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조씨 시조(始祖)와 시조배위(始祖配位)에 관한 연구
학술위원 조 명 근
Ⅰ. 서론(序論)
본고(本稿)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시조(始祖)는 어떤 분이며 시조배위(始祖配位)는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이 논제는 창녕 조씨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서 모두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씨족사 연구(氏族史硏究)에도 일조(一助)가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꼭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본과제의 달성을 爲한 연구방법으로 문헌적 연구(文獻的硏究) 즉 족보(族譜) ․ 금석문(金石文) ․ 기타문헌(其他文獻)의 조사를 통하여 시조는 어떤 분이며 시조의 배위가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속전(俗傳)1)으로 전해오던 시조의 출생과 득성 사실(得姓事實)을 최초로 기록한 문헌이 매계공(梅溪公) 조위(曺偉)의 매계가첩《梅溪家牒》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시조의 출현시기가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때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진평왕대에서 조선전기까지는 팔백수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렀으며 그간에는 신라의 멸망에 이은 고려의 등장과 고려 멸망에 따른 조선건국이란 역사적인 대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대변화 속에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해 놓은 사료를 헤아려 보면 삼국시대를 다룬 것으로는 정사인 《삼국사기》와 야사인《삼국유사》를 들 수 있으며, 고려시대를 다룬 것으로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창녕 조씨 시조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몇몇 곳에 극히 단편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일천수백 년을 건너뛰는 사료의 빈약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창녕 조씨의 사보 및 족보에 기록된 시조 및 시조배위의 사실과 금석문 그리고 기타문헌에서의 관련된 기록을 수집하여 조사 ․ 검토하고 아울러 시조배위에 대한 새로운 의견 제기에 따른 타당성 유무를 구명하여 정론을 내리고자 한다.
Ⅱ. 창녕 조씨 득성 경위와 시조위상검증
1. 창녕 조씨 족보분석
창녕 조씨 족보에 대한 기록은 하강공(荷江公) 조석여(曺錫輿1813~1889)가 쓰신 창녕 조씨 족보(昌寧曺氏族譜) 경진보(庚辰譜) 서문(序文)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집안의 족보도 주 부자 오세의 법2)을 모방하여 처음으로 인종(仁宗) ․ 명종(明宗) 때부터 종인(宗人)인 하윤(夏尹) ․ 진영(震英) ․ 명기(命基) ․장호공(莊胡公) 윤손(潤孫) ․ 경승(景承)이 사보(私譜)가 있었는데 이것을 구보(舊譜)라 한다. 그리고 판관(判官) 중의(仲義)는 광묘(光廟) 때 사람으로 가보(家譜)가 있었는데 이것을 판관보(判官譜)라 하고, 남명공(南冥公) 휘(諱) 식(植)은 명종 때 사람으로 족보 가 있었는데 이것을 남명보(南冥譜)라 하며, 매계공(梅溪公) 휘 위(偉)는 연산조(燕 山朝) 때 사람으로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을 매계보(梅溪譜)라 하고, 참판(參判) 휘 탁(倬)은 선조(宣廟) 때 사람으로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을 참판보(參判譜)라 하며, 참판의 손자 군위현감(軍威縣監) 휘 실구(實久)가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이 군위보 (軍威譜)이고, 인조(仁祖) 때에 회곡공(晦谷公)이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이 회곡보(晦 谷譜)이며, 숙종(肅宗) 정묘년(丁卯年)에 담양공(潭陽公)이 청도(淸道)의 지방관(地方 官)으로 나가서 족인(族人) 상사군(上舍君) 건(建)과 면주(冕周)를 시켜서 여러 책을 모아 편집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계유보(癸酉譜)이고, 영조(英祖) 갑자년(甲子年)에 서주공(西州公)이 담운공(澹雲公)과 편마(編摩)를 의결하고 또 명백씨(命百氏)와 자의(諮議) 임씨(霖氏)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고 자의만이 홀로 살아 계셨다. 그래서 명억씨(命億氏) ․ 윤적씨(允迪氏) ․ 회진씨(晦振氏)와 함께 의논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였는데 24년만인 정해년(丁亥年)에 비로소 완성을 알렸으니 이것이 정해보이다. 이렇게 하여 앞뒤의 족보가 모두 9본이다.”3)
라고 하여, 조선초기부터 정해보 발간까지의 족보를 구본으로 명시하였으며, 거기에다 정해보 이후에 발간된 경진보(庚辰譜) ․ 신해보(辛亥譜) ․ 갑자보(甲子譜) 3보를 추가하면 모두 12본이다. 이 12本의 족보를 중심으로 창녕 조씨 득성 경위와 시조위상을 검증하려고 한다.
가.족보의 종류(창녕 조씨 족보의 근간이 되는 사보(私譜), 가보(家譜), 족보)
① 《구보(舊譜)》 (조하윤공(曺夏尹公), 조진영공(曺震英公),
조명기공(曺命基公), 장호공(莊胡公) 조윤손(曺潤孫), 조경승공(曺景承公)의 사보)
② 《판관보(判官譜)》 (판관공 조중의의 가보 (1400년대 중반))
③ 《매계보(梅溪譜)》 (매계공 조 위(曺偉1454~1503)의 족보)
④ 《남명보(南冥譜)》 (남명공 조 식(曺植1501~1572)의 족보)
⑤ 《참판보(參判譜)》 (참판공 조 탁(曺倬1552~1621)의 족보)
⑥ 《군위보(軍威譜)》 (현감공 조실구(曺實久1591~1658)의 족보)
⑦ 《회곡보(晦谷譜)》 (회곡공 조한영(曺漢英1608~1670)의 족보)
⑧ 《계유보(癸酉譜)》 정묘년(丁卯年1687)에 담양공(潭陽公) 조전주(曺殿周1640~1696)가 청도 지방관(淸道地方官)으로 나가 상사공(上舍公) 조건(曺建1641~1698) 과 병절교위공(秉節校尉公) 조면주(曺冕周1632~1698)를 시켜 여러 본의 족보를 모아 무진년(戊辰年1688)에 편집을 마쳤으나 담양공의 체직(遞職)으로 미쳐 판각하지 못한 것을 계유년(癸酉年1693)에 해서병마절도사공(海西兵馬節度使公) 조정량(曺廷亮1652~1693)에 의해 간행.
⑨ 《정해보(丁亥譜)》 갑자년(甲子年1744)에 서주공(西州公) 조하망(曺夏望 16821747)과 담운공(澹雲公) 조명교(曺命敎1687~1753)가 편집을 의결하고 또 통덕랑공(通德郞公) 조명백(曺命百1717~1756)과 자의공(諮議公) 조임(曺霖1711~1790)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중도에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자의공만 생존하여 다시 현감공(縣監公) 조명억(曺命億17201774) ․ 현감공 조윤적(曺允迪 1707~1772) ․ 감찰공(監察公) 조회진(曺晦振1738~1799)과 함께 논의 감독하여 정해년(1767)에 간행. 참고로 편집을 의결하고 보역(譜役)을 주관하며 감독하신 분의 가계(家系)를 살펴보면, 서주공은 담운공에게 생가(生家)로는 종숙부(從叔父)가 되고, 양가(養家)로는 재종숙부(再從叔父)가 되시며, 통덕랑공과 현감공 조명억은 서주공 의 자제이시고, 자의공은 매계공의 8세손(世孫)이시고, 현감공 조윤적은 담운공의 종질(從姪)이 되시며, 감찰공은 담운공의 손자이시다.
⑩ 《경진보(庚辰譜)》 갑술년(甲戌年1874)에 연암공(烟巖公) 조석우(曺錫雨1810~1878)가 8도(道)의 종중에 발의하여 편집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의 중씨(仲氏)인 하강공(荷江公) 조석여(曺錫輿)가 계승하여 경진년(庚辰年1880)에 간행.
⑪ 《신해보(辛亥譜)》 신해년(辛亥年1911)에 관찰사공(觀察使公) 조시영(曺始永 (1843~1912)이 현령공(縣令公) 조두환(曺斗煥1848~1915)과 심력을 합하고 조두영공(曺斗永公)을 시켜 각처의 종족에게 통고하여 편집 간행.
⑫ 《갑자보(甲子譜)》 갑자년(甲子年1924)에 조병수공(曺秉洙公)이 제족과 상의하여 조석하공(曺錫河公) ․ 조병선공(曺秉繕公)과 함께 편집 간행.
나. 족보에 기록된 시조의 출생과 득성 경위 및 위상 분석
창녕 조씨 족보의 근간이 되는 족보는 모두 12본이다. 이 가운데 시조의 위상과 출생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는 본은 《구보》․《판관보》․《참판보》․《군 위보》․《회곡보》 등 5본이며, 기록되어 있는 본은 《매계보》․《남명보》․ 《계유보》․《정해보》․《경진보》․《신해보》․《갑자보》 등 7본이다. 시조 위상과 출생에 대한 족보별 기록 내용을 살펴보면,
① 《매계보》의 『사실(事實)』이란 제목 아래에,
“비조(鼻祖)는 신라 부마(新羅駙馬)이시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으로 성(姓)은 조씨(曺氏)이고 휘(諱)는 계룡(繼龍)이시며 관직(官職)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4).”
하였으며, 또 기록하기를,
“신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휘 예향(禮香)이 청룡질(靑龍疾)을 얻어 화왕산(火王山)에 있는 용담(龍潭)에서 목욕을 하다가 용자(龍子 ) 옥결(玉玦)과 만나 계룡을 낳게 되었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曺) 자(字)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하여 성을 曺라고 하였다5).”
하였고, 또 속전(俗傳)에,
“조씨 시조의 어머니 휘 예향이 태어나면서부터 복병(腹病)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왕산의 용지(龍池)가 매우 영험(靈驗)이 있으니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을 볼 것이오.’ 하므로, 그의 말대로 길일을 가려서 용지로 올라가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雲霧)가 일어 대낮이 캄캄해지면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었다. 이윽고 운무가 걷히면서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때부터 병은 낫고 태기(胎氣)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서 이르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시오? 이름은 옥결인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잘 양육하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될 것이오. 그리고 자손이 만대로 번창할 것이오.’ 하였다. 그의 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이 그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조계룡(曺繼龍)이란 성명(姓名)을 내리고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진평왕(眞平王)의 사위가 되고 창성부원군에 封해졌으니 이 분이 사실 조씨의 시조이다.
