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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나게 된다?
아침 일찍 찜질방을 나왔으나 곧 멈춰야 했다.
길에 나서자 마자 내리는 비 때문에.
24시 편의점에서 작은 우유를 사마시고 그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그쳐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중무장을 했다.
판초를 입고, 우산을 펴들고.
첨단동(尖端) 이름대로 첨단을 걷는 신도시의 드넓은 길인데 이정표만은 낙후되어 첨단
대교로 나가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도시인데도 문을 연 가게가 없고 바쁘게 걷는 사람은 모두 나그네들인가 길을 모른다.
어렵사리 찾아서 둔치의 자전거길로 내려섰다.
자전거전용도로가 끝나는 지점으로 비탈을 올라섰을 때 자전거를 타고 오던 한 중년남
이 자전거에서 내리며 인사를 해왔다.
놀랍게도, 어제 석양(19:00경)에 2번째로 찜질방 위치를 자상하게 설명해준 분이다.
광주광역시 보건환경연구원 동물위생연구부 수의사 나호명.
출근중인 그와 방향이 전혀 다른 영산강길 나그네가 13시간차를 두고 석양과 아침에 딴
장소에서 거푸 만나게 되다니.
이런 인연도 있구나.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나게 된다는 불교도 수선혜님의 인연론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
우리 카페에서 다시 만나게 된 목동님(메뉴 '인사드립니다'의 111번글 참조)이다.
그는 행인의 도움을 받아 자기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바로 카페에 올렸다.
청년과 중년에 의해 기분은 수직상승하는데 날씨는 고약을 떨었다.
하중도는 예상대로 첨단대교 아래의 제5하중도 까지 연이어 5개나 형성되어 있다.
첨단지구는 영산강 양안, 광산구와 북구를 아우르는 말인 듯 북구에도 고공 크레인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광주인들의 둔치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물이 차면 바로 비워줘야 하는 셋방에 불과한 공지다.
그런데도 안전한 내 마당인 양 길도 시설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자전거길도 전용 병용이 잦아서 헷갈리는데다 '자전거전용'과 "...기상특보 발령시에는
안전사고가 위험하오니 하천이용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푯말이 함께 서있다.
이용하라는 것인가 하지 말라는 경고인가.
산월교를 지나 얼마 가지 않아서 어제 아침보더 더 센 소나기를 만났다.
의지할 데 없는 허허벌판 둔치에서 도로변 경정비공장 처마밑으로 피했다.
한참 퍼붓다가 잠잠해지는 듯 하여 길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더욱 세찼다.
쏟아붓을 물이 바닥나가는지 웬만해져서 본격적인 채비를 했다.
대기한 1시간여의 몫까지 치뤄야 하니까.
호남고속도로 영산강교와 북문대로 산동교를 지났다.
영산강엔들 낡은 다리가 없겠는가.
구 산동교다.
1번국도로 하여금 영산강을 건너가게 하는 다리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은 다리의 모습을 보면 가소롭기 짝이 없다.
당시의 우리나라 교량기술력의 한계라 해두자.
그러나 이 다리는 여느 다리와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2011년 11월)되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입증이 된다.
6.25 민족동란 중 대한민국 군은 북한군 전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1950년 7월 23일
새벽에 이 다리를 폭파했단다.
6월 28일 새벽에 서울의 한강대교를 폭파한 것 처럼.
그리고,무기의 절대부족으로 전의를 상실한 국군의 무방비지역인 호남을 무혈점령해온
북한군과 최초의 교전을 벌였다는 다리다.
그래서 늦게나마 현충시설이 되었으며 교량의 임무와 관계 없이 보존돼야 하는 다리다.
이즈음은 친수(親水) 공원의 일부가 되어 광주시민의 건강과 문화의 공간으로 사랑받게
되었다니 다행한 일이다.
동란의 격전현장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6·25체험행사, 현충시설 탐방 등의 장소로, 또한
안보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면 더욱 다행이다.
