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야기 단락과 육하 원칙
이야기를 글로 쓸 때에는 관련되는 사람이나 사물의 관계를 되도록 명확히 나타내도록 하여야 한다. 말로 할 때에는 대화 현장이 주어져 있으므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인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글로 쓸 때에는 그런 인간 관계를 잘 나타내 주지 않으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되기 쉽다.
[보기 9.43]
(1) 그애가 딴 애하고 만나서 그 문제를 의논하자고 했어. 그랬다가 갑자기 약속이 취소되어 안 나가도 된대.
(2) 민수가 철수에게 내일 여섯 시에 석촌 호수 근처 아리랑 다방에서 만나서 다음 모임에 관한 문제를 의론하자고 했다. 그런데 민수가 사정이 생겨서 그 약속이 취소되어 철수는 내일 거기에 안 나가도 된다고 하였다.
말로 할 적에는 그 상활을 서로 잘 알고 이야기하는 수가 많으므로 (1)과 같이 간단히 말해도 의사 전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 쓸 때에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관계나 말하는 상활을 전혀 모르는 일반 독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글로 쓸 때에는 적어도 (2)에서와 같이 구체적인 서술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글로 쓸 때에는 (2)에서와 같이 관련된 사항들을 누구나 알 수 있게 서술해야 한다. 이른바 "육하(六何)" 원칙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서술하여야 한다. 육하 원칙이라 하면 흔히 신문 기사문에나 쓰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상 이 원칙이 알게 모르게 적용되고 있다. 이런 원칙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글이 쓰이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원칙을 무슨 딱딱한 공식처럼 생각하고 그 틀에 맞출 필요는 없다. 다만 이야기의 내용이 좀더 확실히 드러나도록 필요에 따라 6가지 "물음(何)" 중에 몇 가지는 늘 고려하면서 글을 써버릇해야 한다.
이미 웬만한 분은 이 육하 원칙이라는 것을 다 알고 실제로 써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을 터이지만 여게에서 복습 삼아 다시 알아 보고 그것이 이야기를 쓰는 데에 어떻게 관련 되는지를 살펴 보기로 한다. 우선 위의 예문 (2)에 작용된 육하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육하 원칙]
<1> 누가? 민수
<2> 누구에게? 철수
<3> 언제? 내일 여섯 시
<4> 어디에서? 석촌 호수 근처 아리랑 다방
<5> 무엇을? 다음 모임 문제
<6> 어떻게" 의논한다
곧 (2)의 글은 따져 보면 육하 원칙에 따른 각 물음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빈틈 없이 서술하려면 육하 원칙이 상당 부분 적용되는 것이다. 글로 쓰는 이아기에서는 되도록 남김 없이 서술하여야 누구에게나 의문 없이 그 뜻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원칙을 따라서 이야기를 적어 가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바람직스럽다.
다음 글은 전형적인 우리의 글로서 그렇게 큰 무리 없이 읽힌다. 군데군데 주어나 이유 등이 빠져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특색있는 글을 이루는 요인이 된다고 여겨진다.
[보기 9.44]
(무엇이?) 그럭저럭 37-38년전이다. (누가?) 고복수 은퇴 공연의 악사로 알토색서폰 하나를 껴차고 호남 지방의 순회 공연에 따라 나섰던 일이 있다. 일행에는 당연히 주인공인 고복수씨와 그 부인 황금심씨 외에 당대의 대스타 남인수씨도 있었다. 가는 곳마다 (누가? 왜?)인산인해 만원사례…. 그때 딴따라 초년생인 내 눈에 그분들은 거리에서도, 여관에서도, 그리고 무대위에서도 흡사 별천지의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그 키가 높게 보이고, 떳떳해 보이고, 의연했는지…. 그 어깨로 하늘의 무게를 견디며 "황성옛터"를 비장감으로 부르던 고복수 선생.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르는척 하십니까요"의 요염, 다정 원망이 섞인 소리 황금심 선생. "헤어지면 보고싶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사 이내 심사." 저승에서 이승으로 낭낭한 그 소리 전하러 왔나, 소리의 광채만큼 잘도 생긴 남인수 선생.
