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꽃,7
임하령
꽃재 넘는 길,
"어맛님요~ 아붓님요
사둔 어르신께서 간고디랑 술취떡을 좀 보내 오싯심더 ~잡사 보시소~"
"하이고~이 어수선한 난리통에 한 몸 댕기는 것도 심든데
머 이케 귀한 걸 들고 오싯니껴, 시상에~ 정성도 시럽습니더"
"아임니더 ~변변차나 면구스러븝니더~"
해거름 녘 논에서 돌아온 경섭이 할배는
섶벌같이 날려간 아들의 불행 뒤로 더 꺼멓게 짜부라진 몸뚱이가 검불처럼 허적였다
갈퀴같이 손마디가 튕굴어져 자믓자뭇 검버섯이 핀 손을 포개고 옥분을 향해 구부정
히 허리를 굽혀 예를 치르자 옥분은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만큼 조아려졌다.
옥분이 불행한 일을 당한 언니네 집을 다녀오겠다 작정하고 청하자
장조카 행방불명에 심사가 편치않은 시숙모가 가재미눈을 흘길 줄 알았는데
축동댁은 어디서 구했는지 인편에 부탁해 간고등어를 구해왔다.
전쟁 중이라 물자도 없고 장도 따로 설 것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고을마다
다붓다붓 도붓장수 할매들이 작은 보퉁이를 이고 마실 마다 다니며 장사를 했다.
전쟁이 터지고 뒤숭숭한 난리통에 육고기는 언감생심 구할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울진이나 평해에서 소금에 절인 생선들이 알음알음 조금씩 올라왔다.
축동댁이 노랗게 콩기름 맥여 반딱반딱한 기름종이에 정성스러이 싸인 간고등어
한 손을 내놓았을 때, 옥분이 그동안 매운 시집살이시키던 시숙모에 대한 원망이
다 사그라질 만큼 감격했다.
그뿐 아니라, 귀한 찹쌀 한 홉을 섞은 멥쌀 한 되를 내주며 수리취떡까지 해 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단오 때 야들야들 부드럽던 수리취는 벌써 무릎팍께까지 대가 껑충
하니 뻣뻣해졌지만, 아쉬운 대로 부드러운 윗순만 똑똑 잘라 데쳐, 익반죽으로 꽁꽁
치대 디딜방아질을 찰지게 했다.
디딜 방앗간 서까래에 늘어진 새끼줄을 붙들고 쿵덕쿵덕 방아질을 하는 옥분은 언니
에 대한 슬픔으로 떡을 찧고, 방아공에 묻어나는 떡 반죽을 떼기 위해 물 적신 양손을
비비며 떡 반죽을 뒤집는 축동댁은 스물에 과부가 되었다는 사돈의 팔자가 자신과
같음에 치받치는 과부 설움으로 떡을 찧고,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희붐한 신새벽에
쿵덕쿵덕 방아를 찧는 두 여인은 청승스런 제 설움에 젖어 말이 없었다.
아직 뜨끈한 수리취떡을 적신 베보자기에 정성스레 싸고 볶은 콩가루 고물은 따로
쌌다. 떡 보퉁이와 간고등어를 눈물 바람 한탄으로 양손 나눠 쥐고 걷던 시오리 길
은 왜 그렇게 멀었는지 ....
"야야 ~찬이 읍써 우예노~
아직 밭에 먹을 끼 항게도 안 나니, 웃자란 배찻잎만 뽑는다 카이~
담 위에 애동호박 및개 달릿길래 짭쪼롬하게 새우젓 치고 뽂깠다.
찬은 읎지만 마이 먹거래이~"
빈한 찬이 민망한 예분이 그래도 동생이 왔다고 쪽 떨어진 개다리소반에 따로 상을
받아 옥분과 함께 앉았다. 간고등어는 쌀뜨물에 우려 가마솥 밥 뜸들일 때 올려 폭
쪄 내놓고 아직 몰랑한 수리취떡은 손가락 한마디쯤 썰어내 콩고물을 묻혀 시부모
상에 받쳐 올린 참이다.
"무슨 소리꼬~우리집은 사시사철 시래기 된장국에 짠지 뿌이따
그나마 듣자하니 난리 중에 피난 댕기는 사람들이 수북이 있다 카는데
이 쪽으론 인민군도 안 들어오니 천만 다행이재~ 그챠?"
