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강해 9
서철원 교수
제9강 종말론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오늘은 먼저 천년기에 대한 천년왕국에 대한 그것이 타당한지 살펴 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천년기에 대한 좋은 답을 하고 있어요. 여기보면 13절,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6절까지.
15장이 사도들의 공회인데 율법과 복음의 관계 문제 때문에 이방인의 구원얻는 것을 위해서 사도들이 처음으로 공식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미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장로들과 교회들이 율법을 아주 잘 지키고 율법대로 살고 있었지만 이 율법에 대한 지킴의 요구를 이방인에게 까지 하게 될 때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의 권유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지만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15장 보면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예수 믿음과 동시에 조상 대대로 믿어 왔던 할례를 열심히 지키게 되었고 그렇게 지켰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믿음에 율법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것을 예루살렘 교회 만이 아니라 이방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지켜야 된다고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누구냐 그럴 때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라 그렇게 통상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몬 베드로가 열심히 믿음으로 만이 구원에 이르고 도저히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데 어째서 이방인들에게 우리 조상들이 못하는 그와 같은 율법의 멍에를 다시 멜려 하냐고 해도 해결이 못났는데 그때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전체를 지도하고 있었던 야고보가 일어나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밝히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 그러나 이방인들 사이에 많이 진행되고 있는 그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금해야 할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아모스서를 인용하고 또 예례미야서도 인용을 해서 여기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움이 즉, 메시야 왕국을 다시 회복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메시야 왕국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유대주의의 묵시문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천년왕국과 같은 그런 말은 아니고 지금 천년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별도의 천년이 아니라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하므로 또 14절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와 같은 말씀으로 메시야 왕국이 별도로 진행될 것이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메시야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야고보가 해석을 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복음과 율법의 책에서 다뤘으니까 좀더 자세한 것은 거기를 참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오늘 비판을 할려고 하는 것은 주로 천년전기 중에 세대론을 마음에 두는 것이지만 그러나 역사적 천년전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첫번째로 천년기가 맞지 않는 것은 천년기의 공통적인 특색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역사에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와 같은 주장을 했는데 그 주장에 근거해서 천년기론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왕 없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다스리는 그런 통치 만이 메시야 왕국이라는 그와 같은 관념이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는데 첫째로 여기에 우리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천년에 국한한 것이 타당하다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천년에 국한하는 그런 지상적인 임시적인 나라가 아니고 영원한 나라인데, 천년에 국한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의 증언에 전적으로 맞지 않다고 해야 옳습니다.
칼빈이 천년기를 반대하면서 제시한 가장 강력한 반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인데 천년에 제한하는 것은 전적으로 바르지 않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만일에 이 천년기를 길게 논한다면 혹시 논할만한 가치라도 있기 때문에 라고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천년기는 자체가 합당하지 않다. 영원한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인데 천년기에 국한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천년기가 갖는 것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 이방인들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편입되는데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죠.
복음의 道로가 아니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이방인이 대거 구원을 이루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칼빈이 분명하게는 안하지만 하나님의 엄위와 연관해서 거부하고 배척하기를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훼손하는 것은 적은 것이고 개인의 영혼의 안녕을 위한 그와 같은 것은 중요한 것으로 아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므로 천년기에 국한한 것이 그릇될 뿐만 아니라, 천년기간에도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그런데 칼빈만이 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역사상에 가장 철두철미하게 배척을 한 사람이 교부중의 교부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입니다. 그리고, 모든 공교회들이 함께 강력하게 천년기를 배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에도 종말도식에 관한한 천년기를 배척을 하고 희랍정교회도 천년기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생긴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도 천년기를 전적으로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박형룡 박사께서 레이놀즈라고 하는 미국 선교사에게서 신학을 공부를 하셨어요. 레이놀즈는 구레인, 내가 말 듣기로는 구레인 박사는 종말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레이놀스는 철두철미하게 천년전기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형룡 박사께서 이 레이놀스의 이율서 목사에게서 천년기를 열심히 배우고 이것이 바른 것으로 생각을 했을 뿐만 아니라 또 이분이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으셨는데 보통 이 보수주의 남침례교 계통에도 천년기에 관한한은 대부분이 다 종말론에서는 천년기이지요. 그런 것들이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천년기론을 바른 것으로 가르치도록 했다고 할 것입니다.
