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무장사터
경주에서 4번 국도를 타고 감포 쪽으로 길을 잡으면,
언젠가 영상으로 재현된
밑면적 150여 평 높이 80여 미터의 거대한 9층 목탑이 서 있던 황룡사터를 지나,
넓은 들판이 열리면서 오른쪽으로 규모는 작지만 석가탑보다 다부진
국보 제80호 황복사터 삼층석탑이,
조금 더 가면 소나무가 아름다운
진평왕릉이 아스라이 보인다.
계속 산 구비를 돌아
보문호를 따라 가다 오른쪽으로는
서라벌 초등학교 옆에 보물 제128호 천군동 삼층석탑 두 기가 아름답다.
거기서 보문단지 쪽으로 접어들어 조선호텔 못 미쳐 우회전하면
고산사터와 무장사터가 있는 암곡동으로 가는 길이다.
고산사터는 물에 잠겨 갈 수 없고, (국보 제38호 고산사터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군사문화의 폐기처분’장이라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경주)
무장사터는
암곡동 왕산마을에서 산길로 3 km 정도 가면 된다.
찾기가 쉽지 않은데 마을 사람에게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내가 무장사터를 찾은 때는 늦가을이었는데 무장사터로 가는 골짜기는 단풍이 한창이었다.
‘경주는 가을이 좋다.’는 말은 분명 여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는 확신이 섰다.
사륜구동 차로는 무장사터까지 갈 수 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어 걸어 볼일이다.
맑은 시내를 따라 오솔길이 굽이굽이 이어져있고,
한 면 산을 지나면 다른 면 산이 다가오고,
한 구비를 돌아가면 다른 색깔의 단풍이 화려하게 다가온다.
말 그대로 수채화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산허리에서 능선에 이르는 초록색의 소나무와
붉은 색깔의 단풍나무 군락이 그어놓은 선의 아름다움!
사바의 때를 씻어주는 경치와 어우러져 30여분을 오르니
좁은 골짜기 너머 산중턱에 우뚝한 석탑 한기.
골짜기로 내려가 조그만 나무다리 건너
가파른 맞은 편 산을 미끄러지며 올라가서야 마주서는 보물 제126호 무장사터 삼층석탑.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이제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전쟁은 다시없으리라고 갑옷과 칼등을 묻었다는 그 터다.
석탑 주변은 좁아 절이 있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지 않는데
석탑만 앞으로 나오게 조성되었을 뿐 뒤쪽으로 꽤 넓은 터에 폐사한지 오래 되어 숲이 무성하였다.
터에는 보물 제125호 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쌍귀부와 이수
그리고 연화문이 새겨진 석등의 일부 등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비신을 받혔던 받침대 네 면에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고
한때 맷돌로 쓰였던 사적비 비신은
조선시대 홍양호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인적이 드문 절터에는 나들이 나온 두 가족이 고염나무 열매를 따고 있었다.
* 무장사지
경주시 암곡동에 있었던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장사라 한 것은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안에 감추었기 때문이다.
이 절에 있었던 미타전은 어떤 진인이 이 절 석탑의 동남쪽 언덕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는 꿈을 꾼 이 절의 노승이 건립한 것이다.
이 미타전 안에는 소성왕의 비인 계화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왕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아미타불에게 지성으로 귀의하면 구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재산과 재물을 다 희사하여 명장으로 만들게 한 아미타불상과 신중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 절은 남아 있었으며 미타전은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 뒤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이곳에는 미타상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비문(碑文)인
보물 제125호의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이수 및 귀부(龜趺)와
숲사이에 방치되었던 폐탑(廢塔)을 1963년에 복원한 보물 제126호의 무장사지 3층석탑이 있다.
비신(碑身)은 왕희지의 글씨를 집각한 것인데,
1915년 파편 가운데 세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 비편의 발견으로 절터가 무장사 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사방 0.9m인 석등의 옥개석과 미타전의 자리로 짐작되는 곳에 10개의 초석이 남아있다.
1. 아미타불조상사적비(阿彌陀佛造像事蹟碑) 이수 및 귀부(龜趺)
무장사지에 있는 불상조상사적비로 높이 1.33m 보물 제125호이다.
비신은 현재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훼손된 채로 보관되어 있으며
절터에는 비신을 받쳤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이 비는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의 비인 계화왕후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조성할 때 세운 것으로 건립연대는 801년으로 추정된다.
이수에는 아미타불이라는 여섯 글자를 이행으로 새겼는데,
이수 왼쪽면에는 김정희(金正喜)의 조사기(調査記)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쌍귀부의 머리부분은 부러져 없어졌으며 이수의 일부분도 부러졌다.
귀부의 발은 도식화 되었으며
귀갑 중앙에 장방형의 높다란 비좌를 설정하고
비좌 네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는데,
이처럼 귀부에 십이지신상을 조식(彫飾)한 것은 퍽 특이한 예에 속한다.
잘려진 이수에는 반용(蟠龍)이 운기문(雲氣文)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如意珠)를 잡고 있어서
통일신라초기에 조성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이후 이수가 남아 있는 예가 없는
통일신라초기 이수의 변모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2. 삼층석탑(三層石塔)
무장사지에 있는 높이 4.9m 보물 제126호의 3층석탑이다.
절터는 암곡동 안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았으며 주변일대는 제법 광활하다.
석탑은 본래 도괴되어 탑재 일부를 상실하였으나 1962년 석재를 보충하여 복원되었다.
2층기단 위에 3층탑신을 건립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상층기단 위에 안상(眼像)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하층기단의 하대석과 중석을 붙여서 8석으로 짜고,
중석에는 우주와 함께 각 면에 2개의 탱주를 모각하였다.
하층기단의 갑석(甲石)도 8석으로 구성하였고 상면에 약간의 경사를 주었으며,
그 중앙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몰딩을 두어 상층을 받치게 하였다.
상층기단 중석도 8석으로 구성하였으나 우주나 탱주를 모각하지 않고
각 면에 2구의 안상(眼像)을 조각하여 대신 하였는데,
안상은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층기단의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밑에는 1단의 부연(副椽)을 나타내었으며,
갑석의 상면 중앙에는 각형의 2단 굄 장식이 있어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독립되었으나
초층옥신(初層屋身)은 높은 편이다. 옥신의 각면 귀통이에는 층마다 우주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각층의 옥개석은 도괴시(倒壞時)에 파손을 입었으나 체감률은 괜찮은 편인데,
옥개받침은 각층 5단이며 추녀 밑은 직선을 이루고 있다.
초층옥신의 상면 중앙에는 1면 27.5m, 깊이 23cm의 방형 사리공(舍利孔)이 확인 되었다.
현재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으나 석탑 복원 당시 하층기단 갑석, 상층기단 중석 등의 일부와 함께
노반(露盤) 및 복발(覆鉢)을 새로 만들어 보충하였다. 조성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