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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22) - 소설가 이명한
역사와 전통 넘나든 핍박받는 민중의 삶 묘사
의식 근저에 원초적 황톳빛 생명력 자리 잡아
전통정신 제시, 현대인의 도착적 가치관 질타
'광주 80년'겪으며 작품세계 점차 저항적 색채
2003. 09.24(수) 00:00
소설가 이명한(71)의 작품은 역사의식과 전통정신에 대한 가치관을 제시한다. 어둡고 답답한 일제시대가 있고, 해방공간에서의 희망과 좌절의 조수가 있고,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고통이 있는가 하면 잔혹한 군바리의 횡포가 있고, 로마군단의 총칼 아래 짓밟히고 있는 민초의 설움이 담겨있다.
역사의 그늘에서도 삶의 자리를 지키고자 한 이들의 이야기가 그의 대표적 소설집인 ‘황톳빛 추억‘에서 모티프 격으로 도드라져 있다. 그의 시선과 의식은 분명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사태에 향해 있으면서 거대한 역사적 서사 이면으로 사라져 버렸을 법한 이야기를 포착한다. 일제 강제징용의 역사,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이념적 격동의 역사, 서슬퍼런 군부통치의 역사, 그리고 광주민중항쟁. 이후로는 다음세대에 역사로 기록될 전교조 교사 해직 사태나 IMF 대량 해고사태 등 현실의 문제에 이어지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역사적 사건의 그림자에 가린 뼈아픈 민중의 삶이 면면이 초점 맞춰져 있다.
수많은 인명을 파괴한 한국전쟁이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을 입혔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쓰라린 통한인 것은 국가폭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대향학살 사건들과, 그 와중에 행불자가 된채 생사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비참한 운명이다. 그것을 역대 독재정권들은 금기의 영역으로 설정해 철저히 금압해 왔으나 그의 소설에는 그러한 정신적 상처를 앓으며 살아가는 서민생활의 애환이 형상화되어 있다. 이렇게 반세기 전의 사건들이 오늘에도 미학적 모티브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일들이 아직도 금기의 철조망처럼 막혀진채 묻혀있는 사실을 규명해야 하는 우리가 탐험해야 할 역사의 변경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준다.
그의 데뷔작 '월혼가'는 불교적 인연설을 바탕으로 정신 세계와 기계적인 것, 자연 세계의 섭리와 인위적 폭력의 대척적 관계를 통해서 바른 삶의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즉, '학'과 '총', '효녀무'와 '카메라'를 상징적으로 대비시키면서 노인의 운명적 삶을 이야기의 바탕에 깔고 있다. 특히, 노인의 딸 '선이'가 효녀무를 추는 모습을 묘사하는 대목들은 독자를 충분히 감동시키게 한다. 이와 같이 그의 초기 작품은 서정적 세계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 정신을 추구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의 장편 ‘달뜨면 가오리다’는 역사적 인물인 백호 임제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는 각종 문헌들의 고증을 통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격정과 울분, 사랑과 이별, 풍류와 시 속에서 살다간 그의 생애를 장편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우리 역사 속의 한 인물을 내세워 풍류도에 깃들어 있는 줏대 있는 선비 정신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역사적 안목과 한시문에 대한 박학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는 억압받는 서민들의 애환을 역사 문제와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령 '진혼제'에서 시장에서 생선장수를 하는 덕보의 망처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그리면서, 그 배경에는 못가진 자의 비참한 운명, 6․25 전쟁 때의 좌우익의 갈등, 동학 때의 민중적 수난까지를 깔고 있다. 그런가하면 '혈족'에서는 사회적 정의감이나 정치적 주견하나 없이 그저 정치판에 뛰어들고 보자는 주인공 '갑동'의 무모한 정치 지향성과 문중사람들의 권력 지향성을 동시에 비판함으로써 현대인들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별이 되어 흘렀다'는 재산에 눈이 어두워 인륜의 도리마저 저버리는 어른사회의 비정성을 꼬집고 있다. 물질 가치를 인륜 도덕보다 우위에 놓고 있는 기성 사회의 비정성이 한 어린이(나)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위패’에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매치기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꿋꿋이 그리고 올바르게 살려는 소년의 태도와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핏줄의식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힘있는 자들의 없는 자에 대한 횡포를 통해 없는 자들의 고통이나 불행을 따뜻한 시각으로 감싸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퍽 건강해 보인다.
그리고 낙엽으로 떠돌다가 율도를 아시나요 등의 작품은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 이 땅의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고 유랑하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 빨치산 토벌대에 무고하게 희생된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회한을 그린 진혼제와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서민들의 소담스런 이야기와 함께 한 서린 신명으로 풀어내고 있는 수작이다.
