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동 |
남평읍 노동리 |
동경 126° 54′ 북위 35° 4′ |
극서 |
남평읍 대교리 2구 |
동경 126° 35′ 북위 35° 3′ |
극남 |
남평읍 교원리 방축 |
동경 126° 3′ 북위 34° 53′ |
극북 |
남평읍 평산리 새터 |
동경 126° 7′ 북위 35° 7′ |
남평읍은 나주시의 1읍 12면 6동 중의 1읍으로 나주시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남평읍에는 화순군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지석강(일명 드들강)이 읍의 중앙을 관류하면서 유역의 평야지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으며 남평리, 교원리, 평산리 일대에 넓은 평야지를 형성하고 있는 전형적인 취락지역이다. 특히 육림들, 광리들은 땅이 기름지고 수량(水量)이 풍부하여 어느 지역보다 일찍 농사가 발달하였다. 그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채소 시설원예가 어느 지역보다 일찍 정착되어 광주와 나주지역의 시설원예의 원조라 불리 우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남평읍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목포에서 광주에 이르는 국도 1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경전선 철도가 남평역을 거쳐 목포 여수 부산 방면과도 연결된다.
나. 인구 및 세대수
2005년 12월31일 현재 남평읍 거주 인구는 8,719명(남:4,426명.여:4,293명)이며 총세대수는 3,708 세대이다.
연령별 인구분포상태는 1~9세; 800명, 10~19세; 748명, 20~29세; 1,362명, 30~39세; 1,223명, 40~49세; 1,317명, 50~59세; 1,169명, 60세 이상; 2,100명으로 24.08%에 달하여 점차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80세 이상이 226명으로 장수시대로 다가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면적
면적은 54,202,888㎡(약 16,396,370평)로 나주시 면적의 9%를 차지하고 있다.
라. 평야
육림들(320㏊), 우산들(255㏊), 광리들(166㏊), 오계들(85㏊), 신금들(72㏊), 죽림들(34㏊) 계 932㏊이다.
마. 산
◦중봉산(450m) : 풍림리와 화순군 도곡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서쪽 기슭에 죽림사가 있다.
◦정광산(354m) : 광촌리 정광마을과 광주시 양과동, 화순군 화순읍 경계에 있는 산
◦행군산(196) : 우산리와 상곡리 사이에 있는 산을 백운대가 있다.
◦식산(292) : 서산리와 다도면 풍산리, 산포면 산제리의 경계에 있는 산, 헹글라이더 연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봉(136m) : 서산리와 오계리 그리고 다도면 송학리 경계에 있다.
◦노두봉(196m) : 서산리와 우산리 경계에 있다.
◦화산 : 우산리와 오계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월연대(141m) : 교촌리에 있는 남평의 진산이라할 수 있다. 일명 월현대, 호산(虎山)이라고도 한다.
◦금당산 : 광촌리와 수원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마산 : 광리리 뒤쪽에 있는 산이다. 말(馬)의 형상으로 호산의 먹이 산이라고도 한다.
◦남산 : 교원리 모래내 남쪽에 있다.
◦두루봉(169m) : 상곡리 상촌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시리봉이라고도 한다.
◦지석산(169m) : 서산리 봉산 동쪽에 있는 산으로 지석강과 연결되어 있다.
◦봉암산 : 서산리 봉산과 서원사이에 있는 산이다.
◦서당산 : 서산리 봉산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지석산의 서쪽 줄기가 되는 밑에 서당이 있어 서당산이라 한다. 일명 서당뫼 라고도 한다.
바. 강과 내
1) 지석강 (화순 이양 증리 - 나주 금천 원곡 : 53㎞)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증소산(580m) 남쪽 천리난골에서 발원하여 서운태를 지나 서원천이란 이름을 가지고 시루골로 나가 망견봉(364♏)을 막 감돌아 쌍봉사(雙峰寺)앞을 지나는 쌍봉사천과 만나 두 굽이를 돌아 사은동(思恩洞)에서 나온 사은천과 합류, 남서류하여 쌍봉마을에 이른다. 매정리 상매정에 이르러 대동여지도에 여점(呂岾) 이라고 나오는 고치(예재)에서 발원하여 구례리 사기점을 거쳐 내려온 물을 더해 중매정에 와 남쪽에서 나온 추동천이 더한다. 기운동 앞에서는 남쪽의 송정천, 북쪽의 활용천도 합쳐 월계리를 거쳐 북류하다 귀미에서 서쪽으로 돌아 이양면 소재지의 이양 오일시장을 감돌아 북류하며 이양천을 보탠다.
이양역전마을 앞에서는 청풍천을 그 샛강인 강변천, 차천, 백운천, 대비천을 합류하며 봉화촌 남쪽에서는 오류천, 목단동 마을 앞에서는 세청천을 만나 북류한다. 풍암리 동쪽에서는 금릉교에서 나오는 송석천과 그 샛강인 운수천 어시천이 합류되어 입교(갓다리)를 거쳐 송석정(松石亭)을 지나 춘양면 용두리 쪽으로 굽이돌아 자릉탄(子陵灘)을 이루고 예성산성 북쪽 현학정과 베틀바위가 있는 협곡을 지나 서류하다 사창들을 감돌면서 춘양천을 더해 북류하다가 우매기를 지나 부춘동 부춘탄(富春灘)에 이른다. 이어 금곡마을을 지나 돈달메마을 앞에서 석정천과 그 샛강인 희송천, 광대천을 더하고 도산마을 지나 삼충각이 있는 충신강에 이른다. 모산마을 앞에서 한천천과 그 샛강인 정승천,경우천이 보태지고 능주면 소재지를 서쪽에 두고 북류하면 영벽정(映碧亭)이 보인다. 입교(갓다리)부터 이곳까지 굽이도는 구간이 지금까지 영산강 중에서 지니고 있는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 곳으로 여겨진다. 계속 북서류하여 능주 만수리 도르메에 이르러 옛 종연방직 뽕나무 밭인 종방을 감돌아 죽청 대교에서 화순천이 합류된다. 서류하여 도곡면으로 들어 또 다른 종방을 막 지나면 도곡 천암리를 타고 내린 도곡천을 만나고 곧 신성천도 더한다. 덕곡리 신여울 앞에서 유곡천을 보태고 이곡마을 남쪽에서는 평촌을 나온 나주댐 대초천과 그 샛강인 쌍옥천, 정천, 궁원천, 덕림천, 봉학천을 합류하며 곧 송학천까지 만나 망탄(望灘)을 이룬다. 이렇게 서류하다 지석산(169m) 절벽을 때리고 북쪽으로 감돈다.
지석강이란 이름이 나온 이 지석산 밑 깊고 푸른 강물이 절정(絶頂)이라 지석강(드들강) 유원지(遊園地)가 조성되어 있다. 이어 남평읍을 감돌면서 북쪽 노동천과 남평천을 합해 서류하며 성탄(城灘)이 되고 남평교를 지나 산포면 정자교에 이르면 북쪽에서 내려온 대촌천(大村川)과 만나는데 이곳 역시 절경이라 이 곳도 유원지다. 서류하다가 내기리에서 산포천을 보태고 금천면 신가리 이내를 지나 원곡마을 북쪽에서 영산강에 합류한다. 사실 지금은 직강공사로 유로가 바로 서쪽으로 나 있지만 옛날에는 이내에서 동섬마을을 따라 북류하여 노안면 학산리 봉호(천동)마을 쪽으로 흐르다 감돌아서 남서류 했다. 지금 동섬마을에 옛날 강물 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2) 산포천(다도면 풍산리-산포면 내기리 : 9.4㎞)
3) 구치천(남평읍 수원리-남평읍 평산리 : 6㎞)
4) 노동천(남평읍 노동리-남평읍 수원리 : 8.66㎞)
5) 남평천(남평읍 서산리- 홍어굴 : 2.8㎞)
6) 송학천(남평읍 오계리- 다도면 덕동리 : 4.87㎞)
7) 정 천(화순군 도암면- 남평읍 우산리 : 14.1㎞)
8) 쌍옥천(화순군 도암면-남평읍 우산리 : 2.3㎞)
9) 대초천(화순군 도암면-남평읍 오계리 : 31.22㎞)
10) 나주호(다도댐=대초댐; 다도면 용강을 타고 내린 대초천이 마산리 신기마을 앞에서 봉학천을 만나 갈마, 용곡, 산월, 대초장, 장기 마을을 거쳐서 궁원천과 만나 흐르던 것을 1976년 9월 길이 496m의 댐을 막아 물을 저장하는 인공호수가 되었다. 대초장터가 있던 대초리가 수몰되었다 해서 일명 대초댐이라고도 한다. 다도면 면적의 30%에 해당하는 260만평의 면적과 650호가 수몰 되었다.
사. 저수지
수청제(1945년), 정광제(1970년), 노동제(1970년), 죽림제(1945년), 오창제(1945년), 남석제(1945년), 상남제(1945년), 풍림제(1984년), 원적제(1986년), 반계제(1961년), 봉산제(1961년), 방축제(1945년), 평산제(1979년), 어전제(1938년)가 있다.
아. 다리(건립년도)
남평구교(1928년), 남평교(1974년), 중앙교(1999년), 영천교(1997년), 지석교(1995년), 상곡교(1980년), 상곡1교(2000년), 수원교(1928년), 우산교(1994년), 인암교(1992년), 광촌교(1991년), 광탄교(1985년)
자. 고개
◦높은재 : 광촌리 정광마을에서 정광산 봉우리를 지나 광주남구 양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뗏밭굴재 : 광촌리 신촌마을에서 뗏밭굴을 지나 노동리 상노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바람재 : 광촌리 정광마을에서 정광산을 지나 노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바람이 세다고 하여 바람재라 하였다 한다
◦오굴재 : 광촌리 정광마을에서 광주 남구 양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옥굴재 : 광촌리 정광에서 광주 남구 이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잣고개 : 교원리 원촌마을에서 서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염치(염재) : 노동리 상노동에서 화순군 앵남리 웃말로 넘어가는 고개
◦서당굴재 : 상곡리 연곡마을에서 다도면 송학리 취송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알랑굴재 : 상곡리 신촌마을에서 다도면 송학골 버드내로 넘어가는 고개
◦행군재 : 상곡리 연곡마을에서 다도면 판촌리 고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봉암재 : 서산리 봉암마을에서 봉암산을 지나 서원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일명 매봉재라고도 한다.
◦산짓재 : 서산리 봉산마을에서 도랑굴을 지나 산포면 산제리로 넘어가는 고개
◦한댓재 : 수원리 금당마을에서 광주 남구 대촌 이장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한자로 쓸때 대죽령(大竹嶺), 대치(大峙), 또는 ‘한톳재’라고도 한다.
◦수므재 : 수원리 금당마을에서 광촌리 새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고갯길이 십리가 된다하여 십리치(十里峙)라고도 한다.
◦대촌재 : 수원리 금당마을에서 광주 남구 대촌 도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석 치 : 오계리 오룡(도롱골)마을에서 석치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일명 돌고개라고도 한다.
◦골모릿재 : 오계리 반계마을에서 우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뒷재, 반계재, 붉은재라고도 한다.
◦가재재 : 우산리 문무마을에서 다도면 판촌리 동판으로 넘어가는 고개
◦앞 재 : 우산리 인암마을에서 앞들을 지나 다도면 판촌리 고마로 넘어가는고개
◦여시고개 : 우산리 문무마을에서 화순군 도암면 벽지리 벽동마을로 넘어가는고개
차. 도로
1) 국도 1호선(목포∼신의주) 남평구간 : 4.6㎞
2) 지방도 58호선(나주∼부산) 남평구간 : 11.563㎞(남평읍 우산리∼화순경계)
3) 지방도 60호선(목포∼기장) 나주구간 : 42.775㎞(수원리∼광주광역시 경계 중복)
4) 지방도 55호선(이일시∼화순읍 앵남) 나주구간 : 35.630㎞
4) 남평읍 노동리∼화순경계 : 3.0㎞
4) 남평읍 남평리∼지방도 822호선 분기 : 2.43㎞
4) 남평읍 남평리∼국도 1호선 중복구간 : 1.0㎞
4) 남평읍 교원리∼화순군 경계 : 6.8㎞
5) 지방도 822호선(남평읍∼동복) 나주구간 : 7.31㎞
4) 남평읍 동사리(시점)∼남평읍 오계리 다도면 경계 : 1.8㎞
4) 남평읍 오계리 우산리∼화순군 경계 : 1.8㎞
6) 시도 20호선(다도 덕동리∼남평읍 오계리 : 4.9㎞
4) 다도면 덕동리(1.9㎞), 남평읍 오계리 다도면 경계(3.0㎞)
7) 시도 28호선(광리리∼평사리: 1.7㎞)
4) 광리리(국도 1호선 분기점)∼평산리(광주광역시 경계)
8) 시도 29호선(수원리∼산포면 산제리 : 6.5㎞)
4) 수원리∼남석리∼서산리 봉산마을∼산포면 산제리
카. 철도
1928년 3월 1일 광주∼여수간 철도 부설이 남조선철도회사에 의해 착공되어 1930년 12월 2일 완공됨으로서 1930년 12월 25일 남평역이 영업을 개시 하였다. 이 철도를 경전선이라 하며 삼랑진 기점 284.6㎞, 목포 종점 100.9㎞에 위치하며 역사는 남평읍 광촌리 470번지에 있다.
면적은 역 부지 1,109,000㎡, 역사 68㎡, 부속건물 23㎡이다.
타. 제방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지석천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축조해 왔다. 또한 제방을 축조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바로 십리송(十里松)이었다.
이 십리송은 조선시대 초 현감 우 성(禹 成)이 심었고 1541년부터 1545년까지 재직한 현감 백인걸(白仁傑)이 길렀다고 남평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잦은 비와 홍수로 무너져 내리고 유실되어 수십차례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31년 일본의 식량증산계획의 일환으로 조선궁민구제치수공사(朝鮮窮民救濟治水工事)가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제방공사가 실시되는데 이때 4,870m의 지석강 제방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는 하류에 4,769m의 남평 제방을 축조하고 1934년에는 2,790m의 광리 제방을 축조하여 홍수예방의 기능을 하여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 5일 시장(場)
1) 위치 : 남평읍 남평리 181-번지
2) 개설 : 원래 조선 초기부터 전국 4대장의 하나였음
현대시장의 규모는 1925년 9월 6일에 양력에 의해 시작됨
3) 개장일 : 양력 1, 6일로 끝나는 날
4) 대지면적 : 11,994㎡,
5) 점포 수 : 171개소(중간 변동 가)
2. 문화유산
가. 고인돌
노동리 하노동마을에 9기. 교원리 향교마을에 2기. 남석리 상남마을에 2기. 중남마을에 1기가 있다.
나. 입석
교촌리 육림들에 높이 330㎝. 풍림리 풍강마을 입구에 2기. 동사리 동사마을 할아버지당산(수부막). 광촌리 신촌마을 당산나무에 2기가 있다.
다. 가마터
풍림리 죽림마을 기와 가마터. 우산리 안심마을 분청자 가마터. 광촌리 신촌마을 백자 가마터. 남석리 상남 마을 토기 가마터가 있다.