처음부터서 허공에서 조직신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수백번 수천번 성경을 읽어서 성경을 꿰어 맞추면 조직신학이 되는 것이 아닌데 교회의 가르치는 근본교리에 의해서 조직신학을 전개해야 맞습니다. 그러면 전통적으로 니케아 공회의 부터서 콘스탄티노플, 칼세돈, 에베소 공회의, 에베소 공회의는 정식으로 확정된 공회의의 교리를 남기지 못한 공회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 진행된 재 니케아 공회의까지 일곱번의 공회의에 의해서 나타난 교리들을 참조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위 장로교가 바르고 합당하다고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도 참조를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종말론의 도식에 있어서 전통적인 교회가 믿어온 종말론의 도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거기에 표시를 하고 있어요. 한번의 재림과 한번의 보편부활, 그리고 한번의 보편심판 그리고 정화하는 것과 신천신지의 도입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종말론에 있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같은 것을 살펴 보셨더라도 그렇게 천년전기가 가장 바른 것으로 채택을 안하실 수 있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그분이 광주에서 계실 때에 제가 번역을 했는데 지금 번역도 많이 잘못된 번역이었어요.
그래도 그분이 감수를 하셔서 내 이름을 내지 않고 그냥 박형룡 박사 감수로만 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60년대 말경에 총회교육부에서 출간을 했어요. 그것도 다 읽어 보셨을 터인데 거기에 보면 교회들이 어떻게 개혁교회와 마찬가지로 의와 구원문제에 대해서도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정죄를 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별로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롱 교의 신학에 들어있는 유아는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유아구원설을 저희 조직신학에 옮겨놓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여러분이 대부분 가지신 박형룡 박사의 전집에는 박형룡 박사의 글이 많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에 합당하게 그분의 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교의신학으로 한질이 나왔을 때는 조직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을 빼고는 종말론 중에서 이 천년기를 빼고는 소위 루이스벌?프의 조직신학을 그대로 번역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문에도 박형룡 박사께서 루이스 벌?프를 찾아가서 당신의 교과서를 우리나라 교과서로 쓰게 되었다고 하니까 양도립을 하게 되어서 둘 다가 함께 넘어지고 일어서게 되어서 참으로 기쁘다는 말을 서문에 적어 놓았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박형룡 박사님께서 독자적으로 조직신학을 저술하신 것이 아니고 벌?프의 조직신학을 그대로 번역을 하셔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종말론 부분에만 와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을 따르지 않고 자기가 배운대로 그렇게 천년전기가 가장 올바른 것으로 채택을 함으로 한국교회로 하여금 세대론에 다 빠지게 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소위 현재 미국에서 천년후기설의 가장 대표자가 로뢰인 뵈트너로 알려져 있지요. 로뢰인 뵈트너의 말대로 천년전기를 택하면 세대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냥 정해진 귀결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말대로!
그런데 신학교에서 천년기를 가르치면 일반 평신도들은 다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론이 되는 것이 바른 귀결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거니와 종말론에 관한한은 공교회가 한사코 천년기론을 배척을 하고 무천년기, 무천년이라는 말이 없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 보편 일반부활, 한번의 보편심판, 그리고 신천신지의 도입,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무천년이라는 말이 전혀 없지요. 그러나 그 종말 도식이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도식이라고 성경이 가르치는 무천년 도식입니다.
역사적인 연관을 못 살펴 보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마르셀루스가 고린도전서 15:24에서 전개되어 있는 27-28절에 보면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 28절에 근거해서 아들 자신도 그때 만물을 복종하셨다. 그리고 나라를 바친다. “나라를 바치며”라고 나와 있어요.
그래서 이것에 근거해서 마르셀루스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는가 하고 추측할 수 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플 공회의가 정식으로 니케아 신경에서 결정했던 제 2조에다가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 영원하다고 규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천년기가 교회의 공회의에 의해서 배척이 되었고 그 이후에 모든 공회의들이 다 천년기론에 관한한은 천년기론을 배척하고 무천년을 가장 바르고 합당한 것으로 주장을 하고 믿어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그렇게만 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결정을 하고서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저주가 맨 마지막에 붙어있지 않고 정죄한 전 항목에 다가 붙어 있지만 이렇게 믿는 것이 카톨릭 사도적 교회의 신앙이라고 하므로 아마 이렇게 믿는 길 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분명히 하고 다른 길로 구원을 얻는 길은 정죄받을 것으로 그렇게 확정을 했습니다. 하여튼 공교회가 한번도 천년기론을 교회의 바른 신앙으로 채택하지 안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천년왕국 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방의 교회들을 이방인들을 교회에 통합하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미 세운 것이고 그것이 메시야 왕국이 다윗의 장막의 세움이지 별도의 메시야 왕국을 세움이 아니라! 세번째로, 이 천년기론의 도식에 의하면 천년기가 마쳐갈 때에 사탄이 놓여나고 그렇게 되면 사탄과 그의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해서 천년기를 종식을 시킵니다.