전해오는 말이 비록 정경(正經)과 대도(大道)에 벗어나기는 하지만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은 그의 어머니> 강원(姜嫄)이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가다가 감응되어 탄생하였다는 것과,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그의 어머니> 유온(劉媼)이 천둥치고 비 내리는 큰 못가에서 교룡(蛟龍)과 상교(相交)하여 탄생하였다는 것이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알영 왕비(閼英王妃)가 알영정변(閼英井邊)에서 계룡(鷄龍)의 좌협(左脇)으로부터 탄생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이런 이치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간에 전해지는 것인 즉 자손된 자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들은 바를 간추려 적어서 후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일 뿐 그 선계(先系)를 신성(神聖)하게 하여 힘써 과장(誇張) 하거나 아름답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6).“ 하였으며,
② 《남명가첩(南冥家牒)》에는,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여서(女婿)인 옥결은 바로 창녕 화왕산성의 대지(大池) 신룡(神龍)의 아들이며, 그의 아들 조계룡은 진평왕의 여서가 되었다7).” 하였고,
③ 《계유보(癸酉譜)》의 『사실(事實)』이란 제목 아래에는, “비조(鼻祖)는 신라 부마이시고 창성부원군으로 성은 조씨이고 휘는 계룡이시며 관직은 태사에 이르렀다8).” 하였으며, 또 기록하기를,
“조 매계가첩을 살펴보니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씨가 청룡질을 얻어 화왕산 용담(龍潭)에서 목욕하다가 신룡자(神龍子) 옥결과 서로 만나 繼龍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자(曹字)가 있으므로 인해서 성을 조(曹)라 하였다.” 하였으며, 또 속전에,
“시조 어머니 예향씨가 태어나면서 복병이 있어 온갖 약으로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왕산의 못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불러와 오래전부터 신령하고 특이함이 드러났으니 만약 그 못에 재계 목욕하고 깨끗이 하여 기도하면 응당 효험을 볼 것이오.’ 하므로, 그 말대로 날을 가려 못에 올라가서 목욕하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가 끼어 캄캄해지면서 시조 어머니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랐었다. 얼마 안 되어 운무가 개이자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 뒤로 병은 낫고 배가 불러오는 것이 임신한 조짐이더니 마침내 남자를 낳았다. 꿈에 한 장부가 와서 고하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시오? 이름은 옥결이고 그가 바로 나요. 잘 보호하고 양육하면 크게는 공후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은 잃지 않을 것이며, 자손이 만대로 쇠퇴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이 그 연유를 왕에게 알려 조(曹)라는 성과 계룡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 받았다.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의 여서가 되고 창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니 이분이 실제로 시조가 된다. 비록 정경에 벗어나는 말이지만 <주나라 시조 후직은 그의 어머니> 강원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가다가 감응되어 탄생하였다는 것과, <한나라 고조 유방은 그의 어머니> 유온이 천둥치고 비 내리는 큰 못가에서 교룡과 상교하여 탄생하였다는 것이며, 여조(麗祖)9)의 알영 왕비는 알영정변에서 계룡(鷄龍)의 좌협으로부터 탄생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런 이치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것인즉 자손된 자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들은 바를 간추려 적어 후세 사람에게 알게 하려는 것일 뿐 그 선계를 신성하게 하여 힘써 과장 하거나 아름답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10).“ 舊譜에서 나왔다. 하였다.《매계보》의 『사실』을 본래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상당 부분 윤색이 가해진 것을 원문 대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남명 가첩》에 기재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였다. 그리고 《계유보》 본문 서두 에, “조계룡 신라 진평왕 여서이며 창성부원군에 봉해지고 관직은 태사에 이르 렀다11).” 하였으며,
④ 《정해보》에는 《계유보》의 사실(事實)을 그대로 옮겨 記錄하면서 속전(俗傳)은 《매계보》의 내용을 옮겨 기록하였다. 그리고 창녕 조씨 족보 권지일(卷之一)에, “시조 조계룡 신라 진평왕의 여서이다.
○《계유보》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관직이 태사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신라의 관제를 상고하면 태사 등의 官 직 이름이 없으니 지금 고찰할 수 없다. ○화순에 살고 있는 후손 선행의 사보에 ‘<시조의> 묘소가 경주 초제 신좌의 터에 있다.’ 하였는데, 영조 무진년 (1748)에 과연 찾았다. 경주부의 북쪽 50리 쯤 되는 초제에 상하장(上下葬)이 있었음으로 봉축(封築)을 고쳤는데 좌향과 지명이 꼭 들어맞았고 토인들도 지금까지 조씨의 분산(墳山)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끝내 문자가 적힌 증표를 찾지 못하였으니 다시 참고하는 것이 타당하다12).” 하였고,
⑤ 《경진보》에는 《계유보》사실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였으며 창녕 조씨 족보 수편(首編) 권지일상(卷之一上) 선계(先系)에, “시조 조계룡 신라 진평왕 여서이다. 계유보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관직이 태사이다.’ 하였는데, 신라 관제를 살펴보면 태사가 없으니 지금 상고할 수 없다. 화순의 후손 선행(善行)의 사보(私譜)에 ‘묘소가 경주(慶州) 신좌(辛坐) 터 에 있다.’ 하였는데, 영종(英宗) 무진년(戊辰年)에 경주부의 북쪽 50리 쯤 되는 초제에 상하장이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찾아 봉역을 개수하였으나, 묘지나 묘갈의 징험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별도로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는데, 대제학 홍양호가 비명을 짓고, 후손 판서 윤대가 글씨를 썼다13).” 하여,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문의 글씨를 동포공(東浦公) 조윤대(曺允大1748~1813)가 쓰셨다고 기록하였으며,
⑥ 《신해보》에는 경진보》의 사실과 창녕 조씨 족보 수편 권지일상 선계내용을 그대로 옮겨다 기록하였고,
⑦ 《갑자보》에는《경진보》의 사실과 창녕 조씨 족보 수편 권지일상 선계내용을 그대로 옮겼는데, 단지 창녕 조씨 족보 권지천(卷之天) 시조 조계룡 <주 (註)> 끝에,
“별도로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는데, 대제학 홍양호가 비명을 짓고 후손 판 서 봉진이 글씨를 썼다14).”
하여, 시조묘단비의 글씨는 신암공(愼庵公) 조봉진(曺鳳振1777~1838)이 쓰셨다고 記錄되어 있는데, 비석에는 신암공이 쓰신 것으로 새겨져 있으며, 신암공은 동포공의 長子이시다.
2. 시조묘소를 찾게 된 경위
시조묘소는 오랜 세월동안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 영조20년 갑자년(1744)에 담운공 조명교의 현몽을 계기로 종인 가운데 승려가 된 분을 시켜 다방면으로 찾아보게 하면서 영천(永川)의 치재공(恥齋公) 조선적(曺善迪1697~1756)의 편지15)와 화순(和順)의 조선취공(曺善就公)의 보첩을 참고하여 영조 무진년(1748)에 묘소를 경주 초제에서 찾게 된다. 《창녕조씨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 권지이(卷之二), 세승일(世乘一)에 담운차록(澹雲箚錄)을 인용한 글에서 시조묘소를 찾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갑자년(1744) 12월 1일[무오(戊午)] <담운공의> 꿈에 어느 신묘(神廟)에 도착하니 사람의 말이 들리기를 ‘비석을 세울 곳에 세우라,’ 하므로, 망연히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금 가는 길이 전대의 능침(陵寢)을 지나는데 세워야 할 비석을 지시하는 것인가 하고, 마침내 한 언덕을 넘으니 왼쪽으로 왕릉 계단의 돌이 보이기에 그 길을 버리고 한 곳에 이르니, 산의 형세가 굉대하고 웅장하여 멈출 수 없을 듯하였다. 그리고 산 아래쪽 뭉쳐진 곳에 옛 무덤이 있고 그 무덤 앞에 표석이 있는데 위쪽은 어두워서 분변할 수 없고 아래쪽에 「曺繼龍」세글자가 있었다. 그것이 시조의 묘소임을 알고 북받치는 기쁨을 깨닫지 못하고 곧 장 그 앞으로 나아가니 좌우에서 부축해주어도 가팔라서 올라갈 수 없었고 죽은 아우 교리(校理)16)가 표석아래 있으므로 아우가 이미 먼저 올라갔으니 상세히 알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지름길로 내려가 멀리서 절을 하였는데 위에는 풀이 있고 아래에는 흙이라 갑자기 깔 자리가 없어 풀에 의지하여 흙을 밟고서 예를 갖추 고 교리를 돌아보며 함께 절하려고 기슭에 올라 절을 하고 난 뒤 또 산에 올라가 표석의 뒷면 기록을 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올라가지 못하였다. 산 형세를 둘러보니 좌청룡 우백호는 넓고 멀지만 안산은 둥그스럼하게 솟아 있고 흙빛은 붉으니 그 곳이 경주임을 알았다. (그전에 경주의 흙빛이 붉은 것을 보았음)
꿈에서 깨어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이 꿈을 기록하는데 해묵은 종이쪽지를 찾아 영남 종인 편지에서의 유전되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시조의 묘소가 경주에 있지 않고 창녕에 있다.’ 하므로, 종인 가운데 승려가 된 사람을 시켜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경주 초제리에서 찾았다. 산 아래 거주하 는 본토인들이 수백 년 가까이 살았다고 하며 모두들 이곳이 조씨 시조묘이고 8평장 9소감이 다 그 자손이라고 하였다. 아래 위의 무덤 형태가 완연한데 옛날에는 부부합장을 아래위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화순 종인 선취(善就)의 보첩을 얻어 보니 ‘시조의 묘소가 경주부 북쪽 40리 자옥산 동쪽 초제면 경태룡(庚兌龍) 신좌 을향(辛坐乙向)의 터17)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영남 종인 선술(善述) 형제와 익기(益基)를 시켜 고유제를 행하고 사초하게 하였다18).“ (이하 생략)
하였다.
. 금석문(金石文 : 묘단비명(墓壇碑銘) ․ 영적비문(靈蹟碑文) 등) 분석
가. 금석문의 신뢰성
문헌으로 전해지는 것은 애매한 부분도 있고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적지않지만 금석문은 당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직접 이루어진 것이므로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고 평가한다. 조선시대의 묘도문자는 유학을 숭상함에 따라 선조와 부모에 대한 효성의 하나로 분묘를 보기 좋게 축조하고 신분에 맞게 비석을 세우고 석물을 갖추는 일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당대에 가장 명망이 있고 문장에 능한 학자로부터 비문을 받고 가장 유명한 서예가로부터 글씨를 받아서 碑 를 세우는 것이 자손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묘도문자는 곧 그 무덤 주인의 전기가 된다. 그러므로 찬술자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공정한 서술과 비판을 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비문을 청탁하는 사람이나 찬술하는 사람이 무덤 주인의 인격 ․ 학식․ 업적 등을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사례가 없지 않아 이 묘도문자가 죽은 이의 전기자료로 가장 정확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서술하는 내용의 공정성에는 다소 문제가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자료라는 측면에서 그 신뢰도에 무게를 더 두어야 할 것이다.
