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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도시 제24집
상여소리는 문의고개를 넘어가고
편집자의 말
깨어있는 자만이 상여 소리를 듣는다
상여가 일어서면 산이 일어서는 것 같다. 죽음이 산보다 더 육중한 무게를 지녔기 때문이다. 상여가 일어나는 순간 남은 자들의 뿌리에서 일제히 뜨거운 관악기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양은 세숫대야에 소나기 떨어지듯 무질서하다. 태초의 혼돈처럼 어둡고 깜깜하다. 남은 자들은 이 무질서와 혼돈의 나락에서 가장 찬란한 생의 슬픔과 마주친다.
상여는 이때 불끈 일어서며 죽음의 속살을 파고든다. 그것이 상여 소리다.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는 삶의 연대가 상여 소리다. 절망의 나락에서 희망의 산정을 향해 가는 것이 상여 소리다. 상여 소리는 생물학적 죽음 너머 피안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유한자(有限者)들만이 낼 수 있는, 지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다. 상여 소리가 한 고개를 넘어갈 때쯤이면 남은자들의 절망에 다시 생기가 돋는다. 가시 찔린 손가락에 붉은 피가 돋듯.....
그러나 오늘, 손가락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상여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삶과 죽음마저 박제화 되고 상품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자만이 상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08년 가을. [좌도시]
차례
테마시-상여소리
안용산. 산아리 10
임영석. 어야어~야, 어야 어~야 14
김선주. 상여소리는 문의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18
김종윤. 꽃상여 21
안지순. 상두가 26
좌도시
안용산. 검은 산 외 9편 31
임영석. 꽃을 보며외 8편 43
김종윤. 소년 외 9편 59
김선주. 깃들고 싶다 외 9편 77
안지순. 흥부의 외출 외 6편 91
테마시-상여소리
안용산. 산아리 10
산아리
누구나 볼 수 없다 자기는 더 더욱
말할 수도 없다
하루에 몇 번씩 높아지고 낮아지는 바람이다
높아지고 낮아질 때마다
산
산에
꽃이 피고 진다
나 또한
산이던가
날마다 헤아릴 수 없는 혈당 높아지고 낮아진다
테마 산문
상여소리는 만가라고 하여 죽은 생명을 위한 노래이고 산야 소리는 일노래로 살아있는 생명을 위한 노래이다. 언뜻 있음과 없음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 두 노래는 역설이 숨겨져 있다.
상여소리는 사라진 자를 위한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남아 있는 자들에게 잘 살라고 이르는 소리이고, 산야 소리는 아직은 크지 않았지만 빨리 자라 양식이 되어 우리를 살리라고 부르는 소리이다. 그래서 두 노래 모두 아직은 있지 않는 그래서 있어야 할 것, 즉 꿈의 노래이다.
또 하나의 역설은 두 노래는 모두 자신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승을 떠나는 자는 물론 자라고 있는 벼 자신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노래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는 역설이다.
그렇다. 이 두 노래는 생명의 노래이다. 사람에게 공기처럼, 물고기에게 물처럼 주객이 하나여서 분리할 수 없다는 관계, 역설의 관계를 깨달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 아리랑이 있다. 아리랑은 상여 소리와 산야 소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노래이다. ‘아리’는 떠나는 자를 위한 소리이고, ‘쓰리’는 돌아와야 할 자를 위한 소리라고 한다. 상여소리가 떠나는 자를 위한 소리라면 산야 소리는 돌아와야 할 자를 위한 소리이다. “아리아리/쓰리쓰리/아라리요// 아리아리/고개로/넘어간다”우리에게 흔히 나무꾼들이 부르는 신세타령이라고 하는 소리, 아리랑을 나는 요즈음 날마다 부른다.
한 영혼을 떠나보내고 또 한 영혼을 맞이하는 바람이 고개를 넘는다. 그때 마다 산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꽃이 피고 진다. 꽃이 피고 진다고 하여도 바람은 늘거나 줄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내가 당뇨병에 걸렸다고 한다. 당이 높아지고 낮아질 때마다 어처구니없이 화도 내고 웃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있어야 할 꿈처럼 나도 노래를 부른다. 아침과 저녁에 바람처럼 길을 걷는다. 마치 날마다 산을 넘 듯 오늘을 넘는다. 산아리로구.
임영석. 어야어~야, 어야 어~야 14
어야어~야, 어야 어~야
-상여 소리 후렴에 맞추어
어야 어~야, 어야 어~야,
아쉽다 아쉽다 말하지 말자
그립다 그립다 말하지 말자
어깨 짐 무겁다 한탄치 말자
어야 어~야, 어야 어~야,
그대가 가는 길 내가 가고
내가 가는 길 그대가 오니
오는 길 묻지 말고 가는 길 묻지 말자
어야 어~야, 어야 어~야,
슬픔에도 씨가 있고 기쁨에도 씨가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왜 꽃이 피는 씨가 없겠냐
불어오는 바람이 왜 보는 눈이 없겠냐
어야 어~야, 어야 어~야,
눈 감고 바라보면 보이는 게 다 천당이고
눈 뜨고 바라보면 보이는 게 다 지옥이다
눈 감고 눈 뜨는 게 생(生)과 사(死)가 아니더냐
어야 어~야, 어야 어~야,
기척 없다 서러워 말라
소식 없다 그리워 말라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저녁이 오면 밤이 되니
네마 산문
세상 사는 이치를 생각하면 태어남과 죽음이 한 가지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태어남을 기쁘게 생각하고 죽음을 슬프게 생각한다. 상여 소리의 후렴이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와 세상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일깨워 주는 각 성의 촉매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후렴을 듣고 생각나는 마음들을 적었다.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고 무엇 때문에 고뇌하여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다. 요즘 들어 건강하게 잘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팔팔하게 살다 딱 3일만 앓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포에 휩싸여 있다.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맞기까지 시간을 두려워하고 있다. 가족 단위가 핵가족이 되다 보니 노인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 먹고사는 문제로 맞벌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다 보니 부모들을 봉양하고 돌볼 자식들이 없다. 봉양을 하고 돌보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하지 않다 보니 사회적 문제로 번지고 있다. 기르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면 부모를 모시는 것 또한 자식의 도리여야 하는데 그 이치가 순화되지 않고 있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저녁이 오면 어둠이 깃드는 것을 왜 모르고 살아가는가 싶다.
