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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에 대한 어둠의 대립
요한복음 1장 4-5절 /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 사도 요한은 1장 1-3절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대면해 오던 영원부터 존재해 오시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곧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만물을 지으셨으니, 만물 중에 그분으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의 조성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그분에 의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참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하였다.
2. 그리고 4절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을 하였다.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뒤이어서 하시고 있는 말씀에서 잘 알 수 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에서 ‘이 생명’은 ‘말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육체적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은 생명을 빛의 이미지로 표현하여 빛이 하고 있는 역할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에서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을 보여주어 그 생명에게로 나오게 하는 빛이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말씀, 곧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에 의해 영원한 어두움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에 빛이시다. 이 빛의 내용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대속주로서의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 사역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으로 다가오신 분이심을 알고 믿게 된다. 우리가 얻는 이 생명은 그 성격에 있어서 영적인 생명이며, 이는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영원한’이라는 말을 무려 36번이나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길)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 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뜻을 나타내신 분이신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이적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으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그리하셨다. 이 모두에서의 절정은 자신을 대속물로 십자가에 내어놓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구속주가 되신 사건이요, 사망의 권세를 당당히 이기시고 부활하므로 그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주가 되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인류를 구속하시는 자신의 모든 뜻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내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으며, 그 빛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하는 믿음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을 얻게 하셨다.
3. 요한은 또한 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말함으로써 빛이 어두움을 이기시는 능력을 선언하였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시는 것을 통하여 참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셨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움에 빛이 비취어 어두움 안으로 들어오면 빛과 어두움은 대립 구도의 심각한 갈등과 투쟁에 있게 된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에서 ‘깨닫다’는 단어는 ‘깨닫다’는 기본적인 뜻 외에도 근본적으로 “무엇을 붙잡다, 그리하여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복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의 “깨닫지 못하더라”는 “이기지 못하더라”를 뜻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 본문에서는 (1) 하나는, 어두움에 빛의 세력이 옴으로 해서 어두움은 빛에게 정복된다는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더라”의 번역이 그러하다. (2) 다른 하나는, 어두움에 빛의 세력이 오면 어두움은 물러가야 하는데 알아보지를 못하므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비추는 빛으로 오심으로써 그 현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가게 되고 그 아래 있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께 온전히 사로잡혀서 생명에로 나아오게 된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을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해서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에서 나타내 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12-13절).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두움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된 하나님의 택함에 있지 않은 자들은 빛이 비춤에 있어도 그 빛을 보지 못함에 있는 소경으로 있게 하신다. 이는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알지 못함에 있는 그들의 우둔함, 곧 무지와 그에 따른 완고(완악)함에 내버려 두시는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이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4-8)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7-19)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서는 무지에 있으며 그들의 힘으로서는 무능력에 있게 하여 결코 깨달음에 있지 못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 가운데 오셨지만 알아보지를 못하므로 영접하지를 못한다(10-11절). 그러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어 영접하는 일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항함에 있는 불신자로 살아간다.
그들의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대해서 무지하며,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무능력하지만, 자신을 위한 지혜와 힘에서는 창세기 11장에서 보는 바벨탑 문명을 쌓는 일에 능숙능란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염려하며 자신들의 생명은 스스로 지키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여기에 하나의 생각으로 모인다. 그래서 쌓는 것이 다시 세상을 덮는 대홍수가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도 그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잃는 것을 면하겠다는 생각에 모든 사람이 일치된 행동을 보인다. 그와 같은 현상이 그 시대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있게 된다.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 학자의 책이 있다. 곧,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에 있어 바벨탑 문명을 쌓는 것에 있는 사람이 그들의 지혜와 힘으로 무슨 일을 해 나갈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라고 하는 역사학자는 ‘사피엔스’(Sapiens)와 ‘호모 데우스’(Homo Deus)라는 책1)에서 인류의 과거와 문명의 형성을 다루고서 미래와 AI·생명공학이 가져올 변화인 인간의 문명이 어디까지 발달해 갈 것인지를 다루는데, 여기에서 인간 문명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까지 되어 가고자 하는 것을 내다보는 것에 있다. AI·생명공학의 발전을 통해서 인간은 신체 장기를 재생시키는 기술을 발달시키고, 노화를 중지시키는 세포를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등으로 인간은 나이를 멈추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겪지 않고자 한다. 