그런데 천년기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고 하는 것은 지금처럼 하늘에서 말씀과 은혜로 다스리는 그와 같은 간접적인 통치가 아니고 직접적인 신적인 통치인데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직접적인 통치를 하시는데 통치가 피조물들의 공격에 의해서 종결된다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봅니다. 흔히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을 제가 주변에서 많이 있지 못해서 단정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읽은대로는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이 진리가 바르다고 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0장에 잠깐 놓여나는데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예루살렘 성과 그의 백성들을 두루므로 천년기가 끝나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이제 천년기가 그들을 태우므로 천년기가 끝나는데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인 통치를 하는 일이 피조물의 공격에 의해서 종결된다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다스리심은 큰 의미의 통치여서 그의 통치를 훼방하고 대적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다스리시지 않고 천년왕국을 세워 놓으시고 하늘에 가셨다면 하늘에 다시 올라 가셨다면 그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지요. 하늘에 다시 가심으로써 하시는 통치는 지금의 통치하고 뭐 그리 다를 것인지 나로서는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찰스 핫지가 주장한 것인데 부활체들과 부활하지 않는 전통적인 재래의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함께 살 수 없다. 또 천년간 사는데 이미 부활한 성도들 변형된 성도들은 완전히 영체가 되었는데 나머지 불신자들은 부활하지 않고 전통적인 육체를 입고 있으면서 죄악된 생각을 그대로 갖고 악한 생각을 그대로 품고 그리고 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생산하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부활체가 영체인데 부활체가 변형되지 못한 새롭게 된 창조세계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맞습니다. 만일에 변형되지 못한 세상에 변형된 부활체를 가진 성도들이 함께 섞여 산다고 하는 것은 마치 귀신들이 지금도 우리들의 세계에 와서 같이 살 때 상황하고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그 완전하신 신적인 영광과 엄위를 드러내실 때에 비록 사도요한이 환상으로 그 그리스도를 봤어도 죽은 자까지 그처럼 엎드러질 수 밖에 없었고 또 사울도 아직 바울 되기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눈이 멀게 되어 그 충격으로 며칠동안 고생하며 지나고 그리고 이제 세례받고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들이고 식사함으로 정상으로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완전한 신적인 영광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 앞에 불신자들이 육체를 믿고 살 수 있느냐? 부활체들이 부활하지 못한 육체하고 접촉해서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가지고 오셔서 영광을 친히 드러내실 때에 그 영광 앞에 불신자와 죄인들이 설 수 있느냐?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사기에도, 야고보 야곱도 내가 하나님을 보고 살아 남은 것이 늘 기이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은 존재가 없죠. 그런데 어떻게 신적인 영광을 가지고 오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죄인들이 감당할 수 있느냐? 감당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새것을 갖다가 덧붙히고 새로운 창조물을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내버리지 않고 회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 구속입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천년동안 이곳에 살다가 마침내는 천년기가 끝날 때는 이것을 내버리고 딴데로 가요. 물론 천년기론은 세대론 중에 일부론, 일부의 주장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영원히 땅에 남고 교회는 영원히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죠.
하나님은 종말에 가서 만유안에 만유가 되시기 때문에 두백성을 따로 남겨 전혀 별개의 백성으로 남겨 놓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백성이 남는 것이 아니예요. 한 백성만 남죠. 한 하나님의 백성! 그러기 때문에 에베소서에 보면 둘로 그의 육체로 에베소서가 가장 잘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으로 둘을 허시사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3절 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여기서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과 육에 속한 계명과 율법을 자기 육체로 파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이 둘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은 이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 실감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이방인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장벽이 철폐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심각한 얘기가 아니지만 유대인에게는 이게 보통 심각한 얘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함께 구원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사건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이제 뒤로 되돌아 갑니다 마는 사마리아 사건, 그것을 보통 많은 사람들이 오해해서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전도로 회개하고 예수믿고 그 다음 사도들이 와서 성령을 주고 했으니까 항상 두 단계로 성령을 받는 것이 맞는 줄로 알지마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선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를 해보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슴에 닿도록 얘기를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사마리아인들은 언제 유대교와 완전히 분류됐냐면 주전 300년경에 사마리아인들의 교회가 예루살렘 유대교에서 완전히 분류한 것으로 봅니다. 왜 그렇냐면 주전 300년경에 소위 사마리아 오경이 완성이 됐어요. 그러니까 그때에 사마리아 교회하고 예루살렘 교회, 유대교하고 사마리아 교회하고 완전히 분리한 때라고 봅니다. 이때 더욱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 대한 적개심과 그리고 반감, 천대하고 무시하는 것이 강해졌지만 이 포로 교환 때부터 일이 생긴거죠.