나. 묘비명분석
①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명
창녕 조씨 시조의 묘단비명은 담운공의 손자인 감찰공 조회진(曺晦振)의 청촉에 依하여 1798년(정조22년)에 대제학을 지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지었다. 그 내용을 보면,
“처음에 조씨 시조의 무덤이 세대가 멀어 실전되었다. 그런데 담운공 조명교 가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 어느 신묘에 들어가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비를 세우지 않느냐?’ 하는 것 같으므로, 쳐다보니 산 아래 옛날 무덤이 있 는데 위에는 풀이 무성하고 그 아래의 토색은 모두 붉었으며 앞에 있는 돌에 曺繼龍」이란 세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것이 시조의 무덤임을 알고 송구스런 마음으로 올라가 남향하여 두 번 절을 하였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마 음으로 이를 이상하게 여겼었는데 마침 영천에 사는 종인 조선적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시조 무덤이 경주 초제리에 있으며 예로부터 조씨 시조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여러 차례 병화를 겪었지만 밭가는 쟁기가 들어가지 않았고 간혹 <무덤 구역을>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곧 이변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까지 경역 안에 다른 무덤이 없다.’ 하였고, 그 뒤에 또 화순에 사는 종인 조선행의 구보를 얻어다 보니 거기에 시조의 무덤이 경주부의 북쪽 40리 자옥산 아래 초제리 신좌 을향의 터에 있다.‘ 하였다. 조선적의 편지 내용의 말은 그 지방 사람들의 유전에서 얻은 것이고, 조선행의 보첩은 선세의 기록에서 나온 것인 데 두 가지가 부합하여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영남의 종인을 그곳에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였더니 지형과 토색 그리고 무덤 경내의 좌향과 배경이 일체 꿈에서 본 바와 같았다. 이에 봉분을 개수하고 나무하고 소먹이는 것을 금지하게 하고서 전의19)하였다20).”
하였으며, 또
“당시에 담운공이 늙어서 미쳐 성묘를 하지 못하였고 세상을 떠나 무덤의 도래솔 또한 한 움큼이나 될 정도로 세월이 오래 되었다. 지금 그의 손자 조 회진이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천리 길을 가서 동도(同道)의 여러 후손을 불러 조부의 꿈을 질정하고 영남종인의 편지와 호남종인의 보첩으로 증명하여 듣고 본 바를 참고해서 보니 모두 징험이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무덤에 절하고 掃제한 다음 제사를 지내고 국중의 여러 후손과 의논하여 단을 모우고 비석을 세우니 담운공이 여기에서 손자다운 손자를 두었다고 하겠다21).”
하였고, 시조배위에 대해서는 창녕 조씨 세보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광옥이 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진평왕이 그를 불러서 보았는데 상모가 특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曺」자와 같은 무늬가 있으므로 성과 이름을 하사하였 다. 장성하게 되자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22).”
하였으며, 또
“왜인이 언젠가 동래를 침범하므로 왕이 공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단기로 왜진에 나아가서 말고삐를 잡고 서서히 타이르니 왜인들이 줄을 지어 서서 절을 하며 말하기를, ‘공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다.’ 하고, 곧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갔다23).“
하였는데, 이 기사는 진사(進士) 이덕제(李德齊1656~1706)가 어릴 적부터 들어 온 그 지방의 유전하는 이야기를 치재공 조선적에게 말하였는데 치재공이 듣고 기록한 것에 근거하였다. 내용은,
“이 진사 덕제는 회재선생(晦齋先生)의 현손이다. 문행과 중망이 있었는데 그가 어릴 적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하기를, ‘조 태사가 태어나자마자 특이 함이 있었으므로 이 학사가 진평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불러다 보았는데 상모가 특이하므로 궁중에서 기르도록 하였다 8세가 되자 성인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공주를 아내로 삼아 주었다. 왜인이 언젠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동래 를 침범하므로 왕이 공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단기로 왜진에 가서 말고삐를 잡고 타이르니 왜인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줄을 지어 엎드려 절을 하며 말하기를「공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다.」하고,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공이> 졸함에 이르러 초제에 장사지냈는데 영역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이변이 생기는 일이 김유신(金庾信)의 묘역과 같았으므로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이 그 형국 안에는 장례를 치르지 못했으며 8 평장 9소감은 모두 그의 후손으로 동속(東俗)에 조씨 시조묘라고 일컫는다.’고 한다24).”
하였다.
② 창녕현 화왕산 용지 조씨 영적비문
창녕현 화왕산 용지 조씨 영적비문은 1892년(고종29)에 동곡공(東谷公) 조인승(曺寅承1842~1895)의 청촉에 의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 지었다. 그 비문 가운데 창녕 조씨 始祖에 對한 기술을 살펴보면,
“신라의 진평왕이 이 사실을 듣고 ‘성은「曺」, 이름은「繼龍」이라고 내 렸으며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진평왕의 여서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조 씨가첩의 기록이 이와 같다25).”
하였다.
4. 기타 문헌(其他文獻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전고대방(典故大方))의 창녕 조씨 시조관련내용분석
증보문헌비고는 1769년(영조45)에서 1908년(융희2)에 이르기까지 전후 1백 39년에 걸쳐 완성된 거질의 관찬본 책자이며, 한국 제도문물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증보문헌비고는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경우 그 입문에서 거쳐야 할 안내서 내지는 인도자격인 역할을 하는 책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가. 증보문헌비고 보제계고(補帝系考)의 왕녀조(王女條)에,
“신라 진평왕 장녀 선덕여왕녀 창성부원군 조계룡에게 시집갔음26).“ 하였고, 증보문헌비고 제계고(帝系考) 부씨족편(附氏族篇)에, “창녕 조씨 시조 계룡 (총서에 보인다. 겨드랑이 밑에 曺자의 무늬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姓을 조씨라 하고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27).”
하였다.
나. 전고대방
전고대방은 1924년 당시 학자였던 치당(痴堂) 강효석(姜斅錫)이 우리나라 고대로 부 터 근세에 이르는 각종의 참고자료를 수집하여 편찬 간행한 책이며, 지식인들이 책 상머리에 상치해 놓고 국사지식 내지 인물상식을 넓히며 궁금한 항목을 찾아보던 책이다. 전고대방의 만성 시조편(萬姓始祖篇)에,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 : 겨드랑이 밑에 曺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성을 조 씨라 하고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의 사위가 되고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28).”
하였다.
5. 종합
창녕 조씨 족보를 통하여 조씨 시조의 출생과 득성 경위 및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조의 출생과 득성 경위 및 위상이 최초로 기록된 문헌은 매계보이고, 아울러 속전으로만 알려져 왔던 사실이 최초로 정립이 된 것도 매계보이며, 그 이후에 간행된 족보는 그 기사를 그대로이재(移載)하여 편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조 묘소는 담운공의 현몽을 계기로 영천의 치재공 조선적의 편지와 화순의 조선취공의 보첩을 참고하여 1748년(영조24)에 묘소를 찾게 되고 이어서 심묘고유(尋墓告由)29)를 행하였으며, 1796년(정조20)에 단(壇)을 쌓고 그해 3월 11일에 설단고유(設壇告由)30)를 행하였고, 동년 11月 2日에 감찰공 조회진이 제문(祭文)을 지어 묘단제(墓壇祭)를 지냈다. 그리고 1798년(정조22)에 묘단비명이 완성되었으며, 1817년(순조17)에 묘단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금석문에서의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명은 창녕 조씨 시조에 대한 종래의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종합한 근거에 의하여 찬술되었다. 특히 창녕 조씨 시조의 묘소를 찾게 된 경위를 상술하면서『봉분을 개수하고 나무하고 소먹이는 것을 금지하게 하고서 전의하였다』고 하였는데, 전의는 앞서 말한 대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의심스러운 사실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홍 이계는 그런 의미를 창녕 조씨 시조의 묘단비명을 쓰면서 인용함으로서 은연중에 설단한 사실과의 관련을 지었으며, 설단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전술한 창녕 조씨 족보편에서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창녕 조씨 시조의 배위에 대해서는 「장성하게 되자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라고만 기술함으로서, 진평왕의 몇째 공주라고 내세운 주장을 일축하고 종전 창녕 조씨 세보의 기록을 재확인시킴과 동시에 그 기록을 정론으로 채택하였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서주공이 저술하신 유사(遺事)의 「조세기이(肇世記異)」가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명 찬술의 자료로 제시되었음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료의 취사선택은 집필자의 고유영역인 만큼 그의 이와 같은 기사는 면밀한 검토에서 얻어진 정확한 판단이라고 하겠다.