다만, 안보라는 이유로 북한을 불구대천의 적으로 규정하는 세뇌교육은 제발 그만하고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당위의 교육장이기를 바라며 떠났다.
장기집권의 덫에 걸려 명예롭지 못한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승만의 애국 애족심은
박정희와는 차원이 달랐다.
쫓겨간 임시수도 부산마저 풍전등화의 형국임에도 했다는 말을 들어보면.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맥아더사령부가 일본인을 한국전에 투입할 것을 검토중
이라는 말을 듣고 대노한 이승만은 대포 머리를 즉시 현해탄 쪽으로 돌리라고 했단다.
이북은 언젠가는 함께 살아가야 할 내 동포지만 일본은 영원한 적이라고 하면서.
내 바람도 이승만과 같다.
풍영정사(史) 바로잡아야 한다
들어서자마자 짧은 시간일지라도 연 이틀 판초를 뒤집어 쓰게 한 영산강의 환영 인사가
오염된 강물만큼이나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연 삼일간의 가공할 소나기에서 나를 지켜줌으로서 신뢰가 축적된
판초가 있으므로 걱정되지는 않지만.
둔치의 신설 자전거길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한 단 위의 시가지 형편은 먹통이다.
답답한 듯 하여 광신고무보(洑) 앞에서 도로변의 정자로 올라섰다.
한 개인택시 기사로부터 꽤 멀리 있는 식당을 소개받고 가는 도중에 대문짝같은 간판의
식당이 눈에 둘어왔다.
가까이에 있는 식당을 두고 기사는 왜 그랬을까.(악연 관계?)
우산을 받아야만 될 만큼만 내리던 비가 이 마을(신창동)에서 이른점심('풍년들었네'의
추어탕)을 먹는 사이에 그쳤다.
영산강 위에 철교와 광신대교가 있고 그 위 언덕바지에 정자가 있다.
이조 명종15년(1560)에 칠계 김언거(漆溪金彦琚/1503∼1584)가 관직(승문원판교)에서
물러나 귀향, 지은 정자로 지방문화재자료 제4호라는 풍영정(風詠亭)이다.
경북 영천(화산면 가상리)에도 한자까지 같은 이름의 거목 정자(느티나무)가 있기 때문
인지 궁금증이 광산구청 홈피를 방문하게 했다.(전일에)
풍영정은 김언거가 "김인후, 이황, 기대승 등 거유들과 노닐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훗날 정조가 칭송한
전남 장성산(産)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맞다면 잘못 소개된 것이다.
김인후는 풍영정이 세워지기 전인 1560년 1월에 이미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김인후와 교유하려면 이 정자가 1560년 보다 훨씬 전에 지어졌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의 유명인사 끌어들이는 일 자제하거나 역사공부 더 해야겠다.
호남선(광주~용산/?)광신철교, 광신대교 밑을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덕흥대교다.
위로 하늘을 보았을 뿐 바로 옆을 보지 못하고 걸었기 때문에 이 다리들이 영산강 위에
놓였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한데, 광산구청은 무엇을 믿고 이 둔치에 많은 시설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가.
야구장, 족구장, 주차장 등 방대한 시설을 발주하고 공사중이다.
반대편 둔치(서구?)도 마찬가지다.
잠시 빌려 쓰려는 것이 아니고 거창한 공사다.
인력(人力)으로는 끊임 없이 강을 죽이고 있기 때문에 하늘이라도 나서야 한다.
민초에게 큰 홍수피해가 없는 범위 내에 많은 비라도 자주 내려줘야 강을 살릴 수 있다.
이 일이야 말로 하늘 밖에는 할 수 없으며 그러면 둔치에 만든 모든 오만불손한 시설도
일시에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비는 그쳤으나 우중충한데 시계방향으로 긴 사장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운남동 천변을 따라 걷는 길이 풍영정천의 합수지점이 다가오면서 구분이 되었다.
정면, 풍영정천을 수용하는 지점에 놓인 영산강의 외기둥 사장교는 어등대교.
