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4월 24일)
(2)
옥구공원과 오이도
나는 완벽한 준비후 시작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확신이 서면 일을 저지른 후 보완과 진행을 함께 한다.
가장이며 생활인인데 긴 여정의 공백에 대한 대책이 왜 필요치 않겠는가.
4월의 대부분을 여기에 바친 후 4월 24일 새벽같이 오이도로 갔다.
오이도역 ~ 옥구공원 길은 의도와 달리 많이 우회했지만 잘 된 결과다.
밤에 걸었을 망정 스틸랜드 앞까지 걸어간 길이므로 건너뛰려 했는데 밝은 낮에 다시
보게 되었으니까.
신선한 아침에 만개한 벗꽃길을 걷고 대규모 군자매립지(시흥 미래도시개발사업단)를
거쳐서 옥구공원으로 회귀했으니까.
매립지와 서해안로 사이에는 긴 직선 수로가 있다.
의도적이었는지 매립과정에서 기술적으로 불가피했는지는 문외한인 내가 알 리 없다.
수위실에 들러 물어보았으나 그들도 모를 뿐 아니라 무관심한 반응이다.
이 수로를 조금만 확장하고 월곶포구에서 서해안로를 따라 시화호까지 연장했더라면
주옥같은 관광운하가 되어 각광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이미 시기를 놓친 것 같아 애석하다.
우선, 옥구공원(玉鉤)의 옥구정에 올라섰다.
IMF난국 중에 공공근로자들의 땀과 정성으로 조성했음을 강조하는 공원.
급성장한 시화신도시 주민의 귀중한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공원.
오이도와 함께 섬이었던 옥구도는 매립으로 뭍이 되었고 해발95m 암봉을 중추로 하여
아주 짜임새 있게 가꿔진 공원 정상의 정자다.
낙조가 일품이라는데 이른 아침이며 흐린 날시 때문에 시계(視界) 또한 확보되지 못해
유감이지만 조망권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오이도항과 연육교 개설계획이 있다는 송도경제자유구역이 북서쪽으로 지호지간이다.
시계방향으로 남동산업공단과 논현지구까지 아스라하게 한눈에 들어왔으나 내 디카의
시력은 내 눈에 미치지 못하는 듯 자취가 없다.
다양한 시설을 갖춘 공원과 시화산업단지, 오이도 등은 흐리게 나마 기억하는데.
가장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활짝 핀 진달래와 벗꽃이다.
옥구정에서 15대째 토박이라는 60대 남을 만났다.
30년을 1대라 하면 조선 초기부터다.
20년으로 계산해도 조선 중기부터 오이도를 지켜온 터주 집안이다.
그러니까 오질이도(吾叱耳島) 때부터다.
그의 오이도 안내를 받았다.
서서북쪽의 보일락 말락 하는 똥섬 이야기도 들었다.
바위섬인데 밀물때는 섬이 마치 똥덩어리가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기때문에 붙여
진 이름이라고.
덕섬이라는 다른 이름은 아마도 똥섬이 듣기 거북해서 고쳐 부르는 것일 거라고.
그런데도 이즘 사람들은 둑변의 인다바 노천카페에 달린 돌섬을 똥섬으로 알고 있다며
어이없어 했다.
둑길 따라 배다리선착장을 지나고 일렬횡대 횟집들을 마치 사열하듯 통과했다.
오이도 선착장 앞 빨간등대의 3개층 내부 벽은 낙서가 여백없이 꽉 찼다.
그러나 낙서광의 나라 스페인과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격이 다르다.
추상적, 함축적인 그림과 글이 아니고 저급한 직설적 애정타령이 주를 이루고 있다.
품위 없는 저질 낙서에 실망이다.
둑길은 산을 절개한 도로에 흡수된다.
절개하지 않고 산자락을 타고 가도 되련만 왜 무참하게 절개했을까.
더구나 섬 전체에 걸쳐 패총(貝塚)이 분포되어 있는 생태지구, 선사유적지(사적441호)
로 지정된 지역이라면서.
신석기시대부터 자연부락이 형성되었다는 섬 오이도.
지형이 가마귀 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오이도(烏耳島/訛傳이라지만 ).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22년에 일본이 고품질의 조선 소금을 착취하기 위해 이 섬의
갯벌을 매립하여 염전(군자염잔)을 설치함으로서 섬 아닌 섬이 된 오이도.
북서쪽 인천 남동공단,동쪽 인산의 반월공단과 함께 거대한 임해공단을 형성하고 있는
시화공단을 위해 다시 매립되었으며 지금은 시흥시 정왕동으로 바뀐 군자면 오이도다.
시화호의 구세주 조력발전소
오이도의 끝자락 갯벌체험광장과 시화지구개발사업기념공원(전망대)앞 사거리에서는
시화방조제 길과 반월공단 길 중에서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
전자를 택했다.
지방도로 301번이며 대부황금로다.
시흥과 안산, 화성 등 3시의 광활한 간석지를 개발하는 국책프로젝트에는 총길이 12.4
km로 국내 제일(새만금 방조제 이전이니까)의 긴 방조제가 필요했다.
그러나, 죽음의 호수, 환경 오염의 대명사 등으로 표현되며 말도 탈도 많았던 시화호.
