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동포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피땀으로 가꾸어 온 재독동포사 45년의 생생한 역사를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제목으로 교포신문사에서는 격주로 총 40회(약 1년 6개월)의 계획으로 2면에 걸쳐 연재한다.
이 연재물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이곳 독일 땅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독일에서의 정착 및 재독동포 사회의 건설, 2세들을 위한 헌신, 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등 그 절절한 사연들을 담게 된다.
이 연재물은 지난 1년간 준비위원으로 수고해 주신 김무현, 나복찬, 이종진 준비위원님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교포신문사의 금번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연재물이 우리 재독한인사회의 온전한 45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서는 독자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 -편집실
한인회의 전신인 유학생들의 모임 퇴수회(退修會)
초창기의 한독 관계
일
제 치하 이전부터 한독 관계가 서로 유지되었던 역사 관계와 그 기록까지 역시 분명하게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구한말 때인
1908 년경에 김 중세 박사가 이미 베를린 대학에 유학하면서 철학과 고전학을 전공하여서 1923 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바
로 그 이전이었던 1883 년경에 한독 조약이 서로 체결되면서 공식적으로 양국가는 유학생을 교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고,
이 무렵에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안 중근 의사의 진사 가정에는 일찍이 독일 신부들이 서로 내왕하였던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그의 친
사촌형 안 봉근이 이 당시 독일을 내왕한 사실과 함께, 노버르트 베버(Nobert Weber) 독일 신부가 쓴 너무나 유명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Im Lande der Morgenstille: 1915 년)」라는 책 가운데도 이러한 사실들이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처럼 1920 년대 초반부터 이런 저런 사유로 독일로 유학한 사람들로는 안남규, 안동혁, 유재성, 배운성, 김형태 등이 있는데,
그중에는 한국인들이 독일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경우가 가장 흔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의 저자 이 미륵 (본명 이 의경1989-1950) 이나, 또 1960
년대 독일 유학 당시에 「생의 한가운데(61 년)」와 「데미안(64 년)」을 번역하였고, 또한 독일의 반전 작가 하인리히
뵐의「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와 동일한 제목으로 그녀의 수상록과
일기집을 발표했던 여류 작가 전혜린(1934-1965)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경우에 포함된다.
결
국 이 두 한국인 작가들은 우리나라를 독일에다 알리거나, 아니면 독일을 한국에다 가장 먼저 알린 한독 관계 초창기 때의 문화
사절들이다. 그리고 나치 정권 때 「뮌헨 대학교 백장미회 사건」으로 함께 처형된 후버 대학 총장과 평소에도 교분이 깊었던 이
박사의 일대기가 최근 바이에른주 방송국과 한국 SBS 방송국의 합작으로 이종환 감독에 의해서 약 60분짜리 3회분의 TV-방송
드라라(교포 2세 최성호씨 주연)로 제작된바 있다.
독일 유학생들의 친목 학술단체 「퇴수회(退修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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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개최한 성탄절 파티에 모인 당시 유학생들(사진: 이 수길 박사 소장) |
그런데 이처럼 개인적인 독일 유학의 뚜렷한 인연과 그들의 활동은 퍽 많았겠으나, 그와 같은 자료들도 현재 거의 보존되지 않고, 또한 하나의 단체 조직을 구성하려던 움직임도 역시 매우 뒤늦게야 시작한 것으로 밝혀진다.
처
음 한인회의 조직에 관한 자료들까지 역시 정확하게 보존, 정리되어 오지 않으나, 대충 1962 년경 뮌헨 지방에서 독일 유학을
마치고 대학 교수로 재임하였거나 연구원 등으로 일하면서 독일에 장기 체류를 하고 있던 안 병무 철학박사, 권혁민, 태용운, 김
웅, 이영빈 목사들이 조직한 한인 유학생들의 학술 모임이였던 「퇴수회(退修會)-공부를 마친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재독 한인회」
조직의 필요성을 서로 토론하면서 첫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
렇게 「재독 한인 연합회」의 모체가 된 이 퇴수회는 원래 1960 년대에 일어난 국내의 「4. 19 학생 혁명」으로 인해 독일
교민 사회에서도 민감한 큰 영향을 미치므로, 당시 독일에 체재한 한인 유학생들로 하여금 그냥 무책임하게 공부에만 열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국내의 학생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공식으로 표명하면서, 당시 독일 유학생 약
400 여명을 하나로 규합하려던 조직체로, 또한 귀국 후에는 사회 지도자로서 조국의 민주적인 국가 발전과 그 장래를 연구
토의하고, 미리 훈련하려던 학술 단체로 1962 년 7 월 10 일에 조직, 출발을 했었다. 그러면서 일년 간격으로 열린 이 학술
모임의 각 지역 회의 장소 결정과 그에 따르는 모든 소요 경비와 대회 준비를 당시 독일교회
청년국(Arbeitsgemeinschaft der evangelschen Jugend Deutschland)에서 간사장으로 있었던
이 영빈 목사가 독일 종교청으로 부터 지원을 받아서 프랑크푸르트시 인근 도시 타우누스 감리교 수양 관에서 「민족 경제」라는
주제로 첫 모임을 가지면서 그 활동을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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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철학 박사 |
그
러나 후 일 이 모임은 소위 정부 정책에 대한 온건파와, 그 반대로 동서 냉전 속에서도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독일인들의
다른 모습인 국토 분단 현실을 지켜보면서,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신념을 가졌던 유학생(주로 이북이 고향이고, 또한 그곳에다 친인척을
둔 인사)들로 그 행보를 각각 달리하는 두 그룹으로 다시 양분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정부정책에 대한 강경노선과 온건노선은 아래의 예에서 잘 살펴볼 수가 있다.
