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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勤記-초읽기에 몰린 졸고임을 변소함(대구지방변호사회지 형평과정의 제17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강정한변호사
글쓰기가 영화 만들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말했더니 영화감독인 친구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내 얘기는 글쓰기란 한 문장 한 문장을 평면적으로 이끌어 내는 동안에 그 문장 사이로 끼어들려고 하는 무수히 많은 생각과 사건들을 과감히 물리치고 기어이 한 문장을 끝맺고 나서야만 다음 문장에 돌입할 수 있으나 영화는 그야말로 공감각적 요소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그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바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더군다나 식견있는 분들이 읽고 여지없는 비판의 글 내지는 눈초리를 보낼 수 있는 이 글의 게재처인 “형평과 정의”에 이와 같이 잡문이라도 쓰려고 하는 이 순간에도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들의 양은 적지 않으나 정작 무엇을 써야 할지는 며칠을 생각해도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납기에 쫓기던 내가 생각해낸 게 바로 “출근기”이다.
본 출근기의 시간적 한계는 기상에서부터 사무실에 들어가서 직원들과 인사를 하는 때까지로 한다. 나는 대략 7시쯤 일어난다. 일어나면 문밖에 있는 동아일보를 가지러 나가야 하는데 이때마다 작년 추석 무렵 일본 히로시마변호사회와의 친선축구시합을 위한 연습게임 도중 ‘혼자 헛발질해서 다친’ 무릎이 아직까지 아프다, 약간. 어쨌든 신문을 집어오면서 앞집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헝클어진 머리의 부은 얼굴을 마주치기가 미안해서 그렇다.
딸 민성이는 구립 어린이집을 다니는데 지금 깨울 필요는 없다. 일찍 깨워봤자 내 신문을 빼앗아 갈 뿐이다. 난 항상 신문을 대충 대충 다 읽은 다음에야 민성이를 깨운다. 나는 항상 잘 생긴 왕자가 잠든 예쁜 공주를 깨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민성이 뺨에 뽀뽀를 하지만 민성이의 대응은 대충 1)발길질(형법상 ‘행위’로 보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2)엄마는?, 3)아빠 뽀뽀 좀 하지마, 그냥 깨우면 되는데 왜 자꾸 뽀뽀해?, 4)아빠, 3분만 더 자면 안될까? 정도이다. 4)의 경우에 시간이 길어지면 민성이는 엄마로부터 가혹한 처분을 받게 된다. 한 3, 4초 만에 옷이 모두 벗겨지고 목욕탕에 일시 구금된 후 세탁?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잠든 민성이를 내가 어제 깨우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데리고 노느라고 민성이를 일찍 재우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플 때도 있다.
민성이와 한 상에서 아침을 먹는다. 나는 YTN이라도 봤으면 하는데 “민성이 교육을 위해서 양보하라는 처의 외압에 굴복하여” 시시한 애들 프로그램을 본다. 민성이는 8시 45분이 되면 민성이는 출근을 한다. 아파트 입구에 어린이집 차가 오는데 엄마가 항상 차 오는 데까지 민성이 손을 잡고 나가서 민성이를 차에 태워 준다. 민성이가 아파서 병원을 들렀다가 차를 민성이 어린이집 바로 앞에 세운 다음 민성이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출근한 적이 있는데 내내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게 무언지 써 보려고 했으나 몇 번씩이나 글이 완성되지 않는 걸 보니 그다지 절실하지는 않은 것인가 보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 후로는 민성이를 태워 주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민성이와 함께 집을 나서는 경우도 한 달에 한두 번 있을 뿐이다. 기상 후 출근을 하기 전의 짧은 시간이 우리 부부사이의 대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꼭 할 말이 있으면 민성이를 태워 주고 온 처와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한다. 대체로 어른들 이야기이다.
