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김씨
용궁김씨 보기 드문 희성이다. 보기 힘든 희성이라 용궁 김 씨를 만나면 누구나 친척 같은 느낌일 것 같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궁김씨(龍宮金氏)는 남한에 총 3,327가구, 14,8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용궁김씨의 시조는 아시다시피 김존중 이라는 분으로, 고려 18대 임금인 의종의 태자시절의 스승이었다. 사후 의종께서 용궁군(龍宮君)에 봉하시어 그 후손들이 본관을 용궁으로 하게 된 것이다. 시조 김존중(金存中. 호는 지암. 시호는 정열)은 고려 인종 때 문장이 널리 알려져서 태자시학이 되고 문과에 급제한 후 첨사부록사가 되었다. 의종이 즉위한 뒤 태자소보에 이르러 용궁군에 봉해졌고 죽은 후에 공신으로 이부상서 수문전태학사 정당문학에 추증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용궁으로 하였다.
김씨의 시원(始原)은 김알지(金閼智)라는 분이다. 신라 4대 임금인 탈해이사금 때 금성(지금의 경주)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瓠公)을 시켜 가보게 하였는데, 금빛의 작음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김알지라는 분이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金函)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게 된 것이다. 이분은 모든 신라계 김씨들의 시조이다. 용궁김씨를 포함하여 경주김씨, 강릉김씨, 광산김씨, 안동김씨, 연안김씨등 거의 대부분의 김씨들의 시조이다.
또 다른 김씨의 시조이신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로 분가된 것에 비해서, 김알지의 후손은 3백여 본관으로 나뉘어진다. 이중 대표적인 경주김씨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셋째아들 명종을 1세조 (즉 본관의 시조)로 하는 파와, 넷째아들 은설공을 1세조로 모시는 파 등 또 여러 지파로 나뉘어 진다.
이중 넷째아들 은설공의 8세손이 바로 김존중이라는 분이고, 이분에 이르러서 용궁김씨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신라는 박(朴)씨(시조는 박혁거세), 석(昔)씨(시조는 석탈해), 김(金)씨(시조는 김알지) 등이 차례로 돌아가며 임금을 맡아오다가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왕에 이르러 김씨가 독자적으로 왕위를 이어나가게 되는데, 이러는 과정에서 많은 김씨들이 분적(分籍)하여 나가게 된다. 경주김씨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드님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광산김씨나 강릉김씨 등은 훨씬 이전에 분파하게 되었다.
용궁김씨의 시조되시는 김존중이라는 분의 지석(묘지석)이 발견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그 내용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지석내용- 김존중(金存中 : 1111~1156)의 자는 치허(致虛)로 용궁군(龍宮郡 :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자소보(太子少保) 정영(正英)이고, 할아버지 계(契)와 증조부 낭정(郞鼎)은 모두 태자소사(太子少師)의 벼슬을 지냈고, 어머니는 승평군대군(昇平郡大君) 박씨(朴氏)인데 태자첨사(太子詹事) 경장(景章)의 딸이다. 어려서 유학에 뜻을 두어 남성시(南省試)에 올랐고 태학(太學)에 들어가 여러 차례 우등하였다. 그 후 진사제(進士第)에 올라 시학(侍學)이 되었다. 좌정언 지제고(左正言 知制誥)를 거쳐 한림학사 지제고 동궁시강학사 태자유덕(翰林學士 知制誥 東宮侍講學士 太子諭德)의 직을 맡았으며, 또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말미암아 1156년(의종 10)에 46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다. 먼저 홍씨(洪氏)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며, 다시 이씨(李氏)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용궁(龍宮)은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에 속한 지명으로, 신라 시대에 축산현(竺山縣)·원산현(園山縣)으로 불리웠으며, 고려 초에는 용주(龍州)라 하다가 서기 1012년(현종 3) 용궁현(龍宮縣)으로 개칭되었다. 용궁 김씨(龍宮金氏)의 시조(始祖) 김존중(金存中)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 손으로, 누대(累代)에 걸친 전통적인 왕사(王師 : 임금의 스승)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소과(小科)인 남성시(南省試 : 고려 때 진사를 뽑던 국자감시를 달리 이르던 말)를 거쳐 인종(仁宗)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태자시학(太子侍學)이 되었다. 서기 1146년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내시원(內侍院)에 들어가 한림원(翰林院)에 겸직, 좌정언(左正言)·지제고(知制誥)를 거쳐 왕명(王命)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宿衛) 및 군기를 맡아보던 관청인 추밀원(樞密院)의 좌우승선(左右承宣)에 올랐고, 이어 전조(銓曹 : 이부와 예부를 통합한 관청)를 겸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선권(選權)을 장악하였다. 뒤에 태자 소부(太子少傅)가 되어 한충내보공신(翰忠內輔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부상서(吏部尙書)·정당문학(正堂文學) 등을 거쳐 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를 제수(除授) 받고 용궁군(龍宮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김존중(金存中)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용궁(龍宮)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신종(神宗 : 제 20대 왕, 재임기간 : 1197 ∼1204)때 예부 전서(禮部典書)를 지낸 지철(之鐵),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지록(之錄)형제와 대장군(大將軍) 우(祐)가 유명했으며, 우(祐)의 아들 진(璡)은 1361년(공민왕 10)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상장군(上將軍) 이성계(李成桂)의 원군(援軍)과 합세하여 박 의(朴 儀)의 모반군(謀叛軍)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을 세워 민부전서(民部典書)에 올랐다. 조선 세종(世宗) 때 창령 현감(昌寧縣監)을 지낸 전(全)과 판관(判官) 직(直)은 한성부윤(漢城府尹) 견호(堅浩), 원주 목사(原州牧使) 옥광(玉光), 의령현감(宜寧縣監) 견수(堅壽) 등과 함께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며, 태백(太白)은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와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추증되었다. 한편 훈(勛)의 맏아들 황(璜)은 임란이등공신(壬亂二等功臣)으로 고창 현감(高敞縣監)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戰死)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공조 참판(工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며, 필재(弼載)는 한성부 좌윤(左尹)을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낸 득유(得酉)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중원(重元)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낸 광백(光百), 부호군(副護軍) 종호(鐘壕)·종복(鍾復)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외 순조(純祖) 때의 성리학자(性理學
者) 호성(昊星)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홍권(弘權)이 유명했고, 국현(國鉉)은 항일 투사(抗日鬪士)로 명성을 날려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궁김씨(龍宮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327가구, 14,8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조 김존중(金存中. 호는 지암. 시호는 정열)은 고려 인종때 문장이 널리 알려져서 태자시학이 되고 문과에 급제한 후 첨사부록사가 되었다. 의종이 즉위한뒤 태자소보에 이르러 용궁군에 봉해졌고 죽은 후에 공신으로 이부상서 수문전태학사 정당문학에 추증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용궁으로 하였다.
