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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미학 원문보기 글쓴이: 여세주
제16차 수필쓰기 총평과 촌평
(1)오해와 이해 사이
대중매체에서 종일 태풍 다나스의 경로를 방송하며 피해를 줄이라고 한다. 오후로 접어드니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긴 가뭄에 내린 비라 반갑다.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작년에 우리 집을 다녀간 친구의 문자다. 꼭 일 년 만에 온 문자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한다기에 주저 없이 그러라고 했다. 아들과 함께 온다는 것이었다. 맛있는 것을 해놓고 기다리란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친구한테 편하게 대하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이년 전부터 연락이 닿아 가끔 전화 연락만 했고 왕래가 없었다. 양산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내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한편으론 멀리 사는 그녀가 지나가는 길에 나를 보러 온다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아들과 함께 온다고 하니 뭘 대접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것도 아니니다. 무작정 장을 보러 갔다. 이것저것 사고 나니 남편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한다. 오랜만에 아내를 보러 온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모양이다. 남편이 준비한 식당에서 그녀와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친구와 좋은 시간 보내라는 남편의 작은 배려가 느껴졌다.
그녀와 나는 늦은 시간까지 희미한 옛 기억을 부여잡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을 먹고 그녀는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보러 떠났다. 그리고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내가 섭섭하게 대했는지 돌아보았다. 전화를 한번 해볼까 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일상은 작은 감정까지 오래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아버님이 편찮으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을 치르면서 그녀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잊혀졌다.
가끔 그녀를 떠올리면 기분이 묘해졌다. 왜 가끔 하던 전화연락도 하지 않는 것일까. 내게 섭섭한 것이 있었을까. 나만의 상상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렸다. 그러던 사이 내 전화기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워버렸다.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갔다. 여름이 가고 비가 세차게 내리는 가을날 보고 싶다는 문자가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고 인제 와서 보고 싶다는 말이 순수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나의 옹졸한 마음은 또 하룻밤 묵어갈 집이 필요했던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보낸 문자를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소식이 너무 늦어 미안하고 보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한번 닫힌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녀는 담담한데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냥 이해하란다. 이럴 때 한 살 많은 남편에게 내 좁은 마음을 들켜버리고 만다. 나는 이해하기도 더는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남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오해와 이해 사이는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도 하고 얼음같이 차가운 냉가슴이 되기도 한다. 사소한 오해로 많은 사람이 내 곁을 스쳐 갔는지 모른다. 저녁을 먹고 차 한잔을 마셔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오해와 이해 사이를 넘나들며 그녀를 머리에서 떠올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감정이 정리 안 된 상태에서 문자를 보내면 그녀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 답 문자는 보내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사소한 일에 흥분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바라본다. 이내 못 본척한다. 나의 옹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지만 그 일로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어쩌면 나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지 모른다. 상대방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관리 사무실에서 새벽까지 큰비가 예상되니 문단속을 잘하라고 시간마다 방송한다.
친구 연락처를 정리하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 문자의 전화번호가 다른 친구의 전화번호임을 알게 되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왜 의심 없이 그녀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무의식 속에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오해는 또 한 번 나를 구렁 속으로 빠뜨렸다.
낮에 받은 문자는 몇 년 전에 연락이 끊긴 다른 친구의 것이었다. 한 인연이 가고 나니 새로운 인연이 이어졌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마음이 움직이면 내가 먼저 연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해의 뒷면에 나의 집착이 자리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 아들이 돌아왔다. 우산을 쓰고 왔는데도 온몸이 젖어있다. 정말 큰 비가 올 모양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다루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연락을 해 오는 친구와 화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그려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친구에 대한 화자의 복잡한 심리를 세밀하게 드러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심리적 갈등을 ‘오해와 이해’라고 의미화 했다. 이런 점이 이 작품의 값어치를 가늠케 한다. 다만, 이 작품의 배경으로 끌어들인 ‘비’가 작가의 심리적 상태,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얼마나 일치시키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공간적 시간적 분위기는 화자의 심리적 상황 또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 연출에 더욱 효과적으로 기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아버지
중앙아시아로 봉사 갔을 때 이야기이다. 아침일과를 시작하기 전 대원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목사님이 주관하시지만 기도는 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순번을 정해서 한다. 함께 간 대원들 중에 보직을 맡은 굵직굵직한 분들이 많이 계셨다. 출발할 때 나누어 준 예배 순서지에 내 이름이 올라있지 않아 예배시간에 큰 부담을 가지지 않았다.
먼 거리까지 가서 봉사하려면 새벽이나 다름없는 이른 아침에 예배를 본다. 해외에 나가면 처음 며칠 동안 잠을 설친다. 시차 탓도 있겠지만 예민한 성격 탓도 있다. 아침예배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왜 부르는지? 영문을 몰랐다.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려다 잘못 부른 줄 알았다. 눈을 떠서 이름을 부른 쪽으로 쳐다보다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눈빛을 보니 분명히 나다. 지금 이름 부른 것은 나 보고 대표기도를 하라는 말이다. 잠이 확 달아났다. 오늘아침 기도순서가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분명히 나는 아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반 졸음 상태로 꾸벅거리다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서 기도해도 되는데 놀라서 자동으로 벌떡 일어난 것 같다. 둘러보니 단원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입에서 기도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름이 불러지는 것과 약간의 시차를 두고 기도 말이 줄줄줄 나와야 예배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데 기도 말 대신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말은 못했지만 머리속은 난장판이 되었다. 마치 폭죽 터지듯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이내 먹구름이 몰려 와 캄캄해졌다. 귀에서는 한 밤중에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가 ‘씨거덕 씨거덕 윙윙’ 나는 것 같았다.
한 치 안보일 정도로 앞이 캄캄했지만 현실은 똑바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창피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당장 입을 벌리고 기도해라. 기도를 해‘ 반복적으로 빨리 기도하라고 지시하고 있었지만 닫힌 입이 따라가 주지 못했다.
고개 숙이고 여 있는 구성원이 쉽고 만만한 부류였다면 이렇게 심하게 위축될 이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입에서 술술 기도가 나왔거나 정 기도가 안 되면 슬그머니 빠져나와 도망 갈 정도로 배짱이라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다 저 분들이 누군가? 눈만 뜨면 매일 만나는 직장동료이고 상사다. 그리고 앞으로 이분들과 일주일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이며 여기는 이역만리 타국 땅이 아닌가? 입이 열리지 않아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아 계시는 교수님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찔끔 감으면서 눈신호를 보냈다. 빨리 기도하라고 재촉하는 눈짓으로 이해했다. 고개 숙여 있은 지 이삼 분쯤 가까이 흘렀을 때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하나님......아버지.......”
어렵게 한 마디 하기는 했는데 갑자기 목이 말랐다. 기도가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입안으로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기도시키신 분이 원망스러웠다. 기도시작하기 전 이 삼분 앞에라도 언질을 주었다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 같다. 준비하기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문 앞머리만이라도 간단하게 적어 놓았어도 이런 곤란은 당하지 않았을 것 같다. 대원들이 고개 숙이고 있을 때 꺼내서 뒷말을 유추해서 읽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쉽게 기도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도 첫말은 간신히 끄집어내었는데 이어 갈 말이 아무리 쥐어짜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답답하던지 머리를 두어 방 꿀밤 주먹으로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쥐어박았다. 컴퓨터가 부팅이 안 되면 전원을 끄고 초기상태도 되돌려 재부팅하듯이 머리에 충격을 주면 도망갔던 기도문이 다시 부팅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리만 아팠지 생각 안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이 분 쯤 흐른 후에 마지못해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아멘”
텅 빈 내 머리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단 두 마디로 기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럽던지 투명인간이라도 되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방에서 나올 때 겉옷을 걸쳐 입고 나올 정도로 싸늘한 날씨인데 가지고 있던 손수건 한 장이 흥건하게 적셔질 정도로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남은 예배시간 내내 바늘방석이었다. 다음순서인 목사님 설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회 다닌 지 몇 십 년인데 아무리 건성으로 다녔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보고 들은 게 있었을 텐데 한심했다. 그리고 명색이 의료선교인데 출발하기 전에 순서지에 내 이름이 없다고 아무 준비도 없이 덜렁 따라나선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예배를 마치자 뒤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뛰어올라갔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이 추슬러질 때가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그런데 방문을 걸어 잠그기 전에 대원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제일먼저 기도자로 호명했던 분이 덥석 손을 잡으면서
“아이고! 갑자기 기도시켜서 미안합니다. 오늘 순서지에 기도하시는 분이 선발대로 먼저 출발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과 상의해보니 선생님께서 우리 대원중에 신앙이 제일 좋다고 추천하기에 일방적으로 지명했습니다. 진작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눈을 깜박 거리며 기도 빨리 하라고 재촉했던 교수님도 따라와서
“눈신호를 보냈을 때 같이 눈을 깜박거려 주었으면 내가 대신 할 건데”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김 선생도 가만있지 못하고 한 마디 거들었다.
“문학 하시는 분이라 보통사람하고 틀리네. 문법적으로 해석해 보면 주어 플러스 동사네”
그 날 예배사건 이후 선교여행 기간 내내 기가 죽어 말 한마디 옳게 올케하지 못하고 따라다니기만 했다.
선교여행에서 돌아오자 그 다음날 당장 초등학교 시절 국민교육현장 외웠듯이 기도문 한 장을 달달달 외웠다. 언제 어느 때라도 누가 툭 치기만 하면 기도가 자동으로 줄줄줄 나올 경지까지 되었다. 믿지 못할 내 머리에 당해 본 경험이 있어 외우는 것만 가지고 도 안심이 안 되었다. 안주머니 지갑에 언제라도 꺼내 읽을 수 있도록 기도문 한 장을 깨알같이 써 넣고 다녔다.
기도사건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아무도 갑작스럽게 기도를 시키지 않았다. 지갑에 넣고 다니던 기도문마저 다 헤어져서 버린 지 오래다. 공들 여 외운 기도도 복습을 안 하니까 다 잊어버린 것 같다. 요즈음도 가끔 모임에 나가 고개 숙이고 있으면 갑자기 내 이름이 불리게 될까 겁이 난다.
갑작스러운 기도를 주문 받은 상황에서의 심리적 당황스러움이 매우 치밀하게 잘 그려져 있다. 그런 해프닝이 있은 이후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단일 구성이 지닌 단조로움을 덜었다. 크게 흠 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3) 마늘 장아찌
‘오늘 햅쌀 찧다. 그래서 택배로 부쳤으니 묵은쌀 먹지 말고 햅쌀로 해 먹거라.’ 띠리리~~ 시골 어머니의 문자 메시지가 뜬다. “감사합니다. 역시 우리 집 쌀이 제일 맛있지요, 윤기도 좌르르 하고요. 잘 먹겠습니다.” 나의 너스레에 팔순의 부모님은 계절마다 농산물을 보내신다. 하얀 쌀밥에 마늘장아찌 올려 먹으면 맛있겠다.