최근에 날이 좀 쌀쌀하지만 난 시동을 미리 걸어 두지 않는다. 요사이 공회전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분위기 아닌가. “나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소설가 이외수는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이다”라고 한다. 시동 걸어 놓아 엔진 열 받게 한 다음에 차에 타서 히터를 틀면 바로 따뜻하게 출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회전시키는 거 정말 “나 뿐” 생각이지 않은가? 공회전 대신 택한 것이 코트를 입고 운전하는 것이다.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얼마간 가다가 신호에 걸리면 코트를 벗을 시간도 있다.
아파트는 대구월드컵경기장 인근이다. 차를 위한 출구는 딱 한 곳 밖에 없는데 출구 좌측에 월드컵경기장이 보인다. 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가를 기억할 때 수 십년이 지난 후에는 아마 월드컵 이야기가 빠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왼쪽에 보이는 경기장이 아니라 부산의 경기장이었지만 나는 자랑스럽게도 “한국의 첫 승”을 직접 목도하였다.
2002. 6. 4.은 간간히 맡는 국선변호사건의 공판기일이었는데 하필 공범이 있는 사건이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찍 출석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순위는 2위. 법무법인 소속의 상변호인이 일찍 법정에 나오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내 차례가 왔을 때(그 사이 기일만 변경하는 몇 건이 진행되었다)에 상변호인이 도착하였고 일부 부인 내지 부인으로 일관하던 피고인들도 “공소사실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로 힘든 사건을 30분 정도로 마무리한 후에야 “한 솥 밥 먹는” 조정변호사가 직접 차를 몰고 부산으로 출발하였는데 그 시간이 무려 오후 3시 40분. 넉넉히 도착하여 붉은 악마의 응원을 따라 하겠다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표가 없었다. 표는 창원에 있는 연수원동기 법조인이 무상증여하겠다는 것이었을 뿐 본 적도 없었다. 시간에 쫒기던 나는 표를 준 것만도 고마운 동기에게 택배로 보내달라고까지 하는 염치없는 부탁을 했고 동기는 택배를 선불로 보내주었다. 고마운 친구다. 우린 마산 톨게이트에서 표를 받아 다시 부산으로 향하여 갔다. 공수부대 출신의 조정 변호사의 박진감 넘치는 운전(사실 부산 근처에서는 포복하는 정도의 속도였지만)으로 늦지 않게 도착하였고 20-30분간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저녁은 못 먹었지만 맥주 한잔으로 그만 되었더라.
너무 떨렸다. 한국의 첫 승이 오늘 과연 이루어 질 것인가? 초반에 우리 팀은 너무 몰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응원에 기가 질린 폴란드선수들의 잦은 실수가 이어지고 우리 선수들이 홍명보의 중거리 슛 이후에 자신감을 회복하여 활기찬 경기운영을 한 끝에 한국은 자랑스런 승리를 차지하였다. 소리 지르니깐 목이 금방 아파왔다. 몸이 작년 다르고 올 해가 다르다. 한 해 두 해가 다르다. 부산월드컵경기장근처의 주차장에서 톨게이트까지 가는데 한 시간도 더 걸렸던 것 같다. 거리로 뛰어나온 부산 시민들 때문이었다. 김변호사와 나는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캔 맥주라도 한 잔씩 마셨는데 운전하는 조정 선배는 빵하고 물만 먹었다. 이게 바로 기사도, 기사의 길이 아닌가? 대구에 오니 자정이 지났다. 우리 세 변호사는 ‘우리가 함께 있어 좋은 일이 있었다’며 서로 축하하고 바로 헤어졌다. 그러나 잠이 잘 오지는 않았다. 다음 날도 일상은 계속되었고 오늘도 그렇다.