물론 이보다 그 전에 생긴거지만 사마리아 열 지파를 다 앗수르가 잡아가고 잡아다가는 한곳에 모여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앗수르의 정책은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땅에서 없애버리는 거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열지파를 잡아다가 완전히 광대한 앗수르 지역에 흩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만 모여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도록 완전히 흩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마리아인에게도 자기 앗수르 지역의 사람들을 가져다가 그들과 혼혈을 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유대인이 이스라엘의 종족으로 남아있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정책이 성공을 해서 사마리아인들이 완전히 이방인들과 결합해서 혼혈종이 되었습니다. 그 혼혈종이 된데다가 그래서 여호와의 종교에다 이방인의 종교를 그대로, 그리고 이방인 풍속과 법도를 그대로 갖고 있죠. 그러면서 여호와의 종교는 섬겨요. 그러니까 혼합종교죠. 그래도 그들이 정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야곱의 우물들이 거기에 있고 야곱이 특히 자기의 장자를 지목한 요셉에게 준 땅들이 거기에 있다. 그 바로 수가성이 야곱의 우물 아닙니까?
그러니까 야곱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이들이 이렇게 혼혈했고 종교가 혼합주의가 되고 윤리에 있어서도 법도에 있어서도 혼합주의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들을 개처럼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온다고 하는 것을 소위 예루살렘의 교회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거예요. 빌립의 전도로 만이 예수 믿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했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개같은 그들이 택한 백성인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거룩하게 지켜가지고 그 예수의 피를 받아들이므로 더욱 깨끗해져서 성령을 받았는데 개같은 그들이 성령을 그냥 받는다? 그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의 모세의 법도대로 두 증인이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자들인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 수사도 둘을 보내서 그들로하여금 예수 믿게 하고 성령을 받게 하므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올려면 그들이 일단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그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그리한 다음에 예수믿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예수만 믿는다고 온갖 죄악을 다 범하고 험악한 우상숭배를 하고 그 돼지고기를 그렇게 먹는자들 그들이 그냥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다?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다? 그렇게 골똘히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 그렇게 돼지고기를 아무렇게나 잘먹는 그들이 그냥 성령을 받는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예요.
바로 그 때문에 사도행전 15장에 바리새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도저히 이방인들이 그냥 율법을 지킴없이 예수만 믿는 것 하나로 유대교회에 가입한다. 이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공회의 결정을 베드로와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사도 야고보가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할 것 같은데도, 제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잘 설명을 했어요. 이번에 조금 더 깊이보고 싶은 분은 ?하나님 나라의 구속경륜?을 참조하셔요.
베드로의 긴 이야기도 믿음으로 만이 구원에 이르고 이스라엘을 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 준비작업을 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만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역사하신다는 것을 실례를 통해서 이방인들 중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를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결정했어요. 야고보가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믿음으로 율법을 지킨, 그런데 어느정도 타협은 했죠. 이것이 무엇이냐면 사도행전 15장에 나와있는 우상을 멀리하는 것, 피 먹지 않는 것, 음행하는 것, 이와 같이 네 가지를 정했어요.
그래서 이방인들 사이에 극심하게 진행되는 이와 같은 죄악을 그리스도인들은 못하게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 뿐이라고 야고보가 결정을 했습니다. 수사도인 베드로도 못하고 또 사도 바울도 못했는데 야고보만이 그것을 결정했습니다. 야고보가 결정해야 그 안이 거기서 통과되고 수납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야고보를 따르는 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킨 문제고 자기들의 영수가 이렇게 결정하기 전에는 이거 수납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권위로 될리가 없고 바울의 권위로도 수납될 리가 없습니다. 야고보의 권위로만이 수납될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율법을 지킴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 그때 당시 가장 의인 칭함을 받던 야고보가 공인해준 그 공회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 예루살렘의 의인이고 예루살렘을 지킨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야고보가 돌에 의해서 쳐죽임을 받았을 때 예루살렘의 그 많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즉 의인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킨 거룩한 사도인 야고보가 구원이 율법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뿐이라고 결정을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기독교에 준 큰 공, ?복음과 율법?에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온갖 우상숭배와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먹는 자들 음행을 행하고 목매어 죽이는 죽임을 예사로 살인하고 죽고 그 가증한 죄악들을 범하고 우상숭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돼지고기를 마음껏 먹고 이런 자들이 그냥 예수만 믿는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장벽을 예수 그리스도가 깼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깰 수 있었고 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신 이가 성령으로 하셨어요.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 8장에 사마리아인들의 개종사건에 빌립으로만 교회가 인정되게 한 것이 아니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보냄으로 교회가 교회된 것입니다. 나는 내가 보는 입장으로는 이 문맥을 보고 글을 봐서도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이 사마리아에 갔을 때 예수 믿었다고 난 그렇게 봅니다. 이 시간에 길게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마는 창조가 구속의 회복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길게 갔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아무도 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만이 그 일을 하셨어요. 그리고 두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한 것이 아니고 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몸을 이루었어요. 한몸을!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어느 하나라도 탈락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서에 나오는 땅이 이렇게 종이쪽처럼 말리고 간데없고 그런 것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창조를 새롭게 하심을 표현하시는 것이예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를 만드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려면 구속하실 필요가 없어요. 싹 쓸어 버리고 새로 만드시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완성의 창조하신 것이 탈락되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처음 낙원이 아니면 성전의 기능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나셨을 뿐만 아니라 함께 계셨고 또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낙원이 성전의 기능을 갖죠. 성전이었습니다. 아담이 제사장이었으니까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낙원에서 추방하시고 그리고 이걸 소산시켜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기능이 후에 성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에 의해서 계승되었습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께서 와서 거하셨습니다. 거소로 삼으셨죠.
