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학십도
성학십도라는 책 이 책에 접근하자면 그만 아득하다. 설명은 없다. 그림 하나에 짧은 선언문 하나가 붙었을 뿐인 도설(圖說) 열 개가 전부다. 그림은 난해하고 글은 압축적이어서 흡사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암호 같다. 선조가 강의를 명하자, 내노라하는 신하 선비들이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대유(大儒)의 평생 온축을 저희들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원문을 짚어가며 번역을 하자고 들면, 주자학이 그리는, 그리고 이황이 밟 은길의 지도를 보여주기 어렵다. 지면도 넉넉하지 않다. 그래서 핵심 요령(要領) 하나를 들려줄 참인데, 우선 이런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한다. 주자학의 길은 지금 우리와는 너무나 달리, "인간이 자연으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언필칭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하지 않던가. 주자학은 인간이 우주로부터, 타고난 바탕은 선하고 완전하며, 그 기능을 억압 없이 자유롭게 운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길은 자기 발견의 길일 뿐, 축적이 아니고, 출세는 천만 아닌 길이다. 『성학십도』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출발한다. "도무형상(道無形 象), 천무언어(天無言語)." 그렇다. "길은 형태가 없고, 하늘은 말씀이 없다. " 인간은 이 우주 안에서 온 곳도 갈 곳도 모르고 서 있는 딱한 존재이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길은 찾을 수가 있으므로. 『성학십도』는 그 길의 입구를 찾고 초석을 다지기 위한 지침이다. 첫 그림인 「태극도(太極圖)」는 우주의 시원에 대해서, 창조에 대해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주자학의 대선배인 북송의 주돈이(周敦頣, 1017∼1073)가 그린 것이다. 이황은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수수께기 같은 그림이 자연의 길과 사람의 길을 보여주는 설계도라고 했다. 그만큼 결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황은 나이 19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실린 이 그림과 만난 이래, 그 의미를 대면하기 위해 노력했고, 나중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꼭 이 원두(源頭)부터 가르쳤다 한다. 이 형이상학, 즉 우주 신학의 설명은 너무나 고원(高遠) 막막해서 유학이 표방하는 근사(近思)의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를 잘 알면서도, 그는 초보자에게 이 그림부터 제시했다. 아프리카 어느 토인의 지혜처럼, "우리가 온 곳을 모른다면, 우리는 가는 곳을 모를 것"이다. 이황 또한 그 정신에 따라, 이 원두처(源頭處)를 미리 말하지 않으면, 우리의 공부가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극이태극, 우주의 배꼽은 어디인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우주의 최고 실재는 있다! 그 우주의 배꼽으로부터, 하늘과 땅이 태동했고, 이윽고 생명이 있게 되었다. "태극(太極)이 움직여 양(陽)을 낳았다." 양의 기운은 활동의 극에서 다시 정지 혹은 수축으로돌아선다. 이 순환의 과정에서 해와 달이 생기고, 낮과 밤이 생기고, 이윽고 남자와 여자가 생겼다.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어린이가 되고, 이윽고 흙의 자궁으로 돌아간다. 동양인들에 있어 우주는, 인간사를 포함해서 거대한 순환과 왕복, 회귀의 과정이었다. 여기 죽는 것은 없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모든 것은 리듬이다. 생명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음식을 먹고 또 배설한다. 눈은 감았다가 뜨고, 아침에는 일어나고 저녁에는 잔다. 팔은 굽혔다 펴고,
또 심장에서 뿜어진 피는 다시금 심장으로 돌아간다. 어제 하루 기뻤다가 오늘은 덤덤하고 내일은 슬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인간의 삶은 문득 태어났다가 홀연 사라질 뿐이다. 정치란 일치일란(一治一亂), 분열과 통합의 박동이다. 윌 듀란트(Will Durant)는 『문명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의 서두
에서 거시적 문명의 역사가 자유와 평등,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교대라고
갈파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아들로서, 이 자연의 리듬 속에 있다. 주자를 따라 이황은 말한다. "선은 이 리듬에 순응하는 것이고, 학문은 그 튜닝을 위한 훈련이다. " 여기 미(美)와 선(善), 도덕과 예술은 둘이 아니다. 시와 철학 또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황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도산기(陶山記)」에서 적은 대로, 한편 자연을 벗삼아 노래하고 소요하며,
그 흥이 다하면 책을 잃고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소요와 더불어 학문이 필요한가. 왜 우리는 본래 주어진 '자연(自然)'
을 구현하지 못하는가. 왜 인간은 연비어약(鳶飛魚躍), "소리개가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노는 생명의 자연스런 약동"을 갖지 못하는가. 주어진 자연의 축복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기질적, 심리적 방해물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네 마음속은 이런저런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유전적 열등과 왜곡에다, 지금까지 경험된 것들의 찌꺼기, 가령 공포와 기대,