하여튼 왼쪽 경기장 쪽에서는 가끔씩 고속 질주하는 차들이 있으므로 왼쪽을 주의하면서 우회전을 해야 한다. 이 때 왼쪽 깜박이를 켜야 하는지 오른쪽 깜박이를 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뒷차를 위해서는 오른쪽 깜박이를 켜는 게 맞겠고, 왼쪽 차를 위해서는 왼쪽 깜박이를 켜는 게 맞겠고... 사무실에 있는 고등학교 1년 후배인 임사무장은 왼쪽 깜박이를 켜는 게 맞다고 한 것 같다.그러나, 사무장은 “장롱면허” 소지자다. 음,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하여튼 믿기 어렵다. 비상 깜박이를 켜는 게 어떠냐는 여자주임의 얘기는 그럴싸하기는 한데 자기도 자신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법규에 따르면 오른쪽 깜박이가 맞는 거 아닌가? 어떻든 간에 아파트를 빠져 나온 차는 왕복 10차선의 대로에 접어들기 위하여 좌회전이라는 대회전을 치러야 한다. 좌회전 직전의 차로는 편도 2차로이다. 그 2차로는 좌, 우회전이 가능한 차로이다. 법적으로는 좌회전 하려는 차가 여기서 기다려도 된다는 것이다. 근데 여기 서 있으면 우회전하려는 차들로부터 빵빵거림과 궁지렁거림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나는 다시는 이 곳에 서지 않는다. 좀 꼬리가 길어도 1차로에서 기다린다.
좌회전을 하고 나면 신호가 연동으로 죽 연결된다. 다만,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의미에서인지 꼭 5군지사(제5군수지원사령부) 앞에서 정차를 하게 된다. 나는 방위 시절에 이곳에 몇 번 와 보았는데 실제로 이곳은 군인들 먹고 입는 것을 관리하는 곳이다. 더 이상 말하면 군사기밀 누설된다. 여길 지날 때 마다군 시절 잊지 말고 열심히 살자는 생각이 든다. 매일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던 그 시절이 가장 부지런했던 것 같다. 신호를 받고 쭉 한번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금방 다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간혹 시속 70킬로 이상 달리는 차를 찍는 이동식 카메라가 있다.
언덕을 지나가면 오른쪽으로 법무부 시설이 하나 보인다. 바로 대구구치소다. 출근할 때 이곳을 들르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아침부터 변호사들이 북적대는 모습이 활기있어 보인다. 난 주로 1건 1명이다. 구치소에선 나같은 변호인을 좋아한다. 나는 아직까지는 국선변호 사건이 많다. 국선변호라고 하여도 나는 잘 해 주려고 노력한다. 잘 해 주고 싶지 않은 친구들도 있고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친구들도 있긴 하다. 소년범의 경우에는 마치 내가 검사가 된 듯이 혼을 내기도 한다. 얼차례를 주는 식으로 어린 피고인들을 혼 내고 반성문을 진심으로 써서 내도록 하여서 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애들은 대체로 잘 들 ‘나가는’ 편이었다. 그들이 집행유예기간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최근에 장애인에게 지급하여야 할 돈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기소된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일이 있는데 금요일에 국선변호인 선정, 토요일에 기록 복사, 월요일 접견, 화요일 재판으로 이어진 숨가뿐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변론을 하였건만 돌아 온 것은 “사선변호인” 선임해야겠으니 공소장을 복사해 달라는 전화뿐이었다. 당사자가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고 그 의미가 무언가를 공판에서 밝혀 주었고 따로 변론요지서까지 제출하여 주겠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아 온 것은 “니는 안 되겠다. 돈 주고 다른 변호사 사야 되겠다”였다. 정말 안타깝다. 그 날 난 공연히 술을 먹었다. 같이 마신 치과를 운영하는 중학교 친구는 공연히 내 투정만 듣고 술값까지 자기가 냈다. 고맙고 미안하다. ‘변론요지서 안써도 되니까 잘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 버리자’고 다짐했는데도 자꾸 생각난다. 아직 구치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직원에게 추후 보고는 하지 말라고 했다. 내 건강을 위해서.
