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메트리>-사람을 살리는 손
프롤로그,
어두운 밤.
가로등 밑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는 남자.
기괴한 느낌의 그래피티.
(미스터리 수사극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괴기스런 미장센이 눈길을 끈다)
다단계 정수기 업체 실장(김준호 분/까메오)의 사업설명회를 입을 벌린 채 경청하고 있는 춘동(김강우 분)은 감격한 얼굴로 박수를 치며 '네트워크 마케팅'을 열렬히 외친다.
자랑스러운 판매왕 '양춘동'의 이름 석 자가 호명되는 순간 들이닥치는 경찰.
잠복 나온 척 위기를 모면하는 춘동.
그런데 마포서 형사가 왜 구로구에??
서로 복귀한 춘동은 고반장(서현철 분)에게 넥타이 따귀를(?) 맞는 굴욕을 당한다.
경찰서에까지 정수기를 판매하는 놀라운 생활력에 반해 3년 차 형사로서는 어째 좀 부실해 보이는 춘동.
그래도 부업, 쥐 좆만한 봉급, 칼침의 위험 등등을 운운하는 그의 변명에선 은근 설득력이 느껴진다.
어느 날 준(김범 분)은 또다시 벽화를 그리다가 자신이 그린 그림 한 쪽에 노상방뇨하는 춘동과 처음 만난다.
벽에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춘동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준.
"노상방뇨는 경범죄 아니냐?"
어라?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흥분한 춘동이 그의 어깨를 잡는 순간 춘동의 손을 잡은 준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변한다.
"경찰?"
후드를 벗기려는 춘동의 눈에 재빨리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고 달아나는 준.
그날 밤, 아이가 없어졌다며 경찰서를 찾아온 은지 엄마(박성연 분).
단순 가출이라는 선배 형사 철현(박성웅 분)과 유괴 가능성을 주장하는 춘동의 의견이 갈리고 반장은 춘동에게 수사 기회를 준다.
'민중의 지팡이' 구호를 외치며 신나게 뛰쳐나가는 춘동의 표정은 이제껏 보여진 그의 행태 중 가장 능동적인 형사의 모습이다.
은지가 실종 된 후미진 변두리 산동네에서 춘동은 탐문수사를 시작한다.
한 달 후 동네 불량 청소년들에 의해 발견 된 은지의 시신으로 마포서는 발칵 뒤집힌다.
쓰레기 봉투에 담겨 얼려진 채 잡초 무성한 놀이터에 유기된 시신.
다리 화상 자국으로 은지임을 확인한 춘동은 절망한다.
돈이 목적이 아닌, 아무런 동기도 이유도 없는 살인.
사이코패스.
은지의 죽음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뒤늦게 전담반이 구성되고 애꿎은 춘동만 근신 징계를 받는다.
화가 치민 춘동은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소리치고는 경찰서를 나가 사건 현장으로 간다.
"미안하다"
삭막하게 방치된 놀이터에 앉아 춘동은 아이를 찾아내지 못한 죄책감으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
집에 돌아와 사건 뉴스를 보던 그는 소파에 누워 있다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기자의 카메라에 비친 원경이 어딘가 낯이 익다.
아, 벽화!
하지만 그림이 그려진 시점은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기 훨씬 전이 아닌가.
춘동은 다급히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마침 흰 페인트로 벽화를 지우고 있는 구청 직원.
"아저씨가 형사면 나는 구청장이네요"
아줌마(?)와의 몸싸움에 밀려 가볍게 나가떨어지는 춘동.
어쩌면 가장 중요한 증거일지도 모를 벽화는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림 속 '행복 아파트'를 찾던 춘동은 산동네 문구점 앞에서 어린 여자아이 다희(김유빈 분)를 만난다.
그리고 아이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 아파트를 발견한다.
(절망이 켜켜이 쌓인 산동네 철거촌에 행복 아파트라니, 참으로 서글픈 역설이다)
춘동은 빨간 호루라기를 사서 다희의 손에 쥐어주며 말한다.
"이거 가지고 있다가 이상한 아저씨가 너한테 말 걸고 그러면 그냥 훅 불어버려, 알았지?"
아이는 혀를 내밀고는 까르르 웃으며 비탈진 오르막길을 달려간다.
춘동은 아파트 지하 낡은 보일러실을 뒤지다 버려진 은지의 가방을 발견한다.
그 순간 흉기를 휘두르며 춘동에게 달려드는 괴한.
몸싸움을 벌이던 검은 모자의 사내는 뒷목에 상처가 난 채로 도망치고 만다.