물론 그 거소는 이스라엘을 생각하듯 그때 당시 이방인들이 생각하듯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와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계셨기 때문에그 성전 자체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어서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며 윤리적으로 바로 서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성전을 임의로 떠나셨어요. 주권적으로! 그 성전은 임시적인 하나님의 거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 자신이 전체로 성육신 하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으로 하고 삼으시고 살으셨어요. 그러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 성전을 청결할 때에 제사장들이 와서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느냐고 할 때에 이 성전을 헐라 그러셨어요. 성전안에서 성전을 보고서 성전을 헐라고 함으로 성전을 말함과 동시에 또 역으로 자기 몸으로 성전을 옮겨 오셨어요. 그리스도께서 전통적인 성전을 성전으로 인정하시면서 참 성전이 자기 몸인 것으로 분명하게 하심으로 자기 몸이 성전인 것을 분명히 했어요.
제자들도 아직 그걸 다 깨닫지 못했죠. 언제 깨달았죠? 부활 후에사 완전히 깨달았죠. 하나님께서 그의 전체를 골로새서에 보면 “플레로마 οληρ μα”를 썼어요. 1장 보면 19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돌로 만든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하나님이 와 계시므로 더이상 나무와 돌로 된 성전이 더이상 존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성전을 헐라고 함으로 자기 몸을 성전으로 가르치시면서 내가 3일 후에 다시 세우리라. 자기 몸이 성전인 것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또 자기 몸을 헐므로 3일 후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헐릴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예루살렘 교회가 분명히 헐릴 것을 예언하셨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나무와 돌로 된 성전이 더이상 서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디도장군의 손을 빌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체안에 충만히 거하신 후에 예수의 부활 후에는 예수 안에 있었던 성령으로 모든 새사람들에게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성전, 그의 거소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종말에 가서는 이 완전히 새인류들을 자기의 처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위 화란의 스킬더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캄펜 신학교를 설립하신 분인데 이분이 “하늘은 무엇인가?”하는 책 속에 종말에 가면 지금의 하나님의 거소하고 인류에서의 거소하고 합친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인류에게 거소를 정하고 사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번째로 결정적으로 반대를 해야할 것은 피제사의 복귀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제사가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마지막 구원의 길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이 피로 모든 죄를 씻으시고 새 백성들을 만드시지 다른 어떠한 길로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자들에 의하면 종말에 가면 천년기 때 다시 피제사가 복귀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피제사가 복귀되고 모든 절기들이 세워져 다시 집행되고 그리고 그 피제사를 통해서 속죄가 이루어져요.
이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허는 것인데도 어찌해서 교회에 이러한 것들이 반성과 비평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끔찍한 일이죠. 피제사의 복귀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근원적으로 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배척하는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고 그리고 실물교훈하시고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민족이 되게 하시고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유지되게 하시고 그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고 그 민족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 이루어진 다음에는 더이상 그들이 더이상 민족이 존재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서 그들을 다 민족적인 단위로 존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제사가 이게 실체고 이게 몸이고 다른 것은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몸이 없으면 소산되는 거죠. 그런데 이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피제사가 복귀한단 말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한 구원의 길이 이 길이 아니라고 하는 부정입니다.