창녕현 화왕산 31)용지 조씨 영적비문은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명보다 정확히 94년 뒤에 지어진 글이며 또한 당대의 문장가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에게 비문을 청촉한 동곡공(東谷公) 조인승(曺寅承)은 바로 담운공의 현손으로 당시 이조참판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참고하면 작문에 필요한 관계 자료에 대해서는 빠뜨림 없이 제시하였을 것임으로 종합된 자료에 의한 저술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특히 본문의 창녕 조씨 시조에 대하여 서술하면서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의 여서가 되었다[及長爲眞平王女婿].”라고만 기술함으로서,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명에서의 창녕 조씨 시조에 對한 기록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기록이 정론임을 재확인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의견의 제기가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기타 문헌 즉 증보문헌비고와 전고대방에서는 창녕 조씨 시조의 배위가 진 평왕의 둘째 사위, 또는 진평왕 여서로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창녕 조씨 시조배위
1. 시조배위에 관한 주장
가. 족보
《매계보》을 비롯한 《계유보》와 그 이후에 발간된 《정해보》 ․ 《경진보》 ․ 《신해보》 ․ 《갑자보》에는 단지 「신라진평왕여서(新羅眞平王女婿)」 라고만 기록되었을 뿐 진평왕의 몇째 공주가 창녕 조씨 시조의 배위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나. 《서주집(西州集)》
《서주집》은 1854년에 간행된 서주공 조하망(曺夏望)의 문집(文集)이다. 이 문집 권지팔(卷之八)의 유사(遺事)란 제목하에 「조세기이(肇世記異)」란 소제목이 있으니, 곧 창녕 조씨 시조의 유사인 것이다. 이 「조세기이」 외에도 여말선초의 원조인 서주공의 12대조(代祖)인 좌정승 양평공유사(襄平公遺事), 10대조인 부제학 단고선생유사(丹皐先生遺事)와 7대조 좌찬성공유사(左贊成公遺事), 6대조 호조판서 창양군유사(昌陽君遺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조세기이」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조(鼻祖) 휘(諱) 계룡은 신라 태사 부마도위 창녕부원군이다. 구보(舊譜)에 이르기를, ‘신라 진평왕조에 한림학사 이광옥이 창녕현 고암촌(鼓巖村)에 살고 있었 다. 그에게 예향이란 딸이 있었고 시집갈 나이에 우연히 청룡질을 얻어 약으로 치료했으나 효험이 없어 학사가 한창 시름에 잠겨 있는데, 홀연히 걸재승(乞齋僧)이 앞에 나타나거늘 학사가 말하기를, 「집안에 근심이 있어 시주할 겨를이 없소.」하 였더니, 중이 말하기를,「감히 어떤 양상의 증세이며 병환인지 알기를 청원합니다」하므로, 학사가 말하기를, 스님은 의술 처방에 밝소.」하자, 중이 말하기를, 「밝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회복시킬 수도 있습니다.」하기에, 학사가 이상하게 여기며 시험 삼아 병명을 말하였더니 중이 말하기를, 「이것은 매우 쉬우니 급히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달려가서 화지(火池)에 목욕을 하면 금방 차도가 있을 것이오.」하고는, 하직하고 떠나버렸다. 학사가 즉시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뒤따라 가보게 하였으나 문을 나서보니 문득 그 중은 보이지 않았다. 학사가 그 중이 신승(神僧)인줄 알고 그의 말대로 시험 삼아 딸에게 가서 목욕하게 하였다. 고암에서 화왕산성 북문까지는 겨우 10리 쯤 되며, 성 안에는 세 개의 못이 있는데 그 둘레 는 모두 매우 크지 않지만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바야흐로 목욕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가 일어나 캄캄해지며 그 녀(女)가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대체로 그 녀가 막 목욕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 물체가 못 바닥으로 끌어들이는 듯 하더니 갑자기 구슬로 된 관에다 옥을 찬 소년이 나타나 교어(交語)하기를, 「나는 동해신룡자 옥결이며 그대와는 전세의 묵은 인연이 있었으니 오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운무가 개이고 저절로 솟구쳐 못 가로 나왔는데 해묵 은 병은 깨끗이 없어지고 돌아와서는 임신이 되었다. 소년이 또 꿈에 고하기를, 「나의 아이는 남자이니 모름지기 잘 보호하면 크게는 공후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은 잃지 않을 것이며 자손이 만대토록 쇠퇴하지 않을 것이오.’」하였는데, 태어남에 이르러 크게 기이한 표상이 특수하였고 왼쪽 겨드랑이 밑에 붉은 글씨의 「曺」자가 있었다. 학사가 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진평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 고 「曺」라는 성을 하사하고 인해서 창녕을 본관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이름을「계룡(繼龍)」이라 하게 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이 그의 장녀 덕만으로 배필을 삼게 하였으니 바로 선덕여왕이다. 사기에 일컫기를 「진평왕이 훙(薨)하고 후사가 없자 나라 사람이 덕만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명철하고 민첩하여 16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나라 안이 잘 다스려졌다. 그리고 김유신 등을 발탁하여 삼한을 통합할 계획을 하였으니 대체로 여왕 가운데 성덕이 다. 세상에 전하기를 선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으니 목단의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오.〉하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비를 그리지 않았으므로 알았다.〉 하였고, 일찍이 옥문지의 개구리가 싸우는것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반드시 이웃 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올 것이다.〉 하 였는데, 정말로 쳐들어왔으며, 이미 늙어서는 죽을 날짜를 미리 말하였는데 어긋나 지 않았다.」하였다. 지금 신라역사를 살펴보니 당 태종(唐太宗)이 선덕에게 조서 를 내려 부공(夫公)과 함께 국사를 처리하게 하였는데 부공의 성명은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32).” (이하는 子孫錄이므로 省略함) 하였다. 유사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생전 사적을 기록한 글이며, 특히 자손이 쓴 조상의 유사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술됨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조세 기이」의 내용을 검토하면 앞부분 즉 출생부분은 《매계보》「사실」의 「속전」을 좀더 구체화 내지 윤색하여 재구성하였음을 원문 대조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무엇 을 근거로 약 2백 30여년 뒤에 이와 같은 재구성이 가능하며, 또한 이와 같은 재구성의 필요성이 과연 절실하였는지는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라고 본다. 뒷부분은 기간 족보에 기재된 자손록을 전재(轉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조세기이」의 출처를 막연하게 구보(舊譜)라고 적고 있어 확실한 근거제시에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 시조 배위에 대한 새로운 언급 즉 진평왕의 여서에서 진평왕 장녀 덕만으로 종전의 정론과는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공주」에서 갑자기 「덕만」이란 구체적 인 이름으로 바뀌게 된 전거에 대한 소명자료는 전혀 없으므로, 후손으로서 선계를 미화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지극히 주관적인 기술로 볼 수밖에 없다.
다. 《창녕조씨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
1801년(순조1)에 학헌공(鶴軒公) 조석중(曺錫中1761~1816)에 依하여 편찬된 《창녕 조씨 지선록》권지이(卷之二) 세승일(世乘一)의 「유사(遺事)」내용을 살펴보면,
“시조 어머니[鼻母]의 휘(諱)는 예향이니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이다. 학사가 창녕현 고암촌에 살았다. 딸이 시집갈 때가 되어 우연히 복질(腹疾)을 얻어 약으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학사가 시름에 잠겨 앉았는데 홀연히 걸재승이 문 앞에 이르거늘 학사가 말하기를, ‘집안에 걱정이 있어 겨를이 없소.’ 하였더니, 중 이 말하기를, ‘어떤 증세입니까?’ 하므로, 학사가 말하기를, ‘의술의 처방을 압니까?’ 하니, 중이 말하기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에, 학사가 이상하게 여겨 시험 삼아 병명을 말하였더니, 중이 말하기를, ‘이는 매우 쉽습니다. 급히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달려가서 화왕산 못에 목욕하면 금방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서, 하직하고 떠나버렸다. 학사가 즉시 시중 드는 자에게 명하여 뒤좇아보게 하였으나 문득 보이지 않았다. 학사가 그를 신승으로 알고 시험 삼아 그의 말과 같이 하였다. 고암에서 화왕산성 북문까지의 거리는 10리쯤이고, 산성 안에는 세 개의 못이 있는데 그 둘레는 모두 매우 크지 않지 만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바야흐로 목욕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가 일어 캄캄해져 그 녀가 있는 곳을 잃어 버렸다. 대체로 그 녀가 막 목욕하려고 할 때 어떤 물체에 이끌려 못 밑으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홀연히 한 소년이 주관(珠冠)과 옥패(玉佩) 차림으로 나타나 함께 이야기하기를, ‘나는 동해 신룡의 아들 옥결이오. 그대와는 전세에 묵은 인연이 있었으니 오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운무가 개이고 그 녀가 저절로 못가로 솟구쳐 나왔는데 묵은 병은 쾌하 게 없어졌다. 집으로 돌아옴에 이르러 임신을 하였는데 소년이 또 꿈에 고하기를, ‘나의 아이는 남자이니 모름지기 잘 보호하여 양육하면 크게는 공후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은 잃지 않을 것이며 자손이 만대로 쇠퇴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는데, 태어남에 특수한 모습과 비범한 거동이 있었다. 학사가 그 일을 신라왕에게 알렸 더니 왕이 공의 겨드랑이 밑에 붉게 「曺」자가 쓰여 져 있다고 하여 성은 「曺」 이름은「繼龍」으로 내렸다.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이 그의 장녀로 배필을 삼게하였으니 바로 선덕여주이다. 동사(東史)를 살펴보건대 당 태종이 선덕에게 부공과 함께 국사를 다스리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그 조서에 부공의 성명을 언급하 지 않았으니 탄식스럽다.”33) 가승(家乘)
하였다. 전체 내용을 검토하면 《서주집》유사「조세기이」 내용의 자구를 수정하 여 그대로 이재(移載)한 것을 원문 대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 특기할 부분은 「조세기이」에서는 『비조 휘 계룡(鼻祖諱繼龍)』으로 시작하였는가 하면, 《창녕조씨지선록》의「유사」에서는 『비모 휘 예향(鼻母諱禮香)』이라고 하였고, 또 《매계보》 사실에는 옥결의 정체를 『화왕산성 용담의 용자』라고 하였고, 《남 명보》에는 『화왕산성 대지(大池)의 신룡자』라고 하였으며, 「조세기이」에는 『동 해 신룡자』라고 하였는데,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명과 창녕현 화왕산 용지 조씨 영 적비문에는 「조세기이」의 기재내용을 인용하여 『동해 신룡자』라고 기술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세기이」의 말미에 ‘부공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유사」에서는 ‘부공의 성명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한스럽다.’고 하여, 진실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을 분명하게 남겨 두었다.
2.《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편(王曆篇) 검토
《삼국유사》 왕력편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상현은 《삼국유사》 왕력편 검토에서,
“《삼국유사》 왕력의 기사와 기이편(奇異篇) 이하 제편의 기록을 대조 검토해보면 내용이 서로 다른 경우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서로 다른 내용의 범위 는 신라(新羅), 백제(百濟), 가락국(駕洛國) 등의 제왕력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왕명(왕명)이나 왕의 재위 연수, 시호(諡號)가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 등 매우 중요한 기사에 이르기까지 서로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고 전제하고 끝에,
“왕력이 일연(一然)에 의해 쓰여 진 것이 아닐 것임과 ≪삼국유사≫ 체제상의 왕력이 부록적인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34).”
하였다. 특히 본고와 직접 관련이 있는 선덕여왕의 즉위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왕력에는 「갑오년(634)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14년이다.」고 한 내용에 반하여 기이편(紀異篇)의 선덕왕 지기삼사에는 「정관(貞觀) 6년 임진년(632) 에 즉위하여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참고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연표에는 기이편과 같이 임진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상이점이 많다 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착오로 돌리기에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왕력의 본문 대로 검토하려고 한다.
王曆의 善德女王條에,
“제27대 선덕여왕 (이름은 덕만 아버지는 진평왕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麻耶夫 人) 김씨이다.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하였다. 여왕의 배필은 음갈문왕(飮葛文王) 인평(仁平) 갑오년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35).”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선덕여왕에게는 음갈문왕인 남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 창녕 조씨 시조인 조계룡이 음갈문왕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므로 그 주장이 명확한 근거에 의한 것인가를 분석하여 밝히고, 아울러 인평을 연호가 아닌 인명으로 보는 견해가 왕고에 있었으므로 그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밝히려 한다.