비록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지만 춘동은 벽화와 은지 살인사건의 연관성에 대한 심증을 굳히고 스프레이 페인트의 주인을 찾아 탐문수사를 계속한다.
과거 춘동을 '네트워크 마케팅'에 끌어들인 전적이 있는 사기전과 3범 양수(이준혁 분)는 '포상금 5천'에 혹해 춘동을 따라나선다.
의외의 추리력을 드러내는 양수의 주장에 의하면 범인은 분명 '혼자 사는 놈'이라는 것.
화방에서 주소를 알아낸 두 사람은 산동네 철거촌을 찾아가고 그 곳 옥탑에서 준과 재회한다.
그 때 여아 납치 미수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의 범행 수법이 밝혀진다.
얼린 강아지 사체로 아이들을 유인하는 남자.
그리고 두 번째 유괴 사건의 피해자는 공교롭게도 춘동이 호신용 호루라기를 사 줬던 아이, 다희다.
범인은 돌봐 줄 어른이 없는 소외계층의 아이들만을 골라 범행 대상으로 삼는다.
다시 옥탑을 찾아간 춘동은 준과의 심한 몸싸움 끝에 그가 가진 초능력에 대해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유괴 되어 죽은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유독 아동 실종 사건에 과민 반응을 보였던 춘동의 마음을 단번에 읽어내는 준.
춘동은 준의 고교 동창인 승기(이솜 분)를 다시 찾아가 준의 아픈 과거와 그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사이코메트리.
손을 대면 그것의 과거가 보이는 능력.
자살한 아버지로부터 유전 된 괴물 같은 능력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준은 스스로 만든 동굴에 갇혀 암흑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철거반들을 막다 졸지에 '형'이 되어버린 춘동에게 비로소 마음을 여는 준.
그는 춘동이 가져온 은지의 유류품을 만지고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알아낸다.
동요 소리, 웃음 소리, 알록달록한 공들, 대형 냉장고, 그리고 휴대전화 속 사진.
춘동과 양수는 그 단서들을 토대로 탐문수사를 벌이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그 와중에 은지 엄마의 자살로 떠들썩해진 여론.
그리고 드디어 유괴사건의 실체가 밝혀진다.
동물병원 원장 기우(박혁권 분)는 평범한 외모와 친절한 태도 속에 자신의 진면목을 감춘 사이코패스였던 것.
한편 다급해진 동료들의 압박에 약속을 저버리고 준의 존재를 실토해 버린 춘동 때문에 오히려 범인으로 몰린 준은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이 범인이라고 거짓 자백을 한다.
춘동은 호송차량에서 준을 탈출시키고 자포자기한 준에게 말한다.
"이제 너 절대 버리고 가지 않는다. 나 한 번만 믿어라"
어쩌면 이 말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동생 기동에게 전하는 그의 뼈아픈 다짐인지도 모른다.
경찰에 쫒기면서도 그들은 끈질기게 범인의 흔적을 따라간다.
결국 기우의 거주지를 알아낸 세 사람.
그러나 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우의 흉기에 찔려 쓰러지고, 먼저 기우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춘동마저 그의 칼에 당하고 만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인 기우가 살생을 하는 확실한 이유는 없다.
그저 '예쁘지 않아서, 그냥 덤비니까' 죽인다.
"애들도 좋았을 거야"
절체절명의 순간, 달려와 칼을 든 기우의 손을 잡는 준.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부옇게 지워진 그의 기억들.
죄의식이 없는 사이코패스의 뇌에는 살인도 충격적인 기억이 아닌 것이다.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그래도 준은 포기하지 않고 간신히 남아 있는 다희의 최후를 읽어낸다.
창틀에 매달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기우를 보고 잠시 갈등하는 춘동.
그러나 춘동은 결국 살인범 기우가 내민 손을 뿌리치지 못한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다희는 무사히 형사 철현의 품에 안긴다.
에필로그,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춘동은 새로운 실종 사건을 수사하다 어떤 벽화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까칠한 놈' 준이 남긴 비밀스런 단서.
또다시 모습을 감춰 버린 동생 준이 형 춘동에게 보내는 신뢰의 메시지다.
"잘 지내냐?"
춘동은 환하게 웃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춘동과 준이 그렇고 살인범 기우 역시 마찬가지다.
가끔 보여지는 춘동의 집은 장식이 최대한 생략됨으로써 쓸쓸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고독과 단절이 어둡고 기괴한 벽화를 통해 잘 표현되고 있다.
전형적인 마초 형사가 아닌, 멋부림 없이 망가지는 배우 김강우의 '생활 밀착형 액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