라. 보호수(7그루 지정)
<표 7> 남평의 보호수
지정번호 |
소 재 지 |
지정년월일 |
수 종 |
유 형 |
본수 |
수령(년) |
수고(m) |
흉고(㎝) |
15-4-1-1 |
동사,남평초뒤 |
82.12.3 |
은행나무 |
정자목 |
1 |
400 |
20 |
300 |
15-4-1-2 |
교촌,향교뒤 |
|
은행나무 |
정자목 |
1 |
380 |
20 |
260 |
15-4-1-3 |
동사,중학교 |
|
느티나무 |
정자목 |
1 |
250 |
20 |
300 |
15-4-1-4 |
우산,동초교 |
|
느티나무 |
풍치목 |
1 |
250 |
14 |
400 |
15-4-1-5 |
우산,우진 |
|
느티나무 |
당산목 |
1 |
250 |
20 |
300 |
15-4-1-6 |
풍림,원암 |
|
느티나무 |
보목 |
1 |
300 |
16 |
300 |
15-4-1-7 |
풍림,풍강 |
|
느티나무 |
보목 |
1 |
250 |
18 |
300 |
마. 누정
◦탁사정
남석리 하남마을 지석강 유원지 솔밭에 있는데 지암(芝庵) 윤선기(尹先機)가 1587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해 온다, 단층 팔작지붕에 정면2칸, 측면 3칸의 대청형 건물이다.
(南平郡邑誌에는 운영당(雲影堂), 망미루(望美樓), 관덕정(觀德亭)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음)
바. 사찰(寺刹)과 유물
◦죽림사(竹林寺)
풍림리 산 11번지에 있으며 남평과 화순 경계 중봉산 중턱에 자리한 죽림사는 백제 비류왕 14년(440)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여 종죽암(種竹庵)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죽림사라 불리운다. 1983년 대웅전 수리시 사리16과와 철제불두가 발견되어 죽림사의 역사를 짐작케 하고 있다. 죽림사의 내력을 적은 죽림사기에 따르면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있었던 규모가 큰 사찰임을 알 수 있다.현재는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청향각 등의 건물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1622년에 제작된 괘불(掛佛)로서 현존하는 괘불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98.6.29에 보물제 92호로 지정되었다. 또 극락보전(極樂寶殿)은 1984.2.29 문화재자료 제 92호로 지정되었으며 아미타여래좌상은 건칠불로서 나주 심향사 아미타여래불과도 비슷한 제작방법을 가졌는데 제작연대는 17∼18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사. 유교 유적(儒敎 遺蹟)
◦향교(鄕校)
남평 향교는 세종 2년(1420) 남평현 동문밖 동쪽 4리에 세워졌다가 중종 29년(1534)에 월연대 아래인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후 명종 1년(1546)에 중수하고 다시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나 선조 33년(1600)에 재건하였다. 효종7∼12년(1656∼1661) 사이에 남평현감 이정(李晸)이 동재 서재를 건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선조 33년(1600년) 재건때 대성전만 건립되고 동·서재는 이때 재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1691년(숙종21) 중수하였고 숙종24∼28년(1698∼1702)에 현감 송병익이 향교 서쪽에 흥학당(興學堂)을 세우고 후임 장 완(1703∼1704)이 흥학계(興學契)를 조직하여 향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갖추었다.
1719년에 문성공(文成公)의 위패를 개조하였고 영조21년(1745) 현감 윤경주가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조재홍 현감때 완공하였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중수하였으며 최근 1967년에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1996년에는 명륜당마루 교체 및 대성전 마루설치 등의 보수사업을 하였고, 1998년에는 대성전 명륜당 기와 교체와 서재 기둥 동바리 및 기단공사를 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기법으로 좌향은 남향이며 대성전과 명륜당의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약간 벗어나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외삼문이 있다. 좌측에 명륜당이 있고 명륜당 좌우에 있는 동·서재는 좌우대칭 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각 건물을 보면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막돌 허튼층 쌓기의 낮은 기단을 놓고 덤벙 주춧돌 위에 원형기둥을 올려놓았다. 평면은 좌우툇칸을 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전체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홑처마의 맞배지붕으로 북향의 전면은 개방되어진 상태로 출입하고 있다. 동재는 4칸으로 2칸은 방, 2칸은 누마루로 사용하고 있으며, 서재 역시 4칸으로 측면 1칸은 모두 방이며 전퇴는 우물마루이다.
◦장연서원(長淵書院)
풍림리 원적마을에 있는데 남평문씨 다섯분을 모신 서원이다. 원래 1734년에 장연사(長淵祠)가 있었다고 하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조년간(1776-1799)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봉산서원(鳳山書院)
서산리 서원마을에 있는데 1541년 남평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후학을 양성하였던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을 모신 서원이다. 1590년에 사당을 지어 모시다가 1650년에 서원을 지었으며 1667년에는 사액서원이 되기도 하였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72년에 사당만 복원하였고 1994년에는 휴암 백인걸선생 유적비를 세웠다.
아. 유적지 및 유물
◦월연대(月延臺-해발 141m)
교촌리에 있는 원래 성산고성(城山古城)이며 일명 월현대(越峴臺)라고도 한다. 삼국시대부터 석성이 있었다고 하나 남평읍지에는 현감 한순(韓循. 1590-1592)이 임진왜란에 대비해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상부에 둘레 500m 가량의 방형으로 축조된 퇴뫼식 산성이며 남평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동북사면은 급한 낭떠러지며, 서남사면은 계단식토성인 듯한 흔적이 보이며 정상부는 직경 50m 정도의 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학생들의 탐구학습장으로 추억이 서려있는 곳인데, 현재는 근린체육공원 시설이 갖추어져 읍민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문암(文巖)
남평 문씨 시조인 문다성(文多省)의 탄강설화가 서려있는 곳이다. 이 바위 위에는 1852년 후손 문약연(文躍淵)이 세운 문암(文巖)이라는 비석이 있으며 2000년에는 바위 보호각이 세워졌다. 현재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32호로 지정되어있다.
◦남평동헌 선정비 군(善政碑 群)
동사리 남평초등학교내에 8기의 선정비가 있다. 원래 이 학교는 남평현의 관아가 있었던 터로서 일제강점기에 보통학교로 사용되었다. 현감 권현선정비, 박필시 영세불망비, 현감 한백연 청덕선정비, 현감 이희연 청덕선정비, 현감 박제인 영세불망비, 관찰사 이호준 영세불망비, 현감 이희하 영세불망비, 현감 장완 청덕민애비이다.
◦남평향교 선정비 군
향교 외삼문 담장 밖에 18기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들은 남평현 당시의 각 면(12면)에서 세운 것도 있다. 이문영 권무비, 남평현감겸 능주목사 장희 선정비(5) 현감 홍승오 휼민선정비(3), 현감 조병립 청덕선정비(2), 현감 박제인 휼민불망비, 현감 채경희 청덕선정비(3), 군수 이재량 청덕선정비, 군수 민희식 영세불망비, 흥선 대원위 영세불망비 등이다.
◦봉씨효행실적비(奉氏孝行實績碑)
풍림리 죽림 마을에 있는 비로서 죽계 봉시중(竹溪 奉時中)의 효행이 기록한 것이다. 죽계선생은 효행이지극하여 1611년에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현재 비석은 1967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문다성 유허비(文多省 遺墟碑)
지석산 아래 남평 능주간 도로변에 있는 비로서 남평문씨 시조인 문다성의 행적을 기리기위해 1852년에세운 비인데 도로변 절벽에 감실을 파고 높이 140㎝의 비를 세웠다. 비 정면에는 “新羅武成公文多星遺墟秕”라 세겨져있다.
◦동사리 비(東舍里 碑)
동사리 당산나무숲에 있는데 입석과 마주 보고 있다. 마모가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우나 남아있는 글씨를 추정해 보면 17세기 중반에 있었던 토지매매에 관한 기록으로 보인다. 일명 수부막비(水夫幕碑)라고 한다.
◦동사리 일명비(東舍里 逸名碑)
동사리 최경주의 집안에 있는 비인데 직사각형의 자연석에 글씨가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내용을 알 수 없다.
자. 기독교(敎會 106年史)
◦남평교회
남평교회는 설립 106주년을 맞이하는 호남에서는 매우 오래되고 특이한 복음 전파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의미가 큰 교회이다.
설립과정을 보면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벨(E. Bell 한국명 배유지)목사와 오웬(C. Owen 한국명 오기원)선교사 일행이 목포 개항(1897년)과 더불어 목포와 광주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송정 잉계예배처소, 우산리교회, 나주삼도리교회, 구소리교회와 관련이 깊다.
남평의 최초의 교인인 서관서(서상덕씨의 선친), 최익삼, 조치일을 비롯한 7~8인으로 광주군(당시) 구소리교회에서 신앙하던 중 첫 예배는 1903년 1월 15일 이지서씨 댁에서 드린 후, 1906년 남평군 현내면(당시) 대교리 현 교회자리에 있는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개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특이한 점은 남평교회 자체가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고 당시 남평지역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소교회는 2~3년안에 남평교회 관할이 되었다. (섭리의 역사와 교훈 : 226~249쪽 참조)
뿐만 아니라 남평지역은 선교사들을 통해서 기독신앙과 새학문에 자주 접하게 되어 열강들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는 이 나라가 풍전등화의 운명에 이르렀음을 깨닫게되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서양의 문명과 접할수 있는 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는 매우 의미있는 교회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3. 마을의 유래
◦남평리 南平마을(현 남평리 1, 2구)
남평리는 백제말엽에 미동부리현에 속했고 고려 때에는 영평현에 속했으며 남쪽에는 넓은 평야와 5일 시장이 있어 일명 장거리라 칭했으며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남평리라 불렸는데 82. 1. 26자로 1,2區로 나뉘어 졌다
무주(광주)의 남쪽에 위치하고 아주 넓은 평야가 있어 남평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대교리 大橋마을(현, 대교리 1, 2, 3구)
1910년경에는 송지덤, 법수골, 한다리목이라 칭하여 오다 일제 때부터 큰다리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교리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옛날에는 마을 중간에 동서로 장승 木刻 법수가 있어 마을 주민들의 疾病과 災難을 방지해 주고 풍년을 기약하였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추수후 成品成穀을 모아 豊年祭를 올렸다고 한다.
◦동사리 東舍마을(현 동사리 1구)
동사리는 조선시대 남평군이라 칭할 때 東軒의 동쪽에 손님들이 쉬었다 갈수 있는 객사가 있어 현재까지 동사리라 부르고 있으며 마을 어귀에는 立石과 동사리비가 있다.
◦동사리 客舍門마을(현 동사리 1구)
晉州姜氏 13대 조부인 강씨가 京官에 있다가 다도면 호봉굴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그 후손들이 최초로 동사리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조선조 남평군 당시에 동쪽에 손님들이 쉬었다 가는 객사문이 있었다하여 객사문 또는 객사몰이라 칭하였으나 현재는 잘 부르지 않고 있다
◦동사리 明水마을(현 동사리 2구)
마을 형성 유래가 오래되지 않으나 安三萬氏가 최초로 이 곳에 정착하여 하천부지를 경작하였다고 하며, 원래는 동사리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행정수요의 증가로 1974년에 분구되었으며 어원은 設村 當時 明鏡止水와 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하여 明水라고 불렸다.
◦교촌리 교촌마을(현 교촌리)
金海金氏인 김사행氏가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에서 이곳 교촌으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연대는 미상이나 마을 앞에 큰 냇가를 건너던 돌다리가 있어 돌다리목이라 불리워 오다 옥앞에다 돌다리목이 합해져 石橋里라 불리우다 최근에 와서 교촌리라 불리어지고 있다.
◦교촌리 獄앞 마을(현 교촌리)
김해김씨의 정착으로 마을이 정착되었으며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시대에 현 방청(지금의 교도소)이 있었다하여 옥전(獄前)을 옥앞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만 불리어지고 있다. 마을 앞 들판에 위치한 입석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橋院리 院村마을(현 교원리 1구)
조선세종 2년(1420년) 남평 동문밖에 향교를 건립하면서부터 최초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入鄕姓氏는 羅州林氏로 전해지고 있다. 설촌 당시 남평에서 가장 먼저 생겼고 또한 마을 형태가 제일 컸다하여 원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교원리 생계마을(현 교원리 1구)
세종 2년에 남평향교가 건립되면서 강릉咸氏가 생활터전을 잡았다 전해지고 있으며 향교소재 마을이라 하여 생계라 칭하였으나 현재는 잘 부르지 않고 있다
◦교원리 防築마을(현 교원리 2, 3구)
平山申氏가 화순에서 거주하다 外家의 養子로 입양하여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하였으며 그 후 인동張氏가 入鄕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300년 이상된 물버들나무가 있는데 가뭄때 버들祭를 지내면 가뭄이 해소되고 풍년을 이룩하였다 한다. 마을설립당시 마을 입구에 오가리만한 방죽(둥그런 구기)과 堤防이 있었다하여 방축이라 불렀다 한다.
◦書山리 書院마을(현 서산리 1구)
155년경 달성서씨, 전주이씨 파평윤씨가 황해도 개성 등지에서 입향하였다고 하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마을에 서원이 있어 서원이라 칭하여 전해오고 있다.
◦서산리 鶴堂골 마을(현 서산리 1구)
학이 날아와 놀던 곳이라 하여 학당골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靈城丁氏가 1500년경에 서원마을에 들어왔다가 학당골로 이주 정착하였다.
◦서산리 鳳山마을(현 서산리 2구)
마을 입구에 오동나무가 있고 전면에 봉황산이 있어 옛부터 상서러운 봉황이 자주 날아든 곳이라하여 봉산이라 전해오고 있다.
◦五溪리 磻溪마을(현 오계리 2구)
김해김씨 8대조께서 해남 尹政丞 벼슬을 하다 주변 산세가 수려하고 절경에 도취되어 이 곳에 생활 터전을 닦았다고 한다. 설촌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마을 주변에 돌이 많고 맑은 물이 흘러 旱害에도 水源이 마르지 않는 곳이라 하여 돌고개(돌마을)라 하였으며 현재 반계라 불리워지고 있다
◦오계리 珠峯마을 (현 오계리 2구)
신라시대 국지사 玉龍子께서 砥石江을 구경하시다가 지석강 맥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주봉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다섯 마리의 용이 구슬을 탐낸다하여 주봉이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계리 花山마을(현 오계리 2구)
고대부터 산세가 수려하여 자연의 哲理를 감탄한 곳으로 봄이면 花蕪요 벌레가 찾아들어 선인들로부터 화산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화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국지사 玉龍子께서 묵어 가시던 곳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계리 五龍마을(현 오계리 3구)
백제시대(150년경)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던 곳으로 최초로 진주강씨가 정착하였으며 현재는 김씨, 최씨가 혼성을 이루면서 생활하고 있다.
마을뒤의 산세가 용의 형상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무는 형태의 구슬峯이 있다하여 오룡이라 불려지고 있다
◦오계리 石峙마을(현 오계리 1구)
이 지역은 항상 수원이 풍부하고 경관이 수려하여 강태공들이 이곳을 찾아 돌바위 위에서 침어를 하였으며 돌고래가 있었다하여 석치라 불리워지고 있다.
◦上谷리 上村마을(현 상곡리)
설촌연대는 미상이나 맨 먼저 선진화된 마을로 제일 부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면 소재지로부터 남서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한 오지마을로 계곡이 깊고 지형이 평야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하여 상촌이라 칭하였다.
◦상곡리 淵谷마을 (현 상곡리)
설촌연대는 미상이나 제주양씨가 최초로 정착하였으며, 계곡이 많아 연못이 많고 마을 일대가 연꽃이 만발하어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유명해지자 선인들이 연곡이라 명명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雨山리 印岩마을 (현 우산리 1구)
마을 형성연대는 미상이나 최초 입향은 평산신씨로 추정되며, 그 후에김해김씨, 하동정씨 순으로 정착하였다. 이 마을 백호등에 있는 10m 이상의 석층위에 60kg쯤의 마치 호랑이 형태의 도장 모양이 찍혀있는 바위가 있는데 아무리 힘쎈 장사라도 이 바위를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전설과 호랑이 형태의 도장이 찍혀 있는 마을에 터를 잡았다하여 인암으로 칭하였다 한다.
