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에 이어 유길준이 정밀하고도 실제적인 조선 중립론을 제시하였습니다. 때는 1885년 12월 유길준이 귀국하여 연금 초기였습니다. 이광린은 유길준을 보호하고 있던 한규설이 중립화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갑신정변으로 청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다시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러시아와 영국의 진출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고, 조선에서 국제법을 알고, 동서양의 사정에 대하여 정통한 인재가 바로 유길준 이었으니 그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길준은 중립의 개념부터 시작하여 영세중립의 효용에 대하여 연급하고 당시 유럽에서 벨기에와 불가리아의 예를 검토하고 그에 비추어 조선의 위상을 이해하고,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위협을 평가한 다음에 당시 조선에 가장 적합한 중립화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청의 중재에 의한 청, 일, 러, 영, 프 등 아시아 관련국들의 중립화 조약 체결이었습니다.
유길준이 청을 중심 국가로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유길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의 형세에 처하여 아직까지 만국의 사이에서 토지 인민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이를 하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이 우리를 노린 것이 오래 되었으나 아직까지 감히 거동하지 못하던 것은, 비록 세력균형[均勢之法]에 저지당하였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두려워해서 그랬던 것이다. 일본 또한 우리나라를 취할 뜻이 일찍이 없지 않았지만, 다만 저들의 세력이 부족하고 힘이 미치지 못하여 자보(自保)를 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으니 어떻게 감히 중국과 항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의지하여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보살핌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유길준, “중립론”, 김종학, 한반도 공동보장 구상의 역사적 기원 : 19세기 벨기에 불가리아 사례와 유길준의 중립론 정책연구 시리즈 2020-06,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1, 23쪽)
중국에 대한 사대질서, 중국과의 종번(宗藩) 봉신(封臣) 관계가 바로 집단안보체제였음을 말하고, 비록 우리가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고 있지만 그것은 곧 중국에 의한 안전보장의 혜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조선 말 당시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에서 조선이 국가로서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중국의 보호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유력 후보국이 아니었을까? 유길준은 그에 대하여 또 이렇게 말합니다.
“또 다른 이는 ‘미국은 우리나라와 우의가 두터우므로 의지하여 원군을 삼을 만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옳지 않다. 미국은 멀리 넓은 바다 저편에 있어서 우리와는 특별히 깊은 관계가 없고, 게다가 먼로 독트린[蔓老約] 이후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일에 간섭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저들이 혹 말로는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감히 무기를 가지고 구원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속담에 “천마디 말이 한 알의 탄환만 못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통상(通商)의 상대국으로서 친교할 수는 있을지언정 급할 때의 우방으로서는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유길준, “중립론”, 김종학, 앞의 글, 23쪽)
익히 보았듯이 고종도 미국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통상과 교역에 치중하였지 국제정치적 관계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전하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교역에서의 가치도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미국의 관심을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중국과의 불필요한 마찰도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길준의 문제의식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취약성입니다. 조선이 주위 열강들의 쟁탈전의 무대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금일 외국 군대를 잠시 철병시키더라도 이는 단지 눈앞의 군대를 제거하는 것일 뿐이며, 각국이 마음 속에 품은 예봉은 사라지지 않아서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서 날마다 소란스럽게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쫓고 쫓기는 만국의 병마(兵馬)는 그칠 날이 없다.”(유길준, “중립론”, 김종학, 앞의 글, 24쪽)
유길준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러시아였습니다. 실제로 19세기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었으며 조선 진출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서방 제국과 일본에 의해 유포된 공러의식(Russophobia)의 영향도 엿보입니다.
