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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란 제일 처음의 선조(先祖)로서 첫 번째 조상을 말하는 데, 우리 <가락계> 김해김씨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입니다.
씨족관계에 있어서 파(派)란 한 뿌리 또는 한 조상으로부터 갈려나온 갈래라고 정의되고, 대손(代孫)이란 위 특정 조상의 몇 번째 자손(子孫)인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족보의 역사는 예전부터 모든 씨족들이 족보(族譜)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일부의 양반계층에서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하여 차차 평민계층도 족보를 가지기 시작하였으나 그 숫자는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족보(族譜)는 한 개인이 간행하는 것이 아니라 문중(門中)에서 간행하는 것이며, 족보에 자손들 명단을 수록하려면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여야 하고 족보라는 책을 구입하려면 별도의 책값을 더 지불하여야 하기 때문에 족보라는 책을 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족보(族譜)라는 책은 개인 소장외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하여 각 시.도립 도서관에도 보간되어 있으므로 필요한 부분의 열람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족보(族譜)를 보는 방법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집안에 보첩(譜牒)이 있는 경우 어른 들과 같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족보를 간행할 때 일정한 규칙에 따라 항렬자(行列字)라는 것을 정하기도 하는데 반드시 항렬자를 따라서 이름을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대에서 족보간행에 참여하였고, 후손의 이름을 미리 정하여진 항렬자를 따라서 지었을 때 그 이름자를 보고 어느 파(派)의 몇 세(世)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인데,
님께서 제시한 자료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래 내용을 참고하여 님의 문장으로 답안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윗 대부터 자신에 이르는 가계도(家系圖) 알 수 있는 데 까지만 작성하시면 될 것입니다.
1. 본관(本貫) ---김해(金海)
2. 시조(始祖) ---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
3. 우리 성씨의 유래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 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 18)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峰)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金盒)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군왕(君王)이 된 수로왕(首露王)은 나라이름을 대가락(大駕洛)으로 정하였다. 10대(代)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上等)의 작위(爵位)와 가락(駕洛)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角干)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曾孫)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함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달성(達成)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세계(世系)를 이었다.
4. 우리 가문을 빛낸 선조들
(1).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진 김무력(金武力)
김무력(金武力)은 서기 518년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532년9월 신라 법흥왕이 가락국을 공격해오자 양왕은 나라를 시라에 양여하고 산청 수정궁에 은거했다. 그러나 아들 세종,무력,무득 3형제는 경주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진흥왕때 명장 이사부(異斯夫)를 도와 북방경략에 참여하였다. 당시 백제는 성왕이 즉위하여 538년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신라와 화친하여 백제 중흥을 꾀하고 있었다. 성왕은 551년 한강유역을 되찿으려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옥천지방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6개군을 탈환했다. 그러나 이때 신라는 곤경에 처한 고구려와 동맹하여 백제가 탈환한 6개 군을 모두 빼앗아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으며, 무력은 이때 싸운 공로로 신주 도독이 되었다. 백제의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 관산성(管山城;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당시 관산성에서는 신라의 군주 우덕(于德)이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백제군의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마침 신주에있던 무력은 자신이 거느린 병력을 이끌고 급거 출전하여 그해 7월 성왕을 지금의 대전 동구 직동(피골)에 있었던 노고산성에서 전사시켰으며, 4명의 좌평을 참살하고 병사 2만9천여명의 수급을 베는 대승을 거두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무력의 한강유역 쟁취와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무력 역시 신흥 무장으로서의 발판을 확보하게 되어 신라 사회의 최고위 인물로 부상되었다. 무력이 임명되었던 군주직은 당시 신라 제1급 인물이 받던 최고위 지방관직이었는데, 무력은 47세인 564년 장자 서현을 낳고, 579년 10월 16일 향년 62세로 별세했다. 벼슬은 각간에 이르렀고 부인 박씨는 법흥왕비 보도부인의 동생이었다.
(2).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金庾信)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본관은 김해(金海). 아버지는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 : 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세손(대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 仇衡王이라고도 함),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이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 임영리(任永里)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慶山) 군주(軍主)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居昌)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上州 : 尙州)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647년(진덕여왕 1)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10월 무산(茂山 : 무주)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 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大梁城 :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石吐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佐平) 은상(殷相)을 무찔렀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 : 太宗武烈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忠北 永同郡의 飛鳳山城)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660년(태종 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瓮山城 : 대전시 鷄足山城)에 있는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두솔성(豆率城 : 周留城)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 : 太大舒發翰)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 : 경주시)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있다.