지난여름 시골 부모님께서 마늘을 택배로 보냈다. 마르기 전에 장아찌를 담으라고 했다. 거실에 신문을 깔고 마늘을 깐다. 칼로 뿌리를 자르고, 하나하나 껍질을 벗긴다. 칼에 잘린 마늘에서 매운 냄새가 눈과 코를 쏜다. 손끝도 얼얼하다. 손톱 밑으로 흙이 들어가 까맣다. 무릎도 허리도 뒤틀린다. 간장, 식초, 설탕, 물을 비율에 맞춰 솥에 붓고 끓인다. 집안에 시큼한 간장 냄새가 난다. 모든 창문을 열어 놓는다. 끓인 것을 뜨거울 때 씻어 놓은 마늘에 붓는다. 3~4일이 지난 뒤 물을 따라서 다시 끓이고 식혀서 마늘에 붓기를 두서너 번 더 한다. 그러면 두고두고 밑반찬으로 잘 먹을 수 있다. 아버지는 막걸리 안주로도 좋아하셨다.
뿌리를 자른 마늘 속이 부모님처럼 여러 자식을 품고 있다. 겉보기엔 잘 자란 한 통의 마늘로 허우대도 좋건만, 남모를 속앓이를 얼마나 했기에 저렇게도 많이 갈라지고 또 갈라졌을까, 여섯 남매 키워서 짝 맞추어 자리매김 하기까지 터지고 갈라진 어머니 속이 오죽했으랴 요즘처럼 병원도 가까이에 없고 몇 십리를 가야 겨우 하나 있는 병원은 저녁이면 의사도 퇴근하고 없었다.
어떤 날은 개구쟁이 둘째가 벌집을 건드려 벌에 쏘여 퉁퉁 부어서 오면 어머니는 맨발로 장독대에 가서 된장 한 사발과 밀가루를 버무려 부어오른 어깨, 목, 머리 뒤통수에 썩썩 발라주면서 벌 독 빠지기를 애간장 타게 빌었다. 천방지축 막내가 온종일 밖에서 잘 놀다가 잠자리에서 온몸이 펄펄 끓어올라 끙끙 앓으면 어머니는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가 바가지에 차가운 물 한 바가지와 뭉텅한 식칼을 물독 항아리 전에 쓱쓱 문질러서 가져와 막내에게 머리카락 몇 올을 자르며 머리에 앉은 귀신, 침 세 번 뱉으라 하고 입으로 들어간 귀신 , 낮에 입었던 옷가지에 붙어 있는 귀신들을 칼로 베어서 바가지 물에 칼을 휘휘 섞어서 대문 밖으로 있는 힘을 다해 던지며 “썩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며 객구을 물리곤 했다. 다음날 아침이면 막내는 천방지축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늦가을에 마늘 한쪽이 땅에 심어진다. 땅속에서 추운 겨울을 맨몸으로 견디며 뿌리를 내린다.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자식을 만든다. 자식을 품고 나른한 봄 햇살에 쏟아지는 조름을 쫒으며 곁가지를 세워 봄바람에 휘둘리지 않는 꿋꿋함을 키운다. 뜨거운 여름 품은 자식을 키우기에 목마름조차 잊고 더위를 온몸으로 버티고 있다. 뜨거운 열기가 튼튼한 마늘이 되고 매운맛을 내기 때문이다. (앞 문장과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
여섯 남매를 키운 어머니의 속도 마늘장아찌만큼 검고 반들거릴 것이다 자식들 머리맡에 앉아 잠 못 이룬 날은 얼마이며, 행여 저 자식들 마음 다치지는 않을까, 학교에서 무슨 일은 없을까, 조금 더 키워 놓으면 사회생활 적응은 잘할까, 이성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 그 마음속에 단단한 돌 여러 개 품고 사셨다. (은유로 사용된 돌이란 매체의 원관념은?)
마늘도 새로운 마늘이 터를 잡으면 처음 심은 마늘은 마른 껍질만 새 마늘의 울타리로 바뀌고 속은 삭아 새것의 영양분으로 없어진다. 그 울타리마저 마늘이 커지면 찢기어 거름이 된다.
여름에 담근 마늘장아찌를 꺼내본다. 색이 곱게 익었다. 새콤하고 달콤하다. 이 맛을 내려고 진한 간장 속에서 긴 시간을 견디었구나. 잘 익은 마늘장아찌 하나 입에 넣고 오랫동안 그 맛을 음미한다. (11장)
마늘을 자식을 품은 어머니에 비유한 것이 신선하다. 마늘이 자라는 과정을,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과 자세하게 비교하여 비유의 설득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니, 햅쌀을 마늘로 대체하는 게 좋을 듯하다. ‘시골 어머니’도 ‘친정어머니’로 호칭하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리고 둘째단락에서 ‘마늘쪽’이라는 매체(보조관념)가 지시하는 내용(원관념)은 자식인데, 속앓이로 갈라진 보모의 마음으로도 비유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뒷부분의 ‘돌’이 가리키는 내용(원관념)도 불분명하다.
(4) 전화번호부
낯선 이들과의 모임이었다. 주부들의 모임이나 서로 깊이 있는 관계는 아닌 자리였다.(구체화시켜서 어떤 모임인지를 밝혀두는 것이 더 좋지 않을지) 책상 위에 놓인 옆 사람의 휴대전화기가 진동한다. 동시에 전화기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보낸 사람의 이름이 뜬다. ‘첫사랑’이다. 이름으로 기록하기에는 낯선 낱말임을 순간 깨닫는다. 옆 사람은 통화를 위해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첫사랑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괜스레 궁금증이 인다. ‘남편일까? 애인일까? 아이일까?’를 떠올리며 궁금증을 더해본다. 굽은 마음을 결국 똬리 틀고 내 속에 들어앉는다.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는 그이를 보며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날 이후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어떤 이름으로 저장하는지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휴대전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라 타인의 기록을 쉽게 알 수는 없었다. 식구 중 남편과 나는 전화기를 쉽게 노출하지만, 아이들은 잠금 기능을 사용하고 있어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
한때 남편의 전화기에 내 이름은 ‘마누라’였다. 일상에서 부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으나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았다. 어느 날 제 아빠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둘째 아이가 나를 부르는 이름을 발견했다. 곧이어 ‘마누라’의 촌스러움을 소리 높여 말하더니 제 마음대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왕비’로. 순식간에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다. 아이의 배려로 마누라보다는 한결 품위 있는 이름을 얻었다. 비록 밥과 빨래하는 주부 생활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그 후로 가끔 남편의 볼멘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왕비와 공주를 받들어 모시느라 허리가 휜다고. 이름 하나 바뀐 게 뭐 대수라고 그 소리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남편은 나의 휴대전화기에서 ‘허니’로 존재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랑의 달콤함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고심 끝에 정한 이름이었다. 전화를 걸고 받을 때 이름을 보며 그가 나의 애인(愛人)임을 확인한다. 남편은 불만족이다. ‘허니’가 뭐냐고, 자기가 무슨 꿀물도 아니고 ‘서방님’으로 해달란다. 전화 속의 이름에서조차 존대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지만, 아직도 남편은 나의 ‘허니’다.
둘째 아이가 난리다. 잠근 해제된 언니의 휴대전화를 어쩌다 들여다보니 제 이름 석 자만 나타난다며 자매간의 서운함을 한껏 드러낸다. 늦은 사춘기를 겪는 첫째 아이는 자신을 아웃사이더라 여긴다. 저 외의 다른 사람은 제삼자다. 언니 동생의 호칭도 없이 남처럼 이름 석 자만 기록해 놓으니 남이랑 뭐가 다르냐며 둘째는 화를 낸다. 그러더니 즉시 제 휴대전화기를 꺼내 ‘언니’를 이름 석 자로 바꿔 다른 사람으로 변신시켜 놓았다.
전화를 걸고 받을 때엔 발신자와 수신자에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이 뜬다. 왠지 어색한 관계의 사람이나 부담스런 사람이 나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일부러 받지 않나 하는 오해 아닌 오해도 하게 된다. 나 또한 그런 전화가 오면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며 선택의 갈림길에 선 적도 있다. 상대가 누구인지 미리 알게 되는 것은 편리라기보다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알려주는 관계의 구별법이 되고 있다.
글쓰기 모임의 뒤풀이 자리에서도 이런 얘기가 나왔다. 어느 선생님은 아들을 휴대전화기에 ‘놈’으로 저장해 놓으셨다 하고, 또 다른 분은 누군가가 아들자식을 ‘찌질이 1’, ‘찌질이 2’로 기록해 놓았다고 전해 한바탕 웃었다. 웃음도 잠시 이름을 그렇게 저장해 놓은 배경이 짐작되어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존재가 의미 있기를 바란다. 특히 자신이 알고 있는 가까운 사이에는 더욱 그러하다. 김춘수 시인도 은 <꽃>이란 시에서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도 그에게 가 꽃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름 없는 사물에 이름을 주어 꽃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존재로 변신시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이름은 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반사경이다. 사물로 부르면 사물이 되고, 꽃으로 부르면 꽃이 되는 세상이 지금 내 손안에 있다.
(11.9장)
휴대전화기에 기록된 상대방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상대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 해석해낸 글이다. 다루어 볼 만한 소재를 선택하여 의미부여에 이르기까지 무난히 전개시켜 나간 작품이다.
(5) 황금 나비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나뭇잎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아파트 마당을 들어서는 길이 훤하다. 경비아저씨의 비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계절의 변화에 탄성을 자아내는 우리와 달리 어슴푸레한 새벽녘부터 아저씨의 손은 수고롭다.
딸아이 수능시험을 며칠 앞두고 통학을 시켰다. 아침 6시30분이면 집을 나서야 한다. 아파트 마당으로 밤사이 내린 낙엽이 울긋불긋 하다. 경비아저씨는 일찌감치 비질을 시작했다. 물색 고운 낙엽 몇 장이 자동차 앞 유리위에 떨어져있다. 귀엽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샛노란 가을 길을 조심스레 달린다. 차위에 얹혀있던 낙엽이 풀쩍 일어나 휘익 날아간다. 향기 좋은 카푸치노처럼 달콤한 음률에 볼륨을 높인다. 기분이 좋다. 휘익 불어오는 바람에 힘을 빌려 제 몸을 놓은 노란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젠 오가는 사람들과 차바퀴에 밟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져 숨을 거둘 것이다. 앞서 달리는 차 꽁무니를 따라 조무래기 같은 낙엽들이 데굴데굴 좇아쫓아간다. 구미호처럼 허연 눈썹을 껌뻑거리며 콧구멍, 귓구멍까지 분필가루 세례를 받고 쌕쌕거리던 그 녀석이 불쑥 생각이 났다.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청소시간이 되면 뺀질이 나와 명숙이는 청소는 고사하고 방해꾼이었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청소 불성실 죄’를 적용하여 청소구역을 따로 배정해주었다. 1층은 과학실이고, 2층은 남학생 교실이 있는 건물 앞 화단청소였다. 여학생들로만 구성된 우리 반 아이들이 청소하기 제일 싫어하는 곳이어서 번호순으로 돌아가면 하는 곳이다. 마의 구역이던 그곳으로 유배를 보낸 것도 모자라 반드시 청소검사를 맡으라는 엄명이 추가되었다. 화단에는 꽃나무와 사철나무 몇 그루만 있을 뿐 잔디밭이었다. 힘든 걸로 치자면 교실 청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하다. 잔디밭에 떨어진 휴지조각 몇 개만 주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2층의 그 녀석들 때문이다.