김선주. 상여소리는 문의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18
상여소리는 문의고개를 넘어가고
사람들이 잠든 사이 눈이 내렸다
어둠을 타고 도둑같이 내렸다
댓돌에 놓인 검정고무신
불알을 움켜잡고 잔뜩 옴츠린 아침
고무신 안쪽 깊은 곳의 어둠을 털며
할머니는 망자의 내력을 얘기한다
도둑같이 찾아온 죽음의 내력을
대문간에 부고장을 꽂아놓고 돌아선
낯선 남자의 발길이 소복 눈에 묻히고,
까마귀 길게 우는 아침
바지춤에 손을 묻고 이불 속을 뒹굴 때
상여 소리는 문의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늙은 아낙들은 동구에서 눈발처럼 수런거리고
외양간 어미 소는 더운 입김을 뿜고
테마 산문
죽음은 삶의 뿌리이며 삶은 죽음의 열매다. 죽음은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삶의 뿌리였다. 사람이 죽으면 온갖 화려한 꽃으로 치장하고 유려한 곡조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뿌리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종언(終焉)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의 변태였으며, 죽음을 노래하는 상여 소리 역시 삶의 또 다른 변주였다. 그래서 상여 소리는 서글프면서도 힘이 있었다. 상여소리는 죽음을 또 다른 삶으로 변주하는 우주적 직관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죽음을 삶과 분리시킨다. 산업사회의 공장 시스템에 의해 죽음을 처리해 버린다. 이제 상여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나 굳건한 삶의 의지로써의 철학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산업사회의 폭력이다.
오늘 우리가 상여 소리를 떠올리는 것은 이러한 폭력에 대한 저항이며, 실존에 대한 탐구이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자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문제를 성찰하는 거울로 삼기 위한 전략이다.
김종윤. 꽃상여 21
꽃상여
나팔꽃이 환하다
죽은 울타리 장미 줄기를 거머쥔
작은 손들이 일제히 꽃문을 활짝 열었다
열두 상두꾼의 꽃상여다
매일 이 길을 걷던
담 넘어 꼽추 할매
꽃상여를 타고 산으로 갔다
가는 길이 오는 길이고
오는 길이 또 가는 길이다
나는 매일 꽃상여가 잘 차려진
이 고샅을 지나 밥벌이를 나선다
테마 산문
키가 큰 손위 형님은 멜빵을 벗고 뒤로 물러섰다. 상여의 무게가 높은 어깨를 짓눌러 못 견디겠단다. 옛날엔 상여꾼도 키를 봐가며 열둘이 멨다는 요령잡이의 덧말을 들으며 여덟 명이 멘 상여는 너른 포장길을 간다. 돌밭길, 논둑길이 이제는 농로로 반듯하게 포장되어서 산 깊숙이까지 들어가 있다. 다리 건너 쉬고, 망자의 밭이라서 쉬고, 또 논이라고 쉬고 쉬엄쉬엄 오라온 길이 아침 9시를 조금 넘었다. 포크레인은 이미 작업을 마쳤다.
윗집에 살던 교수인 김형은 상여를 메기 위해 하루를 휴강하고 시골에 왔다. 공무원인 친구도 하루 연가를 내고 왔다고 한다. 진즉 계원으로 모인 상엿계의 일을 늙은 아버지들이 했으나 이제는 늙어 더 못한다고 물려준 상여꾼, 상엿계다. 이렇게 상엿계가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계꾼이 없으면 일당을 주고 상여꾼을 사야 할 형편이 되었다. 경운기 하루 빌리는 데 20만 원, 트럭 한나절 빌리는 데 20만 원, 포크레인 반나절에 15만 원이란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상여로 돌아오면, 마을 사람들은 상주와 돈 거래부터 한다. 일명 통관세라고 한다. 일손이라도 보탤라치면 하루 일당을 앞세우는 짠지같은 인심이 되었다.
상여는 상여꾼 중 한 사람이라도 야료를 부리면 앞으로 나가기 어렵다고 한다. 뒤로는 갈 수 없고 오직 앞으로만 간다고 한다. 고향에서 다붙어서 살던 정으로 갈 때도 서로 힘을 보태던 장례의 풍습이 많이 변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처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시골의 장례 풍습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잃을 것인가.