3. 갈문왕(葛文王)
갈문왕은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혹은 가계의 장 에게 준 칭호이다. 갈문왕에 대한 연구는 조선조 성호(星湖) 이익(李瀷),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에서부터 일본의 금서룡(今西龍), 갈성말치(葛城末治), 그리고 한국의 양주동(梁柱東), 김상기(金庠基), 이기백(李基白) 등의 학자로 이어졌다. 이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갈문왕과 왕과의 관계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먼저 이재 황윤석 은 갈문왕에 대하여,
“신라에서 추봉왕은 모두 갈문왕이라고 일컬었다36).”
하였으며, 금서용은「신라갈문왕고(新羅葛文王考)」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서 나타난 갈문왕 17명에 대하여,
“왕의 부(父)가 8명, 왕의 외구(外舅)가 7명, 왕의 외조부(外祖父)가 8명, 여왕의 배필이 1명, 불명이 1명으로 분류하고 이상의 어느 것도 왕의 최근친으로서 말하자면 준왕이라고 말하여도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37).”
하여, 갈문왕은 왕의 최근친으로 준왕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김상기는 「갈문왕고(葛文王考)」에서,
“신라의 골품과 갈문왕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갈문왕은 왕의 근친․외척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칭호이며, 또 갈문왕에는 박(朴)․석(昔)․김(金) 이외의 씨성이 붙여진 예가 없으니 이것은 명백히 신라 왕족을 구성한 소위 박․석․김 삼성이 향유하 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성골은 이 세 씨족으로 구성된 신라 왕족을 가리킨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에 보이는 『왕족은 제일골이고 처(妻)도 그 왕족이며 자식을 낳으면 모두 제일골이 되고 제이골에게는 장가들지 않는다[왕족제일골 처역기족 생자개위제일골 불취제이골(王族第一骨 妻亦其 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라는 기사를 미루어 보면 갈문왕은 성골에 한한 칭호였음을 추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38).”
하여, 갈문왕은 신라시대 박․석․김 삼성 이외의 성씨에 붙여진 사례가 전무하며, 따라서 갈문왕은 성골인 박․석․김 삼성의 전유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이기백은 「신라시대의 갈문왕」에서,
“결국 갈문왕이 된 것이 왕의 부(父), 왕모(王母)의 , 왕비(王妃)의 부, 왕의 동모제(同母弟), 여왕의 배필이라는 것으로 정리되게 되었다39).”
하여, 갈문왕이 왕의 최근친이었음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용선(金龍善)은 「울주 천전리 서석 명문(蔚州川前里書石銘文)의 硏究」에서,
“가신적(家臣的) 집단을 거느린 갈문왕도 왕에 준하는 지위와 권력을 소유하여 어쩌면 신라 중고시대의 왕권에도 영향력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존재라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40).”
하여, 갈문왕은 왕에 준하는 지위와 권력을 소유하여 왕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以上 네 분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신라시대의 갈문왕은 모두 박․석․김 삼성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아울러 그들만이 향유했으며 왕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존재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따라서 선덕여왕의 배필인 음갈문왕의 성씨는 박․석․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신당서》 신라전의 내용을 대입하면 제일골의 여자도 제이골의 남자에게 하가할 리가 만무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며, 또한 왕권강화의 차원에서 족내혼 특히 근친혼이 성행했던 당시 신라왕실의 상황을 감안41)하면 선덕여왕의 배필은 박․석․김 삼성 중 김씨였을 것이라는 단정이 가능하다.
4. 음갈문왕 인평(飮葛文王仁平) 문제
「인평」이 선덕여왕의 연호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인평을 인명인 김인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으며 필자도 인명으로 보는 견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그 이유를 든다면 삼국유사의 왕력을 통해서 신라에서 연호를 사용한 왕은 23대 법흥왕에서 28대 진덕여왕까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여섯 왕의 기사를 쓰는 가운데 연호를 쓴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선덕여왕 기사의 이 부분에만 연호를 썼다는 것은 저자의 기술형평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선덕여왕의 즉위년은 임진년 (632)이고 인평이라고 개원한 것은 갑오년(634)이라고 판명되어 있는데, 인평 갑오년에 즉위했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사안으로 우연한 착오라고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이 인명으로 볼 수 있는 단서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 학헌공 조석중이 삼종숙인 감찰공 조회진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일찍이 동사(東史)를 보니 간혹 갈문왕 김인평을 선덕여왕의 부공이라고 일컬은 데가 있었습니다42).”
하였으며, 최남선(崔南善)이 편수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선덕여왕의 부군(夫君)은 갈문왕 김인평이며, 진덕여왕의 부군은 갈문왕 김기안 이다. 그리고 무열왕의 어머니는 바로 선덕여왕의 동생 천명부인이다. 읍에 있는 세보에 기록된 것이 이와 같지만 다른 사기에는 모두 전해지지 않으므로 이 사실을 권외에다 적어 전의43)하는 법을 모방한다44).“
하였고, 김용제(金鎔濟)의 ≪경주읍지(慶州邑誌)≫에,
“《삼국유사》에 「당제(唐帝)가」삼색의 꽃씨를 보낸 것은 대체로 신라에 세사람의 여왕이 있을 것임을 알고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당제에게 뛰어난 명철 함이 있다는 사실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갖추어 기재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간혹 선덕여왕의 남편은 갈문왕 김인평이고, 진덕여왕의 남편은 갈문왕 김기안이라고 한다45).”
하였다. 위와 같이 선덕여왕의 남편을 갈문왕 김인평이라고 기록한 문헌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간행된 경주김씨(慶州金氏) ․ 김령김씨(金寧金氏) ․ 익화김씨(益和金氏) 등 제 김씨의 족보46)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의 족보에서 선덕여왕의 부(夫)를 김인평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록의 근거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료를 가지고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고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하며 일방적으로 선덕여왕의 연호를 오인하고 인명으로 착각하여 주장한다는 식의 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판단하거나 처리될 사안이 결코 아니다. 특히 학헌공은 조선 정조 때 학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 관찰사 등을 역임한 인물로 ≪창녕조씨지선록≫을 편찬한 장본인이며, 최남선은 국학자로서 한말을 풍미한 인물이란 점과, 김용제는 한학자로서 사학에 깊은 식견을 가진 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언급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 학헌공이 「갈문왕 김인평을 선덕여왕의 부공이라고 일컬은 것을 동사에서 보았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삼국유사》 왕력편의 이 대목을 지목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본문의 구문내용 즉 「왕지필 음갈문왕 인평」으로 보는 것이 한문의 문장이나 문법상 하등의 하자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최근의 조범환은 《우리 역사의 여왕들》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에서,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단서로 ‘음(飮)’ 이라는 한자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한자의 음(飮)자는 반(飯)자와 아주 비슷하다. 따라서 목판을 찍어낼때나 필사할 때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반’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당시 진평왕의 동생, 그러니까 선덕여왕의 삼촌 가운데 백반과 국반이 있었다. 따라서 백반 아니면 국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두 사람 가 운데 어느쪽이 선덕여왕의 남편이었을까 하는 점이 남는다. 기록에 의하면 삼촌인 국반(진안갈문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잇는 진덕여왕의 아버지이고 따라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촌 간이다. 당연히 국반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반이 아니라면 백반만이 남는다. 그런데 백반이 남편이라면 선덕여왕은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과 결혼한 것이다.”
고 하여, 음갈문왕은 선덕여왕의 삼촌 백반이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이 밖에도 ‘음’을 ‘반’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몇 분이 더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5. 지기삼사(知幾三事)
《삼국유사≫에 기재되어 있는 선덕왕 지기삼사를 요약하면, 첫째는 당 태종이 보낸화도(畵圖)를 보고 향기가 없을 것임을 알았고, 둘째는 겨울에 개구리가 모여서 우는 것을 보고 이웃 나라의 군사가 침입한 것을 알았으며, 셋째는 자신이 죽을 날짜를 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여왕으로서의 나약한 인상을 불식시키고 여왕에게도 성지가 있음을 보여 줌으로서 왕권강화의 효과를 노린 배경에서 출현된 설화라고 보여진다47). 그런데 첫 번째 화도에 대한 기사는《삼국사기》 선덕왕 본기의 내용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부왕인 진평왕 앞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는《삼국유사》에 충실하는 입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본문 가운데,
“이것은 당 태종이 과인에게 배필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48).”
하였는데, 김현룡(金鉉龍)은
“이러한 기술로 보아 선덕여왕이 임금 자리에 오른 뒤의 일로 확실하게 해놓은 셈이다49).”
하여, 선덕여왕 즉위후의 일이라고 보는 필자의 견해와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배필이 없다는 원인을 첫째 혼인을 하지 않은 처녀인 상태와, 둘째 혼인한 뒤 남편이 죽어 과부로 있는 상태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전개되는 개구리가 모여서 울어댄 사건을 분석하면 남녀간의 교구원리를 극대화한 것으로 즉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패하게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패한다는 이론은 바로 체험을 통해서만이 터득이 가능하며 처녀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논리를 군신들 앞에서 거침없이 펼 수 있었다는 점을 추리해보면 배필이 없는 유형에서의 둘째 번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검토 결과를 왕력편의「선덕여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이다.」는 기록과 연관을 지을 수 있으며,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음갈문왕 김인평이 죽었으므로 없게 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선덕여왕이 자신의 죽을 날짜를 알려 주면서 도리천중(忉利天中)에 묻으라고 하므로 왕이 죽자 그곳에서 장사지냈다고 적고 있다.경주시지( 慶州市誌)를 보면,
“선덕왕릉하의 경주 울산선 국도변에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가 있으며 능역내에 음묘라고 불리우는 고분이 있는데 이 무덤이 음갈문왕의 무덤이라고 전한다50).”
고 기록하고 있다. 선덕왕 지기삼사의 분석과 경주시지의 기록을 종합하면 선덕여왕이 결혼하여 왕이 되기 전에 남편과 사별했을 것이라고 본다.
6. 선덕여왕
가. 여왕의 내력 (화랑세기(花郞世紀) 분석
《화랑세기》는 신라시대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신라 역대 화랑의 세계를 전기체(傳記體)로 기술한 책이다. 이 책이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1989년에 공개되었는데, 공개와 동시에 그것이 진본이다 위작이다 하는 뜨거운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책이 원본을 필사한 책일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 가운데 13세 화랑이었던 용춘(龍春)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으며 선덕공주와의 관계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다른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3세 용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용춘은 금륜왕(金輪王:진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智道太后)이니 용수(龍樹)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이 주색에 빠져 음란함으로써 폐위되어 유궁에 있은지 3년 만에 별세했을 때 공은 아직 어려서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지도 태후가 태상태후(太上太后)의 명령으로써 다시 새 임금[眞平王]을 모시게 되자, 공은 새 임금을 아버지라 부르니 이 때문에 왕이 불쌍히 여겨 사랑과 대우가 특별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 분발하여 문노(文弩)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秘寶郞)을 섬기면서 형으로 삼았고 서제(庶弟) 비형랑(鼻荊郞)과 함께 낭도들에게 희사하기를 힘 쓰니 이런 까닭으로 대중들이 붙따라서 삼파가 모두 추대하기를 원하였다. 이 때문 에 서현랑(舒玄郞)이 풍월주(風月主) 자리를 양보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13세 풍월주가 되고 호림공(虎林公)을 보좌로 삼았다. 공은 곧 낭도들의 묵은 풍습을 혁신하여 한결같이 인물을 발탁하고 골품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골품이란 것은 왕의 지위와 신하의 지위의 구별이니 낭도를 어찌 골품으로 쓰겠는가?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떳떳한 법인데 어찌 파를 따지겠는가?”