쌕쌕 ~~ 휘파람을 불며 질겅거리던 껌을 뱉는 것은 약과였다. 창틀에 배를 걸치고 치아사이로 물총처럼 더러운 침을 찍찍 쏘아댔다. “어이, 마누라, 여보… 오늘 일찍 들어와.” 따위의 장난은 다반사였다. 누가 누굴 좋아하네 마네 하는 시답잖은 낙서를 던지거나 가슴이 작아서 키워줘야 한다는 등의 짓궂은 농까지 모두 화단으로 떨어졌다. 유리창이 깨지든 말든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지며 독기를 뿜어봤지만, 속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반발이 심할수록 약 올리는 수법도 점점 치사해져 갔다. 단체로 늘어서 침을 모으느라 잇새를 드러내고 찍찍거리는가 하면, 찐득한 가래를 늘어뜨리기도 했다. 복수라야 고작 선생님께 일러 꿀밤 몇 대 주는 것이 전부였으니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창문2층에서 눈꽃같이 잘디잘게 찢긴 종이 쪼가리들의 낙하…. 어느 누가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독을 품고 속을 끓이는 사이 새빨간 단풍잎도, 노란 은행잎도 각기 제 색으로 물이 들었다. 빛깔 고운 낙엽을 주우러 다니던 그때, 무심코 은행나무 밑을 쓸고 있는 그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청소구역이 창고 앞에서 우물까지인 듯하였다. ‘은혜는 떼먹어도 원수를 잊어서야 하겠는가.’ 나는 드디어 복수의 칼을 뽑아들었다. 짝없는 실내화, 걸레 조각, 몽땅 빗자루까지 총동원했다. 우리 반 역시 2층이기에 앉은 자리에서 던져도 은행나무쯤은 백발백중이었다. 말끔히 쓸어놓고 검사를 받으러 간 사이 눈부신 황금 나비 떼가 일제히 내려앉았다. 날개는 없지만 팔랑거리던 노란 나비의 향연이 장관을 이룰 때, 냄새나는 실내화와 구질구질한 걸레쪼가리도 함께 떨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통쾌한 나의 복수는 계속 이어졌다. 차라리 은행잎을 다 털어내 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무를 발로 차고, 빗자루를 던져 올리며 난리를 치더니 은행나무는 곧 싸움닭처럼 엉성해져 버렸다.
나이 40이 되어서야 어릴 적 학교친구들 모임에서 녀석을 만났다. 반가움에 덥석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소년기의 기억들은 고스란히 나이테에 묻혀 버린 것일까. 말 안 듣던 새까만 얼굴에 뺀질거리던 장난기는 사라지고, 넓어진 이마와 구릿빛 얼굴에는 중년의 무게가 느껴졌다.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기고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몸피의 변화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월자국이 선명하다. 친구 녀석의 엉성한 머리카락 끄트머리에도 희끗희끗 흰 물이 들었다. 뜨거운 폭염과 비, 바람, 폭풍우를 견디면서 푸른 독을 뺀 낙엽처럼, 녀석도 그렇게 철딱서니 없던 장난기가 빠져가고 있나보다. 잎사귀하나가 나뭇가지 어디쯤에 살았는지 눈여겨보아 주는 이 없지만, 제 몫을 다하듯, 친구 녀석도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만큼 의젓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있다. 젊은 시절 나 또한 타인에게 감사하는 법을 몰랐다. 오히려 더 화를 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하는 짓이 너무도 뻔해 보였었다. 쉰이 다 되어서야 장난꾸러기였던 친구 녀석을 보니 마치 나의 자화상 같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그들만의 푸르렀던 삶이 서릿발처럼 앉아있으리라. 생의 끝에서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은행잎처럼, 우리의 내일도 그렇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햇살에 투영된 이 가을,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멋진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나이 들어갈수록 계절의 변화는 매일 매일이 경이롭다. 가을의 끝에 흩날리는 낙엽의 거룩한 낙하를 가슴 활짝 열어 온몸으로 받아본다. 밤사이 가을비가 내렸나보다. 물기 축축한 발밑은 온통 꽃밭이다. 경비아저씨는 오늘 아침도 여전히 힘든 비질을 하고 있다. “아저씨, 다 떨어지면 한꺼번에 쓸어요.” 인사를 건네 본다. 아저씨는 낙엽처럼 고운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구성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연상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데서 오는 결과물이다. 노란 ‘은행잎’이 연상의 연결고리이다. 등굣길의 은행잎에서 학창시절의 은행잎으로, 다시 불혹의 나이를 넘긴 어느 날 동창회에서의 너와 나의 중년의 모습으로 연상은 이어진다. 다만, 중년의 모습과 낙엽을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면 더욱 좋겠다. 그리고 푸른색의 이미지에 대한 비유가 일관되어 있지 않은 점을 비롯하여 밑줄 친 비유들을 점검하여 퇴고하여야 할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로 만들어낸 듯한 비유나 과장된 비유는 진솔성을 훼손시킨다.
(6) 부처를 엿보다
비로전 앞이 한산하다.
오래전, 엄마를 따라 직지사에 왔었다. 비로전 안, 천불상을 보면서 누군가가 “서있는 아기 부처가 첫 번째로 보이면 아들을 낳는대.”라고 했다. 하얀 몸에 머리만 검은색인 천 개의 불상 중 아기부처 하나가 서 있다는 것이다. 온몸에 기운이 눈으로 몰렸다. 자식을 낳는 운명이 엄마를 닮았다면 떼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어떤 굴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성급한 때문인지 육신은 허둥거리기만 했다. 내 눈에는 천 개의 부처가 똑같은 모습으로만 보였다. 눈동자에 힘을 줘가며 아기 부처에게 눈을 맞춰도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나도 엄마의 운명을 닮는 걸까? 그때, 무리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낚아채 (?)나는 비로전 옆문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보였다. 비로전 중앙, 넷째 줄에 아기 부처가 서 있었다. 정면에서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 측면 문에서는 바로 눈에 띄었다. 아까 누군가가 옆문에서 보면 바로 보인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딸만을 낳는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부처를 봤다고 해서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건 아니다. 비로전 앞에 서자마자 그 부처가 첫눈에 들어와야 효험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나름대로 해석을 해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아직 어른이 안 되었으니 상관없어. 언젠가 엄마가 될 나이에 이르렀을 때 첫눈에 서있는 아기부처가 보이면 분명 효험이 생길 거라고 다독였다.
엄마는 딸 넷을 내리 낳았다. 그 사실을 팔자소관보다는 형벌처럼 여겼다. 자라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딸은 엄마를 닮는다.”였다. 빈처의 엄마를 닮기 싫었고, 딸을 넷이나 낳는 운명이 나에게 옮겨질까 두려웠다. 엄마의 얼굴을 닮지 않았다는 말이 때로는 섭섭했지만, 다른 운명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엄마에게도 아들이 점지됐다. 엄마는 당당했고, 아들을 향한 지성에 딸들은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됐다. 말소리에 쉿, 발소리에도 쉿, 우리는 쉿 소리만을 들어야 했다. 한번은 아들이 운다고 해서 방안에 있던 선인장을 마당에 패대기를 친 일도 있었다. 선인장 가시가 아들에게 찔리는 기운을 주기 때문이란다. 엄마에게 아들은 확연히 딸들과 다른 존재였다.
젊은 날, 토요일 퇴근길에 직지사를 찾곤 했었다. 계절 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절이다. 대웅전을 지나 왼쪽으로 길을 들면 비로전이 나온다. 여인네들이 너나없이 법당을 기웃기웃한다. 무엇을 찾는 모습이다. 이 땅의 여인으로 태어나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심정을 쏟아내고 있다. 비로전 문턱에는 한 많은 이들이 염원을 빌었던 흔적이 문턱에서 뚜렷하다. 보인다. 기름을 바른 듯 윤이 나는 문턱을 넘다들며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부처를 향해 얼마나 빌고 또 빌었을까. 곡절 많았을 비로전에서 나는 엄마와의 숙명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매번 소원을 들어 줄 부처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봤다.
어른이 된 나는 첫아들을 낳았다. 엄마의 굴레를 벗어 난 기쁨이 컸다. 그리고 비로전에서의 비밀을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아기부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옆문에서 엿봤다고. 여러 해를 한줄 두 줄 세어 대면하다보니 어느 해부터 단박에 눈에 들어오더라고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들 타령을 했다. 나에게 아들 얻기란 엄마의 힘든 삶과 연결고리를 끊고 싶은 거였다.
2013년 11월, 엄마의 첫아들이 셋째를 보게 됐다. 산달을 세 달 앞두고 병원에서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엄마가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좋아하셨다. 아들을 낳아야만 비로소 가문의 여자로 인정받았던 엄마 세대, 그 예전 여자들의 서리 서린 한들이 오늘날에는 영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딸 둘을 낳으면 여행 다니다 비행기 안에서 운명하고, 아들 둘을 가진 부모는 자식들이 서로 떼다 밀어 길에서 객사한다는 말이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는 세태가 된 듯하다.
오늘 직지사 비로전 앞에 서 있다. 비로전 앞이 한산하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딸이다.
체험과 사색을 적절하게 융합해 놓은 작품이다. 체험의 진술보다는 그에 대한 생각을 진술하는 데에 좀 더 할애했다. 직지사 비로전을 배경으로 삼아, 딸 셋을 낳고 아들을 얻고자 한 어머니와 어머니의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한 화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모든 여성들이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관념적 굴레를 고리타분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오늘날 달라진 의식과 세태를 끌어들여 완결함으로써, 그 동안의 칙칙한 무게를 가벼운 해학으로 덜었다. 그리고 수미상관의 구성을 통해 자녀관의 변화 또는 세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자 의도하였다. 그런데 “비로전 앞이 한산하다.”는 첫 문장이 작품을 마지막까지 읽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음으로써, 작가가 의도한 효과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수미상관의 기법을 포기하고 마지막 단락으로 옮겨서 의도를 드러내면 어떨까 한다.