우측 풍영정천 3주(柱) 사장교는 운남대교.
모두 한판인 우리나라의 사장교, 현수교에 신물이 나서 평할 여력조차 사라진 것 같다.
광주시민에게는 매우 결례되는 표현이 되겠지만 길들이 엉크러진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사장교를 비롯해 멋있다고 말하는 것들이 다 촌스러워 보인다.
무진대로(광산구 운수동 나들목, 우산동과 서구 유덕IC, 광천1교)상의 다리 어등대교의
이름은 어등산(魚登山/338m)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어등산은 광산구의 중추인 송정의 진산이며 항일 의병과 왜군 간의 잦은 전투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는 산이며 옛 해남(삼남)대로가 넘어가는 산이다.
삼남대로는 나주에서 다산 정약용 형제의 이별지(유배길의)인 율정을 거치고 이 지역
선암마을을 지나며 어등산을 넘고 하남공단 ~ 장성갈재를 넘어 정읍으로 간다.
나 또한 그랬다.
이름 난 산이라 해서 온전히 보존하려 하겠는가.
리조트, 골프CC를 비롯하여 관광단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요절내는 중이란다.
유명하고 사랑받는 산 하나가 또 사라지고 있으며 아마도 다리를 건너는 도로가 어등을
통과하기 때문에 신규 역점사업의 홍보효과를 노리고 어등대교라 했을 것이다.
광주지역의 영산강에도 다리가 많은데 모든 다리는 광산구와 북구, 서구를 잇는 다리로
보면 되겠다.
영산강에서 그린 늙은이의 자화상
많은 비가 내린 것도 아닌데 소나기였기 때문인가 풍영정천이 황토천이다.
합수지점 일대의 둔치를 지리멸렬할 만큼 복잡하게 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질의 악화를 가중하는 일만 골라 하며 개탄하다니.
어등대교 밑, 잘 다듬은 쉼돌들이 있는 쉼터에서 광주의 다혈질 초로남을 만났다.
2008년 10월, 영남대로 때 사벌면 토마마을(경북 상주)에서 만난 경운기 남(메뉴 '옛길'
47번 글 참조)과 흡사한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점은 영남과 호남일 뿐 동력 경운기와 동력 겸용 자전거(새로출시된), 동연배일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새 대통령 취임한 해)에 만나 같은 류의 성토를 듣게 되다니.
이 다혈남이 호남 민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강경과 온건으로 갈리고 같은 유형에도 온도 차가 있겠지만 30여년에 걸친 군부쿠데타
정권과 유신정권에 가장 많이 피를 본 지역이라 예민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한다.
늙은이들도 그의 성토 대상이다.
가장 거침 없이 비판할 수 있는데도 가장 침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벌의 남자처럼 길이나 걷고 있는 내게 하는 말도 되겠다.
그들이 정곡을 찌른 것.
이 땅의 늙은이 대부분은 속말로 밥값을 하지 못하는 기생충에 다름 아니다.
투표 성향이 이를 증명한다.
노령연금,경로우대 등 직결되는 문제에나 눈독 들일 뿐 자자손손 대대로 살아갈 나라의
장래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늙은이에 대한 투표권 제한론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늙은이가 하고 있을 정도다.
젊은이의 말이라면 반인륜이라고 법석을 떨겠지만 이 땅의 늙은이가 그린 자화상이다.
부디 그들이라도 더 늙어서도 지금같은 혈기를 간직하기를 빌며 일어섰다.
광주지역 영산강 둔치의 자전거길은 극히 일부 외에는 선명한 빨간 페인트길이다.
천변로를 이용해 오다가 최근에 새로 조성했나.
자주 있는 둔치의 백색 천막 쉼터들도 새 것 냄새를 풍긴다.
운남동 월곡들 지역에서 잠시 천변길을 탔을 뿐 둔치를 고수했다.
다시 답답하해졌지만 일리 있으면 일해도 감수해야 하는 것(一利一害)
하중도가 용산교 아레에서 어등대교 아래까지 8개나 있다.