당
시 퇴수회 회원이었던 안병무 선생은 1차 회의를 끝내면서 다음과 같은 자기반성을 요구했다 “첫째로 불청객 대사관 직원을 받아들인
것이 우리들의 큰 실수다. 민주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면서 아직도 관권(官權)과 정권에 아첨하는 태도는 시민의 후진성을 노출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관권은 아직도 시민을 지배하려는 근본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민주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주권을
의식하고 확보하기 위해서도 장차 우리 유학생들의 집회에 대사관의 직원들의 참석을 거절해야 한다.”
그
러나 제2차 퇴수회에는 대사관직원을 정식으로 초대하고 강연까지 부탁할 정도였다. 그리고 대사와의 좌담회까지 행사순서에 마련하였다.
또한 회의를 마치면서 이제는 `한인회'를 구성할 때가 왔다고 토론하게 하며, 강경파는 다른 외국의 한인회처럼 대사관 소재지에
한인회를 둘 경우 `해외공관의 하부조직으로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참석한 재독 유학생 다수는 '재독 한인회는 주독
한국대사관 소재지에 둔다'라고 정부와의 협조적 안건을 채택하였다.
그
러나 정부에 대한 강경한 의견을 제시한 회원들의 신념은 「조국은 하나다」라는 애국 충정에서 우러난 행보였지, 다른 사회주의 신봉
사상이 아니었던 사실은 추후 고국의 민주 인사들과 같이 연계된 민주 사회건설 등 조국 민주화를 위하 활동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상의 옛 자료로 분석할 때, 즉 이 사실은 후일 실정법(반공법)을 위반한 협의를 받았던 소위「동 베를린 사건」으로 역사적, 시대적, 민족적인 비극으로 다시 한번 크게 확대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
와 같은 배경으로 1963년 10 월 26 일에 두이스부르그( Pestalozzidorf str 41 Duisburg-
Beckerwerth)에서 한인회 첫 발기 총회 소집 회의를 열고 박 종서를 임시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다시 1964
년 4 월 24 일에는 뮌헨에 소재한 「Gasthof 」에서 총 95 명이 소집된 가운데 제 1 차 정기 총회를 열고 함께
회칙을 통과시키면서 당시 베를린 대학의 윤 이상 교수를 제 2 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또
한 이 친목 단체는 사단 법인 등록 절차를 밟기로 결정한 후, 그 이듬해였던 1966 년 3 월 22 일자로 처음에는 「사단 법인
재독 학생회(Verband Koreanischer Studenten in Deutschland e.V. : Bonn 법원 등록
번호 19VR 3155 호)」로 정식 등록한 것으로 회의록에다 밝히고 있다.
이
런 사실 자체는 독일 한인 연합회의 첫 조직이 아니라 당시 독일에 진출했던 유학생들의 친목 단체로서 처음에는 출발했던 것으로 잘
증명하고 있는데, 그 후 약 6 년이 다시 지난 1972 년 8 월 21 일자의 법원 등기부 기록으로 제 9 차 정기 총회 때부터
다른 일반 회원들까지도 다시 영입한다는 회칙으로 새로 개정하면서, 이때부터「사단 법인 재독 한인 연합회(Verband der
Koreaner in Deutschland e.V.)」로 그 명칭까지도 역시 변경하여서 재등록하였던 기록이 남겨져 온다.
그
러나 처음 순수한 학술 모임으로 출발했던 이 퇴수회 속에 당시의 한국 대사관이 차츰 개입하면서부터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진보적인 입장의 인사들과, 또한 그런 움직임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인사들로 서로 크게 양분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후 악명 높던 유신 독재 정권이 해외 석학들의 진취적인 활동을 크게
저지하려던 일명「동백림 사건」과 또한「해외 유학생 간첩 단 조작 사건」들은 결국 해외 독일 한인 사회의 거족적인 성장 요인을 뿌리
체 뽑아 놓고,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씌워 왔던 사실로 짐작 할 수 있다. 정말 개탄해야 할 재독 한인사의 어둡고
비극적인 한 단면과 함께 분단된 조국을 가졌던 해외 한인들만이 겪어야 했던 남다른 고충과 역사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와 같은 그 뒤 배경에는 당시 독일 내에서 흔히 나돌던 출처 모를 공산 이념 논쟁의 극심한 혼란 상태와 함께, 동시에 민주화
움직임을 국내 치정자들은 이를 기화로 정적들의 입을 아예 봉쇄하면서 장기 집권을 위한 한 압력 수단으로 적극 이용하므로 많은
정치적인 희생자를 배출했던 특수한 그 사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