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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약속대로 만났다.
시간과 장소를 서로 어김없이 잘 지키기를 반복함으로서 마지막
코스까지 산뜻하게 출발했다.
건전한 공동생활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훈련은 약속과 이행이다.
대소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의 모든 관계를 가장 원만하게 이끄는
힘의 원천도 약속과 이행에 있다
분명하지 않으며 불투명한 미래에 상호 신뢰로 대처하는 힘 또한
약속의 이행에서 나온다.
나는 아들 부부에게 자녀교육도 약속하는 것과 그 약속을 지키는
훈련에서 시작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함께 걷는 서울둘레길도 약속과 이행을 통한
상호 신뢰가 없다면 애당초 시작도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이끌겠다는 말만으로 어린 두 아들을 엄동설한 속으로
내보내겠는가.
아주 작고 기초적인 공동체훈련을 저변에 깔고 할아버지와 두 손자가 함께 시작하여
9일째인 서울둘레길이 종점을 목전에 두고 있다.
좌우의 중앙하이츠와 대우 양 아파트 단지 사잇길로 올라가면 고지대에 자리한 정릉
초등학교 뒤로 너른 종합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칼바위능선의 들머리가 되는 높은 지대를 다양하게 꾸며놓은 것.
북한산둘레길과 자락길(성북구가 따로 조성)이 함께 하는 길 구간에 어린이놀이터,
만남의 장소, 성북생태체험관, 야생화단지, 솔샘마당 등.
성북구가 공들여 조성한 북한산생태숲과 성북구가 내세우는 도시공원이다.
겨울이라 야생화 꽃길 단지는 의미 없고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던가.
어제와 판이한 환경에 두 손자가 공허감을 느끼는가.(부모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보기 드물게 앞다퉈 체육시설에 매달리니.
공원을 벗어나는 위치,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솔샘.
옛부터 무성한 소나무 사이에 맑은 샘이 있다 하여 솔샘(松泉)이라 불려왔다는 곳.
무성한 솔도, 겨울이기 때문인지 물도 없으니 솔샘 이름이 무색하도다.
이 지점이 성북구와 강북구가 갈리는 경계다.
강북구가 세운 '솔샘발원지' 석비로 보아 이미 강북구 땅이겠다.
4구간(솔샘길)이 끝나고 3구간(흰구름길)이 시작되는 위치도 되는데 2개의 둘레길이
순,역(順,逆) 방향을 달리(화살표를 서로 반대로) 하기 때문에 수시로 헷갈린다.
내 불평이 아니라 손자들의 항의(?)다.
북한산 하늘에 떠있는 흰구름이 어찌 이 4.1km 구간에만 유난하랴만 구간 이름이 된
것으로 보아 이름 지을 때 무척 고심했던 듯.
마땅한 이름이 없을 듯한 구간이니까.
개나리에 이어 진달래가 만발하는 일품 봄길 때는 아직 아니지만, 탄력있고 사뿐사뿐
할 길을 데크 계단이 망쳐놓았다.
무분별하게 아무데나 깔아놓는 데크, 방부목 데크 만능시대를 종식시킬 묘책이 과연
없는가.
(위 사진은 굿판을 준비중일 때의 장면)
북한산둘레길 주변에도 곳곳에 군소 사찰이 널려있다.
그 중에는 사(寺)자를 차용한 굿집도 적지 않다.
명상길 들머리의 청수사(淸水寺)와 여기 향천사(香泉寺)가 그 류(類)다.
제도권 종교들로는 안심되지 않는지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는 이들이 여전하다.
굿 거리가 있으면 통돼지 위에서 햇볓에 번뜩이는 식칼이 춤을 추고 사람들이 북쩍대
는데 쥐죽은 듯이 조용한 것으로 보아 공치는 날인 듯.
시절이 하수상하여 갈 수록 북한산 자락의 굿집들이 바삐 돌아가는데.
(공초 오상순의 묘)
칼바위능선 중간쯤, 둘레길을 조금 벗어난 지점에 외로이 자리한 한 무덤에 들렀다.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1894~1963)의 묘다.
공초는 시공(時空)을 초월한다는 뜻이지만 하루에 9갑(180개)의 담배를 피우는 골초
라 해서 담배꽁초를 말하는 '꽁초'라 불린 분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0 년 문예지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출발한 시인이며 평생을
담배와 살았으나 2달 남짓 모자라는 고희(古稀)까지 수(壽)했다.
당시의 70이라면 이즘과 달리 장수한 것이다.
이즈음, 폐암의 제일 원인이 흡연이라며 애연가들을 겁박하고 있으나 꽁초는 이에
동의하지 말란다.
나는 꽁초 만큼은 아니지만 체인 스모커(chain smoker)였다.
젊었을 때부터 파이프를 애용했고 시거(cigar)도 즐겼다.
여러 종류의 파이프와 평생 피울 만큼의 담배(hand rolling tobacco)가 아직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피우지 않는다.
1개월에 20개 들이 1갑도 다 피우지 못하니까.
