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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차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유수교 - 진주분기점 : 약9.5km)
2018년 6월 17일(일요일)
아름다운 동행(6인) : 조규철, 이성태, 이지원, 조시현, 정찬호, 황부호
예전엔 야트막한 구릉이었을 것이다.
구릉의 북쪽 골골의 물길은 삼계천(유수천)을 이루면서 남강에 합류하였을 것이고, 그 남쪽으로는 가화천의 물길이 사천만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 구릉은 북과 남으로 물길을 가르는 낙남정맥의 당당한 분수령이었을 것이다.
1969년, 남강 다목적댐이 준공되고 홍수로 범람하던 남강의 물길을 인공적으로 우회시키면서 그 구릉은 잘려 나가고 말았다.
남강댐 우회 방수로 수문을 삼계천 방향으로 건설하고 낙남정맥이 지나는 그 구릉을 절개하여 사천만으로 향하는 인공방수로를 개설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강으로 흐르던 삼계천은 가화천의 물길에 합류하여 사천만으로 흐르게 되면서 그 이름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 당연한 결과로 스스로 물길을 가른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명제가 인공에 의해 여지없이 박살난 인공합수천(人工合水川)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대신 남강댐 건설 이후에 가화천이 남강댐의 방수로 역할을 하면서 홍수위를 조절한 덕분에 진주를 관통하는 남강의 하류인 의령군과 함안군에서의 홍수 위험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사천만은 과다한 민물 방류로 인하여 어민들의 피해가 속출되었다.
우리는 유수교를 넘지 않았다.
지난 6회차에서는 유수교 입구의 1049번 지방도에서 갈무리하였고 오늘 7회차는 유수교 건너편 버드나무캠핑장 옆에서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낙남정맥 여정에서 유수교는 빠진 것이다.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수교가 낙남정맥의 노정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1049번 지방도를 연결하는 교량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다만 반세기 전의 온전했을 낙남정맥의 위치와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뷰포인트로서의 기능은 유효하다 할 것이다.
다리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우측으로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정동마을 쑥골 상단의 볼록한 90m봉과 좌측으로 유수리 유동마을 남측의 171m봉으로 향하는 능선이 조망된다.
좌우의 그 산자락을 그대로 이어보면 끊어지기 전의 낙남정맥 산경(山經)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고, 가화천 양안(兩岸)에 견고하게 구축된 콘크리트 옹벽은 그 잘려진 흉터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낙남정맥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가화천 하상(河床) 암반의 공룡화석산지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낙남정맥 능선을 끊어 삼계천과 가화천이 합쳐지고 가화천의 하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백악기 공룡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공룡 이빨, 경린어류의 비늘, 거북의 배갑이 산출되어 1997년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버드나무캠핑장 우측 팬스 담장길을 따라 걷는 것으로 제7회차 산행을 시작하였다.
길은 곧바로 능선으로 오르는 산자락으로 연결된다.
잡목이 우거진 된비알의 오름길은 홍수예보 경보시설물을 지나 171m봉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와 사천시 축동면 반용리의 경계가 된다.
과거에는 이 봉을 중심으로 북사면의 물길은 북쪽의 삼계천을 경유하여 남강으로, 남사면의 물길은 관동마을을 거치고 가화천을 경유하여 사천만으로 각각 흘렀다.
지금은 이 물길 모두 가화천으로 합류하여 사천만으로 흘러든다.
이 봉의 남사면 골짜기인 축동면 반용리 관동마을은 원래의 이름이 갓골이었다 한다.
갓골은 산 밑의 가장자리 끝에 있는 골짝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이를 한자로 훈차하면서 가장자리의 ‘가’가 사람이 쓰는 ‘갓’으로 변형되어 관동(冠洞)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71m봉에서 밤나무 과수원의 전기철망을 따르는 내림길은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내림길이 끝나고 안부를 거치면서 매실나무 과수원의 중간을 관통하는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서정성이 흠씬 묻어나는 길이다.
그리고 구릉같은 야트막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105m봉과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를 거치고 내려서면 비리재이다.
비리재는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와 사천시 축동면 반용리를 잇는 1049번 지방도가 관통하는 고개이다.
비리재에서 능선에 오르기까지는 짧지만 된비알이다.
125m봉에서의 능선길은 128m봉을 거친 후 우측의 감나무 과수원의 가장자리 상단을 따라 이어진다.