앞으로 내가 세대론을 비판하면서 들어갈려고 합니다마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그의 오심의 영광을 보고 메시야임을 받아들이고 하는 이것도 전적으로 성경에 말하는 구원에 배치된다. 또 천년기 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때문에 이방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 교회로 돌아온다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바로 이 피흘림의 피제사로! 다른 길로가 아닙니다. 그런데 피제사가 복귀된다?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많은 훌륭한 신학자들이 천년전기를 지지해도 그래도 공교회가 성령의 인도에 의해서 천년기를 다 배척했습니다. 죠지 래드 같은 사람도 신학적으로 종말론을 천년전기를 맞다고 주장을 해요. 박영호 목사하고 편지 통신하면서 그 답을 번역해서 조직신학에 실어놨는데 이 사람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물론 미국에서 신약학자로써 구라파 학자들이 인정해 주는 학자가 죠지 래드예요.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진행됐다고 강조하죠. 그리고 미래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천년기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맞지 않는거죠. 이 성경학자들의 약점이 여기에 바로 나타나요.
여러분 혹시 신문광고 보셔서 아실지 모르지마는 위트레이트 대학에 지금 조직신학 교수가 하란프란트입니다. 이번에 그 기독교 학생의 초청으로 오시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이 최근에 “확고한 언약”이란 책을 써가지고 우리가 천년기론을 받아들여야 맞지 않느냐 식으로 결론을 맺어요. 그러면서도 문제점이 있다 이거예요. 이스라엘은 영구히 지상에 살고, 교회는 영원히 하늘에 사는, 이것이 문제점은 있지마는 받아들여야 된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 다 읽고 내가 당장 편지를 쓸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도대체가 어떻게 신학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느냐?
그런데 이분이 내 논문의 서평을 한 분이예요. 그래서 괜히 마음만 상해주는 이 하란 프란트가 전통적으로 위트레이트 신학부가 전통의 아성이라 그럽니다. 전통의 아성인데 그 하란 프란트가 이 조직신학 교수예요. 그런데 그분이 언약,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입장에서 봐서 천년기론을 받아들여야 옳을 것 같다. 그런식으로 전개를 했어요. 확실하게는 안해도! 그래서 어떻게 신학자가 이런 정도로 신학적인 논의를 전개하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편지를 쓸려고 했는데 광고에 보니까 오신다고 그래서 강의는 가서 못듣더라도 한번 만나볼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한번 할려고 해요.
피제사의 복귀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전적으로 부인하고서만 가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궁극적인 하나님이 내신 유일하신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부인하고서만이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 피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그것을 지시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제사가 와서 구속을 완성한 이후에는 그 피제사가 계속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종말에 가서 하나님이 로마장군의 손으로 헐어버리신 그 제사제도를 다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때에 회복을 하신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전적으로 유대주의 사상의 재현이고 복귀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그 역사로 오신 것이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세계에 높이기 위해서 오신게 아닙니다. 천년왕국은 전적으로 전체적인 메시야 왕국입니다. 그것은 예수 당시에 살아있던 유대인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구했던 그것, 로마가 해결하는 세계문제의 해결의 길은 정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황제가 되고 몇년에 걸쳐서 평화의 세대가 도래했다고 온 로마천지가 새로워진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예요. 가이사 아구스도가 황제가 됨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정치였습니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 였어요. 이거 좋은 책을 썼어요. ( )신학자가 “예루살렘으로 오너라”하는 책을 써서 ( ) 잘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이 원한 것도 정치적인 메시야와 정치적인 해결이었습니다. 고난의 종은 전혀 생각할 겨를, 틈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이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을 종말 때로 연결해서 확대한 거예요. 이러기 때문에 천년기가 현재까지 내가 이해한 대로는 바르지 않다. 인정할 수 없다.
메시야의 왕국을 다윗왕국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윗왕국의 회복은 야고보 사도의 해석대로 이방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된 것이고 별도의 메시야 왕국을 세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할 때에 메시야 나라를 전할 때 받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연기했다고 그러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려고 하는 이 메시야 구세주의 출생을 구세주가 태어나는 통로가 되게 할려고 어머니가 되게 할려고 모태가 되고 태반이 되게 하는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두신 것이지 이스라엘 자체를 택해 가지고 세상의 영광 보게 해 주실려고 이스라엘을 택한 것이 아닌데도 세대론은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셨지 메시야 나라를 짓겠다고 유대인들한테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은혜의 복음, 구원의 길에 이르는 길은 은혜라고 하는 것, 자기의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에 의존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어요. 그러니까 율법하고 배치돼서 이들이 배척했지 메시야 나라를 세울려고 제시했는데도 메시야 나라를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메시야 나라 정치적인 메시야 나라를 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메시야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고난의 종으로 어린양으로 오셔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실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들과 서기관들이 너희들 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강조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공로를 의지할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선포할 때에 은혜의 복음을 말할 때 그냥 빨리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과 섞이면 물들기 때문에 섞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오셔가지고 창녀들, 세관원들 이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고 합친다.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를 못한거죠. 어째서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느냐? 그런데 뭐라고 답했습니까? 너희들은 의인이어서 필요가 없지만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의사니까 이 병든 사람을 고칠려 하니 같이 먹어야 되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이 의인인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배척한 말씀이 아니죠. 그들도 함께 오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받아 들여요. 자기들은 장자죠. 큰아들이죠. 그런데 둘째 아들은 가산을 탕진했다 돌아오니까 기쁘지 않죠.
