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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지난 6월 28일 대구 동화사에서 열린 7번째 화엄논강 모습. |
일진스님(운문사 강사) : “화엄경의 아름다운 세계와 부녀자 납치 등이 횡횡하는 현대 사회는 매우 대조적인데 현대 사회 속에서 화엄경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비스님 : “연기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데는 그만한 조건과 원인이 있는 것이다. ‘답지’못한 행동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며, 이 문제는 불교사상이 더 많이 전파되어 세상을 바꾸는 것으로 해결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전파되지 않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하는 과정이 서투르고 이 시대 사람들의 의식세계에 적합한 말로 감동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감동을 주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해월스님(동화사 강주) : “스님께서 화엄경의 교리를 광명 정각 일심으로 보셨는데 근거는.”
무비스님 : “화엄경에 그렇게 되어 있다.” (좌중 일제히 웃음)
재가불자 : “보살행적인 삼매를 말씀하셨는데 무엇인가.”
무비스님 :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 화엄경이다. 논강 교재를 1000번 정도 읽기를 권한다. 불가에서 경전을 1000번 일독하라는 것은 보통으로 하는 말이다.”
지정스님(용문사 주지) : “이사무애와 사사무애의 삶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
무비스님 :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설명한 것일 뿐이다. 누가 이사무애나 사사무애를 터득해서 초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종이 한 장을 이사무애나 사사무애로 설명하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4가지 관점이다.”
동화사 학인 : “왜 화엄경은 남방불교권에 없으며, 화엄신중기도는 어떤 연관을 갖는가.”
무비스님 : “남방불교에는 대승 경전이 없다. 기도는 화엄신중에 기도하든 관세음보살에 기도하든 기도 대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기도하는 내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각묵스님(실상사 화림원) : “화엄경은 남방불교에는 없지만, 남방불교에도 화엄경과 사상적 맥락이 같은 경전이 있다. 화엄경이 상징적이며 소설적인 언어를 사용해 감동을 주고 있다면 남방불교에서는 철저하게 법의 언어로 분석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는 차이이다.”
세등스님(동화사 강사) : “한국불교에서 화엄경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비스님 : “한국불교의 20~3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석스님(동화사 강사) : “해인삼매는 무엇인가.”
무비스님 : “깨달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명경지수처럼 맑고 밝아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꽤 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각묵스님(실상사 화림원) : “화엄경이 이 시대에 적합한가.”
무비스님 : “솔직히 이 시대에는〈화엄경〉보다는〈법화경〉이 필요하다고 본다. 화엄경은 조급하기 이를 데 없는 현대인에게는 맞지 않다. 비유가 많은 법화경이 필요하다.”
재가불자 : “화엄삼매와 염불삼매에 대해 정리해 달라.”
무비스님 : “염불삼매는 망상과 분별없이 그저 염불하는 오롯한 한마음이다. 이에 반해 화엄삼매는 아주 ‘활발발’하게 힘에 넘치는 천둥 번개치는 삶이다.”
일진스님(운문사 강사) : “화엄경이 강원의 주교재임에도 법화경이 필요한 시대라 했는데.”
무비스님 : “이 시대에 화엄경이 적합한가를 말한 것이지 강원에 〈화엄경〉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강원에 법화경이 교재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범천스님(동화사 강사) : “초보불자는 어떻게 화엄경을 공부해야 하나.”
무비스님 : "약찬게, 법성게 등 화엄경의 짤막한 시 한구절이라도 그곳에 담긴 뜻에 의문을 품고 깊이 사색하며 읽은 후 한글로 번역된 화엄경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보길 권한다.”
해월스님(동화사 강주) : “화엄경과 법화경의 차이점은?”
무비스님 : “화엄경이 산천초목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그대로 부처요 보살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법화경은 인간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인해스님(동화사 강사) : “조계종 교육원장으로서 승가내의 화엄경에 대한 공부방향은.”
무비스님 : “화엄경은 근기를 배제한 깨달음의 내용만을 드러낸 경전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후 삼칠일(21) 동안 깨달음의 환희와 감동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공부방법은 근기에 따라 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운문사 학인 : “화두삼매에 들면 생각이 자꾸만 달아나고 어떻게 이를 일상과 연결해야하는가가 고민거리이다.”
무비스님 : “학인시절에는 온갖 욕심도 나고 때론 내가 보살이라는 착각도 들기도 한다. 현재의 고민은 크게 문제되지 않으며 과정이고 스님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다.”
재가불자와 공동MC
○…논강의 형식과 수준이 체계화되고 상향조정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후6시부터 3시간동안 첫 공동MC로 진행된 논강은 질문 2분, 답변 3분이라는 원칙에 따라 논사는 물론 참석한 학인스님과 재가불자들이 고루 참여해 열띤 토론의 장을 열었다. 특히 토론에 임하는 이들이 다양해지면서 조는 이 하나 없이 시종 진지한 모습으로 진행됐다.