1> 시조 : 김존중[金存中]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용궁(龍宮)은 경북 예천군에 속한 지명으로, 신라 시대에 축산현,·원산현으로 불리웠으며,고려 초에는 용주라 하다가 1012년 용궁현으로 개칭되었다. 용궁 김씨(龍宮金氏)의 시조 김존중(金存中)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8세 손으로, 인종때 급제하여 태자시학이 되었다. 1146년 의종이 즉위하자 좌정언·지제고를 거쳐 추밀원의 좌우승선에 올랐고, 이어 전조를 겸하여 문무백관의 선권(選權)을 장악하였다. 뒤에 태자소부가 되어 ·이부상서,·정당문학 등을 거쳐 용궁군(龍宮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김존중(金存中)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용궁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신종때 예부전서를 지낸 지철(之鐵), 판도판서를 역임한 지록(之錄)형제와 대장군 우(祐)가 유명했으며, 우(祐)의 아들 진(璡)은 이성계의 원군과 합세하여 [박의]의 모반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민부전서에 올랐다. 그외 순조 때의 성리학자 호성(昊星)과 독립운동가 홍권(弘權)이 유명했고, 국현(國鉉)은 항일사로 명성을 날려 가문을 빛냈다.
한국에 존재하는 김씨 성의 종류
강릉 김씨, 강서 김씨, 강진 김씨, 강화 김씨, 개성 김씨, 경산 김씨, 경주 김씨, 고령 김씨, 고성 김씨, 공주 김씨, 광산 김씨, 광양 김씨, 광주 김씨, 교하 김씨, 금산 김씨, 금산 김씨, 금화 김씨, 김녕 김씨, 김제 김씨, 김해 김씨, 나주 김씨, 낙안 김씨, 남양 김씨, 남평 김씨, 당악 김씨, 당진 김씨, 대구 김씨, 덕수 김씨, 도강 김씨, 도주 김씨, 동래 김씨, 명주 김씨, 무장 김씨, 문화 김씨, 밀양 김씨, 배천 김씨, 보령 김씨, 보은 김씨, 부안 김씨, 부평 김씨, 분성 김씨, 사천 김씨, 삼척 김씨, 상산 김씨, 상주 김씨, 서흥 김씨, 선산 김씨, 선성 김씨, 설성 김씨, 수안 김씨, 수원 김씨, 순천 김씨, 시흥 김씨, 신주 김씨, 신천 김씨, 아산 김씨, 안동 김씨, 안로 김씨, 안산 김씨, 안성 김씨, 안악 김씨, 양근 김씨, 양산 김씨, 양주 김씨, 언양 김씨, 여수 김씨, 연기 김씨, 연안 김씨, 염주 김씨, 영광 김씨
영덕 김씨, 영동 김씨, 영암 김씨, 영양 김씨, 영월 김씨, 영천 김씨, 영혜 김씨, 예안 김씨, 예천 김씨, 오성 김씨, 오천 김씨, 옥천 김씨,용궁 김씨, 용담 김씨, 우록 김씨, 우봉 김씨, 울산 김씨, 웅천 김씨, 원주 김씨, 월성 김씨, 은율 김씨, 의성 김씨, 장연 김씨, 전의 김씨, 전주 김씨, 정산 김씨, 정주 김씨, 진도 김씨, 진례 김씨, 진잠 김씨, 진주 김씨, 진천 김씨, 창원 김씨, 창평 김씨, 철산 김씨, 청도 김씨, 청송 김씨, 청주 김씨, 청풍 김씨, 초계 김씨, 춘양 김씨, 충주 김씨, 칠원 김씨, 태원 김씨, 토산 김씨, 통천 김씨, 파평 김씨, 평산 김씨, 풍기 김씨, 풍산 김씨, 풍천 김씨, 한남 김씨, 함창 김씨, 해남 김씨, 해양 김씨, 해주 김씨, 해평 김씨, 해풍 김씨, 홍주 김씨, 화개 김씨, 화평 김씨, 황주 김씨, 흠양 김씨, 희천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