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왜 다른 곳엔 실리콘밸리가 복제 안될까?
입력 : 2013.02.16 03:06
한국에 '실리콘밸리 경제' 이식하려면
"혁신은 위험을 짊어지는 것… 리스크 분담시킬 생태계 만드는 게 가장 중요"
① 네트워크를 만들어라
스타트업 성장하려면 다양한 요소 필요… 네트워크 있으면 단계별로 충족 가능
② 물리적 클러스터는 잊어라
창업 육성 지역 설정은 낡은 생각… 네트워크만 연결되면 어디나 같다
③ 불확실성에 투자하라
농부가 씨앗 하나하나 골라 심지 않듯 여러 기업 빠르게 살펴보고 분산 투자
④ 낯선 사람들을 포용하라
실리콘밸리 인구 절반이 아시아계… 이민자 많은 곳, 아이디어도 많아
⑤ 효율 중심 제조업 문화 버려라
지나친 효율성이 혁신을 죽인다… 적절한 혼돈이 있어야 혁신 생겨
세계 최고의 '혁신 심장부'인 실리콘밸리는 매년 미국 벤처 자금의 40%(금액 기준)를 빨아들이고, 근로자 1명당 12.57건의 특허를 출원(2011년)할 만큼 창의성이 넘친다. 이 순간에도 혁신 아이디어를 가진 숱한 스타트업(startup·갓 창업한 벤처기업)들이 생겨나고 있다.
Weekly BIZ가 지난달 찾아간 실리콘밸리는 외국 기업과 정부기관의 진출 열기로 뜨거웠다. 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 6개국은 자국 기업 소개와 현지 정보 신속 수집을 위해 '실리콘 바이킹(Silicon Vikings)'이란 단체를 만들어 운영 중이며, 중국 한하이(瀚海)투자는 지난해 새너제이에 7500㎡(약 2300평) 규모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사무실을 개소했다. 삼성전자는 팔로알토·마운틴뷰 등 실리콘밸리 4곳에 사무실을 열고 기존 대비 10배의 연구개발 인력을 운용키로 했다.
이들이 몰려오는 이유는 하나, '실리콘밸리 혁신 시스템'의 열매를 따먹기 위함이다. 이는 달리 얘기하면 실리콘밸리의 혁신 시스템을 자국으로 이식(移植)하려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방갈로소프트웨어파크(인도), 사이언스파크(싱가포르), 시스타(스웨덴), 중관춘(중국), 가산디지털단지(한국) 등 '제2의 실리콘밸리 만들기' 시도가 많았지만 IT기업 집합단지에 머물렀을 뿐 아이디어와 사람, 돈이 선순환하는 공간 창조에는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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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 정인성 기자
"실리콘밸리는 '열대우림'과 같은 큰 생태계입니다. 실리콘밸리처럼 되려면 인재·자금·기술·정보·인프라 같은 물리적 자산은 물론 다양성·초(超)이성적 동기 부여와 호의를 바탕으로 한 신뢰 같은 문화적 소프트웨어가 깔려 있어야 해요. 그리고 아마존 열대 우림처럼 이 요소들을 연결하는 '관계(network)'가 핵심입니다."(빅터 황·벤처캐피털 'T2VC' 대표)
"창업에 성공한 이들이 다른 이들의 창업을 도와줍니다. 초기 자금을 대주고, 경험을 나누고, 전문가도 소개해줍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아이디어를 주고 받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성공하면 또 다른 사람을 똑같이 도와줍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런 네트워크가 매일 반복되며 스타트업을 키우는 법이 축적됩니다."(크리스틴 채·'500스타트업' 파트너).
세계 최대 '스타트업 요람'인 실리콘밸리와 같은 기업 생태계를 한국은 가질 수 없을까? 현장 취재를 통해 '열대 우림' 같은 공존과 네트워킹 현장인 실리콘밸리 혁신 시스템의 복제법(複製法)을 추적했다.
지난달 11일 낮 마운틴뷰시(市) 카스트로가(街)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겸 엔젤펀드인 '500스타트업(500 startups)'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약 300㎡(100평 정도) 크기의 탁 트인 공간에 섬처럼 듬성듬성 책상이 모아져 있었다. 각 책상 모둠에는 1~4개의 스타트업들이 모여 있고, 창업 경험을 가진 멘토들이 각 스타트업을 맡아 조언하는 모습이 보였다. 열린 사무실이다 보니 바로 옆 스타트업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상태인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2010년 창업한 이 회사를 거쳐 간 스타트업은 300여개로 1년에 100개꼴이다. 트윌리오(Twilio)·와일드파이어 인터랙티브·태스크래빗·센드그리드(SendGrid) 등 실리콘밸리의 유망 인터넷 서비스 기업들이다. 구글·유튜브 출신인 크리스틴 채(Tsai) '500스타트업' 파트너는 "우리는 아이디어 수준인 초기 단계 스타트업을 발굴해 첫 서비스나 제품을 내놓기까지 공간을 제공하며 키운다"며 "소액 투자·멘토링·네트워크 등으로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했다. '500스타트업'이 작은 실리콘밸리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실리콘밸리 고유의 혁신 생태계(eco-system)을 한국으로 이식할 수 있는 방법을 현지 취재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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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트워크 창출이 핵심이다
현지 최대 벤처캐피탈 중 하나인 'T2VC'의 빅터 황(Hwang) 최고경영자(MD)는 "하나의 혁신적 서비스나 제품을 성공적으로 출시하기까지에는 온갖 낭비와 위험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위험을 분산하고 분담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 연구·투자·성장·운영 같은 각 요소끼리의 네트워킹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리콘밸리는 대학(스탠퍼드대·산타클라라대)과 벤처캐피탈(VC), 스타트업, 대기업, 특허 전문가 등이 어우러져 창업부터 투자 횟수까지 자연스러운 네트워킹이 완벽하게 가능한 공간이다. "승용차로 30분 이내에 회사 경영진을 만날 수 없는 스타트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게 벤처캐피털 업계의 불문율일 정도다.