(7) 이파리의 꿈
푸르던 가로수의 이파리가 어제는 연붉더니 오늘 보니 검붉은 빛이다. 구부러진 내리막 길을 달려 내려가는 차들이 가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세월은 자신의 흐름을 감추기 위해 매년 이렇게 산에서 길거리에서 마술을 하고 있다.
어디든 단풍 명소 한두 군데는 다녀와야 화제에 궁하지 않을 것 같아 근교 산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을 듯) 둘렛길 걷기로 가을 나들이를 때웠다. 해맞이와 피서철에 경험한 지독한 차량 정체에서 배운 경험이다. 골라 심어 키운 단풍나무 터널길이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 있었다.
헬기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국 곳곳의 풍성하고 찬란한 가을 풍경이 저녁 뉴스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들판에서 계곡을 거쳐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풍경을 보노라니 마치 내가 망토 입은 슈퍼맨이 된 듯하여 기분이 상쾌하다.
능선이 만든 계곡 사이로 울퉁불퉁 얼룩 주름들이 져 있다. 봉긋봉긋한 봉우리 바위틈의 단풍 빛이 코발트 빛 하늘을 배경으로 더 이상 고울 수가 없다. 성능 좋은 컴퓨터의 바탕 화면에 깔린 풍경이상이다. 계절의 풍취가 최고조다. 우리나라 금수강산. 맞다.
체육행사의 계절이다. 종목선정에 의견이 분분했다. 산행을 하자는 안건을 내었지만 젊은이들의 다른 의견도 적지 않은 듯하여 민주적인 선호도 조사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결과는 영화감상. 곧 떨어질 단풍 이파리라며 나이 든 동갑들끼리 허허로이 허허롭게 웃었다.
계모임 시즌이다. 살아온 세월에 비례하니 소속된 모임도 너나없이 많다. 며느리 맞고, 사위 보고….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혼주 석에 앉을 나이다. 혼사 결정권 얘기가 나왔다. 아무런 권한도 없단다. 떨어질 이파리끼리 마주 보고 웃었다. 허허로웠다.
내가 변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어때서라고 역정도 내 보았지만, 세대차이의 깊이만 확인할 뿐이었다. 제시한 새벽 한 시 귀가가 초저녁이라니…. 상황 제시에 생략이 많아서 어떤 상황인지가 잘 이해되지 않음) 자정 통행금지를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하니 그래서 고리타분하단다. 처량하다. 빛바랜 이파리 신세다.
가을의 현란한 펼쳐짐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산천의 몸태질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순종의 모습이다. 각각 자기 위치에서 내일도 뿌리를 내리며 삶을 이어가기 위한 생명의 동시 다발적 몸짓일 뿐이다.
자신을 태우는 화려한 절정의 순간을 보내는 저들은 버려야 할 시간을 알고 있다. 삶의 이유였고 몸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고 비우고 있음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이듬해 밀어낼 새파란 움 한 조각을 벌써 조용히 키우고 있을 것이다.
단풍잎의 꿈을 보면 더욱 빛나 보인다. 비바람과 햇빛으로 잘 버무려진 꿈이다. 씨앗 속에 감추어진 노련한 완숙미는 더 많이 쥐려는 젊은 시절의 꿈과는 다르다. 빛은 비록 차츰 바래 가겠지만 다시 태어날 생명에 이르러 원대한 꿈이 이루어진다.
모습은 비록 앙상해져서 초라하게 보이긴 하겠지만, 폭풍 한설에도 꿋꿋하게 속에 있는 새 생명을 지키리라. 모두가 그러했듯이 조금 더 가지려고 애를 쓸 것이다. 짙은 녹음으로 살다 보면 삶의 순서와 이치를 깨닫고 다음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산하에 뿌려진 붉은 색들과 들판에 펼쳐진 점점의 누런색이 조화롭기 그지없다. 하얀 등대섬의 풍경은 아지랑이 봄 때와는 또 다른 풋풋함이다. 저런 곳도 있구나 싶어 속 탄성을 지른다. 임금도 구경 못 한 절경들을 안방에서 즐기고 있다.
여기도 저기도 모두 다 가보고 싶은데 모든 곳을 동시에 어이 다 다닐까. 신도 아니면서 어찌 무소부재를 꿈꾸랴. 탐욕의 인간이로다.
앞뒤 좌우 할 것 없이 온통 가을, 만산홍엽이다. 가을 아닌 곳이 없다.
이파리의 꿈을 본다. 생각이 깊어진다. (10.0)
작가가 가을 풍경을 직접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카메라가 바라본 풍경을 설명하고 있다. 상쾌하다, 곱다 등 몇 개의 단어가 가을풍경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관찰의 대상을 좁혀 단풍잎의 속성을 순종, 비움이라고 하면서 그 속에 이듬해 밀어낼 새파란 움 한 조각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그게 단풍의 꿈이라고 한다.
중심소재 단풍에 대한 설명들을 모아보았다. 설명이 다소 관념적이고 비약적이다. 단적으로, 단풍의 어디에 이듬해의 움이 숨어 있는가. 이러한 단풍 이야기에 가을행사 종목 선정 문제, 계모임 문제가 병렬적인 관계로 삽입되어 있다. 한마디로 한물간 인생이라는 말인데, 그것과 단풍은 어떻게 화음을 이룰 것인가. 이파리의 꿈은 누구의 꿈인가. 화자가 이파리라면, 그 꿈은 가을풍경을 모두 둘러보지 못하는 야망이라 하였다. 이 작품의 내용을 이렇게 추적해 본 이유는 사유의 혼란 내지 산만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수필은 산문이고 산문은 사유의 논리성과 합리성을 본질로 삼는다.
(8) 간이 큰 남자
아내의 심사가 되게 뒤틀려 있는 게 분명하다. 추석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부터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 한다. 도시에서 태어난 아내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맏며느리 노릇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여러 남매의 맏며느리 역할은 녹록지가 않다. 신혼 초부터 세 명의 시누이와 동거가 시집살이의 시작이었다. 한 집에 살아야 했다. 젊은 나이에 시누이들의 출가 때도 고향에 계신 시부모를 대신하여 수월하게 온갖 뒷바라지를 하였다.
올해도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다. 겨우내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골에서 김장김치는 혹한을 이겨내는 보물이었다. 짠지,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칫국, 김치전 등 거의 모든 반찬이 김치로 만든 것들이었다. 우리 고향은 바다에 인접하여 김장하는 방법이 좀 특이했다. 일반 가정에서 담그는 김장과 다른 것 중 하나가 꽁치 젓갈을 사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선을 많이 넣는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김장은 생선을 보관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향의 입맛에 길들었다. 우리 집은에는 고향에서 어머니가 보낸 준 김치와 아내가 손수 만들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김치가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건강 탓에 어느 날부터 김장을 담글 수가 없었다. 여태껏 고향에서 보내오던 김장김치를 거꾸로 아내가 만들어서 시골로 부쳐야 했다. 아내는 우리 고향 전통방식으로 김치를 담글 줄 몰랐다. 더군다나 꽁치젓갈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와 생선의 비릿함은 김장하는 일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본인이 싫어해도 집안 시부모와 나의 그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며 수십 포기나 되는 김장김치를 고향전통 방식대로 꾸역꾸역 담아왔다. 김장뿐만이 아니다. 아내는 된장, 고추장도 모두 우리 고향 전통방식대로 손수 담근다. 처음에는 언감생심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옛날 방식만 죽으라고 고집하는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시작한 장 담그기는 이제는 당연지사가 되었다.
신혼 초에 아내는 처녀 때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고자 했다. 나는 아내가 직장 다니는 것이 싫었다. 가정을 소홀히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어린아이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고집으로 젊은 시절부터 해오던 숙련된 일손을 놓게 되었고 이제는 전에 하던 일과 상관없는 허드레 일을 하고 있다.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했으면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했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쪼들리다 보니 궁여지책으로 아내가 늦게 직장을 다시 다니게 된 것이다. 원래 다니던 직장을 그냥 다니게 했으면 아마 지금의 이 고생은 하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가정경제의 주도권은 내가 잡았다. 경제권의 상징인 월급봉투는 넘겨 줄 수 없는 나의 자존심이었다. 아내는 지금도 나의 월급이 얼마인지 모른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가지고 아내와 권리 다툼을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만은 놓기 싫었다. 아내에게 경제권을 넘겼더라면 지금보다 경제사정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그 이유를 늘 적은 월급 탓으로 돌리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뉘 집 사모님은 부동산 투기를 잘해서 부자가 되었다’는데 하고 말을 하려다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경제권을 주지 않았기에 아내가 아무것도 못 했구나 하고 괜히 무안해진다.
사무실로 전화하는 부인들이 싫었다. 양반 집성촌에서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남존여비사상이 몸에 배어있어 여성이 남성들 하는 일에 끼어드는 것이 싫었다. 공무 중에 사소한 일로 아내와 오랫동안 전화기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시간 낭비에 그 당시 비싼 전화요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에 비위가 상했다. 아내에게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아이들이 크게 다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과시간에 전화를 못 하게 했다. 아직도 아내는 내 사무실 전화번호를 모른다. “우리 아저씨도 그 직장에 근무하는데요 되요” 하고 대답했다가 “어느 부서에서요?” 하고 물으면 그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올 추석에도 차례를 지낼 많은 제수들을 준비하였다. 아내는 며칠 동안 시장을 보고 음식 장만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조상님에게 올리는 음식은 최상품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한 차 가득 싣고 고향에 가야 적성이 풀리나 보다. 그런데 어머니는 맏며느리의 노고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맏며느리가 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둘째 며느리, 별로 하는 일 없이 마지못해 하는 일은 칭찬에 침이 마른다. 맏이 외에 다른 형제자매가 용돈 몇 푼 챙겨준 것은 재방송을 한다. 그것도 맏며느리가 들으라는 듯이.
아내에게 굳이 물어보지 않았지만 지난 추석에 아마 이런 일들로 사달이 난 것 같다. 이제는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화해 드리라고 명령해야겠는데 선뜻 권유하기 어렵다. 아내 친구들이 나보고 ‘간이 큰 남자’라고 한단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 명령하기 힘드니 분명 간이 큰 남자는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간은 점점 작아져 가고 아내 것은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이제 두 사람 간 크기의 균형을 맞추어 갈 때가 된 것 같다. 어제 저녁 냉장고벽에 ‘엄마 사흘 동안 너무 고마웠어. 사랑해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객지에서 대학 다니는 딸아이가 주말을 맞아 추석 후 처음으로 집에 들렀다가 떠나면서 남긴 글이었다. ‘그래, 여태껏 이 불균형의 틈을 메꾸어 주었던 것은 너희들이었겠지’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극대화되어 있는 한 가정의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어느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그 뿌리가 깊은 우리 가부장사회의 모습으로 확대되어 읽혀지기도 한다. 그러한 문제를 ‘나와 아내’의 관계로 구체화시켜 전달하면서, 그 불균형이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는 자소적(自訴的)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을 간의 크기 비례에 빗대어 희화시킴으로써 자소의 효과를 키웠다.