구치소를 지나면 남부정류장이 나온다. 최근 변호사회지에서 어떤 증인이 처음에는 범어사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남부정류장 방향”으로 갔다고 했다는 이유로(동일한 방향임은 동향사람들에게만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재판장에게 매우 혼이 나는 증인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안다. 아직 출판은 안 되었나? 하여튼 회지 편집을 위한 회의 때 그 부분을 봤다. 남부정류장은 경북 남쪽 지방으로 가는 버스들이 있는 곳인데 예전같지 않고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다. 사실 학창시절만 해도 여기까지가 대구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난 지금 어릴 적 기준으로는 새까만 시골에 사는 형편이 된다. 처는 최근에 경산으로 이사가자는 내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는데 이유가 바로 ‘시골’이어서라고 하니 모든 게 마음 먹기 달린 것 아닌가 한다.
남부정류장에서 직진을 하여 사무실로 바로 갈까, 오른쪽으로 가서 동부정류장쪽의 정형외과에 들러 물리치료를 받고 갈까 고민하다가 사무실로 가기로 한다. 물리치료를 받으려면 오전 내내 기다리거나 누워있어야 한다. 지금은 걸을 만 하니 나중에 치료하기로 한다. 수술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사실 약간 겁이 난다. 수성구청과 수성경찰서를 지나면 범어사거리가 나오고 우회전을 하고 나면 이제 법원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택시를 타고 다닐 때에는 “법원 가 주세요”라고 하는게 보통인데 아무말이 없이 내리게 되는 경우에도 처음엔 내가 판사인줄 알다가 법원에 도달하기 전에 한국통신 앞 쯤에서 내려달라고 하면 “판사 아니시군요”라면서 잔돈을 꼬박꼬박 챙겨주려고 한다. 법원, 검찰에서 일하는 동기들과 학교후배들이 얼마나 힘 든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본다. 변호사 일도 무척 힘들다. 다만, 좀 더 노력하면 빚은 가릴 수 있는 게 변호사란 직업인데 가난한 사람은 법원, 검찰에서 월급을 두배 이상 올려 주지 않는 한 다른 여건이 다 되더라도 갈 수 없는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근데도 왜 내가 밥 먹자면 안 먹는지 모르겠다. 밥은 먹고 사는 모양이다.
연수원시절 6반 교수님인 김지형교수님이 우리반(7반)에 들어와서 법조윤리 강의를 하신 적이 있다. 부자가 현직, 재야의 각 법조인이어서 한 동안 부자상봉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농담만은 아니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한 외침, “이런 거 저런 거 때문에 친구하고 술 한잔 못 한다면 전 이 직업 관두겠습니다.” 분위기는 좀 썰렁했다. 근데 대체로 긍정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중에는 아무도 친소관계로 사건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나 인사를 드리면 반갑게 인사 받아 주시는 부장님이 대부분이다. 이게 사는 거 아닌가.
우리 사무실 입구에 요사이 공사가 한창이다. 어떤 때에는 아예 우리 건물로 진입할 수 없도록 하기도 한다. 할 수 없이 뒤로 빼서 법원 주차장 옆 우회도로로 해서 어렵게 출근한 적도 있다. 변호사들이 줄줄이 후진해서 빙 돌아 출근하는 걸 보니 법으로 다 안하고 사는 것, 법으로 다 안 되는 것이 세상사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 건물 주차장 아저씨는 얼굴 익히기가 무섭게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크게 인사하고 다니려고 노력한다. ‘인사는 들리게 하자’는 구호가 얼마 전 동기 만나러 간 창원지방검찰청복도에 있던데 대구지검에도 그런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 본지 오래되어서... 하여튼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인사하고 엘이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5층이 나오고 나는 문을 연다.
우리 사무실 문에는 방울이 달려있다. 방물 달면 복 들어 온다고 여직원이 사 온 것을 내가 직접 달았다. 딸랑딸랑, 직원들은 모두 출근해 있고 활기 차 보인다. 또 하루가 시작된다. “신주임, 내 커피 한잔 도”. 2002. 10. .
첫댓글 참 인간적인 분 같습니다.
네! 정말 인간적인분입니다. 재미있는분인것같기도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