이런 죄인이 창기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이런 죄인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좋다고 뭐가 좋다고 말예요. 집에 있는 아들은 염소 새끼 하나라도 고아먹지 않고 잘 섬긴 이 아들은 염소 새끼 한마리 줘서 친구들과 재미보게도 안 하시더니 이런 아들이 오니까 뭣이 좋다고 열심히 받아 들이느냐? 그러니 이방인들이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걸 이 유대인들이 용납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 아들로 일한게 아니고 삯군으로 일했죠.
내것이 다 네것이고 다 네것 아니냐고 무슨 소리냐고 해도 아버지는 나한테 염소새끼 한마리 줘갖고 이렇게 열심히 이렇게 봉양을 해도 잘했다고 친구들과 함께 잔치하라고 하지도 않더니 아버지의 모든 재산들을 반이야 안받아 갔겠지만, 작은 아들 몫이니까, 이렇게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거러지가 되어 아들이 돌아오니까 소 잡고 양 잡고 온동네 잔치가 다 났다. 그럴 수가 있냐 그말예요. 그럴 뿐만 아니라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가지고 마침내 무화과 나무의 비유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에게서 나라를 빼앗을 것임을 분명히 하셨어요. 열매맺는 백성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을 하셨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더 이상 존속 못할 것을 무화과 나무 저주에서 분명히 하셨어요. 거기서 보십시오. 물론 여러분들이 예수님께서 시장해서 가셔서 무화과를 따 먹을려고 갔는데 보니까 무화과는 아무것도 없고, 잎만 무성하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입성 후의 일 아닙니까?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생긴 일 아닙니까? 단지 그것 만이 아니예요. 여러분들, 바로 그것은 그때 당시의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이스라엘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구히 내게서 열매를 받을 자가 없으리라. 먹을 자가 없으리라. 그렇게 저주하시므로 그 무화과 나무가 즉각에서 말랐지마는 그것은 아무 열매도 맺지않고 잎만 무성한 그때 당시 이스라엘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보다 더 열매맺는 너희들에게 빼앗아서 열매 잘맺는 다른 족속에게 주리라. 그렇게 하므로 이스라엘에게서 나라를 빼앗을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가지고 세상적인 정치적인 메시야 나라를 세울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이죠. 바로 구원의 길은 믿음으로 은혜로 되는 길임을 가르치셨어요.
그러니까 율법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이 배척한 것입니다. 율법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도 좋은 것 같애도, 은혜의 길을 교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가르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복음을 가르치면 반대하고 욕을 하고 훼방을 하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율법의 길로 생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루실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가 목적이예요. 이스라엘이 목표가 아니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그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죠.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들에게 영화가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예요. 이걸 배척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민족적인 단위로 존속할 필요가 없게 하신거예요. 그 다음, 비판할게 참 많던데, 부활 그리고 승천 그리고 주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에 재림하셔서 그 종말론적인 것을 왜 반복하셔야 될지 모르겠어요. 임시적인 것을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죠.
그리고 그들이 주님이 땅에 내려 오시면 이스라엘이 주님을 보고 회개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해 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그러는데 그런게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뿐이지 이와 같은 물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구원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별도의 방식으로 이렇게 영광을 보고 구원하시게 하는게 아니죠.
그리고 천년왕국 때에 그 철권정치에서 악을 행사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이 잘되고 믿는 신자들이 잘되기 때문에 믿는 신자가 왜 잘되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다 부활해서 영체를 가지고 있는데 세상적으로 무얼 더 부활체들이 바라겠어요. 세상적으로! 그런데 그런 것을 보고 대거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온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지 이와 같이 물리적인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복음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복음이고 충족한 것이지 다른 방식으로 대치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천년동안 메시야 왕국에서 다스린다고 하면은 이스라엘이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해가지고 고난을 많이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보상을 주시는 면이 있겠지마는 실제로 고난당한 백성들은 그때 이스라엘이 아니잖아요. 그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그들은 다 죽고 없어진 후의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조상들의 고통을 그들에게 영광으로 갚아 주심으로 그들이 당한 고난이 글쎄요. 상쇄되고 충족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찰스 핫지가 좋은 말을 지적했는데 초림 때에도 이스라엘의 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재림 때에도 천년기론자들의 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찰스 핫지, 프린스톤의 조직신학자! 보통 개혁파의 3대 조직신학자를 들라면 찰스 핫지, 바빙크, 아브라함 카위퍼를 듭니다. 찰스 핫지가 19세기 중엽 지금 우리나라에도 많이 나와있는 조직신학 책 3권으로 된 책을 썼어요. 그 다음 이제 천년기 동안에도 일부는 죽고 결혼하고 자녀를 생산하고 그러는데 한쪽에서는 자손들이 자꾸 늘어가는데 부활하고 변형된 그리스도인들은 수가 늘지 않죠. 보면 손해 아니예요? 불신자들만 덕보는거지!
