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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정기 산행은 수십개 계곡들이 사방으로 벋어내려 골짜기마다 사찰터요,
석탑이요, 돌부처가 있어 노천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신라 천년왕도의 웅혼한 광채를
품고 있는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 겨레의 영산인 경주 남산을 산행하여 가슴엔 신라의
기상과 정신을 담고 머리엔 유구한 세월을 지켜온 문화와 역사를 담고 마음엔 따스한
우리 산또래 산우들의 마음을 담으려 경주 남산으로 가지 않으렵니까?
※ 남산 산행시 기축년 한해를 시작하면서 저희 산또래 산악회 에서는
산악회의 안녕과 회원님들의 무사산행을 기원하고
가정에도 평화와 만복을 기원하는 시산제를
2009년 2월 19일에 경주 남산 금오봉에서
거행 하기로 하였습니다.
1. 산 행 지 ▶ 경주 남산 금오봉 고위봉
2. 산행코스 ▶삼릉~냉골~상선암~상사바위~금오봉(468m)~이영재~칠불암
백운재~ 고위봉(494m)~전망바위~천우사~용장골 주차장
(중식 휴식시간 포함 5시간 30예정)
3. 산 행 일시 ▶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9시
4. 출발장소 ▶ 동래지하철 4번출구
5. 회비 ▶ 25,000원
6. 연락처 ▶ 대장 011-881-9948 총무010-2025-9561
경주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는 468m 금오산(金鰲山)과 494m고위산(高位山)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40여 계곡이 있고 이곳에는 수많은 불적이 산재되어 있으며 여러 전설과 설화들이 깃들어 있다.
신라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蘿井), 신라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김시습이 거처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하는 용장사터(茸長寺址)등 많은 신라시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어 많은 사찰과 탑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곳은 122여개소의 절터, 57여개소의 석불, 64여기의 석탑이 산재하고 있는 야외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남산에서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까닭에 남산에 얽힌 전설이 많은 편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남산 기슭의 나정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헌강왕에게 신라의 멸망을 경고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여 결국은 멸망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경주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경주 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등이 있는데, 다양한 문화재가 곳곳에 있어 신라 천년의 역사가 펼쳐진 듯하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金鰲山)과 고위산(高位山)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40여 계곡이 있고 이곳에는 수많은 불적이 산재되어 있으며 여러 전설과 설화들이 깃들어 있다.
신라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蘿井), 신라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김시습이 거처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하는 용장사터(茸長寺址)등 많은 신라시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어 많은 사찰과 탑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곳은 122여개소의 절터, 57여개소의 석불, 64여기의 석탑이 산재하고 있는 야외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남산에서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까닭에 남산에 얽힌 전설이 많은 편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남산 기슭의 나정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헌강왕에게 신라의 멸망을 경고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여 결국은 멸망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경주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경주 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등이 있는데, 다양한 문화재가 곳곳에 있어 신라 천년의 역사가 펼쳐진 듯하다.
◈ 東南山
• 반월성(半月城) 앞 골짜기로 대궐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 있어 왕정골이라고 불린다. 인용사(仁容寺)터·천관사(天管寺)터 등 3군데의 절터와 석조여래입상 1체, 석탑 5개, 불상대좌 2개, 정자터 3군데가 발견되었다.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신라 사람들이 지었다는 인용사 터에는 2기의 탑 잔재와 팔방대좌(八方臺座)의 지대석(址臺石)이 남아 있다.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던 천관사 터에는 탑재(塔材)·주춧돌이 널려 있다. 높이 2m, 나비 1m인 여래입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 밖에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고려 왕건(王建)에게 글을 올린 곳인 상서장(上書莊)이 있다.
• 절골[寺谷(사곡)]
상서장 동쪽 양지(陽地)마을의 뒤쪽 골짜기로, 절터의 흔적으로는 3층석탑의 탑재가 남아 있다.
• 부처골[佛谷(불곡)]
남산 동쪽 기슭 인왕리에 있는 계곡으로 3군데의 절터, 석불 1체, 마애불 1체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198호로 지정된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은 높이 3.2m, 나비 4.5m의 바위에 1m 깊이로 판 감실(龕室)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전해진다.
• 탑골[塔谷(탑곡)]
부처골과 미륵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절터 2군데와 석불 1체, 마애불 22체, 석탑 4기,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탑골 입구에는 거대한 바위의 4면에 부처·보살·신장상(神將像)·동물·탑·비천(飛天)·수목 등을 새긴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이 있다.
