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의 리얼 다큐멘터리, <나는 갈매기> 제작 뒷이야기
롯데 자이언츠가 주인공인 이유
<
나는 갈매기>는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과 팬들이 한 시즌을 보내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SK 와이번스에 확대경을 들이댄 TV 시리즈 <불타는 그라운드>(OBS)가 이미 많은 화제를 모았지만, 현존하는 야구 팀이 영화의 소재가 된 건 롯데 자이언츠가 처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갈매기>가 오로지 '팬심'으로 제작된 영화는 아니다.
권상준 감독은 부산 출신도 아니었고, 영화를 찍기 전까지는 롯데 팬도 아니었다. 그저 "어린 시절 고교 야구를 좋아했고, 프로야구 출범 때 'MBC 청룡'의 로고가 예뻐서 어린이 회원에 가입한" 평범한 야구 팬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영화의 아이디어는 제작사 드림빌 엔터테인먼트에서 먼저 나왔다. 팬 층이 두터운 롯데 자이언츠가 분명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야구가 곧 모태 신앙인 '부산 갈매기'들, 참담한 성적을 낼 때도 아낌없는 환호와 채찍질을 보낸 팬들. 게다가 롯데 팬들은 최근 한국 프로야구의 흥행을 이끈 일등공신이지 않은가.
권상준 감독은 이런 팬들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찍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선수들의 모습 70%, 팬들의 모습 30% 정도로 비중을 두려 했다. 비중은 더 적지만 팬들의 모습 역시 영화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축이다. 많은 팀 중에서 왜 하필 롯데 자이언츠냐 묻는다면, 그건 순전히 팬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산 사람들과 롯데 자이언츠 사이에는 끈끈한 애증 같은 것이 있다. 그걸 담아 보고 싶었다."
이 영화에는 <
해운대>의 만식(설경구) 같은 열혈 갈매기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안부 인사가 "밥 뭇나"가 아니라 "어제 야구 이깄나?"로 시작되는 사람들인 것이다. 실제로 권상준 감독은 팬들의 모습을 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밝혔다.
"촬영 초반에는 팬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기 위해 아무 정보 없이 무작정 돌아다녔다. 버스 회사, 술집, 시장, 사회인 야구단 등. 거기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 봐도 롯데 야구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나올 정도였다. 부산에서는 야구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야구장은 물론이거니와, 가게나 가정집 등 모든 공간에 야구 문화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한 할머니는 롯데 야구를 볼 때마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할 정도로 열혈 팬이다. 롯데 경기라면 한 경기도 놓치지 않았을 정도니, "김주찬이 안타를 치고 나간 다음에 이인구가 어쩌고 조성환이 어쩌고" 하는 식의 타순을 줄줄 외우는 게 아주 당연하다.
한편 술집에서는 얼큰하게 취한 한 아저씨가 롯데 야구의 문제점을 거침없이 읊는다. 못한 날은 못한다고, 잘한 잘은 "골고루 잘해야지 저렇게 몰아 쳐서 되겠느냐"며 호통을 친다. 재래시장 상인들의 리어카에서는 롯데 경기 중계가 백뮤직처럼 흘러나오고, 사직구장 앞에서 김밥을 파는 아주머니들은 "맨날 져서 손님이 안 온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야구장 안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롯데 팬이란 이유만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가 된다. 이게 다 야구가 만들어낸 풍경들이다.
몸으로 부딪히고 발로 뛴 촬영현장
<나는 갈매기>의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 것은 2009년 1월. 이때부터 한 달 동안 권상준 감독과 제작진은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역사와 사전 정보를 숙지하고, 촬영에 들어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촬영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저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으로 부딪히고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몸으로 부딪히기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지난 2월에 있었던 사이판 전지 훈련이었다. 권상준 감독은 "사이판에서 10일 정도 머물렀는데, 워낙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그때 선수들과 많이 친해진 것 같다"고 회상한다.