비교적 최근작인 중편 '눈 내리는 산'의 공간 배경은 중국의 연변이다. 주인공 '리 선생'이 만주족 '푸 선생(푸치광)'과 함께 장백산을 오르는 것이 주된 스토리이다. 이 작품에서는 남북 분단 문제, 중국이나 러시아에서의 소수 민족의 문제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그려 나가고 있다. '푸선생'을 통해 본 만주족의 대동 의식을 설명하는 다음의 대목에서 작가의 역사관과 민족관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은 나라를 잃고 민족의 특성마저 상실해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대륙을 지배해온 민족답게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의 동족 의식이 비록 패배주의라든가 퇴영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할지라도 달리 생각하면 보다 폭이 넓은 민족 의식이었다. 편협한 선민 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의 종교와 민족을 고집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은 도량이 넓고 슬기로웠다. 내가 삼지연에 대한 집념을 풀고 오늘 이렇게 백두산을 찾아온 것도 푸 선생의 이런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중편 '눈 내리는 산' 중에서)
이처럼 그의 소설은 주로 역사적 흐름 위에서 전통 정신의 가치 제시, 현대인의 도착적 가치관에 대한 질타, 핍박받는 서민들에 대한 아픔 등을 주제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비록 전통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지만 밑바닥에는 어느 것에나 사회의식이 깔려 있다. 아무리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작품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주장한다. 사람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문학 역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그러다가 광주의 80년을 겪으면서 그는 거리로 뛰쳐나갔고 작품세계도 점차 저항적 색채를 더해간다.
‘저격수’는 평소 군부 지도자들을 하늘처럼 받들고 있던 군대출신 총장이 광주항쟁을 당해 총을 들고 시민군에 가담했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는 이야기이며, ‘오방떡’은 몰락한 농민이 도시로 나와 거리에서 리어카를 놓고 빵장사를 시작하지만 관청의 단속으로 앞길이 막힌 가운데 우루과이라운드를 반대하고 양곡수매를 요구하러 올라온 고향사람들의 데모대열에 합류한다는 내용이다. ‘황홀한 귀향’은 군부독재 이래서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초등학교 동창들이 고향 땅에서 만나게 되는데, 법관이나 교수는 어용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농민운동을 하며 고향을 지켜온 사람만이 정신적인 자부심을 갖고 당당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의 작품에서의 역사는 실상이 삶의 억압기제이다. 역사의식을 갖는다 함은 역사라는 거대한 실체가 삶의 자리에서 발하는 이데올로기적 힘을 직시하고 구체적인 대항의식을 갖춘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그 의식은 삶의 정황을 환원하거나 여분의 것을 재단함으로써 추상화하는 태도에 비판적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다면적인 삶의 이야기에는 핍박 속에서도 지난하게 삶의 자리를 지키려 의지를 다지고 몸부림치는 민중의 면면이 형상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소설은, 영원한 열혈청년으로서 이 시대의 아픈 시공의 한복판을 두려움 없이 걸어 온 그의 힘이 어디로부터 연원했는가를 잘 말해 준다. 그의 의식의 근저에는 원초적 황톳빛 생명력이 두꺼운 지층처럼 자리해 있다. 그의 이야기들은 ‘에덴기행’의 호수같은 자궁이나 ‘작은 귀향’에서의 은희의 맨살이나 ‘기다리는 사람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아 돌아오게 하는 수구막이처럼 절망한 자들을 거듭나게 하는 희망사진관들이다.
소설문학동인회 결성후 본격 창작활동
1975년 월간문학에 '월혼가(月魂歌)'로 등단
소설가 이명한은 1932년 8월19일 전남 나주시 봉황면 유곡리에서 문학쳥년 이창신의 1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의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일본의 아사히신문 등을 읽기 시작했고, 일본잡지에 실린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는 책이 귀할때라 일본어로 된 요넨구라프(初等俱樂部), 쇼넨구라프(少年俱樂部) 같은 월간지, 또는어렵사리 동화를 구해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사이 어른들이 보는 킹구(KING)라는 잡지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 잡지는 순정소설로 가득차 있어서 그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기도 했다.
그는 그 잡지에 실려있는 중일전쟁과 관련된 시에다가 아무렇게나 곡을 붙여 음악시간에 노래를 불러 당시 일본인 여자 담임선생과 친구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여튼 그는 가사와 시를 구별하지도 못한 초등생이었지만 글을 좋아했고, 엉뚱한 작문을 써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일제강압기에서 아버지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고 사회성 짙은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매양 가택수색을 받는 상황에서 성장했고, 해방공간의 사회적 혼란은 안심하고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다가 그는 설상가상으로 15년동안 폐결핵을 앓으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 초등학교 6학년때 해방과 더불어 설립된 나주민립중학교를 거쳐 몇 개의 학교를 전전하다가 함평 수랑개라는 포구로 가서 요양생활을 하던 그는 1949년 서울로 올라가 갓 설립된 서라벌예대에 응시해 꽁트 한 편을 써내고 합격했다. 이때 ‘괴물들의 질주’를 제목의 이 글은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온 청년이 밥을 맞이해 교차하는 헤드라이트 빛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가운데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는 내용이었다.