하니, 무리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문노 때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질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때 대왕이 적자(嫡子)가 없어 공의 형 용수전군(龍樹殿君)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전하고자 하므로 용수전군이 공에게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대왕의 춘추가 아직 왕성한데 혹시 후사를 둔다면 아마 불행해질 것입니다.”
하여, 용수전군이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摩耶皇后)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았는데 바로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공은 이 때문에 더욱 조정에 중히 쓰이어 풍월주 자리는 호림공에게 양보하고 궁중에 들어가 요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낭도들로서 등용되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선덕공주가 점차 장성하며 용봉같은 자질과 천일같은 의표가 왕위를 이을 만하여 대왕이 뜻을 두었고 천명공주도 효성과 순종으로 양보하니 대왕이 곧 공에게 명하여 선덕공주를 모시게 하였다. 공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 모시다가 아들을 두지 못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대왕이 곧 용수전군에게 명하여 모시게 하였지만 역시 후사가 없었다.
공은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워 각간으로 승진되었다. 용수전군이 임종 때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부탁하였는데, 아들이 곧 우리 태종대왕이다.
공주가 즉위하여 공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공이 후사를 얻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물러나니, 여러 신하들이 세 번 남편을 맞는 제도를 의논하였다. 공이 곧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공은 왕명으로 호명궁(昊明宮)에 거처하면서 다섯 딸을 낳았으나 다른 嫡子가 없었으므로 太宗을 아들로 삼았던 것이다. 서자 5명과 서녀 18명이 모두 귀하게 되어 세상에 드러났고, 태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갈문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성스러운 덕이 하늘과 같고 땅과도 같다. 찬(贊)을 짓노니,
“갈문왕의 덕은 일월과 함께 밝았도다. 우리나라 업적이 이를 힘입어 크게 이 루어졌더라51).”
하였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신라왕실에서의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족내혼 특히 근친혼이 극도로 성행하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더구나 이 기사를 통하여 수혼제(嫂婚制)까지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용수와 용춘은 형제 사이이며 선덕공주 ․ 천명공주와 용춘과는 종숙질 사이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신라왕실 특히 김성 계열의 난혼에 관한 소명 자료가 이와 같이 또렷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앞서 갈문왕문제에서 언급한 선덕여왕의 배필은 박․석․김 삼성중의 김씨였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그리고 창녕 조씨 시조가 선덕여왕의 배필이라고 직접 간접으로 주장하는 견해들이 설득력을 상실함은 물론 창녕 조씨 시조와는 무관한 사이임을 입증하는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나. 여왕에 대한 평가
고려의 김부식(金富軾1075~1151)은 《삼국사기》에서 논평하기를,
“논하건대 내가 듣기에는 옛날 여와씨(女媧氏)가 있었으나 이는 바로 천자가 아니고 복희씨(伏羲氏)를 도와 9주(州)를 다스렸을 따름이고, 여치(呂雉)․무조(無曌) 와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유약한 임금을 맞아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통제한다 말하였으나 공공연하게 왕이라 칭하지는 아니하였고 다만 고황후여씨(高皇后呂氏) 니, 칙천황후무씨(則天皇后武氏)니 하고 기록한 것인데, 이를 천리로써 말하면 곧 양은 강하고 음은 유하며, 사람으로 말하면 곧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니, 어찌 모구(姥嫗)로서 규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할 수 있으랴? 신라에서는 여자를 모셔다가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이를 살펴보면 이는 정말로 난세의 일이 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 하고,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야윈 도야지가 깡충거리며 뛰논다.’ 하였으니, 그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52)?“
하였다. 유교적인 음양론을 바탕으로 여왕의 즉위와 통치를 정면으로 철저히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은 ≪양촌집(陽村集)≫에서 논평하기를,
“천도란 양은 굳세고 음은 부드러우며 인도는 남자가 높고 여자는 낮다. 남자는 밖에서 위를 바르게 하고 여자는 안에서 위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천지의 영구불변한 도[常經]이다. 임금이 뒤를 이을 사람이 없으면 마땅히 종실의 어진 이를 찾아서 세자를 정하는 것이 고금의 통의인데 진평왕이 아들이 없게 되자 그 딸 을 세우려 하매 군신들은 대의로써 종실의 어진 이를 택하여 세우지 못하고 곧 先군의 간사한 뜻을 엿보아 그 딸을 세웠으니 법도를 어지럽힘이 심하였다. 진실로 밝은 천자가 위에 있으면 마땅히 그 명분을 바르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고 어진 임금을 택하여 세우도록 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요, 만약 먼 나라에서 중국과 같이 하기가 어려웠다면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당태종의 영명함으로도 이와 같이 하지 못하고, 곧 사신을 보내어 명을 내려 여자를 책봉하여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었다. 대저 공과 왕은 모두 나 라의 주인이요 백성의 임금이란 칭호이거늘 참람되게 음유한 몸에 더해 주었으니 이것은 존비의 분별과 강상의 막중함을 당 태종 스스로 털어버린 것이다. 얼마 안 가서 드디어 무씨가 참절하는 재화가 일어난 것은 실로 당 태종의 이 일로부터 발 단된 것이다53).”
하였다. 전형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진면목을 돋보이게 하는 강도 높은 예리한 비판은 성리학의 근원이 되는 ≪역경≫의 음양과 천존지비의 논리에 입각한 평론임을 알 수 있으며, 여말선초를 풍미한 대학자로서의 이와 같은 비난은 조선조의 여러 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그의 첨성대시(瞻星臺詩)에서 신라 진평왕이 장녀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데 대해서 혹평하기를,
“반월성 주위에 산안개가 걷히니 半月城邊嵐霧開
우뚝한 석탑이 오는 사람 맞이하네 亭亭石塔迎人來
신라의 옛 유물은 산만이 있다 여겼더니 新羅舊物山獨在
뜻밖에 또 첨성대가 있구려 不意更有瞻星臺
선기옥형으로 칠정을 정리한 것은 순임금 우임금의 일이나 璣衡齊政舜禹事
제작하는 근거 없으니 어디다 쓸까 制作無稽安用哉
왕위를 감히 여자에게 넘겨주었으니 敢將神器付晨牝
진평왕은 천고에 재앙의 근원이 되었네 千古眞平爲禍胎.“
하였으며, 또 그의 「과옥문곡(過玉門谷) 일명여근산(一名女根山) 사재삼국사(事在三國史」시에서,
“얕은 골짜기에 어찌 적병이 잠복할 수 있었으랴 淺谷何能伏敵兵
옥문곡이란 두고두고 부질없는 이름이 되었네 玉門千載謾爲名
주민들 <선덕여왕> 지기삼사 다투어 이야기하므로 居民爭說知幾事
공연히 장수들이 길 피해서 돌아가도록 하네 空使元戎枉道行.“
(백제의 주장이 <이곳에서> 죽었다고 하여 후대에 장수들이 작전임무를 수행하면서 모두 꺼려하여 이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고 함)
하였는데,「첨성대」시에서 선덕에서 비롯된 여왕의 승계가 진덕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진성으로 이어짐으로서 정치와 기강이 문란해져 신라가 멸망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진평왕이 그의 딸인 선덕에게 왕위를 물려 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며,「과옥문곡」시에서는 선덕왕 지기삼사가 별것이 아닌 허구임을 옥문곡을 지나면서 실감하고 있음을 읊고 있다. 그리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金時習1435~1493)은「선덕왕릉」 시에서,
“그대는 모르는가? 君不見
여씨가 한실을 능멸하던 때에 呂氏憑陵漢室時
한나라가 몹시 위태로웠던 것을 漢室岌岌嗟將危
또한 모르는가? 又不見
무씨가 당실에서 행악하자 武氏鴟張唐帝家
당나라 왕업이 마침내 어지러웠던 일을 唐室功業終紛拏
예로부터 명철한 아낙이 성을 무너뜨리고 由來哲婦必傾城
아낙이 말 잘하면 화단을 일으킨다네 婦有長舌厲非輕
신라 여주 선덕이라 이름하였지만 新羅女王名善德
좋은 정치 소문 없고 사특만 좋아했네 治則莫聞崇怪慝
일생의 호사로는 그를 당할 이 없으며 一生好事無與比
불교의 신기한 일 몹시도 좋아하여 大喜浮屠神異事
죽을 때도 마음 못 고쳐 도솔천에 묻혔으니 死猶不悛瘞兜率
낭산 남쪽이 넋 깃든 곳이라네 狼山之南神所室
이 버릇이 신라를 저절로 망하게 하였으니 脣齒新羅自滅亡
부처에게 지나치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라네 只緣侫佛爲濫觴
이제껏 들판에 무덤이 남아 있어 而今原野有培塿
가시덤불에 싸여 여우 토끼 뛰어 다닌다네 萑葦叢中狐兎走
일평생 좋은 일도 이름만 남길 뿐인데 百年後事但留名
오명이나 방명 남김도 남들이 평가하는 것이네 遺臭遺芳人所評
공업만 이루어도 일생이 만족하니 但得功業一生足
섶에 싸여 들에 버려져도 나쁠 것은 없다네 衣薪棄野亦不惡.“