• 미륵골[彌勒谷(미륵곡)]
배반동(排盤洞) 경주임업시험장 뒤쪽 골짜기로 보리사(菩提寺)와 석불 1체, 마애불 1체, 석탑 2기가 있다. 보리사 경내에 보물 제136호인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이 있으며 절 입구에서 동쪽 300m 되는 곳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이는 높이 0.9m의 좌불로 전체높이 1.5m의 광배형 감실에 안치되어 있다.
• 천암골[千巖谷(천암곡)]
화랑교육원의 북서쪽에 있는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사적 제187호 왕릉은 4각으로 다듬은 돌로 둘레돌[護石(호석)]을 쌓았으나 덮개돌[上石(상석)]·난간 등이 전대의 왕릉에 비하여 빈약하다.
• 철와골[鐵瓦谷(철와곡)]
통일전(統一殿)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다른 곳에 비하여 골이 깊고 넓다. 2군데의 절터와 석탑 2기, 정강왕릉(定康王陵) 등이 있으며 1959년 이곳에서 발견된 불두(佛頭)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불두의 높이가 1.53m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불상 전체높이는 10m가 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 중 <거문고갑을 쏘라>는 전설을 가진 사적 제138호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 국사골[國師谷(국사곡)]
탑마을과 서출지가 있는 안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4군데의 절터와 석탑 4기, 석등 2기, 대좌 2기 등이 발견되었다. 절터에서는 축대·기단면석·갑석과 탑의 뚜껑돌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상사바위[想思巖(상사암)]·고갈바위·큰지바위·부석(浮石;버선바위) 등의 기암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오산골[鰲山谷(어산곡)]
남산동 남쪽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개선사(開善寺)터와 마애불 1체가 발견되었으며 골짜기 아래에는 몇 기의 고인돌이 있다. 개선사터에 있는 높이 1.7m, 나비 0.56m의 약사여래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 대지암골[大地巖谷(대지암곡)]
남산동 탑마을을 지나는 골짜기로 탑마을에서는 4군데의 절터와 보물 제124호인 남산리삼층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양피사(讓避寺)의 것이라는 설과, 피리사(避里寺;뒤에 食佛寺)의 것이라는 설이 전해온다.
• 쑥두듬골[蓬丘谷(봉구곡)]
남산동 남쪽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골짜기로 절터와 석탑 2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동탑(東塔)은 불국사역 앞 로터리에 옮겨져 있다.
• 승소골[僧燒谷(승요곡)]
남산동 계곡 중 마지막 지류가 있는 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높이 3.6m의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 천동골[千洞谷(천동곡)]
승소골과 봉화골 사이의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등 1기, 돌기둥[石柱(석주)] 2개가 발견되었다. 높이 2m, 나비 0.6m의 돌기둥에는 100개 가량의 감실을 파고 불상을 안치했던 흔적이 있다.
• 봉화골[烽火谷(봉화곡)]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 마애불 8체,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대 1기, 경석(經石) 1개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200호인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은 큰 바위에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칠불암 뒤에 높이 솟은 바위에는 보물 제199호인 높이 1.9m, 나비 1.3m의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 西南山
• 식혜골[識慧谷(식혜곡)]
동남산의 왕정골과 가장 가까운 골짜기로 사제사(四祭寺)를 비롯한 2군데의 절터, 남산성과 포비암(布飛巖) 등이 있다. 사제사터에서 발견된 팔부신중을 새긴 기단면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적 제22호인 남산성은 진덕여왕 때 쌓은 것을 문무왕 때 보수한 것으로 둘레가 4㎞에 이르며, 포비암은 식혜골 정상에 있던 바위로 베짜던 곳이라 하여 베나리바위라고도 한다.
• 장창골[長倉谷(장창곡)]
식혜골에서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7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4기, 석등 2기, 당간지주 1개 등이 발견되었다. 그 중 삼화령석조미륵삼존불상(三花嶺石造彌勒三尊佛像)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고 천은사(天恩寺)터에는 초석, 탑의 뚜껑돌 등이 남아 있다. 또 식량 저장소였던 장창과 사적 제173호인 일성왕릉(逸聖王陵)이 있다. 남간사(南澗寺)터 부근에는 신라 초기 6촌(村)의 하나인 양산대(楊山臺)가 있으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관련된 사적 제245호 나정(羅井)도 이 골짜기에 있다.