완만하지만 풀숲이 우거진 길로써 길섶에는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개망초는 망초와 더불어 주변 산야에 흔하게 널려있는 풀이지만 토종식물이 아니다.
북아메리카 원산인 귀화식물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망초가 먼저였고 개망초는 그 후에 들어왔다.
망초는 우리나라에 처음 철도가 건설될 때 미국에서 수입해온 철도침목에 함께 묻어 왔다고 한다.
당시 개설된 철로 주변에 망초꽃이 무리지어 피었는데, 일본에 의해 철로가 개설되었고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였다하여 그 풀이름을 망초(亡草)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그 후 망초꽃보다 더 예쁜 꽃이 나타났는데 망초보다 더 나쁜 꽃이라 하여 개망초라 불렀다고 한다.
우리는 개망초꽃들이 만개한 풀숲을 헤치다 길을 놓치고 말았다.
길도 없는 비탈을 한참을 해매다 당도한 곳은 유동저수지 앞 아스콘도로였다.
다행히 이곳에서 정맥 능선까지는 멀지 않은 고갯길이었다.
이 고개는 내동면 유수리 버드골마을에서 축동면 탑리의 상탑마을을 잇는 길인데, 낙남정맥은 고갯마루를 가로질러 이어진다.
버드골은 고개 서측 하단에 있는 마을로서 지형이 베 짜는 바디처럼 생겼다하여 이곳 말인 ‘버디’가 변형되어 버드골이 되었고, 이를 한자로 바꾸면서 버디(筬)가 아닌 버드나무를 훈차(訓借)한 유동(柳洞)으로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골 안에 버드나무가 많다하여 마을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우리는 고갯마루에서 북쪽으로 난 오름길 임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은 내동면 독산리 산강마을로 이어지는 또 다른 고갯길로 둔티(屯峙)고개이다.
진주에서 곤양의 조창(가산창)을 잇는 예전의 고갯길로 당시에는 도적들이 출몰할 정도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고갯마루의 서측 봉우리인 둔티산에는 근래 조성한 해맞이공원이 있다.
정맥길은 고갯마루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자스락 오름길로 꺾어든다.
그리고 고갯마루 우측 능선에 올라섰다가 다시 우측으로 꺾어 179m봉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사천시 축동면 탑리와 진주시 내동면 독산리,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의 경계점을 이룬다.
이곳의 남사면, 동사면에서 흐르는 물길은 대축천에 합쳐지면서 남해바다로 유입되고, 북사면에서 흐르는 물길은 독산천을 이루어 남강에 합류하여 낙동강 수계를 이룬다.
남강댐 우회방수로가 건설되면서 헝클어졌던 낙남정맥 수계가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정상적인 물길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지난 구간의 태봉산에서부터 오늘 구간 둔티재까지의 능선에서 갈라지는 물길은 모두 가화천에 합류되어 산자분수령의 예외가 되었다.
우리는 이 구간에서 ‘산은 스스로 물길을 가른다’는 명제가 ‘산은 물을 건널 수 없다’는 또 다른 논리로 바뀌게 된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179m봉에서의 능선길은 실봉산의 턱 아래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실봉산을 오르면서 된비알을 이룬다.
186m, 실봉산(實峰山)이다.
옛날 홍수로 천지가 개벽할 때 낮은 산은 전부 물에 잠기고 이 산의 봉우리만 떡시루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하여 시루봉이라 하기도 한다.
이를 음차(音借)하여 붙여진 이름이 실봉산이다.
봉우리에서 약간 벗어난 능선에는 온통 칡덩굴이다.
칡덩굴로 얽힌 임도는 해돋이쉼터로 이어진다.
해돋이쉼터에서의 조망은 가히 환상적이다.
서북쪽의 지리산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북쪽의 집현산, 동북쪽의 자굴산, 동쪽의 장군대산 그리고 남동쪽의 와룡산까지 조망이 시원하다.
오늘의 날머리인 고속도로 진주분기점도 손에 잡힐 듯 다가서 있다.
175m봉으로 내려섰다가 148m봉 분기점에서 북쪽으로 갈라지는 능선은 진주의 망진산으로 향하고, 낙남정맥 능선은 고개를 동쪽으로 꺾어 구릉같은 소나무 숲길로 접어든다.
이곳에서부터 북사면의 물길은 가좌천을 거쳐 남강에 합류하고, 남사면의 물길은 대축천을 거쳐 남해바다로 유입된다.