안지순. 상두가 26
상두가(喪頭歌)
청보리 물결
허리가 다 굽었다
기우는 해를 이고
상여가 간다
큰아들 앞서 보내고
한평생 굽은 허리로
땅을 보고 걷듯이
상여가 간다
논 두 마지기 팔고
이사 간 둘째 아들네
소식도 없이
뒤란 살구는 서럽게도 붉구나
아 이리 편한 것을
반듯하게 누워
간다
허리 곧게 펴고
상여가 간다
테마 산문
달빛도 푸른 새벽,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 깨지 않은 새벽 나는 이불 속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다. 무언가를 나무라듯 타이르듯 그러면서도 간절한 소리,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 뒤뜰 장독대에 물 한 그릇 떠놓고 그렇게 비는 것이다. 그 소리가 마치 깊은 속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처럼 나를 깨우곤 했다. 할머니가 떠놓은 정한수는 아침이 되고 오후가 되어도 거기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할머니의 간절한 바람과 기원의 신성함이 깃든 정한수를 그 누가 건들 수 있을까.
할머니의 노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 가슴 속 무덤에 들어간 큰아들과 삶의 돌부리에 자꾸만 채이는 둘째 아들과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떠나버린 셋째 아들을 향해 부르는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밭을 매면서도, 부뚜막에 엎드려 밥을 지을 때도, 몸의 반이 꺾여진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들판을 다니실 대도 삼신할머니를 부르고 보살을 불렀다. 할머니의 노래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다시 해가 뜨는 것처럼 늘 우리들의 일상 속에 있었다.
어느 여름, 할머니는 마당에 함지박을 엎어서 어린 손자들을 차례로 앉혀 놓고 머리를 깎았다. 그때 거울을 보고 앉았던 성질 못된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동무들과 산에서 노는 재미에 빠져 할머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질 쯤 어디선가 나지막하면서도 젖은 음성이 낮은 산을 깨웠다.
“아가아-”
그 소리는 산 위에 올라왔다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곤 했다. 그 후로도 종종 그 멀고도 긴 소리를 환청처럼 듣곤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상여가 나가던 날, 합창처럼 부르는 상여꾼들의 노래는 산과 마을을 울렸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아가는 길목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눈물 대신 불렀던 할머니의 노래처럼 우리들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갈 수 없는 그곳에 가고 있었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길은 노래다. 어쩌면 그 노래는 우리가 평생 동안 지니고 다녀야 할 존재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좌도시
안용산. 검은 산 외 9편 31
⊙ 검은 산 (안용산)
-영신굿 1
구름이 구름을 반쯤 가리자 앞산이 반쯤 바람이었다
그래 오늘은 요만큼만 놀자며 어둠으로 사라졌다
마을에서는 보지 못한
눈
신새벽
하얀 산이 되었다
⊙ 빛과 바람 (안용산)
-영산굿 2
봄은 늘 누대로 마을에서부터 산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꽃에게 산동백꽃을 어서 세우라 한다
아니다 싶은
순간
다시 바람이 분다
그렇다 싶어 풀죽은 꽃들이 나뭇가지를 탓하고 있을 때였다
나뭇가지는 뿌리를 탓하고 뿌리는 또 그름 따라 떠다니지만
나 혼자
바람이었느냐고
묻는다
물을 때마다
벌써
마을까지 내려와 있는 산빛 아득하게 출렁거렸다
⊙ 비와 잎사귀 (안용산)
-영산굿 3
나무가 잎사귀를 세운다 잎 하나 무릎을 치려다가
거듭 쑥스럽게 멈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또 하나 잎사귀도 계속 웃으려다 만다
이도저도 아닌
소리
잎사귀들은 바람이나 된 듯 지들끼리 신이 나 바람이 바람을 부른다
우우우
마침내 비
너울너울 휘어질 만큼
잎사귀들이
살려내고 있었다
⊙바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안용산)
풀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무들이 기다리고 있다
숲이 기다리고 있다
떠났다 돌아오고 다시
떠나기 위하여 돌아간
별들의 느낌으로 늘
풀들이 먼저 흔들린다
늦게 나무들이 알았는지
흔들리기 시작한다 숲처럼
일제히
흔들고 있다
바람처럼 떠난
사람들은
바람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 내일이 없다 (안용산)
내일은
갑자기 영하
20도 내려가리라 한다
늘 미리 알리는
일기예보에는
오늘이 없다
보이지 않는 뿌리처럼
나무에는
내일이 없다
빈 가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솟아야 할 잎만큼
바람이
끼리끼리 휘어지고 있었다
⊙ 풀이다 (안용산)