크리스틴 채 파트너는 "스타트업은 성장 단계에 따라 다양한 요소가 필요하며 이를 맞추는데 최대 관건이 네트워킹이다"고 했다. 500스타트업 사무실 책상에 각 회사를 구분하는 '간이 칸막이'가 단 한 개조차 없는 것도 네트워크 활성화를 위해서다.
2 물리적 클러스터(cluster)는 잊어라
세계 각국의 실리콘밸리 흉내 내기에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게 '혁신 클러스터'다. 실리콘밸리가 샌프란시스코~새너제이 77㎞ 구간에 형성돼 있는 것을 흉내 내 물리적인 단일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구글·애플 등 글로벌 대기업에 인수되지 않은 독립 모바일 광고 서비스기업 1위인 인모비(InMobi)의 창업자 겸 CEO인 나빈 티와리는 이에 반대한다. 그는 "적어도 소프트웨어 창업에서 장소는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통해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응용프로그램(앱)을 팔 수 있는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창업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티와리 CEO는 실제로 실리콘밸리가 아닌 인도의 뱅갈로에서 인모비를 창업했다. 그가 뱅갈로에서 창업을 한 이유는 이미 실리콘밸리 네트워크를 충분히 다져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유능한 기술자를 구하기 쉽고 투자자와 만나 네트워크를 쌓기 좋기 때문"이라며 "네트워크가 있는 사람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유능한 엔지니어를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창업하면 된다"고 했다.
3 불확실성에 투자하라
'500스타트업'의 데이브 맥클루어(McClure) 대표의 투자 방식은 '흩뿌리고 기도하기(spray and pray)'이다. 농부가 큰 밭을 일굴 때 씨앗 한 톨씩 골라서 심지 않는 것처럼 밭 전체에 씨를 흩뿌려놓고 싹이 나는지를 지켜본다는 것이다. 투자 방식도 매 회사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거액보다는 상대적으로 소액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
실제로 '500스타트업'은 보통 한 회사당 5만~10만달러 규모로 1회에 30개 정도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실패 사례도 많지만 빨리 결정하는 만큼 초기 투자로 '대박'이 터지는 경우도 꽤 된다. 시장 조사·타당성 검토 등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제조업 문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투자는 금물이며 멘토·파트너 등을 통해 추천받아 좋은 기업들을 골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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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시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500스타트업’ 본사 사무실에서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선발된 스타트업들이 각자 업무를 하고 있다. ‘ 500스타트업’에 입주한 기업들은 개방된 사무실에서 일하며 창업 성공 경력이 있는 멘토와 이웃 기업들로부터 생생한 노하우를 전수받는다. / 마운틴뷰=이인묵 기자
4 낯선 사람들을 포용하라
미국에서 '제2의 실리콘밸리'로 뜨는 뉴욕 맨해튼 일대의 실리콘앨리(Silicon alley)에 투자된 금액은 2009년 17억3700만달러에서 지난해 23억4300만달러로 35% 늘어 같은 기간 미국 전역의 벤처 투자액 증가율(30%)을 웃돌았다('미국벤처캐피털협회').
실리콘앨리의 성장은 세계 최고 수준 대학과 거기에서 배출되는 인재, 막대한 자금, 각국에서 유입되는 인재가 어우러진 결과로 실리콘밸리 생태계와 상당히 닮았다. 실리콘밸리의 전체 컴퓨터 관련 업계 종사자의 절반 이상이 아시안인 것처럼 뉴욕도 외국 출생 거주자(306만명·2011년 기준)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시다. 스탠퍼드대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뉴욕·텔아비브·런던 등 혁신적 창업이 활발한 도시는 외부 인구 유입자들이 많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혁신이 활성화되려면 전혀 다른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하는데, 이민자가 많은 곳에서 이런 교류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5 효율 중심 제조업 문화 버려라
빅터 황 MD는 강한 제조업체가 혁신 경제에서 뒤처지는 이유에 대해 "지나치게 효율을 추구하는 조직 문화가 문제이다"고 했다.
"혁신을 일으키려면 적절한 '혼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조업은 항상 모든 종류의 낭비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최대로 효율적인 환경에서는 혁신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지나친 효율성이 혁신을 죽인 예는 많다. 3M은 2001년 GE출신 제임스 맥너니(McNerney) CEO가 취임해 '6시그마' 등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썼다가 혁신 동력이 약화했다. 3M은 맥너니의 퇴임 후 다시 연구원들의 자율권을 보장하자 혁신이 살아났다. '건전한 혼돈'이 혁신의 필수 요소임이 입증된 것이다.
☞ 열대우림 네트워크(rainforest network)
기업·벤처캐피탈·연구소·엔지니어 등 다양한 주체들이 경쟁과 협력을 통해 혁신을 생산하는 실리콘밸리 시스템을 수많은 동·식물간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열대우림 생태계에 비유한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