분노와 염려 등이 흉회(胸懷)에 남아, 사물을 보는 눈을 흐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삐딱하게 하고, 일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 이 찌꺼기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그것이 유교가 권장하는 '학문'의 기초가 될 것이었다. 그 위에 사람과 관계 맺고 일을 처리하는 수많은 의례와 규범을 배워나가는 것
으로 유교의 학문은 완성된다. 『성학십도』는 이 학문의 핵심을 집약해 놓은
매뉴얼이다. 성학십도의 구조 『성학십도』는 바로 그 학문의 시스템을 해명하고, 실천의 커리큘럼을 제시한 것이다. 각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제1 태극도(太極圖)는 위에서 살폈듯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가 온 곳을 모르면 우리가 가는 곳을 알 수 없다!" 제2 서명도(西銘圖)는 우주의 아들로서의 인간의 위상에 대해서 말한다. "나는 하늘과 땅의 아들로 여기 이렇게 조그맣게 있다." 서명은 인간이 우주의 정신과 우주의 육체를 나누어받은 존재임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우주 안의 생명체는 나와 한 핏줄이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우주적 연관의 철학은 인간에게 부모인 우주에 대해서, 그리고 형제인
인류에 대해서, 나아가 동포인 사물에 대해서 의무와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
한다. 본시 가정 안의 덕목이었던 효도와 형제애는 이로하여 우주적 지평으로 확장
되었다. 짐작하겠지만, 이는 근대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 이념과는 달리 전체적
사고에 입각해서 공동체적 의무를 가르친다. 그 의무는 거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다. 그런데 그에 따라 살기가 쉽겠는가. 무엇이 이 도리(道理)의 실천을 방해하는가. 그 조건과 타개책이 이어진다. 제3 소학도(小學圖)는 인간의 소외를 말한다. "인간은 우주의 아들임을 망각
했다. 물욕에 빠져, 자신의 본성을 잊고, 그 타락에 안주하며 살고 있다!" 그리하여 학교와 교육이 필요해졌다. "성인이 이를 안타까이 여겨,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베푸는데, 이 과정에서
경전들과 생활규범들이 생겨났다. 안타깝게도, 요순이 일으킨 유교문화의 영웅시대는 너무 오래되었고, 지금
풍속은 해이해졌다. 이단들이 득세하여, 진정한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나 그 위대한 가르침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마침내 어둠 속에 묻혀버리지 않는다." 제4 대학도(大學圖)는 '위대한 학문'을 가르친다. 그 시작은 어둠 속에 갇힌, '인간성의 우주적 불씨' 즉, '성즉리(性卽理)'를 일깨우는 데서 시작한다. 이 기초 없이 학문도, 어떤 의미 있는 행동이나 성취도 없다. 그 수신(修身)을 바탕으로 관계의 장, 자기실현의 장은 가족에서 사회, 국가와
세계로 뻗어간다.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이 학문의 강령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자학의 기획은 자신의 우주적 본성을 자각하고, 마음속의 부자
연한 병폐를 제거하며, 그 인격을 바탕으로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계에 의미있
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는 학교에서의 생활규범이다. 여기 학교란 출세를
위한 지식이나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아니라, 삶의 기술
(ars vitae), 즉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도장이다. '학문'은 사물에 대한 지식에서 출발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의미를 성찰하는
법, 그리고 나아가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고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이상에서 몸의 훈련을 말했다면, 지금부터는 마음을 다룬다. 제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마음'의 구조에 대한 이해이다. 이황은 이 문제를 두고 오래 고민했다. 젊은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을 거치면서 얻은 확신이 이 그림에 들어 있다. 『성학십도』가운데 이황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한 곳이 여기이다. 대강의 취지를 적어보자. 인간의 '마음'바탕은 무의식의 잡동사니 창고가 아니라, 가장 정예롭고 맑은 기
(氣)로 이루어진, 우주적 참여와 봉사를 위한 기관이다. 첨언하자면, 이 생각은 마음을 척추골의 진화로, 즉 생존을 위한 기능적 도구로
보는 근대적 사회생물학의 시선과는 십만 팔천 리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에, 우리는 주자학이나 이황의 사고를 이해
하기가 어렵다. 이황은 우리네 마음이 우주의 창조력이 결집된 곳이고, 우주의 의미를 구현하는
장소라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는 자기가 온 곳과 자신의 위상을 팽개치고, 일신의 안일만
추구하는 타락한이 되어 있다. 왜 그럴까.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기(氣)가 탁하고 불순하기 때문이다! 불순한 기의 틈입과 작용으로 우리는 우주가 예비한 창조의 메카니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정의로워야 할 때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동정을 베풀어야할 때 못본
척 지나간다. 그것은 "마음의 장애로 인한 우주적 창조력의 마비"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인간의 과제는 이 장애를 걷어내고 본래의 건전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황의 표현을 빌리면, "돌처럼 딱딱해진 마음을 녹여 사물과 생명 사이의 소