- 이 백천, "옛 노래 옛 청중" 중에서
윗 글에서 일부러 빠드렸다고 생각되는 육하 원칙의 요소를 괄호 속에 보충애 보았다. 다만, 첫 문장에서의 주어(필자 자신이지만)는 최소한도로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어떤 이들은 육하 원칙 같은 것에 매이지 않고 윗 글처럼 주어니 목적어니 할 것 없이 털어 버리는 것이 우리말답다고 한다. 필자도 어느 면에서 동감이다. 우리말에서는 상황에 따라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생략하는 것이 예사이다. 그래서 우리말은 아주 쓰기 편한 언어라고 할 수가 있다. 서양말들에서처럼 다 알고 있는 주어나 목적어를 문법 형식 때문에 반복하는 일은 없다. 이를테면, "먹었니?"라고만 해도 비문법적인 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서로 알아들을 만한 상황이면 오히려 더 우리말답다. 그런 경우에 "네가 밥을 먹었니?"라고 묻는 일은 우리말을 잘 모르는 서양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글로 쓸 때에는 말로 할 경우와는 달라야 한다. 글에서도 구어의 맛을 되도록 많이 드러내려고 하는 소설 따위 문예문에서는 윗 글과 같은 생략체가 때로는 바람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실용적인 글 특히 명확한 서술이 필요한 설명문이나 논설문 등에서는 지나친 생략은 모호성을 빚을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다음 글은 앞에 인용한 일이 있는 학생의 글인데 일부에서 주어 등이 생략되어 의미 전달이 불명하게 되어 있다.
[보기 9.45]
(무슨 시험이?) 우선 사흘째인 오늘 시험은 두 시간으로 마쳤다. (어느?) 현관에서 (누가?) 상민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째 내리는 빗방울은 운동장을 깎아 성글성글 자리를 잡고, 하늘이 짓는 표정은 흡사 내 심정과 같았다.
상민이가 저만치 보인다. 녀석도 나와 같은지 표정이 좀 무겁게 보인다. 그리고 곧 우리는 교문을 나섰다. (누가?) 뭐가 그리 좋은지 옆에선 폴짝폴짝 뛰려는 듯, 날려는듯한 표정이고, 또 한 옆은 (누가?) 천하의 모든근심을 다 짊어진 듯 한숨만 푹푹쉬는게 그 중간의 나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좀체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상민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녀석은 아직도 입가에 쓴 미소를 미미하게 내보 였다.
--박창근, "다시 한번" 중에서
특히 윗 글에서 밑줄친 부분은 주어가 빠져 있어서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나타나 있지만 비교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생략은 대화 장면에서는 가능할지 모르나 글에서는 있을 수 없다.
다음 글에서는 첫 문장과 그 뒷 문장이 내용적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 뒷 문장의 주어가 뒤로 옮겨지고 몇 가지 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보기 9.46]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신기하리만치 좋은 약이 있다면 'agree contra'라고 말하고 싶다. "반대로 조절하라" 또는 "자기 감정을 역행해서 하라"는 이 말은 도이루 신부님 저서 중 '성성의 비결'에 나오는 숙어이다. 우리들의 본성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육체적으로 편의한 쪽을 택하는 경향이 짙으므로 자기 감정을 반항해서 일한다면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짜증스러워지면 상냥한 표정을 짓고 옆사람이 싫어지면 더 따뜻하게 대해주는 등 자기 본 마음을 꺾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 송윤희, "생활인의 약" 중에서
윗 글에서는 "반대로 조절하라"라는 말이 어느 말을 풀이한 것인지 얼른 드러나지 않는다. "이 말은"이라는 둘째 문장의 주어가 너무 뒤로 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째 문장을 이렇게 고치면 더 명확한 글이 될 것이다. "이 말은 '반대로 조절하라' 또는 ...는 뜻으로서 도이루 신부님의 ..."
출처: 다섯살에 시작해요 민서네논술일기 원문보기 글쓴이: blanc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