바람이 분다
모두에게 다른 몸이었다
자기마저도 더듬어야 했다
초원이라 부르면서 잊기 시작하였다
서로 살아 있어야 할 우리
풀이었다
떠나기로 한
순간
이미 바람이 불었다
⊙ 환하다 (안용산)
양을 가르면 나타나는 갈비뼈
아직도
달이라 하였다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간 달을
다시 보는 날이면
또 다른 양이 태어나
풀빛 같은 어둠을 하얗게 핥고 있었다
⊙ 죽음을 보다 (안용산)
가도
가도
보이지 않았다
슬픈 모습으로
더욱 멀게 하는
그렇고 그런 것이 무덤인 것을
보이지 않는 무덤을 보고야 비로소 죽음이 보였다
⊙ 초원 그리고 바람 (안용산)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어디고 바로 가다보면 길이었고 길이 되었다 싶으면
풀들을 세우고 눕다가 다시 세우기 위하여 사라지고야마는
바람이었다
⊙ 개똥벌레와 외딴집 (안용산)
논이 아니라고 이제 찝쩍대지 않을 때이다
스스로 버리고 비워 넉넉한 물싸리들 물싸리로 저물더니
사내 혼자 사는 외딴집 외딴집으로 어둡다
달마저 없는 하늘
개동벌레
서로 밝힌다
임영석. 꽃을 보며외 8편 43
⊙ 꽃을 보며 (임영석)
화사한 꽃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 참으로 많이 한다
그런데 그 꽃이 질 때 예쁘다는 생각 온데간데 없다
내 마음이 두 갈래 생각으로 나누어져
화사하게 핀 꽃들 앞에서만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그 꽃이 질 때에는 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 마음속의 깊이가 깊지 않기 때문이리라
얕은 물은 언제나 제 소리 하나 껴안고 흘러가기 바쁘고
깊은 물은 하늘을 안고 흘러도 그 무게조차 잊고 흘러가는데
꽃이 피나 꽃이 지나 예쁘다는 생각 못하는 나는
아직 내 마음의 꽃 피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꽃이 져야 열매가 달리는데
⊙ 내 머리에 뿔이 있다면 (임영석)
염소농장에 놀러 갔다가 숫염소들이
서로 뿔을 맞대고 싸우는 걸 보았다
그 뿔 부딪치는 소리가 쿵, 쿵 산을 울리며
한 치 양보 없이 승자가 되려고
목숨을 다 내어 놓은 듯한데
한 놈이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고 물러나자
울던 산도 고요하게 제자리로 돌아간다
천년만년 살아온 산도 제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두 뿔을 가진 염소들의 싸움에 혼자 울면서
제 자리로 돌아가 천년만년 다시 살겠다는 자세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뿔은 없는 것일까
산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뿔을 가지려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또 기다려 살까
내 머리에 뿔이 있다면 저 산처럼 천년만년 기다릴 수 있을까
⊙ 두문불출 (임영석)
나도 이제 밖을 쏘다니지 않기로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다 듣다가 보면
이 말이 그 말 같고 그 말이 이 말 같아
정작 중요한 말은 다 흘리고 다닌다
수령 천 년 고목이 어디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인 일 있었는가 밖을 나갈 일이 있다면
그때는 목숨을 다 두고 가겠다는 자세 아닌가
두문불출 산다는 것은 제 속을 꽉 채워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는다는 것도
살아온 날을 버리고 속을 꽉 채워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다
내가 아파트 베란다에 가꾸는 화초 중 호접난은
두문불출 삼 년만에 꽃을 피웠다 삼 년을
먹고 자고 자고 먹고 죽었다가 살고
살았다가 죽어 가기를 반복하며 피운 꽃이
모양은 그래도 꽃을 피워 놓으니
화초라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두문불출 설악산 봉우리에 머무른 흔들바위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려 하지 않는 걸 보면
두문불출 그 자세가 세상 사람 마음을 움직여
설악산을 찾게 하는 것 아닌가
⊙ 옹이 그릇 (임영석)
나무를 이어 붙인 함지박을 너무 오래 써서
옹이가 쏙 빠져나갔다 쏙 빠진 옹이 구멍으로
어린 아이 오줌 줄기 같은 물이 뻗어 나온다
오줌보가 꽉 채워져 더는 참지 못하는 아이처럼
옹이 그릇은 지난 세월 참았던 것들을 시원하게 내뿜는다
나는 그게 너무 재미있어 함지박에 자꾸 물을 퍼부었다
밭에서 일하시고 돌아온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시고
함지박 속 터지게 무엇하냐며 호통을 치신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 옹이 빠진 함지박 속이 확 터졌다
바싹 마른 것들만 담아 놓아야 했는데
우물 속 물을 길어 가득 부어 놓으니 목 마른
몸 틈틈이 물을 먹고는 지어미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몸이 퉁퉁 부어 몸을 뒤틀었던 것이다
지어미 생각하며 울던 옹이 그릇 함지박처럼
나도 술만 먹으면 오줌보 치워진 속을 비우며
고래고래 속 터지는 소리만 한다
지어미 생각하는 옹이 그릇 함지박을 닮아가고 있다
⊙ 그늘 (임영석)
1
그늘은 늘 한쪽으로 비켜서서 앉아 있다