◦우산리 文武마을(현 우산리 1구)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선인들은 다른 마을에 비해 글공부하는 學童이 많아 추후 많은 문인들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선인들이 문무라 칭하였다.
◦우산리 雨津마을 (현 우산리 3구)
新平宋氏 宋自殷이 전북 신평에서 살다가 이 마을에 와 南陽洪氏의 딸을 맞아 후손 5형제를 두어 500년 안주할 곳이라 입향하였으며 현재 500년 이상된 당산나무가 그 때 심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高堂山이 施雨하여 마을 앞에 山亭燈을 나리 삼아 무형을 따라 오른쪽에는 白雲臺가, 왼쪽에는 雲洞이, 앞으로는 雲浦가 있어 비나리(雨津)라 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산리 槎山마을 (현 우산리 2구)
마을 뒷산 지형이 櫓頭에 피었다하여 花頭라 불리우다가 일제때에는 돗대라하였고 현재는 차산이라 칭하여지고 있다.
◦藍石리 中藍마을(현 남석리 1구)
慶州崔氏 崔反이 광산구 大村에 살다가 父親 崔厚立이 임란 의병으로 출전하니 모친을 모시고 피난와서 최초로 안주하였으며, 그후 隨城崔氏 崔聚東은 多侍에서 거주하다 말을 타고 능주로 가다 지석강 건너편 산세가 너무도 수려하여 이 마을에 移居하였다 한다.
砥石江 수원이 쪽(藍)같이 푸르고 지석강 바위가 웅장해서 남석(藍石)이라 하며 우리말로 쪽돌이라 하고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남이라 칭하였다 한다.
◦남석리 下藍마을(현 남석리 2구)
연대는 미상이나 坡平尹氏 尹確이 임란으로 한양에서 피난왔다가 정착지를 물색하던 중 지석산천을 따라 올라 갈 때 지석강 건너 산야가 수려하고 쪽같은 푸른 물에 도취되어 이곳 하남에 정착하였으며, 原名은 남석리로서 쪽같이 푸른 물이 흐른다 하여 쪽돌이라 부르다 마을이 上, 中, 下로 나뉘어져 한양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남이라 칭하였다 한다.
◦남석리 上藍마을(현 남석리 3구)
坡平尹氏 尹華達은 지금부터 약 740년 전에 충청도에서 거주하다 이곳 지석유역을 유람할 때 물이 너무 푸르고 농경지가 비옥하여 이곳에 최초로 정착하였으며 현재까지 파평윤씨의 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남석리 상, 중, 하남중에 한양에 가장 가까이 위치했다 하여 상남이라 칭하였다 한다.
◦楓林리 元岩마을(현 풍림리 1구)
연대는 미상이나 1600년대 초 全義李氏가 최초로 정착하였으며 原名은 元積고을이라 명하였다. 본래는 남평에 속하는 東村面 소재지권이었으며 일제후 마을 이름을 원암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불리워지고 있다.
◦풍림리 竹林마을(현 풍림리 2구)
마을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1600대초 河陰奉氏(현재 江華奉氏)가 최초로 정착하였다고 하며 마을 명칭은 조선시대 때 봉씨라는 효자가 모친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竹筍을 찾아 통곡할 제 신이 나타나 죽순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하여 죽림이라 칭하였다 한다.
◦풍림리 楓江마을(현 풍림리 3구)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백제시대에 마을 앞으로 큰강이 흘렀는데 계속된 풍수해로 모래, 자갈이 메꾸어져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풍강이라 불리워지고 있으나 현재는 강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김해김씨가 최초로 정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나무들은 그 때 심었다고 한다.
◦노동리 蘆洞마을 (현 노동리)
1600년경 明宗때 훈련도감을 지내다가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마을은 白氏村으로 유래된다. 지금도 마을 중간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당산나무를 백씨 할머니라 부르고 있다. 그후 淸州金氏가 入鄕하여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당초 가르실, 가룻(가롯)이라 불렀던 것은 심산유곡이라 그렇게 불렀지 않았나 추정되며, 일제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노동리라 불러오고 있으며 마을 주변이 갈대숲으로 쌓여 고을을 이루고 있다하여 이와 같이 命名하였다 한다.
◦光村리 新村마을(현 광촌리 1구)
淸州金氏 12대손이 蘆洞에서 거주하다 노동은 산세가 험하고 수원이 부족하여 농경생활이 불편하므로 지세가 낮고 평야지대인 이곳으로 최초에 정착하엮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당초에는 광촌리라 부르다가 현재 마을은 지대가 낮고 수원이 좋아 농경생활이 편리하므로 큰 마을이 형성될 것이라 하여 선인들이 신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광촌리 淨光마을(현 광촌리 2구)
연대는 미상이나 당초 마을의 위치는 현재의 터가 아니라 남서쪽으로 2㎞쯤 떨어진 폐절터가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시에는 하천수가 은빛같이 맑고 빛났다하여 정광이라 불려지고 있다.
◦水元리 水淸마을(현 수원리 1구)
마을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최초 정착은 은진宋씨로 추정되며 현재는 김해김씨, 광산김씨 등이 집촌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중간 산간지대에 위치하여 농사철에는 수원이 부족하여 흡족한 농경생활을 못하자 선인들이 풍부한 水源을 갈구하는 뜻에서 수청이라 불렀다 한다.
◦수원리 新金마을(현 수원리 2구)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본 마을은 농토가 비옥하고 수원이 흡족하여 일찍부터 集村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 마부들이 말을 세워두는 馬場터였다 하여 마당거리라 불렀으며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마을 이름을 신금이라 名하고 있다.
◦수원리 金堂마을(현 수원리 3구)
마을 설립연대는 미정이나 최초 입향은 漢陽趙氏와 南平潘氏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두 성씨가 집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풍년제를 모시는 堂이 있는데 祭를 모시고 나면 매년 풍년농사를 이루어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자 주변에서 금당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이리 光利마을(현 광이리)
약 500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최초의 정착은 平山申氏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廣驛 또는 驛村이라 하고 廣利로 칭하다가 일제시대에 광이리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산리 於田마을(현 평산리 1구)
全州李氏 李河康이 전주에서 생활하다가 家勢가 어려워 정착지를 찾던 중 전담이 비옥하고 수원이 좋은 이곳에 최초로 정착하였다.
지명 유래는 당시 전답이 부족하여 주변 지형이 낮은 산을 전답으로 개간 농토를 확장하여 생활하여 오던 중 멀리서 지형을 살펴볼 때 산의 허리가 늘어진 것 같이 보였다 하여 어전이라 불려오고 있다.
◦평산리 平山마을(현 평산리 2구)
평산리는 원래 평야가 광활하고 수원이 좋아 농작물 재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하여 평산이라 칭하였다. 이곳에 최초 정착은 密陽朴氏의 朴一奉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산리 새터마을(현 평산리 3구)
새터마을은 당초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지역이었으나 전답이 광활하여 晉州河氏 하지환氏가 이곳에 최초 정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새터는 전답이 비옥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농경생활지로서는 적합한 곳으로서 최초 마을을 형성한 先人들이 새로 만들어졌다하여 현재의 새터라 칭하여오고 있다.
제3장 남평의 미래
1. 도약
가. 소도읍 가꾸기
여러 가지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었겠지만 해방 후 남평의 발전은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2004년 정부의 지방 소도읍 육성지원법에 의한 육성대상에 포함됨으로써 이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남평읍을 서남권 중간거점 중추 소도시로 육성하여 광주 근교권 부도심으로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진 전원도시로 개발하고 천혜의 지석강 수변 친수공간을 개발하여 휴식 및 체험학습의 장을 조성함으로써 누구나 부러워하며 오고 싶어하는 새로운 남평으로 변신하기위한 사업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첫째, 지석강 친수공간 조성
남평의 중심부를 관류하는 지석강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강변지역의 자연경관과 지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주변지역을 휴식공간으로 전환하여 정주생활권과 친수공간이 연계된 공간을 조성해서 자연적 생태적 환경을 만들고 주차 및 교통여건을 접근하기 편리하게 재배치하여 광주, 화순, 나주등 가족단위 탐방객 유입으로 남평의 활력을 재생하고 하천의 정비로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매력이 있는 남평으로 다시 복원하는 것이다.
둘째, 행정타운 건설
광주 근교권 신도시로서의 남평 이미지를 강화하여 광주 부도심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광주와 나주 및 전남도청간의 연계기능을 이루고 시가지를 확대하고 도로망을 확충하여 남평의 양적 발전을 이루고 서비스 시설을 갖추어 유입인구의 증가로 지역경제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셋째, 종합유통단지 조성
화훼의 판매 홍보의 장을 마련하여 화훼 산업을 지역 특화사업으로 성장시키고 농산물의 집하와 과학적 처리로 물류비용을 절감하며 유통구조 개선으로 농가소득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광주 근교권 가구생산 유통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여 전시 판매 공간의 제공으로 남평 가구산업을 발전시킨다.
넷째, 5일 시장 활성화
우리지역 주민의 숙원사업인 재래시장의 낡은 구조물을 현대화하여 장옥시설 등을 설치하고 시장내외의 환경을 정비하여 시장의 기능을 극대화 시키고 활성화하여 생산자와 소비자 중간상인이 활발한 유통구조를 이루고 문화와 전통을 맛보는 신바람 나는 5일장의 기능을 되살리고 활력을 부여한다.
다섯째, 주민 참여형 시가지 정비사업 추진
소도읍 가꾸기에 지역민이 적극 참여하는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고 기존시가지 도시환경과 정주(汀洲)1) 환경을 개선하여 도시공간의 미관과 시가지내 도로와 외곽도로 등 접근방법을 편리하게 하고 시가지내 부족한 주차공간을 확충하여 불편을 해소하고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시가지 정비사업을 추진한다.
나. 광주․전남의 공동혁신도시2) 건설
1) 2005년 정부는 전국의 균형발전을 촉진시키고자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혁신도시 입지 선정 원칙 및 기준, 절차 등을 담은 ‘혁신도시 입지 선정 지침’을 결정하여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지역의 산·학·연·관이 유기적 네트워킹을 통해 지역발전을 촉진시키는 지리적 공간으로서 기능하게 될 혁신도시를 전국의 주요 거점별로 건설을 추진 중인데 현재 광주․전남의 공동혁신도시의 위치는 나주시 금천, 산포, 봉황면 일원 약 380만평(반경 2㎞)이 혁신도시 부지로 확정되었다. 한전과 농업기반공사 등 이전할 17개 공공기관이 들어설 혁신도시는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 산업인 신 에너지산업과 정보통신·생명·문화산업의 핵심거점이 될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옛 남평현의 중심부에 자리한 곳으로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참으로 감회가 깊다. 이곳은 본래 남평현 어천면, 등포면, 죽곡면이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은 영산강(지석강)을 끼고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금천면을 중심으로 산포면과 봉황면 일대는 남평읍과 나주시를 통해 광주권과의 접근성, 교통망, 기반시설, 교육여건 등이 뛰어나다. 개발 예정지역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이어서 개발비용이 적게 드는데다 자연보호지역이 없어 환경 훼손 가능성도 낮아 뛰어난 장점들을 갖는 곳임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장 남평은 광주광역시와 혁신도시의 연결 관문이요 통로로서 남평의 지리적인 부가가치란 이제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빛을 발할 때가 닥치고 있는것이다.그동안 일제에 의해 잊혀진 고장, 잃어버린 세월만큼 역사는 다시 남평을 향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2) 혁신도시에 입주하는 공공기관
한국전력공사, 한전기공(주),한국전력거래소, 정보통신부지식정보센터, 한국정보보호진흥원, 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회, 전파연구소, 한국무선국관리사업단, 농업기반공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연수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한전KDN(주), 해양경찰학교, 농수산물유통공사,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사립학교교직원연금관리공단 등
3) 혁신도시의 건설의 방향
공동혁신도시는 개발예정지 380만평에 자연과 어우러진 녹색도시를 표방, 인구 2만-5만명 규모의 중․저밀도로 개발되고 도시 시설물의 색채․높이․조명 등 미적 요소를 고려하여 신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는 에너지 절약형으로 조성된다. 또 공영형 혁신학교 및 특수목적고 등 양질의 교육시설이 유치되고 문화․여가활동 공간, 공동생활 공간, 간선급행버스(BRT) 등 신교통수단, 자전거 전용도로 등이 함께 만들어 진다. 즉 독립형 신도시로 개발되고 친환경 주거공간, 문화 및 레저시설 등 수준 높은 생활편의 시설들이 들어선다.
개발방향은 이전기관·연구소·기업·학교 간 클러스터화를 통한 창조적 생산도시, 고급 인력양성 및 휴식, 레저시설 완비된 교육·문화도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친환경 그린도시를 지향한다.
아울러 행정복합도시 건설 모델을 적극 반영하는 한편, 광주․전남지역의 혁신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거점도시로 개발함으로써 광주․전남의 상생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2. 남평의 부활
전라남도 중부지역의 한 중심에서 지리적 환경적인 장점들을 간직하고 오랫동안 경제, 교육, 문화, 교통, 행정 등 여러 방면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하며 지금의 나주와는 별개의 큰 세력을 행사해 오던 남평(南平)은 한일 합방 후 총독부에서 시행한 전국 행정 개편을 통해 나주(羅州)라는 행정의 울타리 안에 갇혀 움추려 들고 말았지만 언제나 역사적인 뿌리만은 우리의 가슴에 뜨겁게 남아 있었다.
이제 남평은 소도읍 가꾸기와 바로 주변에 들어서는 광주․전남공동 혁신도시 건설이라는 큰 명제를 안고 21세기에는 권역별 중심지로 발돋음하며 다시 부활할 것이다. 2012년 이후의 남평은 분명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상주 인구 2만명의 자생력을 갖춘 전남 중심부의 쾌적하고 아름다운 매력적인 친환경 수변 전원도시로 다음과 같이 부활할 것이다.
◦교통망이 확대되어 광주권과 전남권의 중심 거점도시로 성장한다.
◦그동안 감소일로에 있던 인구가 증가세로 반전되게 된다.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인하여 광주 등 대도시로 나갈 필요가 없게 된다.
◦다양한 일자리의 증가, 산업구조 개선, 5일장의 현대화로 남평 지역경제가 활성화 된다.
◦전국적인 다양한 공공기관의 이전으로 취업의 기회가 많아진다.
◦쾌적하고 안정된 첨단 전원도시로 삶의 질이 높아진다.
◦인접도시의 학교와 직장에서 자연 친화적인 체험학습 및 휴식의 장소로 널리 이용된다.
제2편 남평의 교육
제1장 남평 교육의 기원
1. 개교당시의 시대적 배경
19세기말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은 개화기와 더불어 이루어지기 사작한 것으로, 종래의 서당(書堂)중심 한자교육에서 학교중심의 교육으로, 중국중심의 전통적 유교교육 등에서 서구중심의 신문화를 섭취하려는 교육으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는 청․일을 중심으로하는 외세의 침략과 함께 개화와 보수의 갈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개화이념과 동학혁명의 개혁이념을 현실에 적용하여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전반에 걸쳐 전근대적인 체제를 개혁하려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계기로 봉건적 전통을 탈피하고 새 사조에 의해 근대 국가로 변모하는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 5백여 년 동안 이 땅의 초등교육 기능을 담당해 왔던 서당은 서양의 신문화에 밀려 점점 퇴조하기 시작하였고, 신분에 의한 학교교육의 제한이 철폐되었다. 또한, 신교육 사조에 의한 근대학교의 설립을 목표로 우선 정부조직을 개편하여 종래에 학사(學事)를 관장하던 예조(禮曹)를 폐지하고 학무아문(學務衙門: 후에 學部로 개칭)을 설치하여 교육행정을 전담하게 하였다.