통을 되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제7 인설도(仁說圖)는 다시 논의가 회귀한다. 앞에서 적은 대로 인간이 '우주적 의미'를 구현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
을 밝힌 것이다. 나아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은 물론, 사물들까지 우주적 사랑인 인(仁)을
본질로 분유(分有)하고 있다고 썼다. 당최 허튼 소리로 들리는 이 교설을 믿을
수 있는가. 이 지점을 자각하고 설득하기가 제일 난감하다. 이황은 말년에 자주, "옛 선현들이 나를 속이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나는 그가 오랜 노력과 수련을 통해 이 지점에 다가갔다는 뜻으로 읽었다. 「도산십이곡」 중 세 번째 곡이 바로 그것이다.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眞實)로 거즈마리 인성(人性)이 어지다 하니 진실(眞實)로 올한 말이 천하(天下)에 허다 영재(許多英才)를 소겨 말솜할가. 제8 심학도(心學圖)는 '마음의 구체적 수련법'을 제시한다. 그러자면 인을 구현하는 마음, 즉 도심(道心)과 그렇지 않은, 혹은 그렇지
않기 쉬운 인간적인(?)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야 한다. 이기적 충동을 막고 우주적 창조에 동참하려는 노력이 깊어지면, 마음의
산란이 가라앉고, 바깥의 사물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ataraxia), 즉 부동심
(不動心)을 획득한다. 그때 "내 마음이 곧 우주의 중심이고, 내 욕구가 곧 우주의 의지가 된다." 그의 말은 교훈이 되고 그 행동은 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그토록 꿈꾼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즉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울타리를 넘지 않는 자유의 경지
이다. 그는 마침내 "불사이득(不思而得), 불면이중(不勉而中)", 즉 "생각하지
않아도 길이 보이고, 애쓰지 않아도 길이 만들어지는" 자연(自然)의 무위
(無爲)를 성취한다. 제9 경재잠도(敬齋箴圖)는 삶의 부면에서 경건을 연습하기 위한 잠언들이다. 의관을 바로 하는 데서 시작하여 일상생활과 기거에서 절대자가 임한 듯
경건을 지키고, 일을 할 때도 사적 욕망이나 관심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지키라고 당부했다. 한 순간 방심하거나 타협하면 이 경건으로 쌓은 탑은 삽시간에,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고 위태로운 일인가. 경재잠도가 부문별 경의 실천이었다면, 제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는 시간별, 혹은 일과에 따른 경의 실천법
이다. 위 제시문에서 적은 대로 따라 하다 보면 어느덧 마음이 변화하고 인격이
성숙된다. 경(敬), 우주적 삶을 위한 연습 『성학십도』 말미에 이황은 이렇게 썼다. 전하께서 이를 일상에서 언제나 늘 마음에 두시고서 적절히 음미하고 반성해
나가다 보면, 체득되는 바가 있으실 것이니 그때 경(敬)이 성학(聖學)의 알파요
오메가임을 분명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황은 『성학십도』 10장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으로 경(敬)을 제시했다! 경이란 언제나 깨어있는 상태, 자기 안과 밖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심리적 훈련
이다. 이 각성과 주시가 지속되면 악이 틈입할 수 없고, 기존의 경화된 습관과 에고
(ego)의 영향력은 힘을 잃기 시작한다. 이 태도를 24시간, 일과 놀이, 삶과 관계에서 지속시켜나가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다. 『성학십도』의 도설은 물론, 주자학이 설정한 모든 이론적 학습적 장치들은
이 경(敬)을 지속 강화시키기 위한 보조장치들이다. 주자학은 불교와는 달리, 일상 속의 훈련을 중시한다. 일상의 예절과 독서, 그리고 일을 처리할 때, 자기 자각과 주시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거기서라야 하늘에 대한 외경,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자랄 수 있다. 주자학은 불교를 따라 모든 악은 자기 망각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믿는다. 이 각성의 훈련이 점점 익으면 에고는 탈각하고, 우주의 근본과 대면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깨달음은 그러나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그것은 종이가 물에 젖듯이(涵泳) 조금씩 자라는 통찰이고, 합치이다. 그 끝에서 자연, 즉 공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규범을 다치지 않았다"는
경지가 온다.여기가 궁극처다. 그때 외적 자극에 대해 나의 반응은 자연스러워지고 심리적 갈등과 낭비는
최소화된다. 그런 마음이 익어가면, 우리의 마음은 삶의 특정한 계기마다 자연스럽게
동정과 배려의 정(情)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사적 자아를 벗어나 우주의 공적 자아로 거듭난다. 이와 더불어 마음은 외적 조건과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부동심의 아타락시아에서 자족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장한다. 성인(聖人)이란 이 중화(中和)의 경지가 무르익은 사람을 가리킨다. 아직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은 현인(賢人)이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학인(學人)을 군자(君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목표와 이상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궁핍한 시대에. 그러나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성숙을 꿈꾸는 사람은
이황의 조언에 귀 기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