다행히도 이즘에는 생명의 호수로 거듭나고 있다는 시화호변을 걸으려고.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왜 외면했을까.
호수의 오염 걱정을 하지 않는 호수의 나라 스위스에서 왜 벤치 마킹을 하지 않았을까.
일석이조의 조력발전소 건설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책상머리의 안이한 사고 때문이며 농업용 담수호에 집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담수호를 포기, 인공 해수호로 전환하고 조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수질이 개선됨으로서
생태계 환경이 가속적으로 복원중이란다.
당연히 기분 좋은 걸음이다.
호수와 바다, 방조제 양편의 조사들은 고기를 낚는가 세월을 낚고 있나.
아무리 보아도 고기를 건져올리는 이는 없고 고기한테 당하기만 하는 것 같으니....
자리를 옮기던 한 조사는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되었는지 자기 차에 있는 경기
지역 지도를 주고 갔다.
내 배낭 안에도 있지만 그의 호의가 고마워서 받았다.
중간 지점에 시화호조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25만 4천kw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조력발전소란다.
하루에 1억 6천만 톤의 해수가 유출입되는데 평소 유통량의 6배나 된단다.
이 조력발전소야 말로 청정 에너지 생산은 물론 해수 유통량을 증대함으로서 시화호의
수질을 개선해 주는 시화호의 구세주에 다름 아니다.
명실 공히 일석이조다.
휴게소 건물이 시장기를 자극했나.
달리듯이 가보았으나 개소를 위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장차 바닷길의 명소가 될 것이 분명하며, 그러면 6km 전방의 대부도 상인들은 떫떠름
하겠다고 생각되었는데 그보다 훨씬 높은 강도의 반응인 듯.
휴게소 인기가 수직 상승함으로서 기대했던 발전소 효과는 커녕 뚜렷한 고객 감소현상
때문에)
수자원공사가 업체에 위탁 운영하게 된다는 휴게소의 부대시설과 공원이 타의 모범이
될 만큼 잘 들어섰으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은가.
5월 12일(개업일)까지 기다릴 수도, 다시 올 수도 없는 휴게소의 휴게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만 취하며 발전소 건물을 바라보는데 문득 조력발전소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광복후 38선 이남은 전력 부족현상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전력이 풍부한 이북에서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력 확보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중이었으나 제한 송전이 불가피한 때였다.
간만의 차가 아주 큰 인천 앞바다(現 위치였을까)에 조력발전소를 건설해 전력을 무상
공급하겠다고 제의해 온 미국의 한 대기업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시에, 전력난으로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경계하는 여론도 형성되고 있었다.
중국 아편전쟁의 다른 모델일 수 있다고.
전력의 편리성에 중독되었을 때 마각을 드러낼 것이라고.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의 기분이 이랬을까
소문은 유야무야로 끝났지만 반세기에 15년을 더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때 생소했던
조력발전의 현장에 앉아서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다니 역사의 필연인가.
긴 방조제에는 가끔 커피류를 파는 이동 매점이 있을 뿐이다.
맹물로 공복을 달래며 지루한 직선 방조제의 끝 시화교(갑문)를 건넘으로서 명실 공히
대부도 땅에 들어섰다.
큰 언덕처럼 보이는 섬이라 해서 대부도(大阜島).
시화방조제가 축조됨으로서 뭍으로 거듭난 이 섬 아닌 섬은 1994년 12월 옹진군(인천
시)에서 안산시 단원구(경기도)로 이속(移屬)되었다.
좀 비켜있는 방아머리 선착장과 여객선터미널을 지나고 대부도 공원도 지나 방아머리
해수욕장으로 진출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로 일정을 바꿔야만 했다.
디카의 배터리가 죽었는데 여분도 충전기도 없으니.
어찌된 일인지 각종 배터리와 충전기들이 늘 있어 왔던 배낭주머나에 아무 것도 없다.
좀처럼 없는 일이며 귀가해서 챙겨오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다.
한심한 늙은이라는 자탄.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의 기분이 이랬을까.
음식거리가 시작되었지만 즐기지 않는 회집 일색인데다 시장기도 입맛도 사라졌다.
어두워질 때까지 걸은 후 귀가할 요량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카메라 셔터 누를 일이 없으므로 속도감이 났다.
대부황금로를 따라(301번도로) NCC골프장, 대선방조제(大阜島~仙甘島), 불도방조제
(佛島), 화성시 서신면 전곡항을 잇는 탄도방조제(炭島) 앞에 도착했다.
시화호에는 대부도 외에도 선감도, 불도, 탄도 등 작은 섬이 연접해 있음을 의미한다.
대부도는 시화방조제 축조 이전에 이미 연육도(連陸島)였다.
화성시 서신면에서 이미 축조된 탄도방조제와 불도방조제, 대선방조제를 거쳐 육로로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탄도방조제 앞에서 SUV승용차에 편승(hiitch hiking)했가.
운전자는 고맙게도 자기의 목적지 제부도 길을 미루고 초행인 나를 위해 서신면 버스
정류소 입구까지 다녀갔다.
그러나, 수원을 경유해 귀가하는 내꼴은 아마 패잔병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