근대교육을 염원하던 국가의 관심은 갑오개혁이 일어나던 이듬해인 1895년 2월에 조선 개국 504년을 맞이하여 고종은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를 발표하여 종래의 경전 중심 교육을 지양하고, 교육의 3대 강령으로서 덕육, 지육, 체육을 내세워 교육의 새로운 전통을 마련할 것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국가발전에 미치는 교육의 영향을 중요시하여 교육구국운동의 기치(旗幟)를 내세웠다. 또한 동년 3월에 내무아문(內務衙門) 훈시 제10조에서 ‘인민(人民)에게 먼저 본 국사(國史)와 본 국문(國文)을 교(敎)할 사(事) ’(고종실록 권33, 고종 32년 을미 3월 20일자)라 하여 교육과정으로서 본 국사와 본 국문을 강조하였다. 동년 9월 학부고시 제4호에도「학도는 8세 이상 15세까지 증집하야 그 과정을 오륜행실로부터 소학과 본 국사와 지리와 국문과 산술 등 시의에 적용한 서책을 일절 교수하야」(고종실록 권33, 고종 32년 을미 9월 28일자)라 하여 근대 교육이념의 교과를 지향하는 노력을 보였다. 이 조서에 나타난 ‘교육을 국가 중흥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정부는 먼저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성사범학교 관제를 1895년 4월에 발표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 신학제의 수립이었다. 이어 1895년 7월 19일에 칙령으로 소학교령이 공포되었는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각 부(府)․군(郡)은 그 관내의 학령아동을 취학시킬 공립소학교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방자치단체는 8세부터 15세까지의 학령아동을 수용할 공비(公費)의 학교를 세워야 하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었다.
1895년에 공포된 소학교령(小學校令)에 의하면 서울을 위시하여 지방의 관찰부 소재지에 공립소학교를 하나씩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현 광주광역시 남구 사구동인 광주면 향사리에 수업연한 4년제에 1학급 50명의 학생으로 전라남도에 최초의 관립학교인 공립광주심상소학교(광주서석초등학교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목포영흥소학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서 선교사업과 함께 교인들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1903년 9월 9일에 설립하였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광무9년)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였고, 이에 따라 우리의 외교 치안 교육 행정은 미리 합방을 면밀하게 주도하기 위하여 일본통감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때 민족의 선각자들은 교육이야말로 기울어지는 나라를 바로 잡고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자각하여, 일대 교육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처에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한 그들의 교육정책은 1908년 학부령 제16호로 공포된「교과용 도서검정 규정」에서 나타나 있는데 그 주요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과 일본의 관계 및 두 나라의 친교를 저애(阻礙) 또는 비난하는 일은 없는가?
② 기교(奇礄)하고 오류(誤謬)에 빠진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은 없는가?
③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또는 특히 한국인에게 일본인 및 기타 외국인에 대한 악감정을 품게 하는 것과 같은 기사 또는 어조가 없는가? 라는 제 규정을 설정하여 교과서 내용에서 민족사상을 배제하고 일본에 대한 우애를 강조함으로써 장래 일본의 한국지배를 당연하게 평가하도록 하는 교육내용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국을 식민지화 하려는 일본의 정책은 교육적 측면에서는 학제개혁으로 나타났으며 이와 아울러 한국인을 일본정신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준비로서 각 학교에 일본어를 필수과목으로 강요하고 또한, 학교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감독이 나타났다. 일본에 의한 학교교육의 감독은 1904년 한일협약에 의한 고문정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문교 최고 행정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본인의 간섭은 교육 실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소위 모범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목 하에 관․공립 보통학교에는 직접 일인 교사를 파견하여 실질적으로 그 운영의 책임을 갖게 하였으니, 즉, 당시 관․공립 보통학교는 본과훈도(本科訓導)나 혹은 관찰사 부윤 또는 군수가 교장 직을 겸임하게 하여 따로 교장을 두지 않고 대신에 日人 교사를 각 학교의 교두(敎頭)로 배치하였으니 日人이 사실상 학교행정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실제 교육에 있어서 日人의 간섭은 사립 보통학교에도 그대로 나타나니 즉 일본교원을 파견하여 이들 사립학교도 역시 실질적으로는 일본인의 지배아래 운영되었다.
2. 근대식 학교의 개교
이때 오랫동안 유학을 숭상하며 학문과 교육의 도장으로서 향교를 중심으로 사숙을 운영하던 유림들과 국운의 암울함을 자각한 선각자들의 요구와 신교육의 필요성에 의해 1906년 6월 15일 남평군수 민희식(閔熹植)은 향교의 유적인 명륜당에 사립 학숙(學塾)을 열어 서당교육에서 이루어지던 교육을 소학교령에 의한 신교육제도로 전환하고 향교에 기부된 토지와 재산을 이용하여 소학교를 설립하여 이름을 영흥학교(永興學校)라 명명하고 신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위치가 마을에서 떨어져 있고 교육의 시설이 향교인지라 1909년 군청(縣廳)의 객사로 이전하여 영선학교(永善學校)라 개명(1909.4.1)하였다. 학구는 남평군(南平郡) 전지역(오늘날 다도,봉황,금천,산포,남평)과 광주시 남구 대촌일대의 학생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전라남도에 설립된 사립학교는 약 30여개에 달하였다. 1908년에 사립학교령을 제정 공포하여 전국적으로 사학에 대한 탄압을 가하였으며, 1909년 11월 사립학교로 운영하던 영선학교(永善學校)가 재정상 유지 곤란에 빠지자 부득이 폐교하기에 이르렀으나 군수 조병우(曺秉瑀)가 윤세창(尹世昌)과 함께 설립자로 설정하여 1910년 1월 18일에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보통학교령에 의하여 사립(私立) 남평보통학교를 창설하고 일본인 교사 시노로지로우(矢野攏冶浪)를 초빙하여 현대식 교육혁신을 계획하고 운영하다가 1910년 8월 일제 강압으로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식민지 통치를 시작하고 나서 초대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는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고 일본과 한국의 상이점, 한국민의 덕성 함양과 일어의 보급,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 자질과 품성함양, 식민지인으로서 한국민의 근로심 앙양 등 제국신민 양성에 본을 두기위하여 모든 사립학교를 공립화 하기에 이르자 사립 남평보통학교도 1911년 6월 15일 공립 남평보통학교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표 8> 1918년도까지 설립한 전남도내 학교현황3)
현재학교명 |
설립당시 학교명 |
설립연도 |
현재학교명 |
설립당시 학교명 |
설립연도 |
남평초등학교 |
사립영흥학교 |
1906 |
능주초등학교 |
능주육영보통학교 |
1908 |
거문초교서도분교 |
사립낙영학교 |
1905 |
동복초등학교 |
공립동복보통학교 |
1909 |
돌산초등학교 |
돌산치성학교 |
1910 |
화순초등학교 |
화순공립보통학교 |
1917 |
여수서초등학교 |
사립여수경명학교 |
1908 |
장평초등학교 |
장평공립보통학교 |
1918 |
낙안초등학교 |
낙안공립보통학교 |
1912 |
장흥초등학교 |
사립명진학교 |
1905 |
순천남초등학교 |
사립승명학교 |
1911 |
강진중앙초등학교 |
사립금능학교 |
1907 |
나주초등학교 |
공립나주보통학교 |
1907 |
병영초등학교 |
사립병영융흥학교 |
1913 |
목포북교초등학교 |
공립목포보통학교 |
1907 |
해남동초등학교 |
공립해남보통학교 |
1911 |
다도초등학교 |
다도공립보통학교 |
1918 |
현산초등학교 |
달산공립보통학교 |
1918 |
광양서초등학교 |
공립광양보통학교 |
1910 |
구림초등학교 |
사립구림학교 |
1907 |
담양남초등학교 |
공립담양보통학교 |
1912 |
영암초등학교 |
공립영암보통학교 |
1908 |
담양동초등학교 |
사립광명학교 |
1907 |
무안초등학교 |
무안공립보통학교 |
1915 |
창평초등학교 |
사립창흥의숙 |
1906 |
함평초등학교 |
공립함평보통학교 |
1911 |
곡성중앙초등학교 |
공립곡성보통학교 |
1910 |
법성포초등학교 |
사립법성보통학교 |
1908 |
석곡초등학교 |
사립월미학교 |
1910 |
영광초등학교 |
영광보통학교 |
1910 |
옥과초등학교 |
사립유경학교 |
1909 |
장성성산초등학교 |
사립서봉학교 |
1907 |
광의초등학교 |
사립호양학교 |
1910 |
고금초등학교 |
사립고금보통학교 |
1911 |
구례방광초등학교 |
사립양학교 |
1907 |
완도초등학교 |
사립육영학교 |
1906 |
고흥동초등학교 |
공립흥양보통학교 |
1911 |
진도초등학교 |
공립진도보통학교 |
1909 |
보성초등학교 |
사립광진학교 |
1909 |
광주서석초등학교 |
공립광주심상소학교 |
1896 |
벌교남초등학교 |
사립유신학교 |
1909 |
영흥중학교 |
영흥서당 |
1903 |
제2장 일제 강압기의 교육
1. 일제의 교육정책
국권침탈 후 날이 갈수록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가혹해지고 ‘한국인은 아직 전문적인 학교교육을 받을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기초지식만 교육하면 된다’는 교육정책으로 보통교육과 실무교육 정도에서 그치게 하는 철저한 민족 차별교육, 민족정신 말살교육을 실시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으며, 가장 광범위하게 참여한 계층은 농민과 학생들이었다. 나주지역민들도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광범위하고 강렬하게 3․1운동에 참여했으며, 특히 학생들이 독립 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 중심 세력이 되었음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3․1운동은 거국적이고 자주적인 민족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지만 이로 인하여 조선교육회가 조직되었고, 민족본위의 교육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고 융화교육정책을 쓰게 되었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도 매우 크다.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항거에 부딪친 일제의 무단 정치는 문화 정책으로 전환되었지만, 일제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그에 순응하게 하는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강요하였다. 한민족은 독립할 능력이 없는 열등민족으로 규정하고 이 관념을 우리 청소년들의 머릿속에 주입시켜 독립정신을 말살하려 했다.
2. 항일운동(抗日運動)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충돌로 촉발된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이후 전국적인 학생 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우리나라 전 학생들에게 공동의 민족의식을 환기시켜 일본인에 대한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일제 식민정책 자체에 반대하는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굴욕으로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찾겠다고 일어섰던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거룩한 정신이야말로 이 나라 학생운동의 신기원이요, 학생운동사에 영원한 금자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고장에서도 남평초등학교 출신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다수였으며 그 중에서도 광주사범학교와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에서 성진회(醒進會)4)와 독서회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항일정신을 함양하며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어간 분들이 이후 일제에 의해 갖은 고문과 감옥살이로 고초를 겪고 퇴학을 당하여 인고의 생을 보낸 분들이 많았다.<표 9> 학생독립유공자5) 참조
<표 9> 광주학생독립운동 유공자
성 명 |
공 로 사 항 |
이동선 본교10회 1909.7.17- 1982.4.20 |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인 1927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체인 성진회(醒進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차별교육을 일삼던 일본인 교장 강전(江田)을 몰아내는데 앞장섰고 계속 성진회의 조직 확대와 학생 항일운동을 주동한 인물로 학교를 졸업한 후 담양무정초등학교에 재직중인 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 운동과 관련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국가 보훈 및 대통령표창을 수여함(건국훈장 애족장) |
강달모 본교11회 1909.4.4- 1975.9.16 |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1927년 민족차별교육을 일삼던 일인교장 강전(江田)을 몰아내는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8년 교내학생운동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29년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여 재정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동회의 회비 및 회계사무를 맡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국가보훈 및 대통령표창을 추서함(건국훈장 애족장) |
송성수 본교 9회 1905.11.13-1972.8.13 |
1928년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에 재학중 일본인 교사 성강(盛岡)과 한국인 교사 최대열(崔大烈)을 몰아내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피체되었고 1928년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고 출옥하자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하여 나주군과 화순군의 책임자가 되어 소작권 쟁의 등 적극적인 농민운동을 하다 다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 국가보훈 및 대통령표창을 추서함(건국훈장 애족장) |
윤승현 본교12회 1912.12. 7- 1950.11.17 |
광주고보(光州高普) 재학 중 군국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실시된 교련교육과 교내 학우회의 자치권 획득을 목표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처분을 받고 일경의 추적을 받자 은신하여 활동을 하였다. 1931년 전남노농협의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농민부서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4년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및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2년 국가보훈 및 대통령표장을 추서함 (건국포장) |
강유진 본교12회 1910.2.20- 1950.12.1 |
1929년 광주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 독서회를 조직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로부터 독립 실현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고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자 주도적으로 참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국가보훈 및 대통령표창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
참고자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광주학생독립운동사(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광주지방법원판결문, 대구복심법원판결문,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회관 자료. |
광주학생 항일운동 이후의 학생운동은 가혹해진 일제의 탄압 때문에 시위나 운동 같은 것은 활발하지 못했으나, 감시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합법을 가장한 농민운동, 동맹휴학, 비밀결사 등의 방법으로 투쟁을 계속해 갔다. 이 시기의 학생들은 인도의 간디가 주창한 스와라지 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민족의 갱생을 도모하려고 했다. 토론회, 웅변대회 등에서 인도의 반영(反英)운동과 간디를 찬양하고 조국의 현상을 풍자하여 민중을 계몽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기는 전국에 파급되었던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영향을 받아 주로 청년층에서 강렬한 항쟁을 보였다.
3. 일제에 의한 식민교육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0년부터 1945년까지의 15년간은 일본제국 건설의 절정기로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전쟁 준비에 광분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의 교육정책은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 수행의 수단과 방법으로 교육을 최대한 이용하려는데 목적을 두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일본인화에 혈안이 되었으며, 이 같은 의도는 당시 ‘조선 교육의 삼대 강령’에 잘 나타나 있는데,‘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우리 교육도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데 특히 초등교육의 경우 뚜렷하였다. 1929년 이후 8년간은 1면 1교 설립을 목표로 초등학교 확충계획이 가속적으로 추진되어, 1935년에는 학령아동 총수의 25%가 취학하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제2차 초등교육 확충계획을 세워 1936년 이후 10년 동안에 초등학교의 배가를 꾀하였는데, 1938년의 교육령 개정을 계기로 동 계획을 4년이나 앞당겨서 1942년까지 완수하도록 수정하였다. 이것은 학령아동 총수의 약 60%를 수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일제가 이와 같이 초등교육기관을 확대하려고 한 속셈은 그들이 한국인들에게 대륙전쟁 참여 및 지원에 전폭적인 협력을 강요하기 위한 대가로 성의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인적 자원을 전쟁 수행에 유효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필요한 기초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38년과 1941년의 두 차례에 걸쳐 교육령을 개정하여 일본식으로 학교명을 고쳤다. 즉, 1938년에는 종전의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개칭토록함에 따라 교명이 남평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심상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토록함에 따라 교명 또한 남평남공립국민학교로 개명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 소학교령 제1조에 의하면「소학교는 아동 신체의 발달에 유의하여 도덕교육 및 국민교육의 기초나 생활에 필수적인 보통의 지식과 기능을 습득케 함을 본지로 한다」고 규정하였으며, 국민학교령 제1조에 의하면 「국민학교는 황국의 도에 따라 보통교육을 할 것이며 국민의 기초적인 연성을 이룩함을 본지로 한다」로 하였다. 소학교의 교과목은 수신, 국어, 산수, 국사, 지리, 이과, 직업, 도화, 수공, 창가 및 체조로 하였고 여아를 위해서 가사와 재봉을 과하였으며, 조선어는 수의과목으로 하였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여 폐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36년 ‘우가게’의 뒤를 이어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오’는 1938년과 1941년의 2차에 걸쳐 교육령을 개정하여 한국의 학교명을 일본식으로 고치고 3대 교육강령을 내세워 한국인의 황국신민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도모하였으며, 황국신민 서사라는 것을 만들어 학생과 일반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하였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우리말․우리글의 사용을 금하여 민족사상을 뿌리째 말살해 버리려고 했었다. 남평에도 신사6)를 설치하여 일반민이나 학생들을 동원하여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고 일본민족과 근본이 다른 우리 민족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니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니 하는 기만선전을 하여 한국인으로 하여금 그들 천황의 신민(臣民)임을 맹세토록 강요하였는데, 이 서사(誓詞)는 어른용, 어린이용 두 가지로 그 내용을 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 10> 황국신민 서사(誓詞) 내용
< 어 른 용 >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련다. 2.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 어 린 이 용 >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속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
이와 같은 일제의 야만적인 민족사상 말살정책은 1941년 태평양전쟁 도발 후 그 절정에 달하였으니, 중요내용을 살펴보면, 황국신민 서사 암송의 강요,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의 전개, 우리말 금지와 창씨개명의 강행, 신사참배의 강요, 궁성 요배, 민족단체와 민족주의자의 탄압, 징병, 징용과 근로동원 등이었다.
