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의 여인' 작사, 작곡자
글 : 김용만(한양대사대부고 교장)
'산장의 여인' 작사자 반야월
작사가 반야월(半夜月)은 가수 진방남(秦芳男)의
다른 이름이다. 마산 출생으로 본명은
박창오(朴昌五, 1916- )이다.
박창오는 진해농수산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에서 나사점(양복점)을 하다가,
1939년 김천에서 열린, 태평레코드사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한 전국 가요 콩쿨 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하여 콜럼비아레코드의 전속이 되었고,
이름(예명)도 진방남이 되었다.
이때 역시 콜럼비아의 전속 작곡가로 있던
이재호를 만나 가수 및 작사자와 작곡가로서
평생 동지가 된다.
1940년 첫곡으로 내놓은 이재호 작곡의
'불효자는 웁니다'가 히트하여 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이어 이재호 작곡의 ’세세년년‘, ’노래하자 하루삔(꽃마차)‘ 등의 히트곡을
내어 백년설, 백난아와 함께 콜롬비아레코드의 주력 인기 가수가 된다.
얼마되지 않아 가수 진방남은 곧 작사가 반야월로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자신이 부른 ‘꽃마차'를 비롯하여, '울고넘는 박달재' ,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유화' '소양강 처녀' 등 우리가 부르는 옛 가요의 절반에
이를 정도의 곡을 그가 작사했다고 할 정도로 많은 노래 말을 내놓게 된다.

대략 4500여 곡 정도의 노래 말을 지었고,
그 중 3000곡 정도가 음반에 실린 노래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작사한 곡이 많다보니, 반야월이라는 이름 하나로만
사용하는데 한계를 느껴, 추미림, 박남포, 허구, 남궁 려,
금동선, 고향초, 옥단춘, 백구몽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다작의 정력적 작곡가였다.
반야월의 작사한 곡에 대한 노래비가
‘내 고향 마산항’ 노래비(마산)를 비롯하여
‘울고넘는 박달재’(단양), ‘단장의 미아리 고개’(서울),
만리포 사랑(태안), 소양강 처녀(춘천),
삼천포 아가씨(사천) 등 8개나 된다고 하니
그의 지명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사실 그는 2004년 음악계의 노밸상이라 불리는
‘세계음악저작권협회‘가 수여하는 CISAC 골드메달을
수여 받았다.
반야월은 가수, 작사자로서 뿐 아니라
극작가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산홍아 너만 가고’, ‘허생원’, ‘눈 내리는 마산항’ 등
집필한 극본만도 수십 편이 있다고 한다.
반야월 선생이 ‘산장의 여인’의 노래말을 지은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반야월은 6. 25동란 때 고향 마산으로 내려가
마산방송국의 문예부장으로 음악관계 일을 보고 있었다.
어느 날 국립마산결핵요양소에 (가수 秦芳男으로서)
위문 공연을 갔을 때, 관중석 뒷편 좌석에서
흰옷을 입은 말쑥한 여성이 자꾸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인상깊게 보고,
공연이 끝난 뒤 병원 관계자에게 그 여인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병원 관계자가 "주병동의 건너편 산장 병동에
입원하고 있는 여인으로서, 몹쓸 병(결핵)에 걸려 있는
자신의 신세가 야속해 과거를 회상하며 항상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자,
느낀 바 있어 '산장의 여인'이란 제목을 붙혀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반야월 선생은 이 가사를 작곡가 이재호에게
작곡을 의뢰했고, 이재호 또한 한쪽 폐를 잘라낸
폐병환자로서 마산결핵요양소에 입원한 바 있는
분이기에, 노래 말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할 수 있어
이렇게 좋은 곡을 작곡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산장의 여인’에 흐르고 있는 한 맺힌듯한
슬픈 맬로디는 폐결핵으로 찌든 삶을 사는
이재호 자신의 회한이나 마음 속의 절규였는지 모른다.
반야월 선생은 당시 의학으로는 치료하기 힘든
이재호 선생의 폐결핵을 이 노래로서 치유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호반의 벤치 /권혜경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음 ~ ~ ~ ~ 신문을 보실까
음 ~ ~ ~ ~ 그림을 그리실까
호반의 벤치로 가봐야겠네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음 ~ ~ ~ ~ 갸름한 얼굴일까
음 ~ ~ ~ ~ 도톰한 얼굴일까
호반의 벤치로 가봐야겠네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음 ~ ~ ~ ~ 회사엘 나가실까
음 ~ ~ ~ ~ 학교엘 다니실까
호반의 벤치로 가봐야겠네......