그래야 편한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마음을 비워 준 자리 떠날 수가 없나 보다
2
국형사* 소나무 숲, 솔잎의 뾰족함도
납작한 모양으로 그늘을 이루었다
눈 부신 햇살 한 줌이 뾰족함을 다 지운다
3
도둑놈이 따로 없다, 숨 쉬는 게 다 도둑이다
나무는 흙의 도둑, 사람은 자연의 도둑
도둑질 그만 하라고 그늘이 늘 옆에 있다
4
아버지와 아들 사이 마음이 다 다른데
아버지는 둑이 되고 아들은 물이 되어
스스로 그늘이라고 비워주고 채워준다
5
산 같은 집 하나면 부럽지 않은 세상
그 그늘에 눌러앉아 십수 년을 살다 보니
이제는 그늘의 품이 더 큰 산처럼 느껴진다
*국형사 :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치악산 밑에 위치한 사찰
⊙ 편백나무 발판 (임영석)
술도 깰 겸 목욕탕에 갔다
멋모르고 들어간 80도 고온실
1분도 못 견디고 땀에 젖어 도망쳐 나왔다
내 몸의 곳곳마다 가득 들어찬 허물 때문에
80도 고온에서 맥을 못 춘다
빈 몸에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건
80도 고온이 주는 무게가
내 삶의 무게보다 무겁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서 있던 편백나무 발판
땀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발길이 오고갔는지
반들반들 윤까지 난다
80도 고온에서도 끄떡없는 저 힘
자세히 바라보니
목숨을 내어 주고 바꾼 것이다
⊙ 절벽 위에서 (임영석)
절벽이 자석처럼 내 발을 꽉 잡고 있어
아무리 발을 떼도 한 발자국도 갈 수 없다
마음이 자꾸 뒷걸음쳐 손에 땀만 가득하다
두 손에 땀을 쥐고 살아온 나의 생이
얼마나 높았으면 썰물처럼 빠져나가
발 아래 텅 빈 허공이 무덤처럼 보인다
삶이란 저 허공을 오르고 오르는 일,
수많은 모래알이 반짝반짝 빛나는 건
허공을 오르려다가 무너진 눈물의 빛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울어보지 않은 사람
이 절벽에 서 보면 그러면 알 것이다
이 세상 삶의 높이가 그 얼마나 낮은지
⊙ 습진 (임영석)
내 발가락 사이사이 내 삶의 무게만큼
땀으로 얼룩이 져 잡혀 있는 물집들이
하루를 살아온 삶을 꽃잎처럼 터뜨린다
습진에는 목초액이 좋다기에 발 담그고
코끝이 찡한 냄새 참뜻을 알고 보니
적멸의 뜨거운 길을 걸어나온 말(言)이었다
가려움을 참고 참다 터뜨린 물집들이
외로운 나의 삶을 볼모로 잡아 놓고
무엇을 가르치려고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그 글들을 한 자도 못 읽을까
나는 왜 그 글들을 고통이라 생각할까
스스로 알지 못하니 내 아픔만 커질 뿐
내 발가락 사이사이 통증을 없애는 건
절멸 속에 남겨 놓은 참나무의 참뜻인데
참뜻만 가려운 통증 읽어내는 눈인가보다
⊙ 눈잣대 (임영석)
1
누구나 마음 속엔 눈잣대가 하나 있다
삐틀고 구부러진 마음을 바로 보라고
눈잣대 눈금 속에는 삶의 날(日)이 새겨 있다
2
무거운 돌 속에는 무거운 돌의 힘이
반듯한 나무 속엔 반듯한 그 자세가
이 세상 눈잣대처럼 버팀목이 되어 있다
3
갯벌의 구멍 마다 주인 없는 구멍 없고
모래알 하나 마다 사연 없는 모래 없어
햇볕에 반짝거리며 눈잣대를 재고 있다
4
꽃들의 등 뒤에는 꽃 향기가 길이 되어
인적이 뚝 끊겨도 벌나비가 찾아 온다
눈잣대 하나만 갖고 첩첩산중 찾아 온다
5
살아서 백 년이면 하품도 말이 된다
죽어서 천 년이면 마음도 뜻이 된다
해와 달 눈잣대 속은 말고 뜻만 빛난다
김종윤. 소년 외 9편 59
⊙ 소년 (김종윤)
빗방울이 성큼 건너뛰는
모래 운동장
거기, 소년이 두 팔을 벌리고
마치 이륙이라도 하려는 듯이
소년의 목소리는 높고
얼굴은 저녁 그림자를 닮았다
외딴집 마당가에 핀
자주달개비를 닮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화물차를 몰고
도시로 데모를 떠났다
마디가 메진 화물차는
가벼워서 슬퍼 보였다
소년이 뛴다
빈집을 나와 고라니처럼 뛴다
소년의 목소리는 높아서
어두워진 숲이 빵처럼 부풀었다
소년의 집은 비었고
젊은 엄마의 고향은 베트남이었다
⊙ 종이공을 차는 아이들 (김종윤)
아이들은 여섯 시 반의 첫 버스를 타고 학교에 왔다
새벽의 텅 빈 운동장은 하늘만큼 넓고 무섭다
아이들은 노트를 찢어 종이공을 만든다
복도를 뛴다
다섯 아이들의 발소리가 군마(軍馬)의 발굽처럼 거칠다
아이들의 부모는 수박 농사꾼,
이른 새벽 이슬이 촘촘한 비닐하우스에 들어
하루분의 출하를 고민하는 시간
아이들은 수박씨 같은 발로 공을 찬다
종이공은 가볍고 복도는 동서로 길다
함부로 공을 차면서 영어도 수학도
차고 버리는 종이공처럼 하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요일마다 밭고랑을 비틀거리며 들어내는 수박도
종이공처럼 가벼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섯 웃음을 섞으며
열 바퀴 스무 바퀴 복도를 뛰어도
더 이상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는 없다
그들의 부모처럼 아이들도 이슬이 촘촘한
학교라는 온상 안에서 새벽을 맞는다
⊙ 정암리 사람들 (김종윤)
그들은 안개를 먹고 산다
새벽마다 강변에서 금강의 안개를 거두어
비닐을 치고 집을 짓는다
안개 속에서 붉은 딸기를 낳고
강처럼 푸른 수박을 키운다
아침이면 온몸에
햇살 옷 한 겹을 더 입고
밭마다 이랑마다 대나무 솟대를 세운다
강은 강길로
돌개바람은 바람길로
오신 듯 가소서
부여군 정암리 사람들은
농사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음을 안다
한 해 농사를 짓기 전에
먼저 하늘에 항복의 깃발을 올린다