광복 이전의 남평의 교육은 19세기 말엽에 신교육 사조를 받아들여 교육사적인 대전환기를 맞아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다가 일제의 침략으로 절망과 혼돈과 침체 속에 교육의 암흑기를 맞이한 시기였다고 정리해 볼 수 있다.
제3장 광복 후의 교육
1. 해방과 정부수립기의 교육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5년여 동안 나라 잃은 설움을 겪으며 압박과 고통 속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은 그토록 고대하던 자유를 찾은 데 대하여 감격과 환희의 흥분상태에 빠졌다. 1945년 9월 12일에 미 군정청 하에 학무국을 두고 교육부문 담당자로 락카드(E. L. Lockard) 대위가 임명되었으며, 당시 미 군정청은 우리 교육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전제주의 체제를 탈피하고 일제 잔재를 일소하며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새 교육 이론을 도입하여 새로운 교육 체제를 세워나가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교육제도는 신앙, 성별,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 등과 관계없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전제로 하여 학교제도를 복선형에서 단선형으로 바꾸었다.
1945년 11월 23일 제1차 한국교육심의회 전체회의가 열렸으며, 제4차 회의에서 교육이념과 교육방침이 결정되어 채택되었는데,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에 기하여 인격이 완전하고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양성함’을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하였다. 이념의 실천을 위한 교육방침으로 첫째, 민주적 독립자존의 기풍과 국제우호, 협조의 건전한 국민의 품성을 도야함. 둘째, 실천궁행(實踐窮行)과 근로역작(勤勞力作)의 정신을 강조하고 충실한 책임감과 상호협조의 공덕심을 발휘 하게함. 셋째, 고유문화를 순화 앙양하고, 과학기술의 독창적 창의로서 인류문화에 공헌을 기함. 넷째, 국민의 체위 향상을 도모하며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기백을 함양하게 함. 다섯째, 숭고한 예술의 감상, 창작성을 고조하여 순후원만(醇厚圓滿)한 인격을 함양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심의회에서는 교육의 민주화를 위한 이념규정과 운영방침을 설정하였고, 교육위원회에서는 일제의 잔재인 황국사상(皇國思想)을 조속히 불식시키기 위하여 그 기초가 되는 초․중등학교의 교과서 편찬 사업 및 보급에 역점을 기울였다. 그 결과로서 ‘한글첫걸음’, ‘국어독본’, ‘교사용 국어독본’, ‘공민’, ‘국사’, ‘음악’, ‘습자’, ‘지리’ 등이 속속 간행 배포되었으며, 교과서 편찬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한글의 전용과 횡서의 사용이었다.
1947년 군정청 문교부장관 오천석은 동년 ‘민주교육의 건설’이라는 저서를 간행하여 민주교육을 지향하는 데 귀중한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였고, 새 교육운동을 일으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민주교육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헌법 제16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1949년 12월 31일 확정․공포된 교육법 제1조에서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인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2조에서 7개의 기본 방침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광복이후 3년간 군정의 과도기를 지나서 정부수립과 더불어 민주주의 사회체제에 적합한 민주화 교육의 기본방향과 구체적인 실현지침이 확정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우리들의 교육개혁 운동은 과거 문화유산만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위주의 교육이나, 현실적인 생활과 유리된 서적중심의 교육을 배격하고 실제의 생활과 직결되고 전인적 발달에 도움이 되는 산교육을 지향하는 생활중심 교육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일민주의(一民主義) 교육의 강조 등 민족적 민주교육의 구현을 위해서 인격교육의 중시, 기술교육의 장려, 국방교육의 실시, 지식교육의 철저라는 4대 교육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잔재인 황국신민 교육의 뿌리를 하루속히 뽑기 위해서 그에 따른 국민학교 교과서의 개편이 시급한 과제였는데 1946년 초에 문교부 편수과가 주축이 되어 32명의 학자가 모여 새 교과서 편찬사업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때 한글 전용을 주도한 학자들이 주축이 되었고, 이는 후에 한자혼용을 둘러싼 시비와 논쟁의 뿌리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당시의 학생들이 배우던 교과서는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 교과서(군정청 문교부 발행, 1945)
교수 요목기 교육과정 교과서(1946)
한편, 부족한 교원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범교육을 강화하고 교원들의 자질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미국의 교육자를 초청하여 많은 교원들에게 강습시키고, 새로운 학습지도 방법을 도입하여 개인차를 인정하고 다양한 능력과 특성이 계발되도록 하며, 아동에 대한 온정과 수용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시민의 바탕을 이루기 위한 교육으로 상호간의 토론을 통한 분단학습을 강조하는 등 아동 중심의 학습활동으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광복 후 남평초등학교에서는 배봉민 초대교장을 중심으로 새 교육 연구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사회생활과를 중심으로 학생중심의 교수활동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배봉민 교장선생님은 최초의 역사연대표를 손수 만들어 학생들의 수업자료로 널리 사용하도록 하여 이를 전라남도 학무국에서는 교원 재교육자료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기리기 위해 35회 졸업생들은 졸업기념비를 건립하였다.(1947년)
해방 후 오랫동안 학생들의 기억에 남는 학교의 시설을 들자면 그것은 빙청각(氷靑閣)이다. 학교의 동편 동사리 마을의 경계지점에 인공연못을 조성해서 복판에 섬을 만들어 사각의 학습장(學習場)을 건립하였는데 현판의 글은 강해성씨가 썼고 판은 배봉민 교장선생님이 손수 양각으로 새겨서 만들었다.
- 얼음은 물이 되되 물보다 차고 청은 쪽에서 나되 쪽보다 푸르다. 그리하여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빙청(氷靑)이라 한다. -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의지를 심는 남평교육의 상징과 이상이 담긴 자유학습장으로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었다.
광복 후 ‘국민학교의 의무교육’으로 남평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급증하게 되었으나 이에 수반된 교실과 시설 등은 재정 부족으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고 교통망과 통학거리를 감안하여 방면별로 남평동국민학교와 남평북국민학교를 분리 개교하였다.
남평군(南平郡) 시절 저포면(猪浦面)에 속한 우산리에 “남평동공립국민학교”를 개설하여 우산리,오계리,상곡리 거주 학생들을 수용하게 되었고, 또 동촌면(東村面)에 속한 지석강 건너 남평역이 있는 광촌리에 “남평북공립국민학교”를 동사리에서 이전하여 신축하고 노동리, 수원리 수청, 풍림리, 광촌리 학생들을 수용 하였다.
2. 한국전쟁의 수난과 전후의 교육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2월 31일 법률 제86호로 교육법이 공포되었으며, 1950년 2월 10일에 6․3․3․4제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나라 학제가 공포되었다. 이어서, 1950년 5월 30일에는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2대 국회가 개원하게 되었으나 불과 얼마 안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평화롭던 남평은 우리나라의 어느곳이나 마찬가지인 전란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1950년대는 전쟁으로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면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며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격을 도야하여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 제도에 적응할 수 있는 국민 자질의 바탕을 다지는 시기였다.
1950년 문교부는 4대 교육지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인격교육 중시(국민품격 도야), 직업기술의 향상(기술 교육의 장려), 지식 교육의 철저(기초학력 향상), 보건위생 증진(체위 향상)과 국토방위 공헌이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모든 학교는 무기한 휴학에 들어가고 공산군이 패퇴하여 물러갔지만 1950년 11월 7일 당시 나주 다도, 영암, 장흥 등지에 패잔하여 준동하던 공산잔비 세력의 만행으로 남평의 시가지가 소각 파괴될 때 남평에 소재한 초․중학교도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남평의 전(全) 초․중학교 학교건물과 귀중한 학적부를 비롯한 역사적인 자료들이 이때 모조리 소실되어 사라져버리고 당시 전시중임 에도 당직근무에 임하였던 이일섭(본교 32회)선생님은 공산군이 휘둘르는 창과 칼로 중상을 입게 되었다. 정부는 1951년 2월 26일자로 ‘전시하 교육특별조치요강’을 제정․공포하여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학교 수업을 재개하도록 하였는데, 전시교육의 중점을 「멸공 필승의 신념을 배양하고 전국(戰局)과 국제집단 안전보장의 인식을 명확히 하여 전시생활을 지도하는 데 둔다」고 하였다.
당시 남평초등학교 재학생들은 교실이 없어 빙청각에서 수업을 받거나 혹은 운동장과 화단가의 돌 무더기위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노천교실 삼아 공부하였고 월연대 산모퉁이 향교의 명륜당으로 혹은 다리건너 누에치는 잠실로, 빈 공간 빈 집을 찾아 전교생은 각 학년별로 이곳저곳 흩어져서 교과서도 학습장도 학용품도 없이 전시의 어려움 속에서 비참한 환경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하였고 선생님들도 학습 자료를 손수 만들어서 학생들의 수업에 임하던 참으로 험난하기 짝이 없는 고난의 시절이었었다.
1951년 4월 5일 초가집 지붕과 흙으로 지은 4칸 교실의 가교사가 지어졌다. 전시임에도 학생들의 노천 수업을 염려한 정부의 특별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문교부에 의해 취해진 중요한 조치내용은 피난 학생들의 취학 독려, 가교실 피난 학교의 설치, 임시교사(校舍) 건축, 북한 피난 학생의 수용, 전시 교재를 발간하였고, 지도서로서 전시 학습 지도 요강을 발간하였으며, 종래의 교과중심 교육에서 생활중심 교육으로 이행하게 하였다.
1951년 3월에 문교부령 제14호로 ‘과학교육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1인1기교육 실시요강’을 발표하였다. 1952년 4월 8일에 교육법시행령이 공포되었고, 1952년 5월 24일에는 교육위원회 위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6월 4일에는 나주 교육구와 교육위원회가 발족되어 바야흐로 교육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교육자치제가 실시됨으로써 우리의 교육은 역사적인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53년 1월 10일에는 국민학교후원회 연합회가 결성되었고, 사친회 규약 준칙이 발표되었다. 1952년 문교시책의 기본 방침으로 전시문교, 건국문교, 독립문교라는 세 가지를 내세웠으며, 자활인의 양성, 자유인의 양성, 평화인의 양성을 장학방침으로 정하였다.
1953년 7월 27일에 한국전쟁의 휴전으로 정부는 서울로 환도하였으며, 1954년 문교정책으로 첫째 반공의식 함양 및 국민사상의 통일. 둘째 교육의 질적 저하 방지 및 현직 교육의 주력. 셋째 국민생활 순화 등 세 가지를 내세웠다.
1954년 4월 20일 문교부령 제35호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사범학교 교육과정시간배당 기준령을 제정․공포하였으며, 1955년 8월 1일에는 문교부령으로 광복후 10년, 교육법이 공포된 지 5년 8개월 만에 대한민국의 교육과정 제정 작업이 일단락되어 역사적인 제1차 교육과정이 공포되었다. 제1차 교육과정의 특색은 교육활동을 크게 교과활동과 특별활동의 2대 영역으로 나누었으며, 교과는 분과주의를 지양하고 통합의 원리에 따라 광역제를 취하였으며, 특별활동 시간을 두고 전인교육을 지향하였다는 점이다. 전남에서는 지역사회의 특수성과 역사적․사회적 현실을 감안하여 우리에게 맞는‘전라남도 국민학교 교육과정 기준안’을 작성․활용하였는 데, 학생생활 사례를 취급하고, 학습 주제는 생활단원(경험단원)으로 조직․전개하며, 지식과 기능 및 태도가 일원적으로 형성되는 전인적 학습과정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1954년 국제연합의 지원으로 후관 교실 12칸이 신축되었고 빙청각이 개축되었다. 그리고 1956년 목조 화장실이 신축되었다. 이로써 전후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서서히 풀리게 되었다.
제1차교육과정 기별 교과서(1955)
1956년 문교부는 교육의 질적 향상과 도의교육 진흥이라는 2대 정책을 내세우고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1957년에는 과학 기술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조국 혼과 자유 민주 정신 진작, 실질주의 교육과 교육의 질적 향상, 사도 쇄신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50년대 교육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라면 종래의 교육이 단편적이며 주로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것으로부터 학생 생활의 모든 영역을 통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교육의 목적을 전인의 육성에 두었다. 교수요목 당시에는 없었던 특별활동을 20~120분으로 하여 학생의 취미활동과 특기신장 및 학습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아동회 운영을 통하여 민주생활의 훈련과 경험을 갖도록 하였으며, 외국 문물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도덕적 가치 갈등이 심했던 당시 현실을 감안하여, 도의 교육을 강조하고 반공(反共)교육과 방일(防日)교육을 강조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새 교육과정에 대한 연수가 실시되었고, 학습지도 방법에 대한 연구가 생활중심학습 형태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본 도의 1950년대 초등교육에서 괄목할만한 점은 교육과정 지역화 방안을 두고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동안 남평초등학교는 전쟁 이후 임시 사용했던 가교사를 헐고 1954년에서 1958년 단층 정규교사를 신축하여 준공하였고 정부의 지원으로 많은 학습 자료들을 갖추게 되어 차츰 안정된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광주시내의 중학교에 진학하였고 향학열에 불타올라 고등학교 내지 대학의 진학생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이 광주시내 학교를 제외하면 남평초등학교의 근무를 희망하였고 또한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열성을 다하여 남평초등학교에 재직7)하였었다.
제4장 새 시대를 향한 교육
1. 도약시기의 교육
가. 60년대~70년대의 교육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3.15 부정선거에 격분한 학생들에 의해 4.19혁명으로 전개되어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고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어 문교부는 1960년 5월 26일 ‘학원정상화를 위한 긴급조치의 건’을 공포하여 3․15부정선거 관련 교육자나 구정권을 배경으로 부정과 불법을 자행하여 영리를 도모하고 학원 질서를 문란하게 한 사람들을 규제하였다.
1960년 7월 29일, 내각책임제 헌법에 의한 민․참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하는 장 면 정부가 출범하여 민주당 정부의 문교부에서는 학원의 민주화, 중앙집권적인 행정 체제로부터 권한의 지방 이양, 교육의 질적 향상 등을 문교 시책으로 내세워 추진하였다. 이어 학제, 교육자치제, 교포 교육, 장학금 제도 등에 관한 교육정책을 구상하여 실현하려다가 5․16군사정변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가 민주당 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5․16군사 정변이 발생했다. 군사정부의 군인인 문교부장관은 정신혁명, 교육혁명, 교육행정 쇄신, 생산․기술․과학 교육의 강화, 향토․의무 교육의 질적 향상을 장학방침으로 제시하였으며, 도 단위 교육자치제의 부활,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의 실시 등 큰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1962년에 교육자치제를 폐지하고 교육을 일반행정에 편입시킴으로써 한국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1963년 10월 교육자치제를 위한 교육법 개정안이 의결․공포되어 폐지 2년만인 1964년 1월 1일부터 교육자치제를 다시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육 정상화를 목적으로 교육법과 교육공무원법 등의 교육관련 법령에 특례를 규정한 ‘교육에관한임시특례법’을 제정하였다.