폐결핵으로 군대를 나온 후 고향에서 광주를 오내리며 요양생활을 하던 그는 1956년 어느 여름날 광주시 황금동에 있는 다방에서 뜻하지 않게 오유권을 만나게 된다.
만나면 으레 막걸리 타작이었지만 밤잠을 설치며 노력하는 오유권의 근면성은 문학을 꿈꾸고 있던 이명한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분발하면서 그해 겨울 ‘실업 피해자’란 단편을 써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만다. 제목부터가 어수룩하고 평법한 소설이었다.
그는 그 후로 소설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신병의 치료를 위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되고 그 세계에 깊숙이 빠져 들었다. 그 동안에 이해동, 송규호, 이영권 등과 ‘靑塔’이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시를 쓰기도 하고, 몇 편의 소설을 광주에서 나오는 문학단체의 회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창작활동은 1973년 당시 동신중학교에 근무하던 소설가 한승원을 중심으로 ‘소설문학동인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작가로서 문단에 나온 것은 1975년의 일이다. 동인지에 실었던 그의 단편소설 '월혼가(月魂歌)'가 그 해 4월 월간문학 제15회 신인상에 당선된 것이다. 심사윈원인 작가 정한숙과 곽학송은 심사평에서 그의 소설을 "차분한 문장과 정확한 표현, 능히 기성의 수준에 이른 작품이다. 어느 산촌의 자그마한 상황을 이처럼 아름답게 꾸민 솜씨는 범상하지 않다."고 전제하고 "오랜 문학 수업의 결정(結晶)"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후에 늦깎이 신인으로 등단한 이명한은 이미 1970년대 초 이 지방에서 한승원, 주동후, 주길순, 이계홍, 김신운, 김만옥 등과 함께 ‘소설문학동인회’를 결성해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이후에 '위패'(월간문학, 1975.5), '동숙자'(신동아, 1976.4), '왕조와 굴레'(현대문학, 1976.6), '카타르시스의 밤'(월간문학, 1977.3), '극락강에서 얻은 지문'(신동아, 1978.8), '잉태설'(1979.5) 등 십 수편의 작품을 중앙 문예지에 연이어 발표하여 정력적인 창작 의욕을 과시했다. 그리고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 중 12편을 골라 묶은 첫 소설집 "효녀무"(시인사, 1979)를 냈다.
1980년 이후에도 그는 단편 '청산에 살고 보니'(현대문학, 1980.10), '진혼제'(월간문학, 1982.1), '벼랑을 날아온 새'(한국문학, 1983.1), '폐광촌'(현대문학, 1991.11), '낙엽으로 흐르다가'(한국소설, 1997.12) 등 20여 편을 발표했고, 중편 '눈 내리는 산'(현대문학, 1996.6)을 발표했다. 그리고 장편소설 "달뜨면 가오리다"(상,하권, 열린세상, 1994)를 상재했다.
당시의 소설문학동인회 출발은 그때까지 시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전남문단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등단한 작가는 한승원 한사람 뿐이었던 광주에 많은 소설가가 잇따라 탄생하는 모태가 된 것이다. 소설가 김신운 이계홍 등도 동인지에 실린 작품을 다듬어 투고해 문단등단의 영예를 안았고, 이어서 많은 작가가 합류하게 됐다. 소설문학동인회는 그후 문순태, 평론을 쓰고 있던 송기숙, 이삼교 등이 합류해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장편 ‘山火’가 전남일보 창간 1주년 기념 1천만원 현상공모에 당선되기도 했고, 조선중기의 주체성 있는 천재시인 白湖 林悌의 일생을 다룬 장편 ‘달뜨면 가오리다’ 상하권을 발간했으며, 중국 역사를 다룬 ‘춘추전국시대’를 광주매일에 연재하기도 했다.
작품집으로 79년 ‘효녀무’를 신인사에서 출간했으며, 번역서로는 일제에게 징용된 노무자의 수기 ‘아버지가 건넌 바다’가 있다. 2001년 8월에 나온 그의 단편집 ‘황톳빛 추억’은 1980년대 이후 각 지면에 발표된 중단편 10여편이 수록돼 있고, 평론가 장일구씨가 평설을 썼다.
그는 송기숙 문병란과 더불어 그동안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온 자유실천문인협회가 주축이 돼 1987년 결성한 광주.전남 민족문학협의회를 결성, 공동의장으로 활동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 전남문인협회 회장, 광주.전남 소설문학회장, 그리고 1998년엔 진보적 예술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광주지회장으로 참다운 예술과 민주화, 인권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86년에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젊은 시절 폐질환으로 15년간을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다, 이를 극복하고 뒤늦게 1967년 조선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1973년부터 약 10년간 조선대학 부속고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이후 한약방을 경영하다 현재는 은퇴해 동방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글 = 이재창 문화부장 겸 편집부국장
사진 = 김기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