"그라이 아부지가 이르시길, 이쪽이 십승지라 카드만 참말로 그런 갑다.
아부지가 안 그카드나~ 임진왜란 쩍에도 여긴 왜놈이 안 들어왔따꼬~
난리라고는 동학난 때 한 번 뒤집어지고 그나마 조용한 핀 아니가?"
"그러게~난 꽃재를 넘을 때마다 아부지 생각 나드라
아부지가 참꽃 수북이 필 쩍마다 우릴 델구 꽃재 안 가싯뜨나~
거기 가시믄 항상 하시는 말씀이 여기 꽃재서 동학꾼들 엄청 죽었다꼬 ...
외할배도 거서 상했다재?
울 외할배도 참으로 속 모를 분이시따...
가만있어도 팔자 편할 양반 신분에 머 할라꼬 동학에 가담하싯을꼬?"
"우리 같은 소견 야튼 여자들이 외할배 같은 남정네의 거룩한 속을 우예 헤이리
겠노~밥이나 묵자~훗~"
"와 웃노 ?"
"웃기서 그런다~울 아부지 말이다
생각해 보이 딸 넷을 다 동학난 고을로 골고루 보냈네
토치나 용궁이나 금당실이나 다 동학난 때 뒤집어진 고을 아이 뜨나?
근데 왜 나만 깊은 산골 곧은골로 보내싯을꼬? "
"아마 위로 딸들을 대씬 동네로 보내고 생각해보이 막내인 니 하나만이라도
사상이니 체면이니 읎는 핀한 동네서 핀케 살길 바래싯는 갑다. 그쟈?"
"모르는 소리~곧은골도 양반행세는 크게 한다카이.
치마양반 주제에 같잖기는 하지만 우옐끼고?
하는 행세는 무도하고 학문은 얕아도 족보에 대고 절은 억수로 한다 카이!"
"그넘의 시레기 곤좆같은 양반? 아나 양바이따~~크킄~!"
쌀뜨물에 자박히 쫄쿤 고등어 대가리를 발라 씹던 자매가 밥 먹다 말고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트린다.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이 예분이 옥분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아참~ 니 아까 기택이 대린님이 왔다드만 먼 말이로?"
"그 카이~ 기택이 올바이가 삼팔선 넘어 간다꼬 얼마 전 왔드라.
기택이 올바이는 옹진서도 행사하는 집안이라 머심도 많고 소출도 억수로 많은
부자라 카드라. 근데 기택이 올바이가 그 집안에 장손인데 일본으로 유학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안 하나~ 그 소리 듣고 그 집 할배가 상을 엎으셨다 하대!
장손이 일본물이 들까 봐 노발대발 허신 게지?
기택 올바이 집안은 율곡 집안이라 원래 안동 퇴계 집안과 교류가 깊다 카드라.
그카이 본래 유학의 고장인 이 산골짜기 안동으로 강제귀양을 보내셨다 카대.
결국은 아부지 문하생으로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근신하던 참이었지만 기택 오
라버닌 항상 그랬지, 세상이 뒤집혔는데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짓인지 모르
겠다고..후훗~근데 난리가 터졌으니 당연히 본댁으로 돌아가야 안 하겠나?"
"근데 니한테 와 와뜨나? 그카고 아부지 말은 먼 말이고?"
옥분은 말을 하면서 내심 딴 생각을 헤매고 있었다.
듣자하니 인민군이 쳐내려오고 국군이 쳐올라가는 기세를 타고 삼팔선을 넘는
다. 했는데 어찌 고향에 잘 돌아갔을까 싶은 걱정도 되고 땅거미 지는 둔덕 밑
에서 옥분의 손목을 덥석 잡던 기택의 충혈되어 번들거리던 눈빛이 떠올라 갑
자기 가슴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제 심장 뛰는 소리에 당황한 옥분이 급히
고개를 숙이는데 사랑방에서 아가~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참~ 이기 내 정신 좀 보거래이~
아붓님 슝늉도 안 떠드리고 정신줄 놓코 있었네~~"
"놀란 예분이 황급히 정짓간으로 달려가 부럭부럭 주걱으로 보리숭늉을
뜨느라 가마솥단지 긁는 소리를 내는데 옥분은 하마트면 언니에게 들킬 뻔
한 낯빛을 감추느라 투덕투덕 뜨거운 양볼을 두들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