한편 1955년에 제정된 교육과정은 사회의 발전과 국내외 정세의 변화 등 교육 양상의 격변으로 1961년 12월에 제1차 개정 시안이 작성되고, 1963년 2월 15일에 문교부령 제119호로 제2차 교육과정이 개정․공포되었다. 개정된 교육과정은 이른바 경험중심 교육과정으로 일컬으며 자주성, 생산성, 유용성 등을 강조하였다. 특히 제2차 교육과정은 교육과정의 전체 구조를 교과활동, 반공․도덕생활, 특별활동의 3대 영역으로 나누었고, 시간배당 기준은 주단위로 하고 이를 최고와 최저 시간을 정하여 운영상의 융통성을 기하도록 하였다는 점, 그리고 교과활동은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체육, 미술, 실과 등 8개 교과를 지도하여 교육목표의 달성을 기하도록 하고, 반공․도덕 교육을 학교 교육의 모든 영역에 걸쳐 계획성 있게 실시하도록 하였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특히 교육과정의 개정과 새 교과서의 발간에 따라 학습지도 방법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예컨대 향토학교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 중심의 경험학습을 실천하기 위해 프로그램 학습, 버즈 학습, 발견 학습, 탐구 학습 등 다양한 학습 방법이 도입되어 교육 현장은 많은 변화와 더불어 질적인 향상을 이루었다. 본 도에서도 향토학교 건설을 위해 1964년 2월에 ‘국민학교 향토학교 운영 요령’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였으며 이러한 향토학교 운동은 급기야 생산활동을 위주로 하는 자활학교 운동으로 발전하여 1960년대의 교육을 꽃피우게 하였다.
제2차교육과정기별 교과서(1963)
1960년대 교육에 있어서 특이할만한 것은 1968년 6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국민의 새로운 가치관과 생활규범을 규정하는 이른바 국민교육의 지표를 제정하기 위해 각계 대표 44명으로 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한 일이다.
이시기 남평국민학교는 지석강을 건너야하고 통학거리가 4㎞가 넘는 남석리에 남석분교장을 설치하여 1학년부터 4학년 학생을 수용하여 2학급 편성으로 복식수업을 실시하고 5학년부터 본교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또 연구학교 및 시범학교 운영이 활발히 전개되는 시기로 산수과 수도방식과 프로그램학습 과제학습에 의한 계산능력 향상을 기한 시범학교운영(66년), 미술과 공작학습 및 자료개발을 위한 교육연구 시범학교운영(67년)으로 전라남도 교육의 질적 개선과 수업발전에 기여하였다.
1970년 8월 15일 평화통일 선언,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10월 유신 등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국적 있는 교육’을 표방하면서 교육과정 개정, 교과서 개편, 새마을교육 추진, 고교 입시제도 개혁 및 평준화, 방송 통신 교육 등이 실시되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1960년대 가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잘살기 운동으로 거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확산됨에 따라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새마을 교육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새마을 교육은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아래 학생과 주민이 근면, 자조, 협동의 3대 정신으로 무장하고 이 정신을 국민성으로 승화시켜 항구적인 향토 개발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민족사관의 확립을 위한 국민정신 교육의 강조와 민족사적 정통성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기 위해 국사를 독립 교과로 개편하는 등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였다.
1971년 ‘교육법시행령’이 개정되어 학교에 주임 교사제가 실시되었다.
1972년 11월 1일부터는 획일적인 교실수업 체제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학교 수업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완화시켜 줌으로써 인성 함양과 학습능률 향상에 목적을 둔 책가방 없는 자유학습의 날을 설정․운영하였다.
1973년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구현과 국민적 자질 함양, 인간교육의 강화, 지식․기술 교육의 쇄신을 기본 방침으로 하는 제3차 교육과정인 학문중심 교육과정을 공포하였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은 발견․탐구 학습을 강조하고 지식의 구조화를 통한 기본 개념의 이해 과정을 강조하였다. 우리 도에서는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위하여 ‘학력책임제’를 실시하고 ‘기록 바꾸기 3운동’, ‘1교 1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예능장제’와 ‘기능장제’를 꾸준히 실시하였다. 그리고 과학기술 교육과 반공교육을 특히 강화하였는데, 과학교육 면에 있어서는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고 자연관찰원 설치 및 각 학교 단위의 부분관찰원 조성, 발명교실 운영 등을 통하여 과학의 생활화와 과학교육 진흥에 주력하였다.
한편 당시 북한은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휴전선에 땅굴을 팜으로써 적화통일의 흉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우리의 생존과 자유 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하여 반공안보 교육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각급 학교에서 반공 시사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졌으며, 반공관(판)이 설치되었고, 도 지정 및 시․군 지정 반공교육 연구학교가 운영되었다. 또한 반공이론 연수회 및 반공교육 협의회가 개최되었고 특히 전후 세대에 대한 사상교육이 중시되었다.
남평초등학교에서는 72년부터 73년까지 국어과 연구학교로 운영하였고 74년부터 77년까지 도서관 시범학교를 운영하여 독서 및 도서관 이용을 통한 생활화로 학생들의 언어생활과 독서 역량이 뛰어나 학력 우수학교로서 긍지를 갖게 되었다.
정서교육의 일환으로 1976년부터 아름다운 학교, 사철 꽃피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학교 공원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70년대 남평교육은 ‘새 마음 새 힘 길러 국력 배양 앞장서자’‘알찬 교육 착실한 성장’이라는 교육 구호 아래 알차고 힘찬 발전을 거듭한 시기였다.
제3차교육과정 기별 교과서(1973)
나. 80년대~90년대의 교육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과 10월 27일 국민투표에 의한 개정 헌법 공포, 1987년 6․29민주화 선언, 노태우 대통령 취임 등 한마디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1980년대 초등교육을 살펴보면 정치 상황 못지않게 변화가 심하였다.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학교 교육의 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 등을 골자로 하는 7․30 교육개혁 조치를 단행하였으며, 이러한 교육적 관심을 헌법에도 반영하였는데, 전두환 정부 헌법에서는 교원의 지위 향상, 평생교육의 진흥, 교육재정에 관한 사항을 명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을 국정 지표의 하나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1981년 12월 31일 문교부는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여 이른바 제4차 교육과정을 고시(제442호)하였는데, 새 교육과정의 시행은 실험 과정을 거쳐 1982학년도부터 1, 2, 3학년에, 1983학년도부터 4, 5, 6학년에 각각 적용하였다. 제4차 교육과정의 특징은 어느 특정한 교육 사조나 이념만을 반영하는 교육과정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교육과정이라는 점이다. 즉, 교과중심, 경험중심, 학문중심의 입장이나 접근 위에 변화와 미래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는 미래 지향적인 교육과정의 정신과 인간중심 교육과정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반영함으로써 사회적, 학문적인 적합성을 고루 갖춘 종합적인 교육과정이라는 특색을 지니게 되었다. 제4차 교육과정에서는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의 건설, 정의 사회의 구현,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이라는 국정지표에 따라 민주, 복지, 정의 사회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국민을 길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학교 교육은 올바른 정신과 튼튼한 몸을 단련하는 건강한 사람, 취향이 고상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심미적인 사람, 지식과 기술을 익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능력 있는 사람, 인간을 존중하며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도덕적인 사람, 자신과 공동체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여 실천하는 자주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도와주어 전인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국민정신교육, 전인교육, 과학․기술 교육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기초교육을 강조하고 교육 내용의 양과 수준을 재조정하였으며 특히 국어 교육을 강화하고 특별활동을 보완한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제4차교육과정 기별 교과서(1981)
1981년에는 2년제 교육대학을 4년제로 승격시켰고, 1982년 5월에는 사도헌장을 제정․선포하고 스승의 날을 부활시켜 교육자를 존경하고 우대하는 사회 풍토를 조성하였다.
1987년 6월 30일에는 제5차 교육과정이 개정․고시되었다. 제5차 교육과정은 우리의 미래 사회를 자유민주주의 사회, 정의사회, 복지사회, 문화사회로 전망하고 자율화, 개방화, 정보화, 국제화로서 고도 산업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21세기를 주도할 주체적이고 창조적이며 도덕적인 한국인을 기르고, 다가올 복지국가 건설과 반드시 이룩해야 할 조국 통일에 대비하는 미래 지향적인 교육을 강조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따라서 제5차 교육과정은 건강한 사람, 자주적인 사람, 창조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을 희구하는 인간상으로 하여 이를 교육과정의 구성 방향에 제시하였으며, 교육내용과 운영 면에서의 기본 방향으로는 기초교육의 강화, 정보사회에 대응하는 교육 강화, 교육과정 운영의 효율성 제고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제5차 교육과정은 교육과정의 적정화, 내실화, 지역화를 개정의 방침으로 하고 지속성(제4차 교육과정의 기본성격 유지), 효율성(교육과정이 의도하고 기대하는 교육적 성취를 가져오도록 하는 제반 조치의 이행) 등을 개정의 전략으로 하였으며, 기초교육의 충실, 저학년 통합 교육과정의 구성, 미래사회 대비 교육의 강화, 교육과정 운영의 효율성 제고에 주안점을 두었다. 주요 특징은 기초교육의 강화, 국가․사회 요구 사항의 체계적 반영, 특별활동의 강화, 특수학급 운영지침 명시, 저학년의 교과 통합, 교육과정의 지역화, 교육내용의 양과 수준의 적정화 등이었다.
제5차교육과정 기별 교과서(1987)
남평교육은 83년 도덕(반공)시범학교, 조기 영어교육시범학교운영, 도덕(국민윤리)교육 시범학교를 운영 하여 보고회(85.11.28)를 개최하였다. 또 1988년부터 2년간 전라남도 지정 과학교육 시범학교를 운영하여 보고회(89.11.11)를 개최하는 등 활기찬 시기였다.
1986년 11월 1일 전라남도에서 광주가 분리되어 직할시(후에 광역시)로 승격되므로서 남평교육이 일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동안 남평관내 학생들은 고등학교는 가까운 인근에 있는 광주시내의 학교로 진학하여 공부하였는데 이는 광주시내의 교통환경권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는 거리였는데도 행정적인 규제에 묶여 광주시내의 고교로 진학은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남평에서는 광주시 이외의 나주관내 지역인 나주 혹은 영산포등지의 학교로 하행 통학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대학교 진학의 수준별 학교에 미흡한 학교들이 많은 것 또한 원인이었다.
이로 인하여 초등학교 6학년 시기에 많은 학부모들이 인접한 광주광역시로 거주지를 옮기거나 주민등록상 전출하는 등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남평의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는 현상이 생기고 이로 인하여 초등학생 수의 급감으로 학급수가 줄어 들어 학교운영에 이변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 어려움은 이어져 나갔다.
1991년 3월 8일 지방교육자치에관한법률 제4347호에 의거 동년 9월 3일 제1대 전라남도교육위원회가 개원식을 갖고 활동에 들어감으로써 바야흐로 본격적인 교육자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91년에는 문교부가 교육부로, 시․도 교육위원회가 시․도 교육청으로 개칭되었고, 1996년 3월 1일부터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칭되는 변화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 말기의 국내정세는 사회 소외계층의 갈등이 표출되고 교육계 내부에서는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고 있었다.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김영삼 대통령 스스로가 교육대통령임을 표방하면서 교육 부조리 척결과 입시 지옥으로부터의 해방 및 교육예산 GNP 5% 확보 등 교육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95년에는 대통령 자문 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발족되어 21세기를 향한 교육의 비전과 열린교육 사회, 평생학습 사회의 구현을 위하여 그 해 5월 31일 신교육 체제 구축을 위한 교육개혁안이 발표되었으며 교육개혁의 추진을 위하여 GNP 5%에 해당하는 교육재정을 투입함으로써 학교의 모습과 교육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한편 1992년 9월 30일에 교육부고시 제1992-16호로 제6차 교육과정이 개정‧공포되었다. 제6차 교육과정은 우리나라가 민주화, 정보화, 국제화를 향해 급속하게 변화되어 감으로써 새로운 시대와 사회의 전개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교차되는 전환기에 우리의 학교 교육은 건강하고, 자주적이며,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한국인을 길러야 한다는 필요와 요구에 의해 개정되었다. 제6차 교육과정은 기본생활 습관과 예절교육의 강화, 저학년 통합교과의 합리적 조정, 고학년 교수․학습 부담 감축 조정, 생활의 기초 기능과 태도 교육의 강화, 학교 재량시간의 신설 등을 개정의 주안점으로 하였다.
제5차 교육과정에서는 교육과정을 교과활동과 특별활동의 2대 영역으로 나누었으나,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교과, 특별활동, 학교 재량 시간의 3대 영역으로 편성하여 제5차 교육과정에 없었던 학교 재량시간을 신설함으로써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과 지역사회의 요구, 학교장 및 교사들의 교육관 등에 따라 학교 나름대로의 특정 내용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교과별 시간 배당을 주당 시간으로 밝히지 않고 연간 총 시수로 제시함으로써 교과별 수업 시간 수를 계절의 변화, 학교의 실정 등에 따라 융통성, 탄력성 있게 운영할 수 있도록 한 점도 큰 특징 중의 하나였다. 이 밖에도 ‘우리들은 1학년’의 교육내용 재구성 권한의 시․도 이관, 국어와 수학의 통합 교과에서 분리, 도덕 교육의 단계적 구분, 실과교육 내용의 조정, 산수교과 명칭을 수학으로 변경 등이 제5차 교육과정과 다른 점이었다.
제6차교육과정 기별 교과서(1992)
1998년 10월 21일 교육부는 기존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에서 탈피하여 창의성․인성교육중심 교육 체제로의 개편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교육 비전 2002 : 새 학교 문화 창조’를 발표함으로써 1999학년도부터 초등교육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새 학교 문화 창조의 주요 내용은 학교 생활기록부의 파일형 전환, 학생평가의 신뢰성․투명성 제고, 체계적인 독서교육과 컴퓨터교육 강화, 현장체험 학습 확대, 방과후 교육활동(특기․적성교육)의 다양화, 각종 학생자치활동의 내실화, 학생중심 교육과정 운영, 기초학력 부진학생 책임지도제 도입, 학급 담임․교과담임제 개선 등이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바야흐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는데, 국민의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교육개혁안을 발표하였으며, 그 중 교육계에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사안은 교원의 정년단축 문제였다. 이 문제는 당시 IMF 체제 하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구조 조정에 교육계도 포함시킴으로써 공공부문의 개혁을 가속화하려던 정부측 입장과 정부안에 대한 일선 교원들의 분노가 격렬하게 충돌하였으나, 결국 1999년 1월 6일 국회 본 회의에서 여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교원 정년 62세 단축안이 변칙 처리됨으로써, 수많은 교원들이 교단을 떠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1999년 1월 6일에는 ‘교원노조설립및운영에관한법률안’이 국회 본 회의에서 의결되고 동년 1월 29일 공포됨으로써 교직원 노동조합이 합법화되었으며, 이로써 교사들이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권익 신장 활동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90년대 접어들어 시 지정 어학교실 시범학교, 컴퓨터 시범학교를 운영하여 발표 회를 개최하였고, 전라남도교육청지정 표준학교로 지정되어 3차보고회(93.9.24)를 하였다. 또 교육부지정 초 중학교 종합정보관리시스템 개발 시범학교를 2년간 운영하여 보고회(98.11 3), 전라남도교육청 지정 정보통신 지원 시스템 개발학교로 보고하는 등 교육연구 시범학교 운영을 꾸준히 하여왔다.