(9) 아랫방 아재, 최선생님
살다보면 이런 때가 있다. 연락은 취해야 되는데 자꾸 일정이 미뤄지는 일이 있다.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안부를 묻고 살아가는 공감대를 찾아 수다도 떨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허나 언제부터인지 소식이 뜸해지고 나서는 선뜻 먼저 전화기를 들기가 힘들어 질 때가 있다. 특히나 손아래 같으면 방심하기가 쉽고 손위는 조심스러워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러다가 서로간의 큰일이 생기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찾아뵈어야 하는데 참 얼굴 뵙기가 민망함을 외면할 수 없다. 미안하기도 하고 송구스러워서 서먹하기가 일쑤다.
이번 일도 그렇다. 시골집 옆집 아지매가 ‘최선생님이 돌아가셨단다. 연락 못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다. 이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 이것 큰일 났구나. 진작 문안을 여쭸어야 하는데….’ 여간 난처하지가 않았다. 그것도 문상할 때를 놓쳤으니 더욱더 할 말이 없다. 난데없이 부고를 접하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떤 면목으로 찾아봐야 할지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늦었지만 얘기는 해야 하지 하고는 최선생님댁 작은 형한테 전화를 했다. 늦은 시각이라 잠결에 전화를 받으며 내일 보기로 약속을 했다. 마음이 가벼웠다. 이제야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아래채 처마 밑 축담에서 바라보는 시멘트 담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한 단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감나무는 주변 세월의 속사정을 모두 안고 묵묵히 해마다 그르지 않고 자손을 보듬어 내고 있다. 감나무 주위 집 한 채 안에서는 오래토록 가슴속에 많은 일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주홍빛 감색보다도 아름다운 인연과 정분도 함께 안고 있었다.
감을 따러 시골집에 들렀다. 몇 해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난 후 텅 비어 있는 집이다. 자주 드나들지 않은 집이다보니 마루와 틈이 나 있는 어느 공간에도 먼지가 자욱하다. 벌레들의 발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니 최근의 흔적이다. 광(도장)안에는 풍구도 보이고 농기구들이 잠을 자고 있다. 아래채에 눈길이 갔다. 기둥에 걸린 우편함에만 배가 가득 불러 있었다. 기둥에 박힌 빛바랜 알루미늄 표지판에 새겨진 ‘통일벼 재배 우수표창농가’ 이름표가 옛 번성한 농가를 알려주고만 있었다. 구멍 뚫린 창문은 그대로인데 시간은 나를 이만큼 밀어 놓고 있다.
아버지는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 농약에 대한 안전 수칙을 잊은 채 다량의 농약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온 동네 농사를 다 책임지는 듯 했다.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였다. 고된 농사일과 농약 중독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결국 사십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안고 회억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최선생님댁과 우리 가족은 친척일가보다도 더 친하게 지냈으며 형제나 다름없이 가까웠다. 선생님이 아버지보다 두어 살 위이니 선생님과 아버지는 형과 아우 사이로 지냈고 부모들이 그렇게 하니 자식들 간에도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며 우애가 남달랐다.
인연의 시작은 40여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힘든 시절이었다. 우리 집 식구는 할머니를 비롯해서 아버지, 어머니, 4남매, 머슴2-3명. 대농가였다. 아래채에 이사 온 선생님 댁도 머슴들 빼고는 우리식구와 똑 같았다. 새로 부임해 온 초등학교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아래채는 도장과 나란히 있었는데 말이 두 칸이지 중간 밀장 문을 열어 제치면 원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넓은 마당은 있었지만 두 가족이 합해지니 집안을 꽉 채웠고 항상 북적북적한 생활이 참 좋았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은 항상 쟁탈전이었고 불편했다.
선생님은 나의 은사이자 은인이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아침밥을 먹을 쯤 동생과 반찬 다툼을 하다가 쫓겨나게 되었다. 우리는 쇠죽솥 가로 가서 추위를 녹였으나 더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쇠죽솥뚜껑에 앉기로 했다. 솥뚜껑을 다시 고정 시키고 나부터 앉는 순간 솥뚜껑이 스르르 순식간에 미끄러져 쇠죽솥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반사적으로 뛰쳐나와 비명을 지르고 어쩔 줄을 모르는 나에게를 학교로 업고 가 약을 바르고 응급처치를 하고서 아버지와 함께 병원으로 옮기신 분이 선생님이시다. 3도 화상으로 한 순간의 시간이 급박할 때였다.
선생님과 아버지는 농사 일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던지든지 서로 의논하고 도우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고 언성을 높이시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엄마와 사모님도 위채, 아래채에 있었을 뿐 어려운 일을 털어 놓고 서로를 아껴주고 감싸주곤 했다.
10여년을 가족과 같이 생활하다 선생님댁은 다른 학교로 멀리 전근을 가게 되었다. 마지막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는 이별을 할 때 어른들이 서로 안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이들도 따라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그 많은 일거리를 고스란히 어머니가 모두 떠안았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어머니는 바깥일에 대해서는 손끝도 대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랴.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해질 무렵 바깥일을 하시고 돌아오시는 어머니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낯선 사람인가 하고 실수를 범할 뻔하기도 했다. 더욱이 황새같이 여윈 어머니의 가는 다리를 보고서는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철인이었다. 그 조그만 체구에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았는지 우리 남매를 다 대학에 보냈으니까. 새마을 여지도자를 십년이나 넘게 맡기도 했다. 남들 손가락 받지 않게 키우려고 그렇게 힘든 일을 마다않고 하시다가 자식들이 효도노릇 하려고 할 때는 쓰러져 의식을 잃고 겨우 사람만 알아보는 신세가 되었다. 통탄할 일이었다.
선생님 댁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어머니와 내 걱정을 잊은 적이 없었다. 편지로 아니면 전화로 나보다 먼저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잊지 못할 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부터 한 번도 잊지 않고 기일이 되면 직접 오시지 않으면 우체국 소액환을 매번 보내왔다. 제사상에 술 한 잔 올리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으레 친분과 인연으로 여겼으나 내가 사회인이 되고나서까지 십년도 넘게 잊지 않고 그 날을 기억 해 주셨다. 장남인 나는 그분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양친께서 모두 돌아가시자 소식이 좀 뜸하기도 했다. 지금, 오늘까지도 선생님 댁의 고마움을 마음속으로만 안고 있었지 겉으로 표시하지를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않았다. 지레짐작으로 이런 나에게 욕도 많이 했겠지 하면서 소극적인 내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선생님 댁, 울산으로 가는 길이다. 왠지 낯설기만 하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할지를 도착할 때까지 고민을 해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작은 형이 먼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사모님에게 큰절로 인사를 하고 손을 부여잡고 한 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등을 두드려 주시는 사모님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사모님, 마음속에 품어두고는 이제까지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하고서는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용서하고 받아 주십시오.”하자. 나를 일으켜 세워 서로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주위가 갑자기 숙연해 졌다.
오늘 삼우제를 마치고 나서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형은 서울 가는 길을 늦추었으며 벌써 올해 환갑이란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한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직접보기는 사십 여 년 만에 만난 셈이다. 함께 회덥밥을 먹는데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옛 기억을 되살리니 금시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이 되었다. 인정이 두텁다는 것을 이런 분위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비록 선생님께서는 가셨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훈훈한 정은 비온 뒤처럼 더욱 끈끈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가슴에 품었던 것을 털어 놓으니 산수의 청정함과 같았다. 사람 사는 일이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해도 나잇값을 잊는다든지, 못한다든지, 분수와 처지를 망각할 때는 주위로부터 손가락질을 짓을 받지만 좋은 인연을 좋은 기억으로 다듬어 가는 것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되어 기뻤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차창너머 가을 하늘이 더 없이 푸르고 산야의 단풍은 더욱 붉게 불타는 오후였다. 서녘 해넘이를 바라보며 빛을 감싸 안고 아랫방 아재를 떠 올려 본다. 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아지매 혼자 계셔도 밥 잘 챙겨 드시고 부디 건강 하이소.” 우리남매들은 아직도 최선생님과 사모님을 어릴 때 부르던 아랫방아재, 아지매라고 부른다.
이 작품의 특이성은 두괄식 전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수필은 미괄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주제를 미리 제시해 놓고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 그것을 입증해 가는 연역적 글쓰기는 독자를 독서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무화시킬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특히 서두에 제시하는 주제가 사실명제든 가치명제든 정책명제든 상관없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명제적 성격을 띠고 있을 경우, 그때의 글쓰기는 명제의 합당성을 증명해 가는 과정이므로 충분한 흡인력을 지닌다. 이 작품은 연역적 구성을 취하고 있는 사례로서도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적절한 예일지 모르지만, 서두에서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늦게 떨어진다.’라는 사실명제를 내세웠다면 독자가 일고 있는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명제를 만다 당황하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하고 궁금해진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그 뒷부분의 글들을 빨리 읽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10) 휘파람
준이는 휘파람을 곧잘 불었다. 방천을 거닐 때나 나를 불러낼 때도 휘파람을 불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내가 보고 싶을 때, 휘파람을 불면 시원해진다고 했다. 나도 그가 보고 싶을 때는, 볼일이라도 있는 양 그의 집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서성거렸다. 우연이히라도 마주치고 싶어서였다.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손도 잡지 못했다. 그는 휘파람을 불고 나는 돌을 만지작거리거나 발만 꼼지락거리다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진학했지만 그는 집안 형편상 하지 못했다. 가끔 고등학교 책을 훑어보며 훌쩍일 땐 마음이 아팠다. 내가 학교 갈 때는 방천에 우두커니 서서 휘파람만 불었다. 공부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은 방천을 맴돌았다. 하교 시간에 맞춰 둑에 곧잘 앉아 있었는데 나타나는 횟수가 뜸해졌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한참 이성에 눈뜰 무렵이던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눈을 피해 극장 뒤나 방천에서 자주 만났다. 그는 형사가 되고, 나는 섬마을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우리는 가슴에 무지개 하나씩을 그려 넣었다. 그는 형사가 된 다음, 나를 각시로 삼겠다고 했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나도 사정이 생겨서 일 년 동안 휴학하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만날 수 없었다. 그가 생각날 땐 휘파람을 불며 달랬다. 1년 후, 복학하기 위해 집에 들렀다. 그가 여전히 방천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을 것만 같아서 내달렸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반가움에 덥석 안을 뻔하였는데 준이 아버지였다.
“돈이 웬수지, 웬수야. 고등학교가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보내달라고 떼를 쓸 것이지. 물에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멀쩡한 놈이…….”