(3). 신라 집사랑 김장청(金長淸)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김유신전 말미에 '유신의 현손으로 신라의 집사랑인 김장청(金長淸)이 행록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나 지어낸 이야기가 많으므로 이를 깍아버리고 기록할만한 것만 취하여 전을 만든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장청의 [개국공(김유신)행록] 10권이 없었더라며 김유신 장군의 호국충정과 신비에 가까운 무패의 전승기록이 전해 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장청은 '김유신-삼광(三光)-윤중(允中)' 으로 이어지는 김유신 가의 적손인 윤중의 손자였으나 그의 벼슬은 집사성의 말직인 집사랑에 불과했다. 집사성은 왕정의 기밀사무에 관여하는 왕의 직속기관으로 집사중시를 우두머리로 하여 시랑 2인, 대사 2인, 그리고 집사랑은 20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청이 [개국공행록]을 집필하게 된것은 통일 이후 신라 왕실로부터 점차 잊혀져 가는 김유신의 공훈과
자신들이 소외되고 배척받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면서 김유신 행록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해김씨 족보] 등에는 모두 장청이 김윤중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윤중의 손자로 되어있고 아버지는 공백으로 남겨놓고 있다. 일설에는 윤중의 아들이 김융(金融)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하기도 하고, 또 김융이 윤중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찿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혜공왕때 김유신 묘에서 일어난 회오리 바람이 미추왕으로 이어지는 이변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다 같이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김유신의 후손들에게 불가항력의 큰 곡절이 있었던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 가는 김유신의 손자 윤중,윤문이 신라 성덕왕 때 당의 요청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발해를 공격했으나, 폭설로 인해 실패했다는 기록과 장청이 미관 말직으로 전락한 사실을 끝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청의 개국공행장록이 없었더라면 가락의 세계와 김유신 장군의 통일 위업과 위국충절 그리고 인간 김유신의 면모가 약여하게 전해질 수 있었을까!
장청은 '기록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는 참으로 값진 교훈을 남겼다.
(4). 최초의 역술가 김암(金巖)
구형왕 이후 가락국 왕세계를 보면 [삼국사기]는 '구형(仇衡)-무력(武力)-서현(舒玄)-유신(庾信)-삼광(三光) -윤중(允中)-( ? ? )-장청(長淸)' 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김암(金巖)은 장청의 서동생이니 흥무왕의 현손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방술서(方術書)를 공부하는데 호기심을 가졌으며, 소년시절에 이찬(신라 17관 등급 중에서 둘째위계)이 되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음양가법(陰陽家法)을 습득하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저술하여 스승에게 보였더니 스승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명석하고 통달한 지식이 여기까지 이른줄은 몰랐다' 고 하면서 그 후로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공왕때 귀국하여 사천박사(천문을 맡아보는 지금의 기상대)가 되었고, 지금의 양산,진주, 광주(경기도)등의 태수를 역임하고 패강진(浿江鎭:평양)의 두상(頭上:태수와 동위인 관직명)이 되었다.
가는곳 마다 극진한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농무(農務)를 장려하고 여가에는 육진병법(六陣兵法)을가르쳐 사람마다 익히도록 했다.
평양의 두상(頭上)으로 있을 때 메뚜기 떼가 서쪽으로 패강(浿江:대동강)지경을 들어와 징그럽게 온 들판을 뒤덮으니 백성들이 두려워 했다. 김암은 산 위에 올라가서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풍우가 일고 메뚜기가 다 죽어버리는 이적을 보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혜공왕 15년(779년)에 왕명을 받들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일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했으나 그 무렵 당(唐)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서로 만나서 즐거워했다. 왜인들은 비로소 김암이 중국에도 알려진 유명인임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당시 신라 조정은 삼국통일 후 8세 기초인 33대 성덕왕(聖德王)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면서 윤중(允中:김유신의 손자)을 대표로하는 흥무왕(諱;김유신)계를 중앙정부에서 제거하였던 것이니, 8세기말 흥무왕(김유신)계의 신원운동을 볼 때 김암의 일본사신 파견은 그에 대한 정치적 추방의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김암은 우리 나라 천문학의 원조이며 탁월한 천재임에도 관직은 늘 6두품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는 신라 조정이 흥무왕계를 정치적으로 억압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는 흥무왕계로서 정치활동을 한 마지막 인물이며 둔갑술과 음양가로서 가장 탁월한 천재였다.