체육부의 활동도 강화하여 1992년 축구부와 야구부를 창단하여 각종 대회에 참가하고 축구부는 한일 친선 축구경기(94.8.7 일본 창길시 소년축구클럽)에 참가 하였고 야구부는 무등기야구대회, 전남학생야구대회등에 출전하여 실력을 널리 인정받았다.
90년대에는 남평초등학교에서 갈라져 독립하거나 각각 운영하던 학교들을 통합하게 되었다. 학생수의 급격한 감소로 소규모학교로서 운영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으며 또 교통망의 향상으로 통학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남석분교장을 통합(1994.3.2)하여 전원 본교에 수용하였고 남평북초등학교를 4학급으로 편성 광촌분교장(99.3.1)으로 격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또 남평동초등학교는 학생수의 감소와 학부모의 희망에 따라 통합(99.9.1)하여 학교 스쿨버스를 이용하여 학생들의 통학에 불편이 없이 운영하고 있다. 이리하여 50년간 별개로 운영하던 남평읍 관내 초등학교는 다시 단일학교로 통합되었다.
2. 21세기를 여는 교육
가. 2000년대의 교육
1997년 12월 30일에 개정․고시된 제7차 교육과정은 2000년도부터 2002년까지 점진적으로 실시되었다. 전라남도교육청에서는 교육부고시 제1997-15호(1997.12.30.)를 부분 개정하여 ‘전라남도 초등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 지침’을 전라남도교육청고시 제2001-6호(2001.2.13.)로 고시하였다. 교육부고시 제1997-15호와 이 지침에 의하여 제7차 교육과정은 2000년 3월 1일부터 1, 2학년, 2001년 3월 1일부터 3, 4학년, 2002년 3월 1일부터 5, 6학년에 적용되었다.
제7차 교육과정은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학생 중심 교육과정’, ‘주어지는 교육과정에서 만들어 가는 교육과정’, ‘지식 정보화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자기 주도적 학습력 신장을 의도하는 교육과정’을 표방하면서 학교교육을 교육과정 중심으로 전개하고 학습의 개별화를 통해 진정으로 학생을 존중하는 교육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의 특징적인 점은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과 선택중심 교육과정의 운영, 그리고 교육과정의 3대 영역을 교과, 재량활동, 특별활동으로 나누고 재량활동은 교과 재량활동과 창의적 재량활동으로 하며, 특별활동은 자치활동, 적응활동, 계발활동, 봉사활동, 행사활동으로 한 점이다. 또한 각 학교에서는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되 초등학교의 수준별 교육과정의 유형은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과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으로 구분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현장체험 학습과 정보통신기술(ICT) 활용 교육을 강조한 것도 특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7차 교육과정에서는 특기․적성교육을 강조하여 관내 전 지역의 인적 자원(강사) 명단을 분야별로 확보하여 각 안내하는 등 모든 학교에서 특기․적성교육이 활성화되도록 지원하였다.
제7차교육과정 기별 교과서(1997)
2000년에 들어서도 전라남도교육청지정 새문화창조 연구학교를 2년간(2000.3.1~ 2002.2.28) 운영하였고 교육행정 정보시스템운영 연구학교를 2년간(2002.11.1~2004.2.29) 운영보고를 마치고 시지정 나주인 정신이어가기 시범학교를 운영하였다.
또 2005년 5월 1일부터 2년간 교육인적자원부 지정 “학교사회복지사 활용을 통한 학교적응력 향상”이란 주제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나. 미래의 교육
1) 전인교육
미래사회를 짊어지고 갈 양질의 주역들은 교육을 통해서만 양성된다. 그래서 논자들은 인간사회에서 교육의 필연적인 필요성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다. “1년의 계획에는 곡식을 심는 것이 제일이고, 10년의 계획에는 나무를 심는 것이 제일이며, 종신의 계획에는 사람을 심는 것이 제일이다.”옛 관자(菅子)의 말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농업중심의 전통사회에서 공업중심의 산업화 사회로 재구조화 되어왔다. 지금 우리사회는 다변화의 한 중심에서 세상이 칸막이없는 지구촌으로, 소위 말하는 세계화(Globalization)현상이 놀라운 속도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는데 이는 최첨단 정보통신망의 발달로 지구상의 거리가 소멸되고 경제적 의미의 국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펴보면 전통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직업과 기술이 생기고 현대사회는 인간성보다는 기계의 효율성, 능률성이 중시되어 왔다.
이제 21세기의 주역을 교육하는 현 시점에서 남평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학교교육은 더불어 살아가는 여유와 훈훈함을 가진 인간성 함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교육은 인간성 회복이라는 전인교육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깨우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행위이다. 이는 인간 주체를 대상으로 지․정․의가 조화된 전인적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인간답게 자유로운 삶을 누리도록 하는 가치지향적인 활동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답다는 것은 방대한 지식의 습득정도나 기술의 유무를 통해 판단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가치관과 끊이지 않는 풍부한 사랑, 스스로의 의지로 자기 자신을 수련하여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덕이 있는 사람, 선한 사람,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교육의 본질인 덕을 교육한다는 것은 충동적이고 비주체적인 현재의 생활에서 인간을 주체적으로 만들고 보다 참된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진리를 따르려는 의지와 수련속에서 덕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도와 덕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로써 존재하게 된다. 오늘날 남평교육에서 요구되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이고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아가는 습관을 기르는 참된 인간을 육성하여야 할 것이다.
2) 전통문화 교육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국가간의 경쟁력은 각 민족이 지니는 고유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 서구의 모방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것에 대한 연구와 보존 및 재창조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은 기능주의 물량주의에 따른 우리것에 대한 부정과 소홀함에서 탈피 하여야 한다. 일단 우리의 전통에 관심을 갖게 되면 저마다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놀라움을 얻게 될 것이다.
전통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단순히 과거를 현대에 옮겨 놓는 복고적인 이해를 해서는 안되며 또한 고리타분하고 낡는 구시대의 유물로 부정하여서도 안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돌아보고 전통문화는 현재를 통해서 미래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전통사상이 갖는 세계관은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원칙적인 근거들을 갖고 있고, 더구나 서구의 후기 현대 철학이 동양으로 접근하여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만큼 전통문화의 계승과 재창조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일제 강압기를 거치면서 일제의 한국혼 말살정책에 따른 전통문화의 파괴를 겪었고 광복 이후에도 또 다시 우리 문화를 버리게 되는 큰 불행8)을 거쳤다.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재창조의 교육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통문화를 돌아보아 현장학습으로서의 질적 측면을 고양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전통문화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이를 쉽게 보급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사회는 문화적 힘을 갖는 나라가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우리는 힘으로 세계를 제패하지 않지만 문화민족의 무한한 생명력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즉 세계속에 퍼져가는 한류열풍을 더욱 확산해 가는 것이다.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우리의 고유한 민속놀이 및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깊게 하고 가치를 인식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 종류의 전통문화에 따른 기본동작이나 춤과 노래, 혹은 표현기법 등 교육적인 활동으로 신체발달을 돕고 현장답사를 통하여 문화재적 전승문화를 접하게 하며 교과 교육을 통하여 전통사상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3) 남평의 공동체 실현
인간의 본성이란 개인속에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關係)들 사이에서 발달되고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동체는 <나>보다는 <우리>라는 정신을 우선하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영광이 자신의 영광속으로 간주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자기를 우위에 두는 이기적인 사람은 그들과 함께 살 수 없다. 그러나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성찰과 창조적인 표현은 함께 수반된다. 공동체의 구성원리는 더불어 함께 사는 삶, 자유로운 삶, 인간다운 삶에 있다. 이러한 원리들을 교육에서 길러줄 때 공동체의 형성은 가능할 것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교육원리는 지나친 이기심과 경쟁력을 제한시키는 것이고, 자유로운 삶의 교육원리란 어린이들의 자율성을 통한 주체성의 증진이며, 인간다운 삶의 원리란 타인이 자기와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공동체 의식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동체 교육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희망하여 주체적인 인간, 타인과 역사에 대해 서로가 책임을 지는 인간으로 교육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남평인의 “고춧가루 + 물속 삼십리”다운 기질이 남평공동체로 발현되어 남평인의 양성 평등, 선후배의 공경, 지역민의 단합 등 남평의 고유한 미풍이 되살아 나기를 기대한다.
진실로 남평인(南平人)은 교육으로 재창조되고 재무장되어 한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속에 우뚝 일어서는 광영(光榮)의 새로운 한 세기를 맞이하도록 가일층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제3편 남평초등학교 100년의 자취
제1장 학교의 발전
1. 학교의 위치
남평면 소재지에 위치하는 학교로서 남평초등학교는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 238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촌분교는 나주시 남평읍 광촌리 50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
2. 학교의 연혁
가. 남평초등학교
◦1906.06.15 : 영흥학교로 개교
◦1909.04.01 : 영선학교로 개명
◦1909.11.01 : 영선학교 폐교
◦1910.01.18 : 남평사립 보통학교 인가
◦1911.06.15 : 남평공립보통학교(4년제) 인가
◦1926.04.01 : 남평공립보통학교(6년제) 연장
◦1938.04.01 : 남평공립심상소학교로 개名
◦1941.04.01 : 남평남공립국민학교로 개명
◦1963.04.01 : 남평국민학교로 개명
◦1994.03.01 : 남석분교 통합
◦1996.03.01 : 남평초등학교로 개명
◦1999.09.01 : 남평동초등학교 통폐합(3학급증설)
나. 남평북초등학교
◦1946. 4.15 : 남평면 동사리(旧 일본인 학교)에서 분교장을 광촌리에 설치운영
◦1949. 5.10 : 분교장을 남평면광촌리509번지에 확정 교사 1동 신축이전
◦1949. 5.10 : 남평북공립국민학교 개교
◦1950.11. 7 : 한국전쟁으로 본교(동사리 소재)건물 및 분교건물 전소
◦1951. 7. 1 : 광촌리 분교장용으로 가교室 1동 초가 3교실 신축
◦1984. 6.30 : 병설 유치원 개원
◦1996. 3. 1 : 남평북초등학교 개명
◦1999. 3. 1 : 남평초등학교 광촌분교장 격하
다. 남평동초등학교
◦소재지 : 나주시 남평읍 우산리 989번지(부지면적 : 11,102㎡)
◦1940. 3. 1 : 남평심상소학교 부설 간이학교 설립 인가(우진에 사립학교 창설)
◦1940. 4.15 : 남평심상소학교 부설 간이 학교 개교(송씨 제각)
◦1943. 3. 1 : 남평동국민학교 승격
◦1976. 4. 6 : 급식소 신축(14평)
◦1976. 3. 1 : 문교부 지정 자활 급식 실험학교
◦1987. 9.24 : 의식개혁 시범학교 발표
◦1996. 3. 1 : 남평동초등학교
◦1998. 10.21 : 표준학교 가꾸기 실적 보고회
◦1999. 7.14 : 나주시지정 열린교육 시범학교 발표회
◦1999. 8.31 : 남평초등학교 통폐합
3. 학교의 재산
가. 면적
남평초등학교 부지는 25,555㎡, 건물 연면적은 5,663.19㎡이며 남평북초등학교 부지는 4502㎡, 건물 연면적은 762.14㎡이다.