얼마나 상급 학교가 가고 싶었으면 말도 못하고 물에 뛰어들었을까. 그의 휘파람 속에 그리 큰 아픔이 숨어있는 줄 몰랐었다. 가슴에 담을 수 없어서 보낸 신호가 휘파람이었다니…….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그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나를 기억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물에 뛰어들던 날, 기억 속에 있던 모든 것도 잠재운 듯했다. 나는 준이 색시가 되지 못했고 섬마을 교사도 되지 못했다. 준이의 꿈도 여전히 가슴속에서만 산다.
방천에서 빈 휘파람만 목이 터져라 불었다.
자전적 수필과 사소설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굳이 그 장르적 범주를 규정하자면 자전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자전적 수필은 줄거리를 지닌 서사다. 그러므로 읽는 이가 수필로 믿고 읽으면 교술이고, 콩트라고 여기며 읽으면 서사다. 서사적 형상화에 의해 주제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수필가나 수필비평가들이 수필의 문학성이나 장르비평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는 현상을 반성하면서도, 이 작품의 장르적 귀속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11) 돌아갈 때 가더라도
색의 흐름이 황홀하다. 초록에서 노랑, 주황, 다홍으로 이어지는 빛깔이 바라보는 이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호수를 끼고 도는 내내 터져 나오는 탄성을 멈출 수가 없다. 군데군데 무리 지어 피어있는 하얀 억새꽃이 단풍의 붉은빛을 더 돋보이게 한다.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이 봄꽃을 능가한다고 우기는 친구에게 저절로 맞장구가 쳐진다. 주말 단풍 나들이는 돌아온 후에도 붉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짜여진 생활의 틀을 벗지 못해서였는지 내게 자연은 늘 활동 영역의 바탕색 같은 거였다. 그리고 싶은 주인공들 다 그려놓고 남으면 칠해서 메꾸는 바탕 면 말이다. 적어도 많아도 그리 문제 될 것 없는 듯 그렇게 생활반경에서 밀려나 있었다. (주어는? 자연? ) 기회 다을 때면 찾아가 잠시 쉬며 활력을 얻어오는 장소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슬며시 눈으로 들어와 마음을 자꾸 뒤흔든다.
처음 보는 나뭇잎도 아니건만 새삼스럽게 각각의 모양새가 오묘하고 빛깔이 아름답다. 해마다 피고 지는 꽃들이 예쁘고 또 예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미적대다가 일행들에게 지청구를 듣는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풍광을 보고 감탄사를 지르다가 옆구리를 쥐어 질린다. 구르는 돌멩이도 밟히는 흙도 스치는 바람결까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이 변화가 신기해서 일행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들이 이르기를, 늙어가는 증거란다. 아이들은 예쁘지 않더냐고 묻는다. 예쁘다고, 정말 예쁘다고 대답하기 무섭게 한 대를 더 때린다. 마지막 빛을 발하며 떨어져 가는 단풍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날 때가 다 되어가니 남겨둘 것에 애착이 가고 돌아갈 곳에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나. 내가 벌써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저녁 세안을 하고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들이 그대로 보인다. 마음이 바빠진다. 잠시 생각해 봐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아이들 출가에 양가 어른들 뒷바라지에 직장일까지 아직은 한참을 더 세상 중심에 있다 생각하고 살아내야 할 처지다. 거기다 난 아직 미래에 대한 꿈도 꾼다. 하고 싶은 공부도 더 하고 여행도 하고 예쁜 정원이 있는 집도 지어 살고 싶다.
그런 내가 돌아갈 산천에 가까워지는 기미를 보인다니. 슬며시 오기가 생긴다. 바쁘다는 핑계로 뒤로 미뤄뒀던 여행계획을 앞당겨 실행하기로 했다. 예약을 하고 나니 새로운 힘이 생긴다. 얼굴 가득 마사지 크림을 발라 문지르고 나자 할 일 없던 불안감도 조금 물러나는 것 같다. 거실바닥에 담요를 펴놓고 기억도 안 나는 요가 동작을 몇 개 해본다. 두두둑 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반복동작에 놀랐는지 잠시 멈춰준다. 그것도 위안이 된다.
평생 젊게만 살 것 같은 마음이 갑자기 내리는 서리에 놀라 주춤하다 다시 용기를 내는 것 같다. 하지만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인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 앞에 낸 작은 용기는 가을에 피고 싶어 맺힌 장미봉우리 같다. 아득한 태곳적 자연의 한 부분에서 생겨났든 신의 창조물이든 사람 역시 이 땅을 벗어날 수 없기에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뭇잎이 새순이 돋아 푸르게 자라 붉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과 같이 우리 모습도 변하면서 사라져 가야 한다. 차라리 생명이 유한하기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감사히 여겨야 할 것 같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은 부지런히 얼굴을 토닥이고 다리는 허공을 휘젓는다. 열심히 운동 중이다. 무엇을 하면 노화를 지연시킨다 했는지 사라진 기억을 더듬느라 바쁘다. 어느 멋쟁이 할머니가 노환으로 누워 딸에게 부탁하기를 시신에 꼭 화장 해 달라 했다 한다. 나도 그럴 것 같다. 갈 때 가더라도 가는 날 까지 곱고 싶은 마음은 자신을 지키고 싶은 자존심일까, 떨칠 수 없는 욕망일까.
가을 풍경을 바라보면서 작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적 상황을 발견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발견하고 확인한 자아는 나이 듦의 과정에서 오는 변화이다. 화자는 나이가 들어버린 현실에 대해 순응의 자세를 보이면서도 거역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중년을 넘어서는 과정에 놓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모순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숙연한 감동을 자아낸다.
(12) 흔적
다시 빈집이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발소리가 콩콩 울리는 듯하다. 아랫집 할아버지가 ‘이놈’ 하신다고 아무리 주의를 시켜도 아랑곳하지 않던 아이들 발소리가 금방 그립다. 이 방, 저 방을 들여다본다. 온 집안에 아이들의 흔적이 어지러이 퍼 늘려있다.
여섯 살, 세 살, 두 살 손녀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다. 먼저 시어머니 방을 청소하려다 말고 주문에 걸린 듯 침대에 걸터앉는다. 세 살 손녀의 작은 손이 어른거린다. 큰 접시 하나에 작은 접시 하나를 붙여서 눈사람이다. 고만고만한 둥근 화장품 네 개를 붙여놓은 것은 애벌레다. 놀라워라. 나는 그의 상상력을 따라갈 수 없다. 화장품, 약병, 시계, 효자손, 빚, 가위까지 왕 할머니의 서랍에서 나온 것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배를 만들고 뚝딱 집을 짓는다. 일부러 마음먹고 장만한 장난감은 안중에 없고 아이들이 열지 못하게 테이프까지 붙여놓은 서랍은 어찌 열었는지 왕 할머니의 살림살이가 총출동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 살 큰 손녀는 선생님이다. 영어학원에서 배운 영어를 가르치느라고 동생들을 따라다니며 종일 바쁘다. 궁금한 것이 많아 “왜요?”를 연발하던 큰 손녀는 동생들도 세상이 궁금하리라 여겼는지 선생님을 자청한다. 학생들은 언제나 딴청이고 선생님은 효자손을 두드리며 목청을 높인다. 제집에서는 아기인데 동생들 앞에서는 단단히 언니 노릇이다. 집에서는 안 먹는 것도 동생들 앞에서는 잘 먹는다. 걸음마를 시작한 돌배기 손녀가 언제 주방까지 갔는지 벌써 싱크대 서랍이 열렸다. 비닐백을 꺼내 단숨에 십여 장을 뽑아 사방으로 날려놓고 다시 그릇을 끄집어낸다. 큰언니가 달려가 그릇을 뺏는다. 동생은 울음보를 터뜨리고 울음소리에 놀란 언니가 더 큰 소리로 운다.
참새떼 한마당 앉았다 떠난 빈 마당이다. 탁자 아래에 토끼 머리띠가 뒹굴고 공부한답시고 들고 다니던 그림스티커 책도 보인다. 소파에는 양말 외짝이 처박혀있다. 거실 바닥에는 인형들이 무더기 무더기다. 제 것은 손에 들고 동생 것을 뺏으려더니 제 것마저 놓고 갔다. 친정이라고 무장해제를 한 딸들은 진작 각자 가방을 챙겨놓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언제나 허사다. 모처럼 만난 자매끼리 희희낙락하다가 기차 시간에 맞추느라 셋째가 일어서면 덩달아 따라 나서느라고 잘라놓고 간 꼬리가 여기저기다.
빈자리가 허전하다. 전화기를 열고 저장된 사진을 거꾸로 돌린다. 덩굴 속에서 외 자라듯 쑥쑥 자라는 아이들. 옹알이를 하고 뒤집기를 할 때 세상은 매일 기적이었다. 사람과 눈을 맞추고 환하게 웃을 때 아이는 꽃이었다. 도리도리하고 곤지곤지 할 때는 재미가 샘물처럼 솟았다. 월령에 비해 말이 빠른 것을 천재가 아닌가 싶어 외할미가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가. 걸음마가 늦다며 걱정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 아이의 걸음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영상을 들여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동영상 속의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함께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돌배기도 덩달아 손뼉을 친다. 언니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다 부딪혀서 넘어져 울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한 덩어리다. 아이를 바라보는 일은 작년에 심었던 백합에서 새순이 가득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름다운 꽃 무더기다. 이게 무슨 행운인가. 지구 위에 이 축복이 다시 있는가. 마음이 어느새 숲길처럼 맑아진다.
기억의 창고를 뒤지듯이 사진을 되돌린다. 히죽 웃다가 혼자 보기 아까워 남편을 불러댄다. 청소하려고 일어서려는데 카카오톡으로 외손녀의 영상이 우르르 들어온다. 큰 애는 제집에 도착해서 잘 왔다는 인사다. 역대합실에서도 여전히 뛰어다니던 셋째네 손녀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얌전히 잠들었다. 둘째는 왜 소식이 없느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식탁 위에서 신호가 응답한다. 아이 챙기느라 전화기를 두고 간 모양이다. 그렇잖아도 손녀들이 한꺼번에 떠나 허전했는데 반갑다. 전화기 찾으러 다시 돌아올 손녀를 기다리며 밖을 내다본다. 10.6장
손녀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 그곳에서 떠오르는 회상을 모았다. 손녀들이 뛰어 놀던 모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손녀들의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상의 환희라는 점에서는 통일된 전체성을 지니나, 일정한 순서를 따르는 선조적 글쓰기는 해체되어 있다. 이질적인 파편들의 결합은 아닐지라도 각 단락들에 담아낸 내용들은 독립을 지닌다. 이런 특성을 지닌 글쓰기 방식을 병렬식 구성이라고 하며, 그 결과로 생산된 이와 같은 형태의 글을 신재기의 말을 빌리자면 ‘하이퍼텍스트적 특성’을 지닌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하나의 주제가 소재를 랜덤random하는 창작방법을 본다. 일상이 그리 따분하거나 고통의 연속은 아니며, 때로는 환희이고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13) 손
웬일로 늦장을 부리며 침대에서 뭉그적대고 있다. 미뤘던 방 정리를 딸과 같이 할까 했더니 한마디로 거절이다. 저녁 연주를 위해서 몸 쓰면 안 된단다. 서운한 마음으로 방을 나오다가 벽에 걸린 딸의 일정표를 보았다. 시월 한 달 중 빠끔한 날이 없다. 그간 너무 무심했었나 보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딸에게 그저 밥 먹었느냐고 묻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다 자란 딸을 언제까지 어린아이 취급할 수는 없었다. 혼자서 잘 해내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어디든 제힘으로 뚫어내기를 바랐다. 그런 내 기대와 달리 여기저기 열심히 발품을 팔고는 있지만 자리 잡는 일이 쉽지 않나 보다. 엄마의 호응이 한 줌 격려라도 될까 싶어 적당한 날을 짚었더니 초대장을 준다. 딸 핑계 삼아 호젓한 가을밤 나들이 한번 해보겠다.