하였는데, 이 시에서 매월당은 한(漢)나라의 여후(呂后)와 당(唐)나라의 칙천무후(則天武后)가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어지럽혔던 고사를 인용하여 신라의 선덕여왕은 이름만 좋았지 불교에 미혹되어 오명을 남겼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리고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1577~1624)는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한 여인의 작은 지혜가 마침 후일의 화(禍)의 소지가 되었다.……백성들이 또 종매인 승만(勝曼)을 세우니 진덕여주(眞德女主)이다. 그 후 백성들이 고사를 따라 또 진성여주(眞聖女主)를 세우니 음란한 것으로 정치를 잘못하여 끝내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54)
하고, 이어서,
“개구리가 노하여 울면 반드시 적이 있고 蛙怒鳴必有敵
꽃에 나비가 없으면 서로 농락하는 것이고 花無蝶相調謔
죽음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지만 死固有預知
세 가지 합치되기 어려운 것인데 꼭 맞았으니 難合三如期
신라에서 여자가 대신 나라를 다스렸네 新羅代女治國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인데 牝鷄晨家之索
대의에 어두워 보잘것없는 지혜를 귀하게 여겼도다 昧大義貴小慧
선덕이 죽자 진덕이 계승하였으니 善德沒眞德繼
상례에 얽매여 지각이 없었네 狃故常罔知覺
그러다가 진성여왕이 所以眞聖主
마침내 국가의 맥을 끓고 말았도다 終焉椓國脈.“
하였는데, 여기서는 선덕여왕의 지기삼사를 하찮은 지혜로 보고 여왕의 즉위가 先 례가 되어 결국 신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숭악(崧岳) 임창택(林昌澤168 2~1723)은「모린도(牧丹圖)」시에서,
“제녀 여와씨가 보석을 불린 것도 帝女鍊寶石
군자가 오히려 비난하였지 君子猶有譏
주공은 성왕을 보필하였고 周公負孺子
강모는 발을 드리우지 않았었네 姜母簾不垂
제나라 궁실의 백옥환도 齊宮白玉環
전국시대에 부서졌는데 擊碎戰國時
모란도를 보고 안 것을 그대는 성신하다 말게나 牧丹圖君莫稱聖神
암탉은 본래 새벽에 울지 않는 것이네 牝鷄本無晨.“
하면서, 지기삼사중 모란에 대한 일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고 신랄하게 비난하 는 내용이다. 그리고 순암(順蓭)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살펴보건대, 진평왕이 후야(薨)하매 아들이 없었다. 이 때 왕실 지친으로는 김 춘추(金春秋) 부자(父子)가 있었고, 종척대신으로 알천(閼川)의 무리가 있었는데 훈망이 모두 뛰어나서 나라 사람들의 신복한 바 되었으니, 신라의 여러 신하들은 이때에 어진 이를 택하여 그를 세웠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선군의 사특한 뜻을 따라 그 딸을 세움으로써 음양의 이치를 배반하고 남녀의 분의를 바꾸었으니 그 상도를 거스른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이러므로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며, 비담(毘曇) 등이 그것을 틈타 난을 일으킨 것이 이상하게 여길 것 이 못된다. 당시의 사정이 역사에 자세하지 못하나 어찌 대신중에 권세를 탐내 는 자가 있어서 국정을 마음대로 농간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 면 오랑캐의 풍속이 잡되고 어지러워서 그러한 것이 아닌가? 만약 명위가 이미 정해져서 폐립하기 어려웠다면 선덕이 훙서하였을 때에 마땅히 종실의 어진 이 를 세웠어야 하는데 그릇된 잘못을 그대로 이어 받아 또다시 진덕을 세워, 마치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을 떳떳한 도리인양 김유신 같은 무리도 일대의 인물로 호칭을 받으면서 머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 여주를 섬기되 부끄러워하지 않았 으니 무엇 때문이었을까?55)”
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진평왕이 선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태도에서부터 김유신 같은 인물이 여왕에게 굽실거리며 섬긴 태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비난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낙하(洛下) 이학규(李學逵1770~?)는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세 가지 안 일이 일에 무슨 도움이 되랴 三事知於事竟何裨
모란에 나비가 없는 것으로 맞힌 것은 牧丹之無蝶
쥐똥을 넣은 간교한 속임을 발각한 것이고 鼠矢發姦欺
연못 속의 개구리가 눈 부릅뜬 것을 듣고 안 것은 池鼃之怒目
조객이 사냥 나가는 시기를 말한 것과 같다 趙客言獵期
또 죽을 때를 예고한 것은 死期之豫告
억측으로 자주 맞히는 것이다 臆測屢中之
아아! 한 가지 깨닫지 못한 일은 嗚呼一事有未覺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네 牝鷄之晨家之索.“
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앞의 심광세보다 더 구체적으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그 이유를 밝혔다고 하겠다. ≪해동악부≫에서 「지기삼사」에 대한 기록에서 제 1사에 대해서는 손량(孫亮)의 고사에 비견하고, 제 2사에 대해서는 조객(趙客)의 고사에 비견하여 「삼사」에 관한 문제를 별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매계공 조위는「영묘사(靈妙寺)」 시와 「무열왕릉(武烈王陵)」시에서 강도 높은 비난을 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영묘사」시에서는,
“사방의 벽에는 붉고 푸른 무늬인데 四壁絢靑紅
사람과 하늘의 뭇 형상을 그렸으며 人天繪象像
구슬로 꾸민 깃발과 일산에는 珠幢與寶蓋
어지러이 먼지가 끼었도다 漫漶集坌坱
그 가운데를 잠깐 엿보니 我暫窺其中
만든 구조 내려다보나 쳐다보매 혼란스러워 結構迷俯仰
인력으로 된 것 아니라고 여기고 謂非人力施
감탄하며 지난날을 상상하였도다 感歎起遐想
옛날 선덕왕은 암탉이 새벽에 운격인데 善德昔司晨
부처 섬기기에 너무 지나쳐 事佛過崇獎
절 짓는 재목 한 개에 백금을 허비하고 一木費百金
주춧돌 하나에도 만 꿰미의 돈을 버렸네 一礎捐萬鏹
경영한 일 겨우 이것뿐이고 經營乃止此
국고 모두 탕진함은 염려하지 않았었네 不恤傾帑藏
부처의 힘을 빌어다가 欲借迦維力
한 세상에 널리 펼치려 하였지만 普沾世界廣
원망하는 소리 어찌 없었으랴 豈無怨嗟聲
복리가 마침내 흐리멍덩해졌네 福利竟䁳矘.“
하였고, 또「무열왕릉」시에서는,
“빗돌을 만지며 비문을 읽어 보았지만 摩挲讀碑文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사실을 알기 어렵네 缺落難實究
아득한 세월을 지내면서 茫茫歲月荒
내버려진 채 수호하는 사람 없었네 委棄無人守
옛날 여자가 남자처럼 왕 노릇 한 것 생각하면 憶昔陰爲陽
선덕과 진덕은 진정한 임금이 아니었네 二曼非眞后
강한 이웃나라 함부로 번갈아 침략하여 强隣肆侵軼
사방의 국경에는 전투가 잦았었네 四境多兵鬪
무열왕이 왕통을 계승하여 惟王入繼統
뛰어나게 공덕이 융성하였네 卓焉功德茂
믿음직한 중신 김유신에게 위임했으니 爪牙委庾信
무략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었네 武略殆天授.“
하였다. 매계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비판은 앞서 여러 학자들의 선덕녀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우선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매계가 태사공 조계룡의 후손이라는 특수관계 때문이다. 후손의 입장에서 이렇게 철저히 선덕여왕의 실정과 여왕이 된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인「진정한 임금이 아니다〔非眞后〕」고까지 하면서, 혹평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선덕여왕이 창녕 조씨 시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하다.
7. 정중환(丁仲煥) 논문의 허실
정중환이 동아논총(東亞論叢)에「비담(毗曇) ․ 염종(廉宗) 난(亂)의 원인고(原因考)」 ―신라정치사회(新羅政治社會)의 전환기(轉換期)에 관한 일시고(一試考)― 56)라는 논문을 쓰면서 창녕 조씨 시조설화라는 소제목하에 서술한 내용 가운데 확실한 자료의 검토도 없이 편견을 기술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결정적인 문항만 간추려 보면 첫째, 창녕 조씨 시조의 출생지에 대한 언급이고, 둘째, 창녕 조씨 시조의 출생 경위를 설명하면서 양촌 권근근제로 전남 영암거 조모씨 소장에 계한 원문이란 자료를 인용한 점이며, 셋째, 음갈문왕을 창녕 조씨 시조와 연관지은 것이다. 이 세 가지 왜곡 사실을 관계 자료에 의해서 허실을 구명하려고 한다. 구명에 임하기에 앞서 정중환은 설화로 전래되어 온 한 씨족의 시조에 관한 사실을 정확한 전거에 의한 검토도 없이 극히 단편적인 자료를 가지고 그것이 전체 씨족의 일관된 문건으로 착각하고 여과없이 그대로 인용하여 연구논문으로 발표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창녕 조씨 시조 출생지에 대하여 그는 논문에서,
“창녕 조씨의 세보에 의하면 조씨의 시조는 이름을 계룡이라 하고 진평왕대에 신라왕도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창녕 조씨의 여러 족보 중 시조와 관련된 기록에는 시조의 출생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전술한 창녕 조씨 족보편을 참고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주집》 권지팔(卷之八) 창녕조씨 시조유사에,
“학사가 창녕현 고암촌에 살았다57).”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학사는 속전에 기록된 조씨 시조의 외조부인 翰林學士 이광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기록의 근거는 파악할 수 없지만 창녕 조씨 시조의 출생과 득성 그리고 관향 등을 참고하면 이 기록이 사실과 근접한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후대의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속단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녕 조씨 시조의 출생지가 신라왕도 경주라고 임의로 기술한 것은 관계자료에 대한 검토가 미흡했음을 반영하는 단서이다.
둘째, 창녕 조씨 시조의 출생 경위를 설명하면서 주석(註釋)으로 양촌(陽村) 권근(權近) 근제(謹製)로 전남 영암거 조영호씨 소장(全南靈巖居曺永浩氏所藏)에 계(系)한 원문중(原文中)이라고 인용한 점이다. 그의 논문에,
“광옥이 이 일을 진평왕에게 아뢰었다. 진평왕이 아이를 보니 그 상모가 이상 하고 협하에 조국(曺國)이라 한 것 같은 문자 무늬가 있으므로 성명을 사하고 자라매 공주로써 배(配)를 삼았다.”
하고, 주석으로,
“(6)양촌 권근 근제로 전남 영암거 조영호씨 소장에 계한 원문중에는「협하유용조자 잉성조 명계룡(脇下有龍曺字仍姓曺名繼龍)」이라 하였고 이계 홍양호(영정대(英正代)의 대학자)찬의 ”창녕 조씨 시조 신라태사 부마도위 창성부원군 묘 단비명병서(昌寧曺氏始祖新羅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君墓壇碑銘幷序)“에서는「脇 下有文 如曺國」 賜之姓名 ‥‥」이라 하였다. ”國“자는 혹은 자의 늑자(泐字)가 아닌가 한다.”