나. 교사의 증개축
◦1906 : 문묘에서 영흥학교 개교
◦1909 : 영선학교 改稱. 객사 이전
◦1911.06.15 : 客舍(南平公立普通學校)
◦1950.11.07 : 교사전소(공비방화)
◦1951.04.05 : 가교사 목조, 60평, 5실, 단층, 신축
◦1954.10.19 : 후관 교사 목조, 130평, 6실, 단층 신축
◦1954.12.27 : 후관 교사 목조, 6실, 단층 신축
◦1955.08.23 : 永靑閣 改築 목조, 단층 개축
◦1956.06 : 동부 변소 목조, 6.75평, 단층 신축
◦1958.08.24 : 본관 중부 현관,교장실,직원실,동부변소 목조, 146.75평 5실
◦1959.11.12 : 본관 동부 교사 목조, 50평, 2실, 단층 신축
◦1961.10.01 : 후별관 목조, 75평, 3실
◦1962.10.13 : 서부별관 벽돌, 75평, 3실
◦1963.06.30 : 동부별관 벽돌, 75평, 3실 신축
◦1964.09.15 : 남석분교장 벽돌, 2실 신축
◦1964.10.30 : 동부변소 1동 벽돌 3.7평 신축
◦1966.06.04 : 서부 별관 목조, 25평, 1실 신축
◦1966.12.31 : 서부 변소 신축
◦1967.04.17 : 도서관 목조, 1층 신설 신축
◦1967.06.30 : 서편 교사 벽돌, 50평, 2실 신설 신축
◦1968.06.15 : 서편 교사 벽돌, 54.2평, 2실 신설 신축
◦1972.01.01 : 후관 교사 철근콘크리트, 6실, 2층 신축
◦1972.11.15 : 교사 철근콘크리트, 1실, 2층 증축
◦1977.01.31 : 교문 브록크 이축
◦1977.01.31 : 철책 브록크 및 철, 183m 생울타리철거 후 시설
◦1977.05 : 학급 공원화 구획 정리 브록크, 703평
◦1978.10.20 : 변소 신축 벽돌조, 1동5칸 신축,연못옆
◦1979.09.16 : 교실 개축 벽돌스라브, 2층 2개교실
◦1982.06.17 : 교실 벽돌스라브, 2층 4개교실
◦1983.01.31 : 교실 벽돌스라브, 2층 2개교실
◦1984.10.29 : 교실 개축 벽돌스라브, 2층 4간 개축
◦1984.10.29 : 도서관 벽돌스라브, 2층 1간
◦1984.12.24 : 교실 개축 벽돌스라브, 2층 4간
◦1988.04.02 : 서편2동 4개 교실 개축 스레트변화, 4개교실
◦1988.06.10 : 과학실 1실 증설
◦1989.06.05 : 어학실습실(40석) 1실 시설
◦1991.10 : 컴퓨터실(30석) 1실 시설
◦1992.11.30 : 관사 신축 콘크리트스라브조, 1동
◦1994.02 : 급식실 개축 5동
◦1994.10 : 도서실 1실, 2층
◦1994.11 : 차고 1동 통학버스, 1동 신축
◦1995.08.30 : 유치원 교실 신축 2실 개축, 신축
◦1997.08.25 : 체육관 철근콘크리트 신축, 교실 개축 철근코크리트, 스라브,
◦1991.05.20 : 어학실설치 1실, 좌석수 20석
◦2000.08.28 : 교실 증축 및 급식실 증축 급식소1실, 교실3실, 강당1실
◦2000.12.20 : 휀스시설, 교문설치, 현관보수, 방송시설 1식
◦2001.12.10 : 유치원 물놀이장 시설공사 유치원 물놀이장
◦2002.01.03 : 장애자 편의시설 공사, 현관입구 출입로, 동편화장실 1실
◦2002.09.04 : 급식실 전처리실 증축 공사 1식 28.8㎡
◦2002.10.29 : 정원수 자연석 쌓기
◦2003.07.04 : 체육관 냉난방전기 시설공사
다. 내부 배치도
유치원 |
유치원 |
|
|
|
|
|
|
보건실 |
|
|
|
|
|
|
|
|
|
|
|
|
|
|
| ||||||
화 장 실 |
|
|
|
|
|
|
|
|
|
|
|
|
|
|
|
|
|
|
|
|
|
화장실 | |||||
|
별밭 도서관 |
5-1 국어 |
무 용 실 |
운영 위원 실 |
교 장 |
|
5-2 국어 |
5-3 특활 |
4-1 국어 |
4-2 도덕 |
4-3 사회 |
|
3-1 특활 |
3-2 특활 |
3-3 국어 |
학교 사회 복지실 |
|
음악실 |
2 층
|
|
|
|
|
|
서고 |
|
|
|
|
|
|
|
|
|
|
|
|
|
|
| ||||||||
화장실 |
|
|
|
|
|
|
|
|
|
|
|
|
|
|
|
|
|
|
|
|
화장실 | ||||||||
|
학습 도움실 |
정보실 |
컴퓨 터실 |
멀티실 |
방송실 |
|
현 관 |
행 정 |
협의실 |
과학실 (휴게실) |
준비실 |
1-1 바생 |
|
1-2 국어 |
1-3 국어 |
2-1 국어 |
2-2 국어 |
2-3 특활 |
조 리 실 |
|
|
|
급식실 |
다목적실 |
|
|
|
6-3 국어 |
6-2 체육 |
6-1 도덕 |
운동장(주차장)
4. 교육연구
년월일 |
분 야 |
지정구분 |
적 요 |
1966.03.02 |
산수과 교육연구 |
군지정 |
1966.09.28 연구발표 |
1966.06.10 |
보건 환경 시범 |
〃 |
|
1967.03.02 |
미술과 교육연구 |
〃 |
1967.10.20 연구발표 |
1968.03.02 |
〃 |
〃 |
서면 보고 |
1969.03.02 |
미술과 교육 시범학교 |
〃 |
1969.11.19 실천보고 |
1971.03.02 |
도서관 시범학교 |
〃 |
1971.11.20 실천보고 |
1972.03.02 |
국어과 연구 |
〃 |
1972.12.12 연구발표 |
1973.03.02 |
〃 |
〃 |
1973.12.06 연구발표 |
1974.03.02 ~1997.11.26 |
도서관 연구 |
〃 |
서면 보고 |
1977.11.26 |
〃 |
〃 |
1977.11.26 연구발표 |
1983.03.02 |
도덕(반공)시범학교 |
〃 |
|
1983.03.02 |
조기영어교육시범학교 |
〃 |
|
1984.03.02 |
도덕(국민윤리)시범학교 |
〃 |
|
1988.03.02 |
자연 시범학교 |
도지정 |
1988.11.11 연구발표 |
1990.03.02 |
어학교실 시범학교 |
시지정 |
90.11.1시지정 어학교실 시범학교 운영 발표 |
1992.03.02 |
컴퓨터 시범학교 |
〃 |
92.10.6컴퓨터시범학교 운영발표(시지정) |
1992.07.01 |
나주시군 표준학교 |
도지정 |
2003.10.2 보고회 |
1993.09.24 |
전라남도교육청지정 표준학교 |
〃 |
93.9.24 도지정표준학교발표회 94.12.22(3차발표) |
1996.03.02 |
전라남도교육청지정 컴퓨터시범 |
〃 |
96.11. 도지정컴퓨터교육 시범운영 보고회 |
1997.03.01 ~1999.02.28 |
교육부지정 초․중학교 종합정보관리시스템개발시범학교 |
교육부지정 |
97.11.12 협의체학교 1/2차년 보고회 |
1999.03.02 |
정보통신지원 시스템 개발 |
도지정 |
2000.10.24 협의위원체제 보고회 |
2000.03.01 ~2002.02.28 |
새학교 문화 창조 연구학교 |
〃 |
|
2002.11.01 ~2004.2.29 |
교육행정 정보시스템운영 연구학교 |
〃 |
2003.10.2 교육행정 정보시스템보고회 |
2004.3.1 ~2005.2.28 |
체험학습을 통한 나주인 정신 이어가기 |
시지정 |
2004.11.10 공개보고회 |
2005.5.1 ~2006.4.30 |
학교사회복지사활용을 통한 학교생활 적응력 향상 |
교육인적자원부 |
2005.11.25 공개보고회 |
5. 연도별 졸업생수
가. 남평초등학교
졸업년수 |
졸업횟수 |
졸 업 생 수 |
졸업년수 |
졸업횟수 |
졸 업 생 수 | ||||
남 |
여 |
계 |
남 |
여 |
계 | ||||
1913.3.25 |
1 회 |
10 |
2 |
12 |
1939. |
26회 |
44 |
7 |
51 |
1914.3.25 |
2 회 |
14 |
3 |
17 |
1940. |
27회 |
51 |
12 |
63 |
1915.3.25 |
3 회 |
6 |
․ |
6 |
1941. |
28회 |
45 |
20 |
65 |
1916.3.25 |
4 회 |
6 |
3 |
9 |
1942. |
29회 |
46 |
15 |
61 |
1917.3.25 |
5 회 |
15 |
․ |
15 |
1943. |
30회 |
105 |
17 |
122 |
1918.3.25 |
6 회 |
8 |
․ |
8 |
1944. |
31회 |
84 |
15 |
99 |
1919.3.25 |
7 회 |
19 |
․ |
19 |
1945. |
32회 |
107 |
25 |
132 |
1920.3.25 |
8 회 |
11 |
1 |
12 |
1946. |
33회 |
79 |
29 |
108 |
1921.3.25 |
9 회 |
16 |
․ |
16 |
1947.6.30 |
34회 |
85 |
35 |
120 |
1922.3.25 |
10회 |
21 |
․ |
21 |
1948.6.30 |
35회 |
101 |
32 |
133 |
1923.3.25 |
11회 |
29 |
․ |
29 |
1949. |
36회 |
114 |
40 |
154 |
1924.3.25 |
12회 |
37 |
․ |
37 |
1950. |
37회 |
140 |
48 |
188 |
1925.3.25 |
13회 |
29 |
5 |
34 |
1951.07.21 |
38회 |
73 |
32 |
105 |
1926.3.23 |
14회 |
38 |
5 |
43 |
1952.03.31 |
39회 |
58 |
37 |
95 |
1927.3.23 |
15회 |
39 |
3 |
42 |
1953.03,31 |
40회 |
63 |
21 |
84 |
1928.3.20 |
16회 |
27 |
6 |
33 |
1954.03.22 |
41회 |
57 |
42 |
99 |
1929.3.20 |
17회 |
33 |
3 |
36 |
1955.03.25 |
42회 |
72 |
25 |
97 |
1931.3.20 |
18회 |
31 |
․ |
31 |
1956.03.23 |
43회 |
84 |
24 |
108 |
1932.3.20 |
19회 |
34 |
․ |
34 |
1957.03.2. |
44회 |
94 |
37 |
131 |
1933.3.20 |
20회 |
34 |
3 |
37 |
1958.03.22 |
45회 |
72 |
40 |
112 |
1934.3.21 |
21회 |
34 |
․ |
34 |
1959.03.25 |
46회 |
90 |
63 |
153 |
1935.3.16 |
22회 |
36 |
3 |
39 |
1960.03.12 |
47회 |
130 |
99 |
229 |
1936.3.20 |
23회 |
29 |
7 |
36 |
1961.03.07 |
48회 |
120 |
83 |
203 |
1937.3.20 |
24회 |
46 |
3 |
49 |
1962.03.21 |
49회 |
120 |
66 |
186 |
1938.3.20 |
25회 |
42 |
6 |
48 |
1963.02.09 |
50회 |
131 |
118 |
249 |
졸업년수 |
졸업횟수 |
졸 업 생 수 |
졸업년수 |
졸업횟수 |
졸 업 생 수 | ||||
남 |
여 |
계 |
남 |
여 |
계 | ||||
1964.02.09 |
51회 |
100 |
79 |
179 |
1989.02.17 |
76회 |
97 |
83 |
180 |
1965.02.08 |
52회 |
120 |
70 |
190 |
1990.02.16 |
77회 |
34 |
54 |
88 |
1966.02.10 |
53회 |
104 |
102 |
206 |
1991.02.22 |
78회 |
59 |
54 |
113 |
1967.02.18 |
54회 |
126 |
115 |
241 |
1992.02.15 |
79회 |
46 |
67 |
113 |
1968.02.16 |
55회 |
185 |
153 |
338 |
1993.02.19 |
80회 |
53 |
62 |
115 |
1969.02.12 |
56회 |
137 |
138 |
275 |
1994.02.22 |
81회 |
33 |
42 |
75 |
1970.02.11 |
57회 |
157 |
114 |
271 |
1995.02.22 |
82회 |
26 |
42 |
68 |
1971.02.09 |
58회 |
144 |
167 |
311 |
1996.02.16 |
83회 |
30 |
37 |
67 |
1972.02.09 |
59회 |
158 |
153 |
311 |
1997.02.21 |
84회 |
18 |
24 |
42 |
1973.02.15 |
60회 |
173 |
115 |
288 |
1998.02.21 |
85회 |
20 |
29 |
49 |
1974.02.18 |
61회 |
182 |
174 |
356 |
1999.02.19 |
86회 |
15 |
20 |
35 |
1975.02.18 |
62회 |
164 |
154 |
318 |
2000.02.18 |
87회 |
16 |
15 |
31 |
1976.02.12 |
63회 |
155 |
148 |
303 |
2001.02.18 |
88회 |
25 |
20 |
45 |
1977.02.16 |
64회 |
155 |
144 |
299 |
2002.02.19 |
89회 |
16 |
14 |
30 |
1978.02.18 |
65회 |
148 |
171 |
319 |
2003.02.20 |
90회 |
10 |
19 |
29 |
1979.02.20 |
66회 |
178 |
144 |
299 |
2004.02.20 |
91회 |
23 |
12 |
35 |
1980.02.20 |
67회 |
118 |
116 |
234 |
2005.02.18 |
92회 |
18 |
27 |
45 |
1981.02.19 |
68회 |
140 |
150 |
290 |
2006.02.17 |
93회 |
21 |
25(1) |
47 |
1982.02.19 |
69회 |
134 |
146 |
280 |
|
94회 |
|
|
|
1983.02.17 |
70회 |
137 |
150 |
287 |
|
95회 |
|
|
|
1984.02.21 |
71회 |
144 |
130 |
274 |
|
96회 |
|
|
|
1985.02.16 |
72회 |
132 |
136 |
268 |
|
97회 |
|
|
|
1986.02.18 |
73회 |
109 |
134 |
243 |
|
98회 |
|
|
|
1987.02.18 |
74회 |
120 |
124 |
144 |
|
99회 |
|
|
|
1988.02.22 |
75회 |
92 |
96 |
188 |
|
계 |
|
|
12,031 |
나. 남평북․동초등학교
졸업 횟수 |
졸업년수 |
졸 업 생 수 |
졸업 횟수 |
졸업년수 |
졸 업 생 수 | ||
북초교 |
동초교 | ||||||
북초교 |
동초교 | ||||||
1 |
1949 |
18 |
35 |
34 |
1982 |
58 |
85 |
2 |
1950 |
20 |
15 |
35 |
1983 |
64 |
78 |
3 |
1951 |
35 |
22 |
36 |
1984 |
55 |
81 |
4 |
1952 |
25 |
25 |
37 |
1985 |
57 |
63 |
5 |
1953 |
37 |
12 |
38 |
1986 |
50 |
74 |
6 |
1954 |
27 |
9 |
39 |
1987 |
51 |
51 |
7 |
1955 |
30 |
12 |
40 |
1988 |
32 |
52 |
8 |
1956 |
35 |
19 |
41 |
1989 |
14 |
31 |
9 |
1957 |
39 |
27 |
42 |
1990 |
19 |
32 |
10 |
1958 |
48 |
21 |
43 |
1991 |
16 |
21 |
11 |
1959 |
61 |
26 |
44 |
1992 |
23 |
25 |
12 |
1960 |
54 |
36 |
45 |
1993 |
17 |
21 |
13 |
1961 |
35 |
35 |
46 |
1994 |
24 |
21 |
14 |
1962 |
61 |
41 |
47 |
1995 |
11 |
15 |
15 |
1963 |
44 |
42 |
48 |
1996 |
6 |
16 |
16 |
1964 |
57 |
45 |
49 |
1997 |
6 |
16 |
17 |
1965 |
51 |
36 |
50 |
1998 |
5 |
7 |
18 |
1966 |
60 |
53 |
47 |
1999 |
1 |
6 |
19 |
1967 |
90 |
51 |
48 |
2000 |
4 |
|
20 |
1968 |
93 |
72 |
49 |
2001 |
0 |
|
21 |
1969 |
63 |
71 |
50 |
2002 |
3 |
|
22 |
1970 |
93 |
91 |
51 |
2003 |
3 |
|
23 |
1971 |
86 |
105 |
52 |
2004 |
2 |
|
24 |
1972 |
101 |
83 |
53 |
2005 |
1 |
|
25 |
1973 |
76 |
113 |
54 |
|
|
|
26 |
1974 |
94 |
118 |
55 |
|
|
|
27 |
1975 |
102 |
95 |
56 |
|
|
|
28 |
1976 |
69 |
119 |
57 |
|
|
|
29 |
1977 |
94 |
77 |
58 |
|
|
|
30 |
1978 |
85 |
123 |
59 |
|
|
|
31 |
1979 |
70 |
119 |
60 |
|
|
|
32 |
1980 |
67 |
87 |
61 |
|
|
|
33 |
1981 |
71 |
84 |
합계 |
|
2,527 |
2,604 |
제2장 오늘날의 남평초등학교
1. 학구의 실태
가. 남평초등학교
1) 학구지역 총면적 (단위 : 천㎡)
계 |
전 |
답 |
학교용지 |
대 지 |
과수원 |
공업용지 |
임 야 |
기 타 |
54,512 |
6,030 |
9,330 |
32 |
1,460 |
30 |
110, |
31,510 |
6,010 |
2) 학구내 가구수 및 인구수
행 정 구 역 |
마을수 |
세대수 |
인 구 수 |
농가 세대 |
농 가 인 구 수 | |||||
법정리 |
행정리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
16 |
34 |
55 |
3,442 |
9,627 |
4,902 |
4,725 |
1,660 |
4,490 |
1,930 |
2,560 |
나. 광촌분교
광주에서 남서쪽으로 15 km떨어져 있으며 동쪽은 화순군 도곡면, 남쪽은 다도면, 서쪽은 산포면, 북쪽은 광주시 광산구 대촌동과 각각 인접하고 있다. 중봉산, 부광산이 솟아 있으며 지석천이 흐르고 있고 광활한 남평 평야를 이루고 있다. 학교 뒷산은 도동산이 있으며 국도 1번도로에서 1.5km 떨어진 지방도 번도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100m 떨어진 곳에는 기차역이 있고, 광촌리, 풍림리가 학구이고 소재지가 2km정도 거리에 있다.
2. 교육 목표
가. 바른 인성으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어린이
나. 자기 주도적 학습으로 창의성을 발휘하는 어린이
다. 폭넓은 학습 경험을 쌓아 진로를 개척하는 어린이
라. 소질과 취미를 살려 개성을 키워가는 어린이
마. 전통문화 계승으로 고장을 사랑하는 어린이
3. 교육 중점
◦기본생활 습관 형성 지도
◦공동체 체험학습 강화
◦기초․기본 학력 지도
◦독서교육의 활성화
◦특기․적성교육의 활성화
◦기초 체력의 증진
◦정보활용 능력의 신장
◦고장 문화유적 현장 체험 학습 기회 확대
4. 특색 교육 활동
가. 남평 명예 박사제 운영(한자, 영어)
나. 우리고장 문화유적 탐구
첫댓글 한 두 번 읽어서는 어림도 없겠습니다. 귀중한 자료를 올려주시는 수고에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시간 나는대로 와서 읽어보겠습니다^^*
거저 낳고 자란 고향이 아니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집니다,감사합니다,.
여기등록 하신분들은 고향사랑 , 애향심을 굳게 확인하는 사람의 일이라 생각 됩니다.
<표 6> 남평읍의 방위 중 '극남은 우산리 안심마을' 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 고개. 중 골모릿재는 우산리 차산(골모리)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 하시면 훨씬 이해하기 좋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