설거지를 마치고 물에 젖은 손을 닦는다. 혹여 누추한 차림새로 딸의 체면을 구기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여 옷장을 들쑤셔 본다. 겨우 외투 하나 골라 입고 길을 나선다. 빼딱 구두가 불편하지만 딸을 생각하니 참을 만하다. 연주회장으로 가는 동안 클래식 채널을 찾아 귀를 씻는다.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긴다. 동네 마당에서 친구들과 구슬치기 하다가 집에 돌아와 숙제하는 느낌이랄까.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이 최고였던 어느 날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겨진 스파게티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검은 정장의 연주자들이 각자 자신의 악기를 점검하느라 무대 위가 소란스럽다. 흐릿한 조명 속에서 내 아이가 제일 먼저 ‘솔’ 음을 낸다. 나머지 악기들이 그 음에 맞춘다. 마침내 조명이 밝아지고 지휘자가 등장한다. 가을밤 클래식의 향연.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 연주된다. 누가 어떤 악기를 연주하든 내겐 그저 흘러가는 냇물이다. 긴 냇물 사이사이에 들리는 딸아이의 연주 부분에 귀가 쫑긋한다. 이젠 여유가 있어 보는 나도 편안하다. 연주회 후반부, 마흔쯤 되어 보이는 피아니스트가 나왔다. 올리브색 벨벳 드레스에 컬이 멋진 긴 머리. 한껏 멋을 낸 모습이 우아하며 당당하다. 길고 긴 곡을 악보도 보지 않은 채 연주한다. 프로필이 궁금하여 안내서를 들춰봤다. 한 면을 가득 채운 그녀의 프로필에 입이 쩍 벌어진다. 그 내용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피아노 건반 위를 오르내리는 그녀의 손놀림이 현란하다. 저 피아니스트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자식이 있을까. 그녀도 물에 손 담그고 설거지할까. 남편을 위해서 다림질도 할까. 아니야.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궂은 일 하면서 피아노를 저토록 잘 칠 수 있겠어. 틈만 나면 식구들이 찾는데 그들의 부름을 다 들어주다 보면 내 시간이란 게 없지 않던가. 아마도 손을 신줏단지 모시듯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겠지.
어둠 속에서 내 손을 만져본다. 누군가 내 손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요즘 들어 텃밭 일까지 보태졌으니 완전 농사꾼 군 손이다. 손톱이 망가지고 그 밑이 검게 변해 있다. 비누로 뽀독뽀독 씻고 밤마다 로션을 발라도 속수무책이다. 매니큐어 발라본 지도 까마득하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고 했던가. 나 자신은 힘겹다 생각 않고 살아왔지만 손은 힘들었나 보다. 별다른 프로필 한 줄 없으면서 참으로 험하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아무 일에나 덥석 덤볐던 시간이 후회로 다가온다. 칼에 베이기도 하고 가시에 할퀴는 날도 많았다. 손을 뒤로하고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빗자루 들면 온 집안이 반들반들하고 호미 들면 온 밭이 금세 환해졌다. 김치 담그려고 쳐 놓은 무채 앞에서 그 가지런함에 반해 허옇게 웃기도 했다. 심어놓은 고추며 가지나무에 꽃이라도 피면 그 앞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글감이라도 하나 나타나면 자판 위의 손놀림이 현란하다. 피아니스트가 왔다가 울며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오늘도 겁 없이 물에 손을 넣는다. 삶의 무대에 올라온 이상 몸을 사릴 순 없다. 제자리 찾으려 동분서주하는 딸. 군말 없이 그의 뒷손이 되자. 그리고 가끔 딸의 오보에 연주 들으며 내 손에게 휴식을 주자. 뭐든 미루지 않고 열심히 사는 내 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밤이다. (14.9)
평이한 문장, 간결한 문장, 과도한 비유로 치장하지 않은 소박한 문장들의 연결이 무척 가지런하다. 이러한 문장을 두고 ‘정제된 문장’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정제되어 있지만 결코 건조하지 않다.
딸의 연주회에서 손놀림이 현란한 피아니스트의 귀한 손을 통해 그녀의 삶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펼치다가, 이것을 연상의 끈으로 삼아 자신의 거친(천한) 손으로 시선을 몰아간다. 피아니스트의 상상속의 삶과 화자의 현실속의 삶은 대조된다. 대조를 통해 두 손은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인식에 이른다. 사물은 제각기 제 빛깔과 제 역할이 있다는 말이다.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중요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주제가 언어의 기표 속에 암시되어 있는 셈이다.
(14) 석등과 가로등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 하나 서 있다. 국보 17호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팔각의 석등은 3단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까지 얹은 세련된 모습이다. 네 면의 화창(火窓) 사이에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무량수전과 3층 석탑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햇살을 받고 있는 석등은 이제는 그 옛날 뭇 대중들을 밝히던 등불은 아니지만 가람의 수호자인 양 우뚝 서 있는 자태가 참으로 의연하다. 온 도시에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가로등과는 확연히 다른 풍광이다. 어둠을 밝히는 같은 등이라 해도 석등을 보면 사뭇 마음이 경건해진다. 우리 옛 조상들은 부처의 광명을 밝히고 중생을 인도하는 길잡이로 석등을 세웠으니 아마 가로등의 역사는 석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불국사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앞에 서 있는 두 개의 석등이 남아 있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등불은 부처의 지혜를 뜻하며 이 등불이 켜질 때 중생의 어둠은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절 마당이 아무리 넓어도 석등은 하나만 세운다고 하는데 불국사에는 두 개의 석등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을 별개의 영역으로 본 것이라 한다. 불국사 석등은 네모난 창으로 보면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연화문과 석등, 대웅전, 본존불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신라인들의 부처님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기에 석등이 새삼 내 마음을 사로잡아 발길을 머물게 한다.
한편으로 태양에 대한 숭배는 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인 경외심이 드러난 의식이었을 것이다. 만물의 근원이자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태양은 그야말로 인류 이전의 무한자적 존재이기에 현대인에게도 늘 광명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태양신 사상의 수많은 흐름 중의 하나가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 종교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니 태양과 우리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가로등은 태양보다는 달에 가깝기는 해도 광명이세(光明理世)를 중시하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래도 태양 같이 밝은 가로등이 더 어울린다.
가로등은 가로수가 생기면서 보편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가로수가 우거진 신작로가 도회지에 만들어지면서 길을 밝히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등이 거리를 밝히면 가로등이 된다. 1,900년 어느 날 우리나라에도 최초로 종로에 가로등이 생겨 온 장안에 화제가 되고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해와 달의 자연광이 아닌 인조광으로 비추는 가로등이 신기할 때가 있었으니 세월이 참 무상하기도 하다. 곧게 뻗은 신작로에 줄지어 선 가로등을 보며 당시 사람들은 서양의 지혜를 흠모하지는 않았을까.
박인환의 시구나 대중가요 가사에 나타난 가로등은 만남의 장이자 이별의 아픈 흔적을 간직한 추억의 매개물이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봄날에 우산을 받쳐 들고 가로등 불빛 아래서 오붓한 상봉을 즐기는 청춘 남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함박눈이 솜처럼 내리는 가로등 아래에서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이별의 흐느낌에 울먹이는 두 연인은 환한 불빛이 오히려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이 될 것이다. 인생살이의 온갖 희비가 불빛 아래 날마다 펼쳐지는 만화경의 세계가 바로 가로등이다.
오늘의 가로등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태양의 동반자가 되어 밤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가로등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요긴한 문명의 이기로 인류 역사 발전의 촉매제가 되어 왔다. 달빛의 낭만 어린 풍광을 대신하면서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창조해 낸 가로등의 역사는 불과 이백년 남짓이다. 시골의 한적한 신작로에도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길 떠난 나그네를 지켜주는 듯하다.
부석사에 들러 고즈넉한 산사의 지킴이가 된 석등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이제는 아무도 석등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볼 수가 없다. 중생들의 무명을 걷어내려던 지혜의 불빛이 가로등으로 변해 버렸다. 무수한 가로등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해도 그 옛날 석등 하나가 밝히는 지혜의 가르침을 따를 수가 있으랴. 산사를 내려오며 내 마음에 조그마한 석등 하나를 밝힌다.
문장의 흐름이 청산유수 같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 같다. 단문이 주를 이루는 간결체가 아니라 복문 투성이인 만연체를 구사하면서도 막힘이 없는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누가 수필의 문장은 간결해야 한다고 했던가. 간결체가 만연체보다 가독성이 앞선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판단일 뿐이다.
석등과 가로등이라는 정물을 두고 펼쳐놓은 작가의 해석과 가치평가가 작품을 치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술문학의 본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뛰어넘어 인간의 무명을 걷어내는 석등의 속성을 해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성찰에도 이르렀다. “산사를 내려오며 내 마음에 조그마한 석등 하나를 밝힌다.”라는 서술이 작가나 독자 자신에게 던지는 당위적 명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운이 있다. 주제를 직설하지 않고 기표 속에 보일 듯 말 듯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로등은 석등의 이미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주변 소재일 뿐이다.
(15) 발성연습
연립주택 아래위층간 소음문제로 살인과 방화가 있었다는 매스컴의 연속 보도를 들었다. 소음을 견디다 못해 시비가 벌어졌고 그러다 욱 하는 기분을 참지 못하여 상대방이나 그 주택에 상해를 입힌 모양이다. 언젠가 교수인 손아래 동서도 아파트 위층의 소음에 대해 자제요청을 했다가 부정적 반응을 듣고는 아예 집을 팔고 다른 아파트 맨 꼭대기 층으로 이사를 감행해 지금도 살고 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한 세월이 되었다.