하얀 백기를 올린다
⊙ 틀니 두 짝 (김종윤)
엄마 아버지 틀니 하셨네
한 해 농사 돈
입안에 다 들어왔다고
입이 무겁다고 빈 입맛 다시더니
오물오물 잔주름만 모으시더니
총각무 한 입 베어 물고
아하! 이제 살것다 살것어 하시네
명절날 잿밥처럼,
더운 물로 어러 차례 씻어
흰 종이 위에 올려놓은
엄마 아버지의 틀니 두 짝
선생이 뭔 돈이 있다냐
이른 아침 출근길에
시린 손으로 꼭 쥐어주는 3만 원
막내가 드렸던 용돈이 틀니 값으로 내게 왔네
⊙ 고무신을 잃다 (김종윤)
흰 나비 한 마리
벚꽃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하늘을 올려본 순간
나의 나비가 사라졌다
수만 마리의 나비 속에서
나는 고무신을 잃고
한참을 울었다
⊙ 유달산 (김종윤)
유달산은 단단한 산이다
한두 놈이 소란을 놓는다고
흔들릴 산이 아니다
한 몸이 못 될 도사리들 진즉 털어내고
힘 센 것들끼리 웅성웅성
어깨를 맞놓고 금줄을 쳤다
유달산을 오르다보면
젊었을 적 아버지의 어깨가 그리워진다
목포의 하룻밤이 새고 나면 꿈틀,
생짜 근육을 밀어 올릴 것만 같다
바다는 오랫동안 깊은 눈빛으로
유달산을 보고 있는 중이다
가끔은 부러운 듯 손을 뻗어
산의 가슴께를 툭, 쳤으리라
유달산은 유달산 대로 바다는 바다 대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눈치다
⊙ 돌아앉기 (김종윤)
대바구니 어께에 걸고 장대를 끌고
날망 포도밭가에 호두를 거두러 갔네
으름덩굴이 기세 좋게 일가를 이룬
호두나무에 올라 열매를 터는데
떨어지는 호두마다 황소 눈동자만큼
크고 부리부리하게 드러나는 구멍들
딱따구리 녀석, 가지에 열매를 매단 채
솜씨 있게 호두 속을 빼간 것인데
햇살은 청맹과니처럼 빈 껍질에 살을 붙이고
바람은 또 상원(上元)밤 장독대 촛불 곁을 지나듯
발소리를 재운 것이다
밤낮으로 미안한 호두나무는
구멍 자리마다 손으로 가리고
으름 열매 주렁주렁 위안을 삼은 것인데
끝내는 주인 발걸음에 궁둥이 틀어
돌아앉고 말았다 나무를 내려온 나는
불현듯 햇살 보기가 많이 부끄럽고
논밭에 일손들 보기도 낮뜨거워
빈손으로 돌아오는 낮도둑처럼
경계를 하며 집안으로 드는 것이다
⊙ 외할아버지 추억 (김종윤)
외할아버지는 무당이었다
봇짐 하나 메고 발 놓는 곳이 당골이었다
바람이 부르는 대로 걷고
밤에는 몇 사내의 운명을 점지하였던가
외할아버지 역마의 길을 돌아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옥천의 촌가에 들면
술주정꾼 외삼촌 풀이 죽고
외할머니 발걸음이 느려졌다
흙벽 두꺼운 방에 들어 면벽독서
시장하다 방이 차다 말이 없었다
닫힌 문 앞에서 그림자로 소식 물으면
먼 풍문인 듯 건너오는 낮은 기침 소리
너는 외할아버지를 닮았단다
어머니는 자랑처럼 내 손을 잡지만
나는 발품이 길지도 오달지지도 못하여
매양 삶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 불편한 곡선 (김종윤)
속리산 청왕봉에서 내려오다 보았다
거진 다 누워있는 거대한 소나무 몸둥이
그의 몸은 뱃고동처럼 길고
살았던 날들의 궤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촘촘한 이웃들과의 햇살 공양으로
머리 다투마다가, 그만 허리 부실로
휘어져 생을 마감한 것이리라, 바람은 벌써
그의 사인(死因)이 출혈 경쟁이라고 단언했다
소나무는 죽으면서 휘어졌다
휘어져 아카시아 나뭇가지에 온몸을 던졌다
물고기를 낚는 낚싯대처럼 몸의 곡선이 팽팽하다
불편한 저 곡선을 본 적이 있다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 네 모퉁이
팔짝 지붕의 처마를 들고 있는 보조기둥이 그랬다
대웅전은 서서히 늙으면서
제 몸을 보조기둥에 넘기고
기둥은 또 불편하게 휘어지면서 견디고 있었다
휘어진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인가
요즘 들어 내 고집이 자주 휘청거린다
죽은 소나무의 몸 아래를 지나 내려왔다
가볍지 않은 의미 속으로의 하산
햇살도 그의 몸 위를 지나 반 마장쯤 내려오고 있다
소나무의 곡선을 질겨서
내 남은 생명만큼은 충분히 휘어질 것이다
한 대의 화살을 떠나보내기 직전의 활처럼
수축기의 근력으로 건(乾)과 곤(坤)을 이을 것이다
그의 그늘 아래에서 새로 자란
층층나무는 벌써 4층 탑을 올리고 있다
⊙ 젖무덤 (김종윤)
남향 벽돌 담 아래
뜨거웠던 하늘나리꽃밭 터
까만 유두 같은 주아(珠芽)들
맨살 내놓고 한겨울 강을 건너고 있네
새봄에 쓸 부엽토 한 줌씩
봉긋이 올려주었네
흙 한 줌으로 넉넉한 젖무덤들이네
김선주. 깃들고 싶다 외 9편 77
⊙ 깃들고 싶다 (김선주)
겨울 해거름에 참새 떼 깃들이는
사철나무 울타리는 따스하다
식어버린 방고래에
뚝뚝 생솔가지 꺾어 군불 지피는 새벽녘
구들을 타고 늑골 사이로 올라오는 엄마의 손은 따스하다
인생이 힘들고 외롭다고 느껴질 때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어
울고싶어질 때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편안하고 따뜻해진다
내가 가난하고 외로울 때
당신에게 깃들고 싶다
⊙ 산에 와선 꽃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김선주)
산에 와선 꽃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이러쿵저러쿵 어우러져 그냥 놀게 하라
그것이 꽃이면 어떻고 잡풀이면 또 어떠랴
산에 와선 꽃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이름도 없이 살다간 우리 동네 장씨
이장네 집에 도장을 맡겨놓고 제 이름도 잊어버린
그는 그냥 장씨였다 이름은 불러서 뭣하겠는가?