하중도는 수질의 적신호를 알리는 섬 아닐까.
더구나 상류지역의 짧은 구간에 많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유속의 둔화에 따라 퇴적물이 축적되어 형성되는 섬이기 때문에 강심을 퇴적물이 지배
한다면 당연히 수질의 악화를 초래할 것 같은데 내가 무지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일까.
광주시 중심부를 관통하여 흘러온 광주천의 합수지점에 덕흥대교를 건너는 2순환로를
위해 상무대교가 놓여있다.
조금 아래 경전선(송정~순천) 철교 밑을 지나면 극락교다.
극락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극락강역이 있고 극락교가 있다.
어등대교의 전 이름도 극락대교였다잖은가.
이 일대가 불교의 성지도 아닌데 왜 불교색이 짙은 이름이?
교량이 있기 전, 예전에 송정과 광주 사이 영산강 나루에 극락원(極樂院)이 있었단다.
일종의 관영(官營) 숙박소다.
당시에는 광주천 합수점부터 서창교 아래 황룡강의 합강지점까지를 극락강이라 했고.
광주와 송정인들이 부른 영산강의 다른 이름이었단다.
광산땅이 광주광역시의 일부가 됨으로서 거대도시가 되었으나 영산강이 가로막고 있던
예전의 허허한 곳에 들어서게 된 철도역 이름을 극락강역이라 한 까닭이 읽혀진다.
당시만 해도 광산군의 많은 지역이 광주 아닌 나주의 생활권에 들어있었고 시내의 개념
역시 광주가 아니고 송정이었다니까 영산강이 극락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여러 교량이 광산지역과 광주 도심을 연결해 주는 이즈음과 달리 유일한 다리였다니까
나루에서 배를 타야 했던 사람들에게 다리야 말로 극락을 오가는 느낌을 주었을 터.
영산강을 살리려면 둔치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라
극락교 밑도 낙원(?)이다.
위치는 분명치 않다 하나 극락원이 있고 나룻배가 오갔을 강가임에는 틀림 없는데 너른
교폭(橋幅)에 운동장처럼 다듬어 놓은 둔치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제각기 벌여놓은 판에서는 신명이 나있다.
섬진강과 영산강의 둔치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섬진강 둔치는 하류가 개발된 편이고 상류도에도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강변공원
으로 조성된 곳이 있으나 극히 제한적이고 대부분은 풀숲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그러나 영산강은 최상류부터 온갖 시설로 개발되어 원형을 거의 볼 수 없다.
섬진강의 상류는 거의 오염되지 않았고 영산강은 상류부터 오염되어 있다.
까닭이 불 보듯 뻔한데도 딴 데서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
강이 살아나기를 정히 원한다면 둔치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부터 해라.
(상징성이 높아 자연이 감동할 것이다)
그리고 지천을 다스려라.
복원력이 강한 자연(江)은 곧 살아날 것이다.
극락교 이후 서창 한하고 청천의 뇌성벽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륙하는 제트 전투기의 굉음이다.
아뿔싸, 극락교 지근에 공항, 전투비행단이 있으며 내 진행 방향이 이착륙 코스와 일치
하기 때문이다.
시민생활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착륙 항로를 미개발지역으로 냈을 것이다.
다행이지만, 토지 소유자들이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겠다.
극락교를 떠나 1km 남짓 진행했을 때 바람 타고 들려오는 멜로디.
조금 더 가까이 갔을 때 동요 '섬집 아이'가 '도나우강의 잔물결'로 바뀌었다.
우이령을 넘다가 들었던 오카리나 소리 같기도 하고 섹소폰 연주인 듯도 하고.
자전거 없는 자전거길을 독점 중인 늙은 길손의 가슴을 애잔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
극락교 발 1.5km 지점 둔치의 천막 쉼터에서 섹소폰 연주 삼매경에 빠져 있는 중년이다.