100m 전후의 구릉같이 야트막한 능선이지만 낙남정맥의 분수령 역할을 당당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인 진주분기점이 있는 화원마을에 도착하였다.
사방이 어수선하고 부산하다.
고속도로와 지방도가 얽히고설켜 교차하고 있는 진주분기점이다.
에필로그(epilogue) -진주 망진산과 비봉산
실봉산에서 동북으로 175m봉을 거친 낙남정맥은 148m의 분기봉에서 동쪽으로 머리를 틀어 화동마을을 향하는데, 한편 분기봉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능선을 따르면 망진산(178m)에 이르게 된다.
망진산은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진주성, 비봉산과 마주하고 있다.
풍수상 비봉산을 진주의 주산(主山)으로 본다면 망진산은 그와 대(對)를 이루는 안산(案山)이 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주의 비봉산과 망진산에 관련하여 “시내와 산의 경치가 영남 제일이요, 큰 산과 큰 강이 있어 인물이 많고 물산이 영남 여러 주의 절반이다. 비봉산은 북쪽에서 멈춰 있고 망진산은 남쪽에서 공손히 절한다. 이 두 산 사이에 긴 강이 흐르는데 동서의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러섰다”고 설명하였다.
비봉산은 풍수적으로 봉황이 활짝 날개를 편 비봉(飛鳳)형국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예로부터 봉황을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갖가지의 비보 풍수적 명칭과 방책들이 진주에 전해지고 있다.
‘진양지’의 ‘관기총론(官基總論)’에는 “… 마을 이름으로는 죽동(竹洞)이 있고 벌로수(伐老藪)와 옥현(玉峴)이라는 곳에 대를 심었으니 죽실(竹實)은 봉이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의 이름을 망진(網鎭)이라고 한 것은 봉이 그물을 보면 날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요 대롱(大籠), 소롱(小籠)이라는 절이 있는 것은 봉이 새장(籠)에 갇혀 머문다는 것이며, …”라고 그에 대한 비보 풍수책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비봉산의 산줄기 계통에 대하여 ‘진양지’에는 “덕유산의 한 맥이 동으로 달려 의령의 자굴산이 되고 자굴산이 서쪽으로 구부려져 집현산이 되었고, 비봉산은 집현산이 남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이 산경(山徑)은 최근 들어 정ᐧ기맥 산꾼들 사이에 진양기맥라는 이름으로 통하면서 기맥 산행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 황매산, 한우산, 자굴산, 집현산을 거쳐 비봉산에 이르기까지 160여km의 대장정이다.(엄밀히 말해서 기맥산행으로서의 진양기맥은 비봉산이 날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현산에서 광제산을 거쳐 진양호에서 그 끝을 맺는 것을 말한다.)
한편 백두대간의 지리산 영신봉에서 분기한 낙남정맥은 삼신봉, 옥산, 실봉산을 거치고, 진주 외각에 이르러 곧바로 도심을 향하는 분기맥의 가지를 치는데, 그 끝자락에서 멈춘 곳이 망진산이다.
망진산은 진주를 휘감아 흐르는 남강의 물길에 막혀 진주의 원도심에 이르지 못하고 강 건너편 비봉산과 그 아래의 진주 읍치를 마주보는 자리에 멈추어 섰다.
돌이켜보면 비봉산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망진산은 백두대간의 영신봉에서 각각 분기하여 물길을 가르고 골을 이루면서 진주 남강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여정을 갈무리하였다.
비록 갈라진 산경은 다시 이어질 수는 없지만 이들이 갈라놓은 물길은 하나로 합쳐 남강을 이루면서 오늘도 진주를 휘감아 흐른다.
山主分而脈本同(산주분이맥본동)
산은 본디 하나의 뿌리로부터 수 없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고,
水主合而源各異(수주합이원각이)
물은 본디 다른 근원으로부터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망진산 명칭에 대한 보충)
진주를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망진산(望晋山)의 명칭에 대하여 몇 가지 이명이 존재한다.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이 봉이 날아가려는 형국이어서 봉을 날아가지 못하게 그물로 망을 친다는 비보 명칭으로 망진산(網鎭山)으로 불렀다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편으로 고려 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오게 되자 나라를 걱정하며 늘 이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망경산(望京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네의 이름이 망경동(望京洞)인 것은 그에 연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첫댓글 문화역사해설이 있는 인문학 둘레길 이네요^^ 체력을 길러 민폐되지 않을 정도 되면 참여하고 싶습니다.
걸어보면 좋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