(5). 직필사관 김일손(金馹孫)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년) 판도판서 김관(金管:김해김씨 삼현파 중조)의 6세손인 김맹(金孟)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며칠전 운계리 맑은 냇물에 붉은 서기가 무지개처럼 뻗치어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 한다. 맹이 하늘에서 내려온 준마 한 마리가 품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었다하여 아들을 준손(駿孫),기손(驥孫), 일손(馹孫)으로 이름지었다 한다.
그는 5세때 벌써 천자문에 능통하였고, 당대의 석학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되어 20세에 생원에 장원급제하고 23세에 문과에 제2인으로 등제하여 벼슬이 이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뛰어난 문장과 판단력을 겸비하여 사관(史官)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초기의 거유 길재(吉再)의 학맥을 이은 김종직에 사사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등당대의 신진사류들과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성종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관학파로 알려진 훈구대신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이극돈(李克墩), 그리고 유자광(柳子光)등이 이들 사림파를 몹시 두려워하고 시기하였다.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이 편찬될때 이극돈이 역사편찬의 당상관이 되었는데, 김일손이 쓴 사초(史草)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과 훈구파의 비행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보고 이를 연산군에게 고하여 영남학파의 신진 선비들을 대거 숙청한 이른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 사화로 이미 고인이된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공은 처형되었는데 당시 신진사류 70여명이 처형되고 혹은 귀양가는등 역사상 유례없는 대 참사였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6).위국충절의 사표 김완(金完) 1577(선조 10)∼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구(子具), 시호는 양무(襄武). 영암출신. 이성현감(利城縣監) 극조(克조)의 아들. 1597년 정유재란 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갔고, 이해 여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가 끝나 돌아오다가 적을 만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명을, 둔원내촌(屯院內村)에서 10여명을 목베었으며, 장치(獐峙)에서는 혼자서 수십명을 목베어 선혈이 반석에 낭자하여 후인들이 이 반석을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점검을 위해 온 것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 겸 단련사(小坡兒權管兼團練使)가 되어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의 운송책임을 맡았다. 1603년 선전관이 되고 이듬해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에 남원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서울에 올라와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고 다음해 절충장군, 1618년 내금위장에 제수되었다가 곧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체임되었다. 1622년 평안좌도방어사, 다음해 평안도방어사 및 창성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뒤 다시 복관되어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일시 투옥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 1634년에는 훈련원도정·황해도병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5. 우리 가문의 유적지
(1).수로왕릉 (사적 제73호)
서기 42년 가락국 시조로 왕위에 오르고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 김수로왕의 릉이다. 능호는 납릉이다. 조선 세종과 선조 년간에 수축하였고 능 앞의 비는 인조 25년에 세운 것이다.
(2). 숭선전 수로왕과 허왕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은 고종 15년 (1878년)에 나라로부터 내려진 이름이다.
(3)허왕후릉 (사적 제74호)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서기 48년 가락국 수로왕에게 출가하여 가락국 시조 왕비가 된 보주태후 허씨릉이다. 능호는 후릉이다. 조선 세종 년간에 수축됐고 능비와 상석등은 인조때 세워졌다.
(4).파사석탑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안전항해를 위해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하는 5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원래 호계사에 있었는데 고종 10년 능전으로 옮겼다.
(5),덕양전 (경남지방문화재 제50호)
덕양전은 구형왕(양왕)과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덕양전 뒤편에는 가락국 10대왕 구형왕릉으로 전하는 석릉이 있다. 덕양전은 원래 수정궁으로 왕릉 가까이 있었는데 고종15년 덕양전으로 개칭하고 192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6). 흥무왕(김유신)릉 (사적 제 21호)
삼국통일의 원훈이요, 신라 제일의 명장이며 후세에 까지 추앙받는 인물로 문무왕 13년(673)에 서거한 김유신(흥무대왕으로 추봉됨) 장군의 능이다. 상부는 토봉이고 하부는 12 지신상이 새겨진 24개의 호석이 둘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