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이글 타오르던 남아프리카의 태양이 크루거 국립공원의 밀림 품에 안긴다.
수십 마리의 코끼리 떼를 좇아 길도 없는 숲에서 거칠게 랜드로버를 몰던 레인저(ranger)
가 시야가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나자 차를 세운다. 남아프리카의 황홀한 일몰을 배경으로 커피잔을 든 나이트 사파리(Night Safari) 투어객들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남반구에 위치한 남아공은 한국과 반대로 초겨울 날씨다. 한낮에는 반팔 셔츠를 입을 만큼 덥지만 해만 지면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춥다. 붉은 구름이 잿빛으로 물들고 구름 사이로 초롱초롱한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자 레인저가 랜드로버의 시동을 건다. 본격적인 나이트 사파리 투어에 나서는 순간이다.
동서 65㎞,남북 350㎞로 면적이 남한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크루거 국립공원과 철조망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사설 야생동물보호구역은 동물의 왕국이자 사파리 명소. 림포포주와 음푸말랑가주에 길쭉하게 걸친 크루거 국립공원은 동쪽으로는 바다와 이웃하고 북쪽으로는 모잠비크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크루거 국립공원은 케냐의 마사이마라와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초원처럼 동물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랜드로버를 타고 사자 코끼리 표범 코뿔소 버펄로 등 ‘빅5’를 찾아 숲속에서 동물들과 숨바꼭질하는 재미가 특별하다.
랜드로버의 조수석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간이의자에 앉아 사위를 두리번거리던 트래커(tracker)가 캄캄한 숲 속을 향해 휴대용 서치라이트를 비춘다. 풀을 뜯던 임팔라 무리가 깜짝 놀라 숲 속으로 달아나고,졸던 기린은 ‘초원의 신사’답지 않게 벌떡 일어나 꽁무니를 보인다.
사파리 투어는 운전대를 잡은 레인저와 동물을 추적하는 트래커가 2인1조로 투어객들을 안내한다. 노련한 트래커는 동물의 배설물과 발자국을 보고 정확하게 동물의 위치를 추적하고,레인저는 길도 없는 숲을 손금 보듯 정확하게 읽는다. 이들이 눈빛과 손짓을 교환한 후 숲 속을 이리저리 달리면 기다렸다는 듯 어김없이 동물이 나타난다.
나이트 사파리는 아무 곳에서나 경험할 수 없다. 크루거 국립공원은 물론 마사이마라나 세렝게티도 해가 지면 출입금지다. 하지만 통칭 크루거 국립공원으로 불리는 인접한 사설 야생동물보호구역(Private Game Reserve)은 예외다. 사설 보호구역은 남아공 식민지 시절에 영국인들이 개인 사냥터로 이용하던 곳으로 땅과 그곳에 둥지를 튼 동물이 모두 개인소유다. 수십 명의 땅 주인들이 모여 하나의 보호구역을 만들고 철조망을 둘러쳐 동물의 서식환경을 보존한다. 국립공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면적에 비해 동물의 수가 훨씬 많고 보호구역 안에 숙소인 ‘롯지(Lodge)’ 등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트래커가 캄캄한 숲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나보다. 길을 벗어난 랜드로버가 트래커의 서치라이트 불빛을 쫓아 캄캄한 숲을 질주한다. 옷깃을 스치는 나뭇가지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춤추는 듯 움직이는 불빛을 쫒는다. 점무늬가 선명한 동물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초원의 청소부’로 유명한 하이에나다.
불빛을 피해 달아나던 하이에나가 결국 트래커의 집요한 추적에 달아나기를 포기하고 환환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레인저가 어느새 무전을 쳤는지 인근에서 나이트 사파리를 즐기던 랜드로버들이 전조등을 환하게 밝힌 채 숲 속으로 몰려든다.
다이아몬드의 나라라서 그런가.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에 보석처럼 아름다운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나이트 사파리의 흥분에 들떠 롯지로 향하는 도중 트래커가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다.
숙소인 롯지와 500m쯤 떨어졌을까. 랜드로버가 멈추고 서치라이트가 숲을 비추자 20여 마리의 사자 가족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저녁 사냥에서 포식을 했는지 사자들은 느닷없는 서치라이트 불빛도 아랑곳 않고 하품을 한다. 밀림의 왕자인 수사자는 불빛에 익숙한 듯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암사자를 둘러싼 새끼들이 잠에서 깨어나 어슬렁거릴 뿐이다.
‘써니부시’ 등 숲 속에 지어진 대부분의 롯지는 철조망이나 담이 없다. 따라서 동물들이 무시로 롯지를 가로질러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야간에는 롯지 안에서도 반드시 총으로 무장한 가이드가 동행한다. 호텔방을 방불케 하는 롯지이지만 잠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사자 가족 때문이 아니다. 밤새도록 들려오는 야생동물들의 포효 때문만도 아니다. 단지 창문을 노크하는 아름다운 별빛 때문이다.
일출 1시간 전부터 시작되는 새벽 사파리도 나이트 사파리 못잖게 감동적이다. 잠에서 깨어난 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이동하고 사자들의 사냥도 이때 시작되기 때문에 동물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새벽별이 스러지고
여명이 밝아올 때쯤 200여 마리의 버펄로를 만난다.
윤기 나는 검은 털 속에 숨은 우람한 근육에서 아프리카의 힘을 느낀다. 힘겨루기를 하듯 뿔을 맞대고 부비던 수컷이 갑자기 암컷의 등 뒤에 덥석 올라탄다. 몇 차례의 사파리에서도 목격하지 못했던 야생동물의 사랑 장면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수천만 평의 사설 보호구역은 거대한 동물원과 다름없다. 전날 오후에 만났던 코뿔소 떼도 만나고 밤잠을 설친 기린도 만난다.
어둑어둑하던 숲이 갑자기 오렌지색으로 환해진다. 용광로처럼 빨간 해가 밀림을 뚫고 솟앗나보다. 롯지 근처에서 늦잠을 잔 사자 가족이 숲 속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기 시작한다. 숲 저편에서 풀을 뜯던 얼룩말과 누 떼가 위기를 직감하고 본능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햇빛에 물든 흙먼지가 화염처럼 이글거린다.
약육강식이라는 밀림의 법칙이 시작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