벽안의 비구니스님도 참석
○…벽안의 비구니 스님들이 참석해 필기하고 녹음하는 등 화엄논강에 관심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운문사 강주 명성스님의 소개로 참석하게 됐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보현사 여광스님과 티베트 불교 수행승 드리메(drimay)스님이 주인공. 두 분의 스님은 강의가 끝난 후에도 명성스님과 필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문답을 나누기도 했다.
무비스님 발제문 요지
“정각, 일심, 삼매 핵심
감히 말할 수 없는 진리”
〈화엄경〉은 일체 모든 문제를 철저하게 정각(正覺)의 입장에서 논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읽으며 즐길 수는 있어도 감히 말할 수는 없다. 시냇물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이며, 산천초목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이런 이치를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화엄경〉은 깨달음의 세계와 내용을 잘 정리한 경전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여래의 모습, 삼매의 문제, 초발심의 문제, 공덕의 문제 등 2000가지의 질문에 답이 쏟아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엄경을 읽으면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이다.
화엄경은 용수보살이 용궁에 가서 가져왔다는 용궁장래설(龍宮將來說)에 근거한다. 이는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후 등장하는 2000여명의 인물이 모두 성격이 놀랄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이야기 흐름을 전개하고 있는 것에 탄복하는 것과 같다.
〈화엄경〉의 성립시기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최초 삼칠일이며 편찬자는 용수보살이다. ‘광명(光明)’은〈화엄경〉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광명은〈화엄경〉품마다 설해지는데, 불교가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지혜는 각자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고 깨달음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겠기에 나온 표현이 ‘빛’이다. 빛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깨달음 즉 지혜의 문제를 적절히 비유한 것이다. 이는 화엄경은 첫머리를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 “비로서 정각(正覺)을 이루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 마갈제국(摩竭提國) 아란야법(阿蘭若法) 보리도량(菩提道場)에 계시사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었다” 깨달은 사람을 부처님이라 한다면 정각을 이뤘다고 것은 중생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다. 첫마디부터 막힌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뤘다는 화엄경의 첫머리는 결국 깨달음의 시각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처라는 것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를 근거로 깨달은 이의 눈에는 ‘땅의 장엄’, ‘보리수의 장엄’, ‘궁전의 장엄’, ‘사자좌의 장엄’ 등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땅을 “금강(金剛)으로 되어있고”라고 표현했을까. 환영에 사로잡혀 흙덩이 돌덩이를 금강이라고 표현했을 리 없다. 깨달음의 안목에서 보니 그렇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깨달음의 시각에서는 금강이라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머리도 뛰어나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태어나면서 맹인이었는데 35세에 눈을 떴다고 치자, 그가 35세까지 주변사람들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때 그 앞에 펼쳐진 세상은 어떨까. 아마도 치고 받는 싸움까지도 신기하게 바라볼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들을 전혀 경중이나 옳고 그름을 개입시키지 않고 신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삼매로도 화엄경을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철저히 죽고 철저히 산다는 말이다. 어느 한가지 대상에 몰두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빈틈없이 철저하게 활동하는 것도 화엄삼매이다. 그러니 보살행이 삼매요, 삼매가 보살행인 것이다.
이상의 것들이 교리라면 교리요, 앞서의 논의까지 포함한다면 정각, 일심, 삼매가 화엄경의 교리라 할 수 있다.
논주 무비스님은…
무비(無比)스님은 1958년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해인사, 상원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10여 년간 수행에만 전념했다. 탄허스님의 강맥을 이은 무비스님은 이후 통도사, 범어사에서 강주로 활약했고 조계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종단내의 유능한 강사진들을 길러냈다. 또 1979년에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시절에는 승가위계 질서 확립과 자질향상을 위해 단일계단을 만들고 승가고시를 처음 실시하기도 했다.〈화엄경〉,〈법화경〉,〈금강경〉등의 경전들을 번역했고 현재는 조계종 교육원장으로 재직중에 있다.
- 화엄논강 중간결산
법공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쌍방 통행식 진행 신선한 바람
질문 선별하여 쉽게 설명해주길
5월17일부터 매주 토요일 저녁6시를 기해 동화사 설법전에서 열리는 화엄논강은 작금의 백고좌 법회와는 그 성격을 달리해 여러 점에 있어서 한국불교에 또 다른 신선한 바람을 몰고왔다.