이후 올스타전이 열린 7월 말까지, 제작진은 전반기 롯데 경기의 반 이상을 따라다녔다. 촬영 여건상 모든 경기를 다 따라가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놓친 경기에서 행여나 중요한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
나는 갈매기>의 카메라가 침투한 곳은 경기장의 촬영석과 라커룸, 타격 연습장, 불펜, 트레이너실 등이었다. 이따금 구단 관계자를 설득한 끝에 덕아웃을 촬영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
나는 갈매기> 촬영 현장은 경기의 방향만큼이나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야구는 팀 스포츠이면서 개인적인 스포츠다. 때문에 단순히 팀만 따라가기보다 여러 캐릭터의 선수들을 담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선수들 스케줄 맞추기가 정말 힘들었다. 선수들에게도 개인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또 '오늘 경기 끝나고 인터뷰하자'고 약속했어도 막상 그날 경기에서 대패하고 인상을 팍 쓰고 있으면 차마 인터뷰하자는 말이 안 나온다. 그렇게 해서 날려버린 인터뷰가 꽤 된다."
물론 운 좋게 우연히 잡아낸 장면들도 있다. 일례로, 송승준 선수의 여자친구를 촬영할 수 있었던 것도 권상준 감독이 송승준 선수와 대화하던 중 "오늘 내 여자친구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촬영 허락을 받은 덕분이다. 하지만 야구팀에 어디 좋은 일만 일어날 수 있으랴.
권상준 감독은 스스로 롯데 자이언츠의 팀원이라 생각하고 촬영에 뛰어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선수들의 눈치를 봐야 할 때도 참 많았다. 카메라 자체를 불편해하는 선수들을 설득하는 작업도 그렇거니와, 팀 분위기가 바닥을 칠 때조차 연출자 입장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지난 4월 SK전에서 조성환 선수가 강속구에 맞고 앰뷸런스에 실려 갔을 때다.
'따라간 경기는 무조건 다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우연히 담은 장면인데, 그 안에는 그동안 우리가 중계 카메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담겨 있다. 선수들 사이에선 충격의 정적이 흐르고, 장재영 트레이닝 코치는 벤치를 걷어찬다. 한숨과 분노와 절망의 기운은 덕아웃을 지나 복도로 이어진다. 이 순간을 권상준 감독은 "정말 찍기 무서웠다"고 회상한다.
상승 무드일 때 촬영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살벌한 순간에마저 촬영을 계속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미안한 마음 반, 어떻게든 영화를 위해 들이대야 한다는 마음 반으로 권상준 감독은 계속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
차마 보지 못했던 그들의 뒷모습
많은 팬들이 <나는 갈매기>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난 경기를 복기하려는 차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저예산 다큐멘터리가 고성능 중계 카메라의 퀄리티를 따라갈 수도 없다. <나는 갈매기>의 진짜 묘미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아니라, 우리가 차마 보지 못했던 그들의 뒷모습에 있다. 권상준 감독은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팬들이 쉽게 볼 수 없는 공간을 최대한 많이 찍으려 노력했다. 또한 영화적인 특성을 고려하다 보니, 스토리가 있을 법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지사지만, 권상준 감독은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강민호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수건 한 장만 두른 홍성흔을 찍으려다 된통 혼나는 모습, 이대호가 "지금 (승차가) '-2'밖에 안돼요. 옛날에 '-40'도 해봤는데요, 뭘"이라며 넉살을 떠는 모습 등 <나는 갈매기>에는 각 선수들의 개성적인 캐릭터가 드러나 있다. 영화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권상준 감독이 '덕아웃의 수다쟁이 3인방'으로 꼽은 손민한, 송승준, 이용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충분히 즐겁다.
하지만 <
나는 갈매기>에는 선수들이 겪는 굴곡의 순간들도 함께 담겨 있다. 만루 홈런을 맞은 후 화장실에서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송승준, 라커룸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조정훈, 병실에서 롯데의 부진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조성환, 상동 2군 구장에서 구속이 나오지 않아 절망하는 손민한, 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타격이 부진한 모습을 보여야 했던 가르시아, 두산 베어스에서 이적한 홍성흔의 부진과 보상 선수로 간 이원석의 활약이 교차되는 순간 등.
