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마을 역사이야기 5
마을기금, 마을기업으로 행복 마을 일구었던 대천지역개발계 이야기
마을 역사 여섯 번째 마당으로 자치 경제공동체를 이루어 자생적인 지역 발전의 모범을 가꾸어나갔던 1960년대 대천지역개발계 이야기를 펼쳐 본다.
농지개혁으로 지주-소작제가 사라진 평등 농촌에 새 경제공동체가 만들어졌다
1963년 1월 1일부터 동래군 구포읍 화명리는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화명동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열두 개 씨족 281세대가 살고 있었던 화명동은 도시 냄새라고는 전혀 맡을 수 없는 시골이었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아 구포에서 산길로 한 시간을 걸어 들어와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초대 동장으로 대천마을 황수원(당시 34세)을 추천해서 내세웠다. 동사무소는 대천마을회관에 두었다.
그 이태 전인 1961년에 대천지역개발계(계장 황수원)가 조직되었다. 개발계는 마을 기금을 적립하여 마을 기업을 설립하는 일을 벌였다. 1965년 3월에 25만 원을 들여서 대천마을 입구에 화명기와벽돌공장을 세웠다. 마을 주민 윤희수가 터전을 희사하고, 마을의 3대 성씨였던 윤, 권, 정씨 문중에서 문중산의 땔나무를 베어다 주고, 마을 기술자가 권상운이 설계 하고, 개발계에서 기계를 사들이고, 청년들이 노동력을 제공하여 이 공장을 운영하였다. 기와, 벽돌 공장 설립은 대천천에 쓸려 내려오는 모래를 재료로 쓸 수 있다는 데에 착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권상운의 집을 시초로 하여 마을 초가집은 거의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또한 개발계에서는 기와공장 바로 뒤에 70평 규모의 큰 분뇨탱크도 마련하였다. 부산시내의 분뇨를 저장해 두고 거름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 터전은 임우근이 희사하였다.
60년만에 처음 보는 가뭄에도 풍년가 드높았다
1965년 여름 대홍수로 백포원(아랫들)은 모래밭으로 바뀌었고, 원동기 양수장도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가 버렸다. 곧바로 마을 사람들은 화명초등학교에 모여 양수기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수리계(계장 황수원)를 모으기로 결의했다. 위치는 대천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정하였다. 마을 사람으로 시 수도과에 근무하던 권상태가 측량과 설계를 무상으로 도맡아 주었다. 양수장 건립에는 150만 원 남짓한 경비 가운데 부산시에서 16만 원을 보조받고 나머지는 마을에서 자담했다.
1966년 4월 15일 기공식을 연 날부터 하루 200여 명이 동원되었다. 먼저 용수로 작업을 위한 제방을 쌓았다. 강바람에 휘날리는 모래가 눈을 못 뜨게 할 정도였으나 남정네는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여인네는 뒤에서 밀었다. 어린이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지게를 졌다. 가장 힘든 일은 집수정과 인수관 매몰 공사였다. 썰물 때를 틈타 야간작업을 강행했다. 전기가설공사가 이어졌고, 14개의 전봇대가 주민 손으로 세워졌다. 1966년 6월 5일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세운 양수기가 처음 낙동강 물을 논으로 퍼올렸다. 이날 마을 사람이라면 코흘리개까지 나와 촛불을 켜들고 정상 가동을 기원했다. 그 이듬해에는 60년만에 처음 보는 가뭄이 삼남 지방을 휩쓸었다. 하지만 화명동만은 풍년가가 온 들판을 울렸고 낟알이 튀어나올 듯 무거운 벼이삭이 고개를 늘어뜨린 채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며 풍년가에 장단을 맞추었다.
뜻만 모으면 못할 일이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의 꿈은 이어진다
대천지역개발계는 1967년에는 20만 원을 들여 비료창고를 세웠다. 비료 창고가 없어 십리 길이 넘는 구포까지 가서 가져와야 하는 불편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손수 시멘트 블록을 찍어 창고를 지어 놓으니 이웃한 금곡동, 금성동에서도 이 창고를 이용하게 되어 한 해에 7만여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마을 안에 이발소가 없는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계에서 마을 청년 장성근을 이발기술학교에 보내주어 이발 기술을 습득하게 한 다음 동사무소 맞은편에 화명이발소를 세웠다. 장성근은 당장 이발비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발을 해 주고 가을걷이 때 한해 이발삯으로 벼 한 말을 받았다. 개발계로 결집한 마을 사람들은 십여 평이나마 공동목용탕도 지었으며, 가파른 바위투성이 산언덕도 밭으로 개간하고, 농한기에도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았다. 정홍길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은 채석장에서 일을 하고 품삯을 모아놓았다가 결혼할 때 타 쓰는 결혼계를 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민 자치의 경제공동체 활동은 70년대에 들어 관주도의 새마을사업으로 흡수되면서 활기를 잃어버렸다. 무엇보다도 도시화의 거센 물결은 농촌공동체의 자생적 발전의 흐름을 집어삼켜 버렸다. 하지만 마을 기금을 조성하여 마을 기업을 설립해 나갔던 자치 경제공동체의 꿈은 거듭거듭 되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