게스트(guest)가 와있는 것도 모르고 연주에 열중중인 그와 말을 트기 위해서는 가요곡
동백아가시 1곡을 더 들어야 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일터를 등지고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
의사의 권유로 섹소폰을 배우게 되었고, 치유 효과가 크단다.
집(광주시서구?)에서 자전거로 여기 와서 연주 연습을 하고 귀가하는 것이 거의 일과가
되어 있다는 그는 회복해서 병약자 위문 섹소폰 주자가 되는 의지를 키우고 있단다.
투병에서 의지 이상의 명의(名醫)는 없다.
그의 병명은 모르지만 그는 기필코 승자가 되어 포부를 실행하게 될 것이다.
섹소폰 주자와 헤어져 1.9km, 서창교 밑에 도착한 시각은 18시.
광주시민의 일상생활 공간은 둔치 밖에 없는가.
둔치라 하기에는 과도하게 화려하고 완벽하게 정비된 광장이다.
강 따라 걷는 길에서 가장 짧게 걸은 하루를 마감했다.
소나기 때문에 중지한 시간과 다혈남, 섹스폰남 등과 보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행정구역 조정이 말하기 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그래서 불편한 일상인 경우가 적지
않은데 여기 서창(서구)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심한 곳은 안방과 건넌방의 동(洞)과 면(面)이 다른 곳도 있다.
일반적으로 강과 다리,길을 경계로 하는데 서창동의 경우 영산강 양쪽이 모두 서창이다.
이조시대에 세곡 수납 창고인 서창(西倉)이 있었다 해서 서창동(西倉洞).
서창교가 없다면 불편이 여간 아닐 것이다.
서창면에서 출발해 광주군 - 광산군으로, 광주시 -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으로,광주시
광산구 서창출장소로,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으로 이관과 편입 경력이 화려한 서창동.
영산강(서창교) 서쪽의 서창동(문촌, 신영 두 마을)의 광산구 이관을 조정중이라 했는데
어찌 되었는지.
정자와 식당이 있다는 서창동 중심지로 가려면 신서창교를 건너야 한다.
용케도 오염 적응에 성공했는지 물고기들이 있나.
어렵사리 적응해 살아갈 텐데 다리 밑 강가에 설치된 조대(釣臺)에는 그 놈들을 노리는
강태공들이 진을 치고 있다.
다리 옆, 정자 유왕소정(流王沼亭)을 염두에 둔 후 식당을 찾아 마을로 갔다.
광역시라 하나 시골 마을에 다름 아니지만 경력을 입증하려는 듯 꽤 큰 마을이다.
잘 지은 2층 신축건물의 식당은 왜 이름을 '거지'라 했을까.
한자로는 대단한 지혜(巨智), 아주 지혜로운 식당을 뜻하지만 거저 얻어먹는 식당 같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 호의적일 리 있는가.
거부감을 갖게 될까, 흥미로워서 굳이 찾아갈까.
주인은 심사숙고 했겠지만(작명가로부터 받았을까) 내게 거지는 실패했다.
근거리에 있음에도 더 멀리 있는 집을 찾아갔으니까.
너른 마루의 정자는 앞에 있는 서창 게이트볼 구장 효과인지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으나
이름 '유왕소정'은 뜻도 내력도 모두 알 길 없으며 마을의 내로라 하는 분들도 모른단다.
현판을 쓴 사람만은 알고 있을까 해서 그를 찾아보았으나 누군지 마저도 알지 못한단다.
(나중에 동사무소에 전화로)
내 무지탓으로 돌리고 전국의 정자목록을 뒤져봐도 그 이름은 커녕 유사한 이름도 없다.
참으로 괴이쩍은 일이다.
이름의 뜻도 모르는 정자에서 이 한 밤 나는 영어(囹圄)의 몸에 다름 아니었다.
인혈(人血)에 굶주린 모기떼의 결사적 문해전술(蚊海戰術)에 무력한 늙은 나그네.
영산강변의 첫 야영이라 야경도, 조대의 강태공들도 궁금했으나 생리적 불가피 외에는
천막 안에 갇힌 채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으니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