무리 속에 섞여 한 평생 피고 지면 됐지
산에 피는 꽃은 그냥 산꽃이다
⊙ 일본으로 가는 덕혜옹주 (김선주)
패망한 왕조
궁궐 뜨락에 한 장 사진으로 남은
공주는 쓸쓸하다
화려한 궁정의 날들이여
추락하는 낙엽같이 단호하여
생은 더욱 쓸쓸하다
적국의 볼모로 가는
패망한 왕가의 어린 딸
궁정의 뜨락을 내려서서
적국으로 가는 옹주여
세상 모든 육체가 그대의 궁정같이
화려한 시절을 난다마는
죽음에 볼모잡혀
쓸쓸한 종말을 맞는도다
화장을 하고 금붙이를 하고
유쾌한 웃음으로 치장한 인생들
덕혜옹주의 쓸쓸한 낯을 보는도다
⊙ 감동 (김선주)
- 장한나
그가
내 마음을 만졌네
귓속말 같이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
나는 애잔하여져서
말없이
푸르렀네
호수처럼
의혹이 사라지고
씻은 몸처럼 맑아져
홀로 사랑스러워졌네
하늘처럼 높아졌네
그가 나를 만졌네
⊙ 저녁 이야기 (김선주)
아파트에 장이 섰다
얼음 위에 긴 다리를 축 늘어뜨린
죽은 산낙지처럼
팔리지 않는 여름 장은 부패한다
졸음에 겨운 여자의 실눈 사이로
나도 서서 부패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부패한다
저녁 바람은 부패한 냄새를 힘주어 낳는다
어둠이 무릎 위로 차오르고
자리를 들고 일어서야 하는 시간
생의 몰락을 감지한 사내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고구마 순 한 단에 천 원-
자궁을 막 빠져나온 어린애 울음같이 힘차다
부패하는 것들의 마지막 순간에는
코끝 톡 쏘는 향기가 있다
⊙ 사과, 사랑하기 때문에 익는다 (김선주)
우주의 작고 푸른 점 위에서
소망한다, 나는
바늘 끝같이 간절하여지는,
절망조차 가 닿지 못할
영원한 찰나
그곳에 사랑이 오리라
아찔하게 스쳐가는
번갯불 같은 풋사랑
지금은 늙고 쭈글쭈글해진 사과
단내가 다 빠져가는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별들을 보는 저녁
사과밭 근처에서 졸고 있는 아녀자여
푸른 행성이 빛나는 것은
쭈글거리는 사과의 추억 때문이다
당신의 정원에 사과가 익어가는 것도
애절하고 간절한 사랑,
생의 달콤한 열망 때문이다
사랑이 사과를 익게 한다
⊙ 겨울 탱자나무 (김선주)
노랑병아리처럼 옹송그리는 볕이 있어
경루, 탱자나무 울타리는 따스하다
상처받지 않도록,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숨을 멎고, 꿀떡 숨을 삼켜버리고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애비들의 심장은
가시를 삼킨 나무처럼 아프다
그래도
노랑병아리처럼 파고드는 볕이 있어
겨울 탱자나무는 평화로다
⊙ 쌀밥 (김선주)
살진 것들이 옹송그리며 몸을 붙인다
인력시장에 새벽을 맞는 인부들 같이
따뜻한 것들은 어깨를 붙이며 입김을 낸다
⊙ 흔들림 (김선주)
흔들리는 것은 뿌리가 있다
푸른 가을 하늘에 몸을 내어맡긴
강르 코스모스 한 아름
하늘거리는 저 관능의 몸짓
우주의 심연에 뿌리 내린
생의 찬란한 순간들이여
가끔,
삶이 흔들린다
영원에 뿌리 내린
이생의 연약함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다 연약하여
흔들리기 좋아한다
삶이여, 가끔
흔들려도 좋다
⊙ 반디 (김선주)
그런 것들도 있다
궁둥이에 불을 켜는 것들
깊고 고요한 어둠속에서
머리 아닌 궁둥이로
빛을 내는 것들이 있다
안드로메다 바로 옆 230만 광년 거리에 있는
은하계의 어떤 푸른 행성에는
그런 고등생물들이 살고 있었다
안지순. 흥부의 외출 외 6편 91
⊙ 흥부의 외출 (안지순)
그가 집을 나갔다
해모수가 29인치 화면에서
피 토하고 죽던 저녁
간간이 눈물 훔치더니
그날 저녁에도
무릎걸음으로 방을 닦다가
슬그머니
다용도실 배낭을 메고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한 계절처럼 긴 밤이 지나고
따스한 입김 토하며 아침이 오자
낡은 운동화 한 켤레 현관에 들어선다.