어느 선수에게나 다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있을 테지만, 권상준 감독이 개인적으로 꼽는 명장면은 박정준 선수가 박정태 코치와 통화하는 장면이다. 박정준은 스프링 캠프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좀처럼 출전 기회를 갖지 못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1군에 합류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던 날, 박정준은 라커룸에서 스승에게 한 통의 전화를 드린다. 그 모습을, <
나는 갈매기>의 카메라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선수들이 성적과 팬들의 기대에 얼마나 부담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권상준 감독은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야구 경기가 끝나면 팬들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길이 만들어진다. 일종의 레드 카펫 같은 것이다. 그날 잘한 선수들에게는 더없이 기분 좋은 길이겠지만, 비인기 선수나 성적이 부진한 선수들은 그 길을 통과하는 일이 상당히 힘들 것이다. 그래서 빙 둘러서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선수들도 많다." 영화감독의 욕심으로는 팬들과 선수들이 부대끼는 장면을 잡고 싶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지난해에 비해 구단 차원에서 경호가 대폭 강화되다 보니, 생각만큼 재미있는(?) 풍경들은 없었다고 한다.
'생짜'의 맛을 최대한 살리자
권상준 감독에게 스포츠 다큐멘터리는 전혀 생소한 장르가 아니다. 그는 첫 장편 <서울유나이티드, 이제 시작이다>를 통해 K3 리그에서 출발한 축구팀 '서울유나이티드'의 이야기를 담은 바 있다. 하지만 순전히 '팬심'에서 발동한 전작과 달리, 애초부터 상업 다큐멘터리로 기획된 <나는 갈매기>를 찍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일단 축구와 야구는 굉장히 다르다. 권상준 감독은 "축구 경기에는 일련의 리듬이 있다. 하지만 야구는 정지되어 있다가 한순간에 터지는 스포츠다. 처음 촬영할 때는 날아가는 공을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었다"며, 촬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예산과 장비와 스킬의 부족. 야구 경기만 10년 넘게 찍어온 전문가들을, 그것도 한 경기에 고성능 카메라를 10대 이상 돌리는 중계방송을 넘어서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몇 초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자료 화면을 구입할 수도 없었고, 또 그러기도 싫었다. 제작진의 원칙은, 단 한 컷을 쓰더라도 직접 찍은 화면을 쓰자는 것이었다. 다소 거칠게 보일지라도 <나는 갈매기>만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언제 쓰일지 모르는 단 한 장면을 위해, 제작진은 4시간에 육박하는 경기를 무조건 찍고 또 찍었다. 그 결과는? 400시간의 촬영분을 85분으로 편집해야 하는 살인적인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갈매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레이션이 없다는 것. 권상준 감독은 "개인적으로 내레이터의 설명이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제3자가 너무 깊숙이 개입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
나는 갈매기>는 롯데 자이언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여러 인물들의 동작이나 인터뷰 화면,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 그리고 응원가와 자체 제작한 음악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내레이션이 주는 친절한 맛은 없어도, 다큐멘터리의 대상과 관객들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생짜'의 맛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갈매기들의 남은 이야기
지난해 인상적인 블론 세이브로 '임 작가'란 별명을 얻은 임경완 투수는, 영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롯데 팬 분들은 진짜 냉정합니다. 잘하다 못하면 혼나요.(웃음)" 한때 그를 비난했던 갈매기들이 많았지만, 카메라가 비춘 사직구장 내 어느 피켓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해피엔딩 임 작가."
젊은 선수 정보명은 지난 밤 트레이드되는 악몽을 꾸었다고 카메라 앞에서 고백하며, 롯데의 레전드 염종석은 자신에게 롯데가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조용히 말한다. 지난해 은퇴한 마해영 해설위원은 "사실 롯데에서 선수로 뛴다는 것, 참 힘듭니다"라고 하며, 손민한은 "부진할 때 팬 분들이 욕하시는 거 다 이해합니다"라고 너그럽게 이야기한다. 갈매기들에게 롯데 자이언츠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술과 담배보다 끊기 힘든 것? 차마 헤어질 수 없는 애인 같은 존재?
권상준 감독은 "이 영화를 찍고 롯데 팬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팀 자체에 열광하기보다는 아직까지 선수들에 더 관심을 갖고 응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작품성을 떠나 <
나는 갈매기>는 롯데 자이언츠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필견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영화의 타깃 1순위는 당연히(!) 롯데 팬들이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한국 프로야구의 나머지 7개 팀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해 권상준 감독은 덧붙인다. "롯데 자이언츠 한 팀에 관한 영화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선수들과 팬들이 어떻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 시즌을 끌고 가는지, 그들에게 어떤 고통과 행복이 있는지를 봐주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