“러시아는 특히 무도함이 심하므로 온 천하가 지목하여 탐욕스럽고 흉포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그 흉포한 마음[虎狼之心]을 호시탐탐 그치지 않고 교도(敎徒)의 일을 빙자하여 터키에서 전란을 일으키고는 이를 멸망시키려고 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해서 장차 유럽을 잠식할 기반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한꺼번에 일어나 터키를 원조하여 러시아의 예봉을 막고 그 계획을 저지하였다. 이에 러시아 인들은 주변 강대국들과 원한을 맺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켜서 중무장한 군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시키고 시베리아 철도를 가설하였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막대해서 이득이 손실을 메꾸지 못하니, 저들의 의도는 굳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판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위태로움은 그 절박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유길준, “중립론”, 김종학, 앞의 글, 22쪽)
유길준은 일본도 경계합니다. 갑신정변에서도 일본군이 나서서 한성을 유린하였음을 지적합니다. 또 갑신정변의 결과인 텐진조약으로 철병을 한다고 하여도 언제 또 어떤 구실을 붙여서 진주해 올 수 있음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비록 시무에는 다소 통달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우리를 대하는 것은 매양 중국을 본뜨면서도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내지의 무역으로부터 해변의 어채(漁採)와 한성의 개잔(開棧)에 이르기까지 일마다 이렇듯 심하여 우리나라가 이미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이번에도 중국 군대는 한성 200리 밖에 주둔하였으나 일본 군대는 말을 몰아 입성하여 마치 사람이 없는 듯 방자하게 굴었으니, 이는 비단 저들이 우리나라만을 무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는 함부로 중국을 경시하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힘이 있었다면 저들을 맞이하여 싸워서 모두 죽여버리더라도 안될 것이 없었겠지만, 실제로는 항의 한 마디 못하고 벌벌 떨며 오직 우호를 잃지나 않을까 근심하였을 뿐이다. 이는 우리나라 인민들이 자강(自强)을 하지 못한 탓이니 다시 누구에게 죄를 돌리겠는가. 가령 일본군이 금일 철군하더라도 크게 기뻐할 것이 없고, 백년을 주둔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근심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비록 저들이 오늘 떠난다고 하더라도 내일 다시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오려고만 한다면 어찌 구실이 없음을 근심하겠는가. 이후로 일본뿐만 아니라 천하의 병력을 보유한 국가들이 모두 이와 같을 것이다.”(유길준, “중립론”, 김종학, 앞의 글, 24쪽)
이렇게 갑신정변에서 일본을 비난하고 청국을 두둔한 것은 임오군란 때의 판단과는 정반대라는 점이 주목됩니다. 앞서 임오군란 당시 유길준은 청국에 의한 조선 장악을 걱정하며, 일본의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그 때에도 일본의 공식 개입은 꺼려하고 단지 일본군 ‘차병(借兵)’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조선의 평화를 일본에 의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에서는 일본의 개입을 비난하고 청의 개입을 상찬하고 있습니다. 유길준의 이율배반일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길준의 정확한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오군란에서 일본의 도발은 딱히 없었습니다. 수구파가 개화에 반대하여 그 분노를 일본에 터뜨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구파 반란의 무리를 진압한다는 이유로 청이 군사를 동원하고, 조선의 통치에 개입한 것이었습니다. 청이 조선의 상국으로 조선 국왕을 책봉하였고, 그 군권이 변란으로 전복되었으니 청이 개입할 근거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근대 국제법질서에서 청과의 사대질서를 청산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청이 개입하여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라면 일본에 대한 원조 요청은 조선의 방어와 독립 유지를 위한 것으로 국제적 정당성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에서는 그와 달리 일본군이 먼저 도발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옥균 개화당과 함께 일본 공사관 경비부대가 유혈 정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개입하여 진압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일본의 부당한 무력개입에 대하여 청이 조선의 보호를 위한 정당한 개입을 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유길준은 갑신정변과 거문도 사태에서 러시아 그리고 일본을 경계하며 청에 의존하는 조선 중립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유길준은 조선 중립화가 조선의 안전 보장을 위한 것임은 물론 그에 그치지 않고, 청에게도 이익이 있고, 모든 열강들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의 입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중국의 이익이자 여러 나라가 상호 보존하는 계책이 되니, 어떻게 수고롭다고 이를 하지 않겠는가. 유럽의 대국들은 방아(防俄: 러시아를 방비함)와 자보(自保: 자신을 보호함)의 계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해서 벨기에와 불가리아 양국의 독립을 공동으로 선언하고 순식간에 성사시켰는데, 왜 아시아의 대국들은 한갓 근심할 줄만 알고 계책을 세울 줄은 알지 못하는가.”(유길준, “중립론”, 김종학, 앞의 글, 26쪽)
조선의 중립이 단지 조선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국제관계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또 주위 국가들의 인정을 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의 중립은 중국에도 이로우면서 여러 열강들의 상호 공존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국제관계에서 중립의 평화가치에 대한 떳떳한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립을 청은 수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일까? 앞서 리훙장은 중립에 긍정적이었는데, 청국은 결국 조선 중립을 수용하지 않았음을 보았습니다. 조선 중립은 결국 열강들에 의한 조선 안보의 공동보장을 의미하고 이는 청의 배타적 종주권의 상실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선 중립화가 조선의 입장에서는 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으로 향해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뜻합니다. 유길준이 청에 의존하는 중립을 말하는 것은 결국 청의 종주권을 존중하지만, 결국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