인간이 유전자를 조작하여 – 본래의 유전자는 동그란 형태인데, 이 유전자가 20-30세가 넘어가면 동그란 형태에서 점차 막대기 형태로 바뀐다. 그 형태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 인간은 살아 있는 것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전자를 조작하여 어제의 90세 노인의 유전자 세포를 오늘 날자의 유전자 세포로 존재하게 하여, 매일 그 세포가 만들어져 계속해서 90세의 노인으로 죽지 않고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최장수인 969세를 산 므두셀라를 넘어서 자연 인간으로서는 불사의 인간으로 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죽지 않는 불사의 인간에 있어 영원히 사는 인간에 있을 것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과연 그러한 인간에 있게 되기는 하겠으며, 또한 그러한 인간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만일 과연 불사의 상태까지 오게 되면 인간은 자살, 살인, 사건, 사고, 새로운 질병, 전쟁, 불의의 온갖 재앙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고는 죽음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렇게 자연 상태에서 죽음을 겪지 않게 되는 일이 실현되면 – 실상 인간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참으로 장구한 세월을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들이 행복하기 위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달성하는 혁명의 시대를 열어가면서 살아갈 것인데, 과연 불사의 인간 상태에 이르는 시대를 맞이하기는 할 것인가? 창세기 11장에서의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을 겪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조치하여 벌하신 내용을 볼 때 그러한 인간에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불사의 인간으로의 혁명을 꾀하여 갈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도 도출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주의 강림 – 재림 - 에 의해 그 인간을 심판하여 무너뜨릴 것이다.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불의를 좇아서 살며 결국에는 영원히 어두움의 세계에 지배를 받는 지옥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에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신자들이 미혹되어 그들을 따라감에 육체로 하나가 되는 모습에 있어 가는 것에 있는 실정이다. 세상 문명이 만들어가는 그 영향과 혜택을 사회의 일원인 그리스도인도 함께 받아 가면서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에서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렇게 되다 보면 어느 때에 노아 때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니 "(나의 영이 영원히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3, 5)에 있게 되어 “믿음 있는 자를 보겠느냐?”는 심각한 물으심을 받게 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러했으며, 중세교회시대 때의 신자들이 그러했는데, 이제 우리 시대에서 그 상황을 다시 대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각 시대의 상황에 따라 차이를 갖겠지만 점차 두드러져 갈 것은 틀림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소망 중에 기다림에 있는데, 컴퓨터, 인터넷, 핸드폰 등 빠르게 발전하는 문명과 마음을 뺏기고 즐길 것이 생활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그리고 기근, 질병을 극복하며 부요 속에서 수명이 장수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에 그리고 장차 다가올 종말과 내세의 나라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믿음을 갖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이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을 행복해 하며 원함에 있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함에 있는 참으로 지혜 있는 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능력(권세)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겨 따름에 있는 참으로 권세 있는 자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분명하다. 장로교회의 삼대 신앙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해 작성된 대소교리문답서는 그 답을 준다.
․ 대교리문답서 제1문답 : “사람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인가? : 사람의 제일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 소교리문답서 제1문답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본분)이 무엇인가? :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 안에서 그분을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분명히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는 그의 마음에 있어야 할 것 대신에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하여, 사도 바울이 말한 바인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명을 받음에 있고 또한 그 삶을 사는 것에 우리가 사는 생명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명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삶을 소위 수박 겉핥기 식으로 가져나갈 수는 없다. 참으로 마음과 온 생각을 기울여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가져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행복이며, 이 실현에 있지 않고서는 살아 있으면서 겪는 것은 야곱이 고백한 바와 같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것(창 47:9)에있는 슬픔과 고통뿐이다. 그러니 설사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거쳐 겪게 되는 AI와 생명공학의 기여로 백 년을 살고, 더 나아가 천 년을 살며, 그 세월을 뛰어넘어 살지라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큼 불행이다. 그러한데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무의식과 무통치에 있으면서 자신을 위해서 현세의 세상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사는 것에 머물러 있으려는 것은 단지 ‘이 세상뿐’이 전부인 것으로 지극히 불신앙적이다. 그게 그리스도인에게서 정상이겠는가? 정상이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갈등에 깊은 생각의 고민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생각과 일을 거역하며 자기의 생각과 일로 살려는 육의 대립에 대해 싸우는 투쟁이 있어야 하며, 이겨 나가야 한다. 그가 참으로 영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성령의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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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화론자는 인류의 분류에서 ‘현생 인류’(Homo Sapiens)를 말한다. 이 인류는 (1) 직립보행 (2) 도구사용 (3) 인지능력(지혜/언어와 상상력)에 의해서 동물과의 차이를 갖는다. 유발 노아 하라리는 인류의 분류에 의해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가지고 있는 ‘사피엔스’(Sapiens), 곧 ‘슬기’인 ‘인지능력’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지혁명의 시작으로 농업혁명 – 과학혁명의 순으로 인류가 발전하며 지구(세상)를 지배하여 왔다는 것을 다루면서, ‘호모 데우스’(Homo Deus)에서 AI와 생명공학의 혁명으로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다루며 지금 진행 중이며 또한 미래 지향에 있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데까지 가려고 하는 것임을 다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