'산장의 여인’ 작곡자 이재호
193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가요계를 이끈 대표적 작곡가 세분을 뽑는다면
단연코 손목인, 박시춘, 이재호(李在鎬)를 꼽을 수 있을것이다.
이들 모두가 여러 악기를 다루면서 작곡, 편곡, 지휘 등
어느 부문에서도 남다른 재주를 지녔으나,
특히 이재호는 작사도 하면서 작곡, 연주에서
천재적 음악성을 발휘한 귀재였다.
본명이 이삼동(李三童)인 그는 조실부모하고
고모와 기생인 누나의 보살핌으로
진주제일심상소학교(현 중안초등)와
진주고보(현 진주고)을 졸업했다.
졸업 후, 재학시 밴드부에서 여러 악기를 섭렵한 덕택으로
가지게 된 악기실력으로 잠시 진주극장의
가두 선전원(마치마와리)을 하다가 동경으로 가서
초,중학 때의 동창 박갑동(당시 와세다 대학생)의
하숙집에 머물면서 동경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 20세 때인 38년부터 ‘무적인(霧笛人)’이라는
예명으로 작곡 활동을 시작하여
첫 히트곡 ‘항구에서 항구로’(박향림)와
‘애수의 강변‘(박향림) 등을 콜롬비아레코드를 통해
발표하였으나,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한 것은
39년 태평레코드 소속이 되어 예명을 ’이재호‘로
바꾸고 난 후부터였다.
이때부터 내는 곡마다 히트하였는데,
채규엽의 '북극오천키로',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마도로스 수기‘,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세세년년‘,
’노래하자 하루삔(꽃마차)‘, 박향림의 ’막간 아가씨‘,
백난아의 ’망향초 사랑‘, ’갈매기 쌍쌍‘, ’황하 다방‘ 등이
그것이다.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는 그 시절 이재호와
콤비를 이루어 데뷔하거나 인기가수의 반열에 오른 가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선’(이인권) 등을 발표하고,
지병인 결핵 치료를 위해 고향 진주로 내려가
47년부터는 진주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그때 제자가 이봉조이다.
이봉조는 유행가 작곡가인 선생이 학생들에게는
유행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대신 명랑하고 희망을 주는
노래만 부르게 했다고 회고하면서,
자신이 음악인 생활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이재호 선생의 영향이 컸었다고 말했다 한다.
지병의 악화로 선생의 교단생활은 오래지 않아 끝나게 된다.
6.25 동란 때에는 부산에서 KBS부산방송국 관현악단장을
맡기도 하면서 작곡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내놓아 히트한 곡이 ‘비내리는 삼랑진’(진방남),
‘향수(고향생각, 박재홍), 경상도아가씨(박재홍) 등이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와 ‘물방아도는 내력’(박재홍),
‘홍콩아가씨’(금사향), ‘단장의 미아리고개’(이해연),
‘아네모네 탄식’(송민도), ‘울어라 키타줄’(손인호) 등
많은 곡을 발표하는데, 나오는 곡마다 히트를 쳤다.
이 시기에 남인수도 그가 작곡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반야월 작사의 ‘어린 결심’, ‘낭자의 눈물’, ‘영애의 사랑’,
‘산유화’, ‘눈물진 봄아가씨(춘정)’, ‘무정 열차’,
‘다정도 병이련가’, ‘작별’ 등과 강사랑 작사의
‘마도로스 사랑’, 자신(무적인)이 작사한
‘불효자의 하소’ 등이 그것이다.
지병이 깊어져 마산의 국립결핵요양소에 입, 퇴원, 요양을
거듭하는 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식지 않아,
‘산유화’(남인수), ‘무정열차(남인수)’,, ‘산장의 여인’(권혜경),
‘고향에 찾아와도’(최갑석) 등의 명곡을 끊임없이 내 놓았다.

그 중 ‘산유화’는 유행가를 저급시하는 지식층을 향해
유행가에도 이런 명곡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사실 가요계에서는 이 ‘산유화‘를 작품성으로 보아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과 함께 한국 가요의 3대 명곡이라 말한다.
약값 등으로 지출이 많아지는 등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술을 멀리
못하는 낭만적 기질과 내성적 성격은 지병을
더 악화시켜 1960년 7월, 만 41세의 젊은 나이에
천재 작곡가로서의 일생을 마감했다.
이재호 선생은 우리 가요를 일본 엔카류의 단조로운
2박자로부터 탈피시켜 템포를 다양하게 하고,
우리 민요와 서양음악이 지닌 요소를 가요에 접목시켜
한국 유행가의 경지를 한 차원 높여놓은 천재 작곡가였다.
가수로서 작사가로서 선생의 평생 동지로 살아온
반야월(진방남) 선생은 “외롭게 자라서인지 평소에 말이 없고
우수에 차 있는 듯 했으며 술잔이 몇 순배 돌아야
그제서야 말문을 여는 분”이라며,
“술을 너무 좋아해 건강을 되찾지 못했지만, 늘 낭만이 넘쳤고
또 번득이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았던
예술가로 그가 조금만 오래 살아주었더라면 한국 가요계의
판도가 또 한번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가 돌아간 후 나온 추모 앨범의 타이틀 명을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했듯이,
그는 갔지만, 그의 노래는 우리 민족의 슬픔과 한을
승화시켜주는 노래로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