폐암 겁박때문이거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담뱃값을 요긴하게 쓸
데가 생기면 절연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금연권을 주장하는 만큼의 흡연권도 존중(인정)되어야 하며 정부는
흡연자를 위한 시설을 충분히 마련하라고 다그친다.
흡연자들로부터 거액의 세금을 징수하면서도 그들을 범법자 취급하고 세금은 내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금연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정부를 나는 비판한다.
담배가 그처럼 해악뿐이라면 아예 생산과 수입을 금하면 되는데 절연(節煙) 효과를
구실로 담뱃값을 배로 올렸으나 효과는 일시적이었을 뿐이며 세수만 배로 늘었다.
더욱 목불인견인 것은 담뱃값 인상 때 극렬하게 다퉜건만 찬반 양측에 권력 이동이
있었다 해서 돌변한 주장을 펴는 치졸한 자들이다.
국민의 건강을 구실 삼은 인상의 주동자들은 권력을 잃었다 해서 인하를 주장하고
서민의 지갑을 이유로 결사적 반대를 했던 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해서 인하를 극구
반대하고 있으니 건강 또는 지갑 걱정은 가소로운 표방이었을 뿐 교활한 자들.
나는 두 손자에게 공초와 꽁초 이야기를 했다.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는 그들에게 굳이 들려준 것은 사리에 맞지 않거나 경망스런
짓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나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
마이동풍인데 반해 곧 내려선 빨래골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였으니까.
빨래골.
수유리(水踰里)의 순우리말은 무너미다.
물이 넘친다 해서 물넘이인데 무너미로 변음된 것.
삼각산 자락 수유리가 물이 풍부한 곳이라는 뜻이며 이곳에 맑은 물이 넘쳐서 궁중
무수리들의 빨래터였기 때문에 빨래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돤 것이란다.
궁중은 아는데 무수리가 뭐냐는 손자들에게 옛적(고려, 이조시대)에 궁중에서 청소,
빨래 따위의 잔심부름을 하던 여종이라고 답하면서 어제의 일이 새삼 궁금해 왔다.
그리도 많은 알고 싶은 것들이 부모와 함께 걷는다 해서 깡그리 없어지는지.
1980년대초까지도 빨래골은 물론 우이동 계곡마다 빨래하러 오는 여인들이 있었다.
빨래를 하고 마르는 동안 도시락을 먹으며 쉬기도 하므로 소풍나들이 기분이었단다.
1950년대까지는 전차와 우이벌의 실명용사들을 위해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하였고,
60년대 이후에는 문안에서도 시내버스를 이용했다.
그러나 이조시대에 무수리들이 이용한 교통수단은 무엇이었을까.
빨래골공원지킴터에서 화계사로 가는 길은 꽤 높은 등성이를 넘는다.
그 곳에는 '구름전망대'라는 이름을 가진 4층 전망대가 서있다.
구간 이름 흰구름길에 맞춰 지은 이름인 듯 싶은데 전망대 이름으로는 부적절한 듯.
구름과 전망은 상극, 적대적 관계다.
구름이 득세하면 전망이 없고 전망을 위해서는 구름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름이야 어떠하건 12m라는 4층 꼭대기는 전망이 괜찮다.
누대(累代)를 살아오는 몇채의 집 외에는 삼각산 자락이었을 뿐이며 민가와 완전히
격리된, 조계사의 말사였던 화계사(華溪寺)도 거대 사찰이 되었다.
지금은 참선수행과 국제포교의 중심사찰이란다.
화계사에는 숭산(崇山/1927~2004)이라는 대선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미국 예일대에서 서양철학, 하버드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벽안의 청년 폴
뮌젠(Paul Muenzen/법명玄覺)을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스스로 오게 한 분.
미국의 홍법원을 비롯하여 세계32개국에 120여개의 선원(Zen Center)을 개설하고
운영한 분이니까.
화계사에서 냉골로 넘어가는 둘레길은 눈살 찌푸리게 하는 길이다.
소유자(대우건설)의 요청으로 기존노선을 이용할 수 없으므로 우회하라는 것.
편한 길을 두고 된비알을 오르내려야 한다.
대우건설이라면 부실경영으로 죽어가다가 국민의 혈세로 수혈해 살려낸 기업인데
만약, 동일업체라면 이 소유자는 이기적일 뿐 도덕적이지 못한 기업체다.
받기만 하고 베풀줄 모르는.
산길 밟으면 땅이 꺼지거나 신발에 묻어 달아나기라도 하는가.
냉골은 한여름에도 시원한 골짜기를 의미한다.
그 골을 흐르는 물 또한 당연히 차가워서 무더위철에 인기를 누린다.
자연샘물 또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냉골샘 뒤에는 대한민국 초기의 무비(無比) 거목의 유택이 있다.