하였다. 양촌 권근 근제……원문중이라는 資料 를 提示 한 데 대하여 그것이 資料 로서의 전혀 價値가 없음을 기제시 자료의 全文을 소개하고 검토 분석하려고 한다. 그 전문을 보면 한 장의 백지에다「조씨 사적(曺氏事蹟)」이라는 제목하에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曺繼龍)과 조자기(曺自奇), 조익청(曺益淸) 세 분의 사적을 한문 문장으로 서술하고 말미에 「양촌 권근제」라고 필사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미에 적힌 양촌 권근제라는 제자표시를 보고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 원문 내용의 전체를 양촌의 저술이라고 오인한데서 자료로 채택이 된 것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참고자료(參考資料) 별첨(別添) P34~1]
우선 이 원문을 조사해보면 네 글자의 오자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는데, 열거하면 태사 창성부원군 조계용의 사적 둘째 행의 22자째인「龍」자(字)는 쓰지 않아야 할 글자를 잘못 쓴 것으로, 점을 찍어 삭제해야할 것임을 표시하였고, 또 동일사적의 다섯째 행 여섯째 자인 「瘦」자는 「庾」자를 잘못 쓴 것이고, 다음은 좌정승 하성부원군 휘 익청의 사적 일곱째 행 13째 자인「特」자는「恃」자를 잘못 쓴 것임을 알 수 있는 바,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필사자의 식견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제시된 자료가 분명히 양촌 권근의 저술이 아님을 판단하는 근거는, 첫 번째 양촌 권근이 지었다고 증명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 두 번째 양촌이 「조씨사적」을 써야할 하등의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점이며, 특히 「조씨사적」에 명시된 「태사 창성부원군 조계룡」의 「태사 ․ 창성부원군」과 「문하시랑평장사 휘 자기」의 「문하시랑평장사」라는 두 분의 직함은 오직 창녕 조씨 족보에만 기재된 주관적인 내용인데, 일국의 대학자인 양촌이 객관적인 증빙자료도 없이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세 번째 문장구성자체가 자손이 조상의 사적을 기술하는 투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 네 번째 문하시랑평장사 휘 자기의 사적을 기술하면서 인용된 문헌인 병요(兵要)․대동운(大東韻)․여지승람(輿地勝覽) ․ 동국사(東國史) 등은 양촌이 졸한 뒤 50~70년 뒤에 간행된 서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양촌 권근제라는 제자표시는 바로 조익청의 사적 8행 하단의『교서왈 하성부원군조익청 입지순성 지신근신 역부십년지잠덕 식지금휴 위부만민지구첨 각준전헌 혁혁방가지석보 당당사직지중신 영서저어단서 풍열포어청사(敎書曰 夏城府院君曺益淸 立志純誠 持身謹愼 力扶十年之潛德 式至今休 位副萬民之具瞻 恪遵前憲 赫赫邦家之碩輔 堂堂社稷之重臣 永誓著於丹書 豊烈褒於靑史)』라고 한 구절 때문이다. 이 글은 고려 32대 우왕(禑王)이 즉위한 이듬해인 병진년(1376)에 경효대왕(敬孝大王:恭愍王)을 부묘(祔廟)하고 다섯 분의 공신을 배향하는 교서중 하성부원군 조익청에 관계되는 일부분이다. 양촌이 당시 지제교로서 이 교서를 왕을 대신하여 제술했던 것으로 양촌 권근제라는 제자표기는 이 부분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글은 일반 서술문이고 교서가 아니므로 제(製)라고 표기할 수 없는 글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적시되어 있는데도 면밀한 검토를 하지 않고 마치 양촌이 찬술한 것으로 오인하고 자료로 채택하였으므로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음갈문왕을 창녕 조씨 시조와 연관 지은 것이다. 그의 논문에,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만 왕지필 음갈문왕 인평 갑오립 치십사년(王之匹飮葛 文王仁平甲午立治十四年)」이라고 하여 배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음갈문왕이 곧 조씨 시조라고 한다.”
하였다. 앞서 갈문왕에 대한 연구로 신라의 갈문왕은 박․석․김 3성 외 여타 성씨에서는 점유할 수 없는 지위이다. 더더욱 창녕 조씨 시조가 음갈문왕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료로 제시된 양촌 권근 근제의 조씨 사적은 교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양촌 권근의 저술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세밀하게 분석한 바 있다.
8. 종합
창녕 조씨 족보에는 진평왕 여서」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몇째 사위라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으며 이것이 자연스런 정론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서주공이 시조 배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서주집》에 실었고, 학헌공은 그 기록을 《창녕조씨지선록》에다 자구의 수정을 거쳐 그대로 이재(移載)하였다. 하지만 그 기록이 확실한 근거에 의한 소명자료가 전무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이어지는 정해보의 발간과 시조 묘단비명 찬술 그리고 화왕산 용지 조씨 영적비문 작성에 그 내용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기록한 분의 주관적인 견해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갈문왕은 신라시대 박 ․ 석 ․ 김 3성의 전유물이기에 창녕 조씨 시조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과, 인평은 선덕여왕의 연호이기도 하지만 인명으로도 쓰인 사례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고, 《화랑세기》에서는 당시 신라왕실의 왕권강화 수단으로 족내혼의 성행을 낱낱이 증명하고 있으며 아울러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인 김씨임이 판명되고 있다. 그리고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에서 특히 매계공의 강도 높은 폄평은 속전으로 전해오던 시조의 출생 및 득성 사실을 처음으로 기록한 장본인으로서의 적극적인 비판으로 평가되며 조씨 시조와 무관한 사이임을 재확인시키는 자료라 하겠다. 그리고 정중환이 논문을 쓰면서 자료로서의 하등의 가치가 없는 자료를 활용하였다면 그 부분은 허구이며 그 허구 부분에 대한 적절한 조처가 따라야 할 것이다.
Ⅳ. 결론
이상에서 창녕 조씨 시조와 시조배위에 대하여 관계 문헌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고찰을 하였다. 이를 간략히 요약한다.
창녕 조씨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여서로 벼슬은 태사」라는 공통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통점의 최초 정립 시기를 추적해보면 조선조 초기였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진평왕여서」라는 사실 이상의 더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고 또한 있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고 본다. 구태여 그 이유를 든다면 첫째 입증할 만한 문헌적 근거가 없다는 문헌의 한계성을 들 수 있고, 둘째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해야 할 뚜렷한 목적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창녕 조씨 시조에 대해서는 이러한 공통점을 인식하는 선에서 조선 전기를 거쳐 후기로 진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조배위에 대하여는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공통된 기록과 상이한 기록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바로 ≪서주집≫의 유사조(遺事條) 「조세기이」에 기록된 것을 《창녕조씨지선록》에 이재한 「진평왕이 그의 장녀를 배필로 삼게 하였으니 바로 선덕여왕이다.」고 기록한 부분이다. 종전과는 다르게 시조의 배위가 그냥 공주가 아닌 장여로 적시하여 기록된 그 문헌상의 전거가 어디 있는지를 다각도로 검증 ․ 검토를 하였으나 창녕 조씨 시조의 배위가 진평왕의 장녀인 선덕여왕이라는 객관적인 기록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다만 《서주집》의 유사조 「조세기이」에서의 출처를 막연하게 구보라고만 적은 것으로 보아 자손이 선대의 생전 유적을 기록하는 유사의 특성상 선계를 미화하고 우월시하려는 일념에서 그냥 공주가 아닌 장녀 덕만으로 변개하였으리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할 따름이다.
그 당시 신라의 왕실에서 왕위승계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 선덕여왕의 남편으로서 갖추어야 할 여건을 기연구된 자료에 의하여 정리하면, 첫째는 성골신분이라야 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갈문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창녕 조씨의 시조는 이러한 필수적인 구비조건과는 거리가 멀고 더욱이 박․석․김씨가 아니기 때문에 갈문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왕권강화를 위한 당시 족내혼 특히 철저한 근친혼의 성행 사례로 보아 선덕여왕의 남편은 분명 김씨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 사실은 ≪화랑세기≫가 여실히 증명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역대 학자들의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에서 매계공의 평가는 여타 학자들과는 출신이 다른 입장임을 감안할 때 선덕여왕이 창녕 조씨 시조와는 무관함을 천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이계 홍양호의 창녕 조씨 시조 묘단비명과 영재 이건창의 창녕현 화왕산 용지 조씨 영적비문에서의 조씨 시조에 대한 기술 역시 종래의 공통점 즉 「창녕 조씨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여서」라는 기록이 정론임을 입증하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라고 본다. 따라서 창녕 조씨 시조의 배위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지만 선덕여왕은 아닌 것으로 정론한다.
이상으로 창녕 조씨 시조는 어떤 분이며 시조배위가 누구인지를 구명하여 보았다. 이 연구 작업은 1천수백 년을 거슬러 관조(觀照)해야 하는 시간적인 간극(間隙)에다 관련 문헌의 부족으로 자료인용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자료의 수집 ․ 발굴과 해석의 객관성 유지에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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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山家史》, 筆寫本,
창녕조씨학술위원회 간사조명근교수 019-501-6840
[출처]원문 창녕조씨(장흥 제산종중) cafe.daum.net/cho2002 |
첫댓글 대종회 운영위원 님들에게 보네주신 사무국장님 메일을 (논문)카페에 올려두엇습니다...
조계룡의 조(曺)에 대한 이두식 고찰은 없네요!!!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놓치고 있다고 봅니다!!!객관적으로 고찰하였다고 봅니다만, 김인평=조계룡이라는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음[마실]갈문왕 김인평은 곧 조[마실]계룡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서기571년 김인평(원래는 조인평)이라는 이름으로 탄생, 서기 587년경 등용 및 자(인경) 하사받음, 서기595년경 공주와 혼인, 서기631년 2월 조계룡이라 사성명받음(조씨 성 복원), 이후 [마실]갈문왕 김인평은 조계룡 창성부원군으로 기록됨!
위 결론부분의 "창녕 조씨 시조의 배위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지만 선덕여왕은 아닌 것으로 정론한다. "라는 글은 "...선덕여왕이다라고 명백히 기록된 것은 없지만, 신라시대의 이두식 문자를 고찰하면 음갈문왕의 음(飮)은 [마실]이라는 글자이며, 조계룡의 조(曺) 또한 [마실]이라는 말로서 서로 소리가 같은 글자가 되므로 조계룡일 수 밖에 없다"라고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한학(漢學)의 벽을 넘어서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연구에 할애 하신다면, 크나큰 결과가 나오리라 봅니다.
고대 중국의 요순임금의 하늘은 단군조선이자 단군왕검이었습니다. 송미자세가<기자의 홍범구주>에 바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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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天帝)>천왕(天王)>천군(天君=단군)>>천하 제(帝)(=天子등)>천하 왕(王)(=天子등)>천하 군(君)>공 후 백 자 남
천제, 천왕, 천군>천후(천공, 천후, 천백, 천자(天子), 천남)>공, 후 , 백, 자, 남
단군조선>천하 동서남북중(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중국 천자)>일반 제후(공후백자남)!
홍근 일가님 좋은글 잘읽어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