매스컴의 보도에 나는 진땀이 났다. 진땀이 난 것은 바로 내가 우리 아파트에서 소음공해를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래위층이 아니라 옆 층과 다른 층까지 두루 소리가 들릴 만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으니 연립주택의 소음쯤은 아마도 약과일 것이다. 단순한 소음이 아니고 성악곡이라 일부 주민들은 귀가 솔깃했을 수도 있겠지만 노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다른 주민들에게는 고역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한창 성악에 취미가 붙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아파트 공간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태리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는 꼭 한두 군데 고음 클라이맥스가 있어 아래위층에 들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낮추어 부르자니 노래 부르는 맛이 영 나지를 않았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부탁말씀>이 붙었다: “노래 소리가 커서 지장이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자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것은 분명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당장 목소리를 낮추고, 그것조차 신경이 쓰여 나중에는 숫제 입을 봉했다. 그리고는 부탁말씀 아래 공간에 “미안하다”는 말을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차일피일 하다가 삼 일째인가, 사인펜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더니 아뿔싸, 이미 누가 한마디를 적어놓은 게 아닌가: “제가 아침, 저녁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아마 들린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아니, 그럼 나 말고 다른 범인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났다. 어쩌면 저 <부탁말씀>은 어떤 분이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나의 반응을 기다리던 나머지 아무 응답이 없자 조급증이 나서 내게서 듣고 싶은 반응을 자신이 적어서 나의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려 한 게 아닐까.
그러나 <부탁말씀>의 정중하고도 간곡한 표현으로 보아 내가 너무 넘겨짚은 것만 같아서 그의 진심을 그대로 믿기로 했다. 나도 한마디 적어 넣고 싶은데 무슨 말이 좋을지 신중한 마음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적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살살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부탁말씀에 순응하면서 발성연습에 대한 나의 의지를 유지하려는 답변이었다.
내가 은퇴하여 성악공부를 시작한 것은 차선책이었다. 원래는 색소폰이 좋아서 선생을 찾아가 등록까지 마쳤는데 악기를 연습할 장소가 마땅찮았다. 학원에서만 연습해서는 제대로 마스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치지 않고 어디 승부가 나던가. 아파트에서 연습하자니 소음이 문제고, 산에 가자니 모처럼 산에 오른 등산객들의 여가를 망칠 게 분명했다. 그 소리가 오죽이나 큰가.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기에 색소폰 배우기는 포기해버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성악이 좋을 것 같았다. 목소리는 내 몸에서 나오니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낼 수 있어서 악기처럼 휴대할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으니 편리성에서 따를 악기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멜로디만 연주하는 악기와 달리 노랫말이 있으니 소통에 있어서도 얼마나 효율적인 악기인가. 다만 겨울철에 독감만 조심한다면 몸의 악기는 전혀 탈날 일이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서슴없이 성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발성연습이 무리일 것 같았다. 어느 날 오페라교실 가던 중 승용차 안에서 불러보았다. 좁은 공간에서는 공명이 잘 되었고, 소리도 근사하게 들렸다. 그 이후로 승용차는 나의 소중한 발성연습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만 한 가지 흠은 노래할 때 입을 떡 벌리고 하다 보니 마침 신호등에라도 걸리면 옆에 정차한 차에서 내가 욕이라도 하는 줄 알고 잔뜩 놀라 바라보는 일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인적 드문 계곡이 제격이다. 드넓은 산의 품이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발성연습장이다. 구릉과 오솔길에서 목소리의 반향은 언제나 새롭게 들린다. 앞산은 이제 나의 근사한 음악실이다.
최근 다시 아파트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날씨가 춥기도 하지만 노래에 약간 자신감이 붙은 탓이다. 조금 호기를 부리자면 나의 이웃이 이 멋진 예술을 도대체 어디서 쉽게 접한단 말인가. 조용한 절집에도 풍경소리와 염불소리는 있다. 이것이 어디 바닥을 쿵쿵치는 탁음과 같은가. 집에 가만히 앉아서 오페라 아리아를 감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수지맞은 일이 아니고 뭔가. 그러나 나의 생각은 주관적 판단이자 몽상일지 모른다.
이웃의 원성을 사지 않으려면 더욱 실력을 연마하는 수밖에 없다. 새들과 풀벌레들의 노래를 듣고 누가 시끄럽다 하던가. 노래에 영혼을 불어넣어 귀가 솔깃하도록 온몸으로 노래한다면 아마 이웃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기량을 갈고닦아 고수가 되어야 하리라. 그래야만 곤줄박이나 귀뚜라미가 창가에 날아와 아무 때나 마음껏 노래해도 뒤탈이 없듯 나 또한 아파트 공간에 살아남아 실컷 노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때는 아내가 기급을 하며 손사래 칠 일도 없을 것 같다. (13.8매)
상상이나 해석의 기발함(재치)이 독자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수필에는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한다’(있으면 더 좋다)는 수필이론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6) 고개를 숙이고도
갑작스레 찾아온 증세였다. 며칠간 눈앞에 날파리가 날더니 검은 장막이 점차 내려와 시야가 가려졌다. 안과를 찾았다. 망막박리라 했다. 수정체를 통과한 물체의 상이 맺히는 망막이 떨어진 것이다. 수술을 받았다. 집도의사가 동공에 있는 액체를 뽑아낸 뒤 손상된 망막을 붙이고 나서 불소가스를 동공에 채웠다. 가스가 위로 휘발하는 특성을 이용하여 붙인 부위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망막을 밀어 올린다. 자나 깨나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일어나 앉아도 고개를 깊이 숙여야 가스가 새 나가지 않는다.
의사는 “안과로서는 매우 큰 수술에 속하고 어쩌면 원래의 시력을 회복할 수 없을 수도 있고 회복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멀쩡하던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 부인이 재작년에 수술 받았는데 결국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될까 불안한 마음을 애써 추슬러 본다. 엎드려만 있으려니 헬렌 켈러까지 떠올릴 정도로 온갖 걱정이 다 든다. 그러게 왜 무리를 해가며 극성을 떨었을까?
8월 하순에 바로 옆의 신축 건물로 지점 이전을 하였다. 은행은 공공기관인 만큼 복잡하고 신경 쓸 일도 많았다. 실내장식공사 점검, 집기비품 점검, 서류 장표 정리, 이전식 행사 기획 등등….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탓에 직원들에게 분담시킨 내용도 꼼꼼히 직접 점검하느라 지쳐갔다. 평소에도 불면증이 있는 터에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막바지 한 주간에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하여 정리 점검을 하였다.
그 무렵부터 오른쪽 눈이 왠지 찝찝하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뭔가 탈이 날 징조가 아닐까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지금 그런 것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어 괜찮아지겠지 하며 예사로이 넘겼다. 이전식도 성대하게 치르고 훨씬 좋아진 환경에 고객들도 직원들도 만족해해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날 저녁 이전하느라 고생한 직원들 격려차 본부장이 오셔서 전 직원 회식을 시켜 주었다. 그 간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며 열여덟 명 전 직원과 술 한 잔씩을 주고받았다. 집에 돌아오니 몸은 천근만근 피곤이 극에 달한 느낌이더니 결국 탈이 난 것이다.
엎드려 자는 것, 게다가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로 자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30분을 견디기가 어렵다. 허리가 아파오면서 온몸이 뒤틀린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일어나 앉아도 고개는 들지 말아야 한다. 친지들이 문병 왔다가 고개를 못 드는 내 모습에 민망하여 빨리 가주는 게 문병이겠다며 황급히 일어나곤 한다.
30~40분 간격으로 자세를 바꾸려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코를 베개에 박으니 숨쉬기가 곤란하다. 어쩌다 잠이 들면 간호사가 각종 검사한다고 수시로 깨운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하루가 왜 이다지 긴지, 길고 긴 하루하루다. 문병 온 사람들에게 경위 설명을 반복하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체온과 맥박을 검사하러 온 간호사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유 힘드시겠어요. 머리가 얼마나 무거운데…….”
“내 머리는 든 게 없어서 그렇게 무겁진 않네요.”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까지는 그나마 좋았다. 2~3일이 지나면서 늘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머리 무게는 주체할 수 없는 고통이다. 돌대가리라 그런가. 아니면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가.
남들 앞에서는 가식적으로 칭찬하고 아껴주면서 선량한 척, 고고한 척, 점잖은 척해 놓고는 조금만 마음에 거슬리면 가차 없이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함부로 내뱉고 나 좋을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몇 번이던가?
이번의 점포이전 일만 해도 그렇다. 임기도 다 되었는데 그냥 조용히 있다 가면 될 터였다. 더 나은 영업환경을 확보해야 한다는 어쭙잖은 사명감과 공명심을 내세웠다. 바로 옆의 건물로 이전하여 옛 건물주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체계적인 계획과 준비로 차질 없이 깔끔하게 이전해야 한다며 직원들을 몰아붙이고 야근에 휴일근무까지 강요했다. 초청장을 보내놓고도 확인전화로 축하한다는 난화분이라도 보내 줄 것을 은근히 강요했다. 이색적인 이전 행사를 기획합네 하면서 남들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을 화분 배열, 내빈 초청, 연주자와 성악가 초청으로 부산을 떨었다. 내 뜻대로 따르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직원들을 닦달해댔다.
그것뿐인가? 남들이 아프다 할 때는 그냥 그런가 하고 무심히 지나쳐 놓고는 내가 좀 아프니 어찌 그리도 관심이 없느냐고 불평했다. 심지어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어 관심을 촉구한 건 어쩌고....... 정이란 게 베푼 만큼 돌아오는 건데 쥐뿔만큼 베풀고는 무얼 그리 많이 바라는가? 스스로 고개 숙여 마땅하다.
더 크고 중한 죄도 많겠지만 언젠가는 절대자가 심판해 주시겠지. 넘어진 김에 쉬어가랬다고 고개 숙인 김에 많이 반성하자. 내 기억 속의 죄스러움을 정리해본다. 지금까지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이니 내 인생의 리셋키를 눌러 삭제하자. 이제부터라도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 항상 떳떳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살아가자 결심한다.
그런데 마음 저 밑에서 슬며시 밀고 올라오는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13.8)
안과 수술 후의 회복기간에 이루어지는 대인간계에 대한 회억과 성찰을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유머와 위트가 보인다. 수술 후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 고개 숙이고 있어야 상황과 삶에 대한 반성으로서 ‘스스로 고개 숙여 마땅하다’는 상황을 동일한 의미로 연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위트다.
그런데, 이 작품의 핵심내용을 마지막 단락에서는 부정해 버린다. “그런데 마음 저 밑에서 슬며시 밀고 올라오는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제목도 이런 반전을 예고했었다. 그렇다면 이 수필에서 작가는 자신의 어떤 자화상을 그리려 하였는가.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야비성? 이중성? 모순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