홀로 걸을 때는 으례 들러서 가지만 동행자를 대동하기에는 먼 거리다.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1894~1960)박사의 묘소다.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신념대로 산,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민주주의의 진수를 온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빈대잡기 위해서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는 명언으로 내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분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그가 1960년 2월 15일 월터리드 육군병원(미국)에서 급서하지
않았더라면 4.19민주혁명이 발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대통령이 됨으로서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이승만의 장기 독재정권이
종언을 고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 때의 4년 전인 1956년에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야당대통령후보였던 해공 신익희가 선거를 앞두고 급서함으로서
4년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 때(유석의 서거)의 국민적 충격은 극에 달했던 것이다.
1956년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목도한 인산인해는 지금도 선하다.
서울시민은 물론 경기도에서도 도시락을 지참하고 걸어서 도착하는 등 30만 군중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듯 했건만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더 많은 시련을 강요했다 .
당시의 서울시 인구는 1백 5십만에 불과했으므로 서울시민의 5분의 1이 한강백사장
으로 몰려나온 것이다.
냉골 입구의 옛 삼원수영장 일대는 서울영어마을로 바뀌었다.
아들(손자들의 아버지)이 초등학교생이었던 1970년대 어느 신정(新正).
우리 부자와 한 지인 셋이 수안보온천에 갔다.
그 곳에서 만난 아는 분(K은행부장)이 공용차를 이용하면서 운자기사의 숙소를 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가 차숙(車宿)해야 할 처지였다.
아들이 그 기사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숙하기를 제의, 그 문제를 해결했으며 이 일로
인해 아들은 기사의 인척이 운영하는 삼원수영장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는데.
냉골의 찻길로는 팔봉 김기진(八峰金基鎭/1903~1986)의 집이 종점이었으며 그 옆에
있던 작은 정신지체아 집 각심학원(覺心學院)은 대규모 국립재활원(병원)으로 컸다.
팔봉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리더, 일본명 가네무라야미네
(金村八峯)로 대표적 친일작가,철저한 반공문인,군사쿠데타 권력에 가담 등 변신을
거듭한 작가, 언론인이었다.
6. 25동란때 피납, 인민재판에서 타살형을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낮은 산자락을 2번 돌면 아카데미하우스 입구의 통일교육원이다.
교육원 안 뒤쪽에도 애국선열묘소가 있다.
춘헌 이명룡(春軒李明龍/1872~1956)의 묘다.
통일교육원 본관 건물 앞 지점에 있었는데 교육원 신축으로 인하여 현 위치로 이장
(1988년 10월 10일)하였단다.
이장하려면 애국선열묘역으로 할 것이지 왜 정부관련 건물 뒷구석으로 밀려났을까.
1956년 당시는 교육원은 물론 아카데미하우스도 없었고,오솔길에 불과한 길이 선열
묘역을 나누지도 않았을 때였지만 지금은 홀로 격리된 처지 아닌가.
이 구역을 고집하는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다면 유족도 선열묘역을 바라련만.
흰구름길이 끝나고 이준 열사 묘를 시.종점으로 순례길이다.
북한산둘레길은 각기 다른 테마를 가진 총 21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으며 시점으로
부터 2번째 길이다.
항일 독립유공자들과 4.19 민주혁명의 영령들이 영면하고 있는 지역이며 그 분들을
참배하는 길이라는 뜻으로 순례길이라 한다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길이다.
순례길 주변에는(서울둘레길과 달리 북한산둘레길의 진행 방향으로)
강재 신숙(剛齋申肅/1885~1967)
상산 김도연(常山金度演/1894~1967)
동암 서상일(東菴徐相日/1887~1962)
심산 김창숙(心山金昌淑/1879~1962)
현곡 양일동(玄谷梁一東/1912~1980)
단주 유림(旦洲柳林/1894~1961)
성재 이시영(省齋李始榮/1869~1953)과 17위의 독립군
가인 김병로(街人金炳魯/1887~1964)
해공 신익희(海公申翼熙/1892~1956)와 아들 평산 신하균(平山申河均/1915~1975)
일성 이준(一醒李儁/1859~1907) 등의 묘역과
국립4.19 민주묘지가 있다.
(국립4.19민주묘지)
순례란 찾아가서 참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북한산 순례길은 선열들 묘지를 일일이 찾아가서 참배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름뿐인 황당한 순례길이다.
산재한 묘지들을 멀리 한 길이기 때문이다.
신숙~김도연~서상일~김창숙~양일동 묘역들을 연결하는 길이 이미 조성되어 있음
에도 왜 그 길을 외면하고 묘역과 무관한 산책로를 순례길이라 하는가.
이시영~김병로~신하균~신익희 묘지를 연결하는 길도 같은 경우다.
그러므로 이 길이야 말로 순례와 무관한 사이비 순례길이거나 순례를 가로막는 반
(反)순례길이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산둘레길과 대동하지만 시.종점을 달리 하는 것 처럼 의미가 다른 서울
둘레길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통과했다.
이어걷기가 여러 날 계속되기 때문인지 관심이 산만해지고 있는데다 선열들에 대한
역사의식을 갖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아서.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