세대론은 성경을 글자대로만 해석하도록 하는데 너무 과도히 집착하므로 구약의 다니엘서와 에스겔서와 같은 예언과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글자대로 해석하기를 고집하므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전적으로 놓치고 이렇게 왜곡합니다. 문자적인 해석만을 고집하면 근본주의죠. 성경에 기록돼 있는대로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 그러면 여기 휴거란 말도 안맞고, 성경에 휴거도 없잖습니까? 삼위일체도 맞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문제도 문제가 되고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이미 말씀을 했겠지만 내가 함부르카에 한번 갔을 때에 성 미가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당 입구에 위에 큰 조각이 하나 새겨져 있었는데 거기에 미가엘이 큰 방패를 들고 큰 창을 들고 시커먼 사탄을 발로 밟고 칼로 찔러요. 그런데 그 옆에는 부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벌벌 떠는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사탄은 아주 새카만데, 그런데 거기 그 방패에 뭐가 그려져 있냐면 십자가가 그려져 있어요. 그 칼이 글쎄 바로 십자가 였어요. 미가엘 천사가 사탄을 제거하는 것은 물리적인 물질적인 쇠사슬과 방패와 칼로 사탄을 결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의 권세로 결박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을 우리가 글자대로 보는 의미의 쇠사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세요. 그 피의 권세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피의 권세를 말해요. 사탄을 의거하고 압제하는 것이 이렇게 물리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권세로만 그래요. 골로새서에 보면 그것이 나와 있는데 그 장에도 1:17-18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보다도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권세로 사탄의 권세가 대폭 제약되고 일면에 무장 해제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주석가는 이걸 주석해서 뭐라고 했느냐?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 이후에 더 선해졌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의 권세로 그의 권세가 대폭 제약되고 약화되었으므로 그 전에 악대로 다 행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는 분명히 무장 해제된거죠. 그런 의미로 사탄이 훨씬 더 악령들이 선해졌다. 우리만 구속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권세가 악령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제재한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권세는 다 없어질 것들이지만 십자가의 권세로 만이 사탄을 제어해요. 복음의 권능으로 그 권능으로 만이 사탄의 권세가 약화되고 제재돼요. 복음이 오기 전에는 한국에도 가는데마다 귀신 나는데가 많았습니다. 예수 이름을 듣고부터 귀신들이 물러가요.
그런데 왜 천년간이냐? 만국을 미혹하게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적으로 박멸하려고 하는 노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실 때까지 만국을 미혹하게 못하게 한거죠. 천년간 결박되어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의 권세 기간동안 사탄이 복음에 의해서 그 활동이 제약되고 만국을 미혹하게 못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방식으로 쇠사슬에 매여서 꿈틀꿈틀 해도 못나오고 그런게 아니죠. 여기보니까 그냥 옛뱀이라고 그랬습니다. 용을 잡으니까 옛뱀이 마귀요 사탄이더라. 여기 왜 용이라고 했습니까? 낙원에서 생긴 첫 사건에 뱀의 역할을 지시하기 위하여 그런거라고요. 뱀이 사탄이 뱀을 도구로 해가지고 인류를 타락하게 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뱀이 바로 사탄과 일치된거죠. 구분되면서도! 그러니까 여기 옛뱀이 나왔죠. 용이라고도 하고 옛뱀이라고도 하고! 풀어 놨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에서 아는 용, 비가오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쇠소리를 내며 울며 다니는 그런 용, 삼국지에 잘 나오죠. 용, 그러고 과학이 현재 가르쳐주는 공룡들, 그런 용을 말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곧 옛뱀이요. 여기 뱀이라고 말한 것은 낙원의 사건을 지시합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다시 풀었는데 사탄이라. 이런 물체적인 피조물 중에, 동물 중에 하나인 뱀이 용이 아니라 사탄을 말합니다. 그 영물을 쇠사슬로 어떻게 묶느냐? 다음 시간에 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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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