기존의 일방통행식 설법이 아닌 신행과 학문을 결합한 쌍방통행식 진행으로 새 바람을 몰고 온 것인데, 그 형식은 논주의 강의에 대하여 사부대중이 서로 그 궁금한 점을 낱낱이 토론하고 그 질문에 대하여 논주는 이에 구체적으로 답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기실 불교전통의 논강 방식이나 동화사에서 사부대중과 함께 하여 한국불교사회에 다시금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고 개진된 다양한 의견을 종합적으로 파악케 하는 안목을 길러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개선해야 할 점을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 점을 먼저 논주스님의 답변 방식부터 언급한다면, 즉 6월28일의 주제는 “화엄경의 교리론”이다. 즉, 당일 산림의 내용이 선(禪)적으로의 이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엄경 일천 독을 하면 풀릴 것 이라는 등,보다 질문자의 편에선 궁금증 해소가 아니고, 신(信)을 강조하는 번복이 많았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당일 신도들의 질문내용이 거의 교리와는 관계가 희박한 질의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답변이었던 것은 이해 할 수 있으나, 당일의 주제인 ‘교리로서의 답변’이 부족한 것 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토론방식의 기술적 문제와도 연관이 없지 않다. 먼저 논제의 확실한 내용을 갖고 연구를 한 신도의 질문 내용만을 선별(휴식 시간에)하여, 중복되는 내용이 없게 할 뿐 더러, 그 토론내용을 보다 폭 넓고 유익하게 전 대중들에게 전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논제와 직결된 내용 체계적 강설 절실
이설,쟁론부분도 배경설명했으면
앞으로 화엄논강이 성공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논주에게 다음의 몇 가지 개선점을 제시하고 싶다.
첫째, 가능한 한 논제와 직접 관련되는 내용에 국한해 간략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강설해주었으면 한다. 모든 논주가 화엄사상에 관련된 이야기를 중복해서 할 필요는 없다. 주제에 관련된 내용만 명확하게 강설하면 될 것 같다.
둘째, 해당 논제와 관련 종래의 이설과 쟁론 부분에 대해 그 배경 및 내용을 충실히 소개하고, 더불어 논주의 합당한 견해를 논거와 함께 제시하여 문제제기가 있는 발표가 되었으면 한다. 토론의 쟁점이 명확해지지 않으면 논주의 일방적인, 그리고 평상적인 설법에 그치고 만다.
셋째, ‘대화’라는 진리추구의 방식을 존중하며, 어떠한 질문에도 짤막하면서도 요점을 얻은 분명한 대답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모르는 부분은 다른 전문가에게 대답을 대신하거나 참고자료를 소개하거나 아예 대답이 어려운 경우는 “모른다”고 하는 편이 낫다. 한 사람의 논주가 모든 것을 다 대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필요치 않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고 대답하는 것이 훨씬 교육적이며 감동적일 수 있다. 그것이 대중들과 대화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토론과 대화의 핵심을 벗어나서 “혼자 한번 공부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거나, “자신의 저술 속에 모두 들어 있으니 그것을 구입해 잘 읽어 보라”거나, “관련 경전을 몇 백 몇 천 번 읽어 보라”는 등의 ‘두리뭉실’한 회피는 금물이다. 이 방식은 불법의 대중 전수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넷째, 토론과 대화를 불교 내부의 서열구조에서 나온 엄숙주의가 가로막아선 안 된다. ‘가르침 앞에 차별은 없다’(有敎無類). 진리의 자각에 계층과 서열이 방해가 되어선 안 된다.
현수련/ 화엄논강 수련생
매회 논강마다 참석, 화엄의 세계 큰감동
수준 떨어진 질문 등 옥에 티도…
어느 새 화엄논강 8회째를 참석하였다. 학덕 높으신 논주스님을 모시고 논사스님들 재가논사님들 그리고 100여명이 넘을 듯한 제방의 스님들을 모시고 200여명이 넘는 재가수행자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모인 논강회장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다. 매회 논강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화엄의 세계를 펼쳐 한회 한회 마칠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에 감동의 물결이 출렁이었다.
이번 논강을 기회로 화엄경의 성립, 구성, 공부방법, 화엄과 선, 화엄의 연기론, 교리론 등을 귀동량으로 남아 듣게되어 여태껏 두려워하며 접근하기 힘들었던 화엄경의 좀더 친숙하게 다가갈수 있을 것 같다. 기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화엄경을 보는 안목이 달라진 점이 더없이 반갑다 하겠다. 화엄경은 깨달은 이의 안목으로 본 세계이므로 읽는 이도 역시 그런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새삼 가슴에 크게 닿았다.
이번 논강에 동참해보니 옥에 티로 몇몇 문제점도 눈에 띄었다. 첫째, 재가논사님들을 모시는데 있어 준비가 부족하여 질의의 수준이 뒤떨어지는 점이 있었고 둘째, 질의자들 중에 인사말, 찬사 등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 귀중한 질의 시간을 허비하는 점이 시정되어야 하겠다고 보였으며 셋째, 논강이라는 형식에 걸맞는 예리함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꼈다.
지난번 무비스님의 말씀 가운데 “화엄경을 천 번 읽어보면 안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마음을 다하여 읽고 또 읽어봐야 겠다. 진정 감명 받고 이해하며 실천하고 증득할 바를 바로 찾으며 또 도저히 모르는 부분은 어디인지 그래서 고뇌하고 또 고뇌해 보아야 하겠다. 무한한 기쁨과 감동의 기회를 주신 동화사의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크게 감사하며 정성스런 합장으로 절한다.
< 불교신문 >에서 발췌 옮긴 것입니다.
첫댓글 동화사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