• 포석골[鮑石谷(포석곡)]
탑정동(塔井洞) 포석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원래 부흥골[富興谷(부흥곡)]이었으나 포석정의 이름을 빌어 포석골이 되었다. 10군데의 절터와 석불 2체, 마애불 1체, 석탑 8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연꽃 위에 앉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는 높이 1m의 마애여래상 외에도 사리탑·남근석(男根石)·상사바위가 있다. 대표적인 절터로는 창림사지가 있으며 목 없는 비로자나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 유느리골[潤乙谷(윤을곡)]
포석골의 상류로 해목령(蟹目嶺) 남쪽에서 남산성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다. 2군데의 절터와 마애불 3체,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0.8m의 약사여래삼존불은 ㄱ자형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 기암골[碁巖谷(기암곡)]
포석골의 한 갈래로 배실이라고도 한다. 3군데의 절터와 석불 1체, 석탑 4기, 석등 1기가 발견 되었다. 머리 없는 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산봉우리의 바둑바위 부근에 금송정(琴松亭)터가 있다.
• 선방골[禪房谷(선방곡)]
포석정의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보물 제63호인 배리석불입상은 배동삼체석불이라고도 하며 조각솜씨가 석굴암과 견줄 만하다. 주위에는 삼불사(三佛寺)·망월사(望月寺)가 있다.
• 삼릉골[三陵谷(삼릉곡)]
배동(排洞) 배리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냉골[冷谷(냉곡)]이라고도 한다. 8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으며, 사적 제219호인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신덕왕릉(神德王陵)·경명왕릉(景明王陵) 외에 경애왕릉(景哀王陵) 등 4개의 능이 있다. 그 밖에도 목 없는 석불좌상, 삼릉계선각불상군으로 불리는 6존불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호인 마애관세음보살상, 제158호인 마애선각여래좌상, 제159호인 마애석가여래좌상, 보물 제666호로 지정된 경주삼릉계석불좌상 등, 석불 3체와 마애불 11체가 있다.
• 삿갓골[笠谷(입곡)]
삼릉골의 지류로 경애왕릉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3군데의 절터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경주남산입곡석불두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상반신만 남아 있으나,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 약수골[藥水谷(약수곡)]
배동 뒷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산호골[珊瑚谷(산호곡)]이라고도 한다. 6군데의 절터와 여래좌상 1체, 마애여래대불 1체, 석탑 1기가 발견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부분이 손실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마애불은 높이 10m로, 남산의 마애불 중 가장 크다. 박혁거세 6세손인 지마왕(祗摩王)의 능으로, 사적 제221호인 지마왕릉도 있다.
• 비파골[琵琶谷(비파곡)]
배동 앞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석가사(釋迦寺)·불무사(佛無寺) 등 4군데의 절터와 4기의 석탑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절의 창건연대는 692년으로 전해진다.
• 용장골[茸長谷(용장곡)]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의 계곡으로, 용장사를 비롯한 11군데의 절터와 석불 5체, 마애불 1체, 석탑 6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은 각각 보물 제186호와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두와 약사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보물 제913호로 지정된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은 높이 1.62m, 나비 1.1m로, 삼층석탑 아래의 높이 10m 암벽에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용장골에서는 대좌 1기와, 비를 세웠던 귀부(龜趺) 1기 등이 발견 되었다. 용장사는 김시습(金時習)이 기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곳이다.
• 천룡골[天龍谷(천룡곡)]
남산 최남단에 있는 골짜기로, 천룡사터를 비롯한 3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 외에도 주춧돌·귀부·법당터·석조(石槽)·부도·대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천룡사는 원래 수리사(水利寺)였으나,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중건하면서 천룡사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폐사(廢寺)되었다
남산 개념도
산행지 사진
삼릉
용장사지
선각 육존불
상선암 마애 대좌불
용장사지 삼층석탑
냉골 석가 여래상
냉골 석가여래상
칠불암 마애 석불
아드린느을 위한 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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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1등이다!,,,,눈!의사에게 적극 로비중임!
빠른 쾌유를 빕니다.....
눈 치료땜에 걱정이 많겠네!! 아무쪼록 조심하게나 ~~~
밑으로만 안 보모 치유가 빠르답니다...
대장님 수고 하셨습니다
와 !!! 유서깊은곳에서 가족안위와 무사산행을 기원한다는데 ??? 우짜노 !!!!!
칭구야! 손바닥에 침을! 탁때려 티는쪽으루,,,돌아오지않을 순간!,,,그냥 마음편한쪽으로 행하면그게행복이지?,,,,ㅋㅋㅋ
전 아무 말씀 안 드릴랍니다~훗날 애물단지 안되게 잘 하이소 ㅎㅎ
내일 우천 관계로 부득히 경주 남산에서 거행하는 정기 산행겸 시산제를 다음주로 순연시키기로 하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