도시 변두리 어느 골목을 걸었을
큼지막한 신발 하나가
제 몸을 풀어헤치고
깊은 잠에 빠졌다.
드넓은 땅 날쌘 말을 타고
바람 같은 기상으로 달리고 있는지
간혹 가파른 숨을 내쉬면서
그가 자고 있다.
집으로 돌아올 생각도 없이
마냥 자고 있다.
⊙ 옳은 발 (안지순)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 위에서
분 초를 다투는 오른발
바람 좋은 날에는 노래 장단도 맞추고
길 위에 납작해진 고양이도 지나가는 발
때로 무심히 지나는 노파를
아슬아슬 비켜가며
보험증서를 떠올리는 발
세상에 태어나 옳은 일 한번 못해 봐도
신발 밑창이 다 닳도록
당당하게 무뎌질 줄도 알고
온종일 무거운 육신을 끌고 다니는 발
육신이 잠들었을 때
홀로 깨어 쥐가 나고
습관처럼 힘줄은 욱신거리지만
가장 늦게까지 살아있는 발
⊙ 밥 (안지순)
친구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쌀을 샀다
얼굴 환한 산떨기꽃
산을 넘는 소리
메아리 되어 밥이 끓는다
밥을 먹을 수 있다
밥을 먹을 수 있다
식탁에 앉은 나는
짐승처럼 간절해졌다
⊙ 개똥벌레 (안지순)
아카시아꽃이 폈냐
모내기를 해야지
어지럼증에 걸린 어머니
한숨으로 쏟아낸 별무리
빛을 찾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손
밥풀처럼 쏟아지는
저 만질 수 없는 것들
⊙ 나무의자 (안지순)
봄 햇살 아래
젖은 운동화 받치고 서서
기다림에 익숙해진 자세로
낡아가는 나무의자
삐걱대는 불편한 다리로
구석에서 뒹굴다가
주인집 아들 재치로
허락받은 남향집 베란다
평생 살아오면서 받은 햇살을
거친 솔로 긁혀졌을
운동화의 가슴을 열어
나누어 주고 있다.
날 저물도록 앉아
제몸에 물 자국 새기고 있다.
⊙ 사진 (안지순)
언제 걸렸는지도 모를 큰댁 마루에 오랜 사진 하나
스물세 살 앳된 청년이 큰집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엄마 손을 잡고 큰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나를 내려다보던 큰아버지 얼굴은
큰집 마루를 없애고 거실이 있는 집으로 고쳤을 때도
색 바랜 사진틀이었습니다.
큰어머니, 그 사진 아래서
사진과 닮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다시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도회지로 흩어진 자식들도 명절날은 돌아와
사진을 잘 닦아 상 앞에 놓고 절을 합니다.
사진을 거는 손들이 쭈글쭈글해질 때마다
사진 속 앳된 청년도 같이 늙어갑니다.
이번 설에는 식구들 모여서 앉았는데
큰어머니 사진틀 아래 누워만 계십니다.
인자는 느이 큰아버지한테로 갈라나부다.
며칠 새 작아진 큰 어머니
엉금엉금 문지방 넘어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을 지나 낡고 오랜 사진 하나 들고 나옵니다.
누런 사진틀에 앳된 처녀 얼굴
큰어머니, 스물세 살 청년 얼굴 뒤에 슬며시 놓아둡니다.
쪽진 머리 매만지며 누운 고운 숨소리가
저문 해를 잡고 넘어갑니다.
그 사진 아래서 우리는 밥을 먹고
상을 치우고 간간이 웃으며 잠이 듭니다.
⊙ 식객(食客) (안지순)
내 어릴 적 우리집에는
사립문이 없었다.
마당에 멍석 깔고
밥을 먹으면 엄마는
어쩌다 지나가는 장사치를 불러
누런 몸뻬 바지로 싹싹 문지른
숟가락을 내놓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탁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이유도 없이 객(客)이 싫었다.
현관문이 두 개나 있는 아파트에서
식구 수만큼 놓인
의자에 앉아 밥을 먹는다
분량이 정해진 전기밥솥에
남는 것이 무서워 담은 찬은
식탁 위에 똑딱거리는 시계 초처럼
가지런하다
습관처럼 닫힌 현관문을 확인하고
우리는 안도의 식사 기도를 올린다
아무도 내 식탁을 침범하지 않지만
내 일용할 양식은 늘 위태하다.
⊙ 좌도시 24집
상여 소리는 문의고개를 넘어가고
발행 2008년 10월 31일
지은이 김선주 외
발행처 좌도시동인회
주소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68 금산문화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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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쇄 종려나무 대전광역시 유성구 용계동 73-4, 102호 042)544-9333
좌도시동인회 2008
이 책은 금산문화원에서 일부 지원을 받아 제작하였습니다.
상여는 이때 불끈 일어서며 죽음의 속살을 파고들어 새 길을 낸다. 그것이 상여소리다.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는 삶의 연대가 상여소리다. 절망의 나락에서 희망의 산정을 향해 가는 것이 상여 소리다. 상여 소리는 생물학적 죽음 너머 피안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유한자(有限者)들만이 낼 수 있는, 지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다. 상여소리가 한 고개를 넘어갈 때 쯤이면 남은 자들의 절망에 다시 생기가 돋는다. 가시 찔린 손가락에 붉은 피가 돋듯....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