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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ley story 스크랩 전설의 서막, 할리데이비슨 히스토리 Part,1
스와니 추천 0 조회 16 10.05.10 13: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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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d by 온라인 모터사이클 미디어 바이커즈랩  말러센스 오토스크랩




전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모터사이클 브랜드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는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진 브랜드도 있으며, 뒤늦게 출발했지만 큰 성공을 거둔 브랜드도 있다. 


실제 모터사이클 역사에서 그 브랜드 가치를 100년 이상 유지한 브랜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2009년, 창립 106주년을 맞이한 할리데이비슨 또한 유구한 역사 속에 살아남은 브랜드 가운데 하나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 할리데이비슨의 역사를 총 3부로 나눠 공개한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4평 남짓한 작은 공장에서 할리데이비슨의 전설은 시작됐다.

할리데이비슨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의 이름이다.
1903년 23살의 윌리엄 S. 할리(William S. Harley)와 22살의 아서 데이비슨(Arther Davidson)이 함께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를 세웠다.
두 사람은 약 14m²(약, 4평 남짓)의 작은 공장에서 배기량 439cc(26.84큐빅인치) 단기통 엔진을 얹은 모터사이클 시리얼 넘버 원을 생산했다.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모터사이클, 시리얼 넘버 원. 

레이스를 위한 모터사이클로 제작됐지만, 일반에 시판된 모터사이클이다.
시리얼 넘버 원은 가죽 벨트를 사용해 리어 타이어로 동력을 전달하는 방식이며, 자전거 페달을 채용해 출발은 물론 브레이크로 사용했다.


▲할리데이비슨의 창업주, 왼쪽부터 아서 데이비슨, 월터 데이비슨, 윌리엄 할리, 윌리엄 데이비슨

사업의 규모가 커진 할리데이비슨은 1907년, 윌리엄 A. 데이비슨까지 합류해, 모두 4명이 경영 전반에 참여했다.
이 해에 할리데이비슨은 힐클라임 대회를 비롯해 총 4개의 대회에서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런 대회에 출전했던 것은 역시 모두 창업주들이었다.
레이서들이 만든 모터사이클, 그것이 바로 할리데이비슨이다.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V형 2기통 엔진을 탑재한 모델

할리데이비슨이 창립 6주년이 되는 1909년, 할리데이비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V형 2기통 엔진을 얹은 최초의 모터사이클을 선보인다.
5-D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모델은 배기량 811cc(49.48큐빅인치)의 엔진으로 8마력을 냈다.


▲할리데이비슨의 초기 엠블럼, 이것에 기초해 현재의 엠블럼이 탄생했다.
 
V트윈 엔진을 얹은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현대의 할리데이비슨을 상징하는 엠블럼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앤드 실드(Bar & Shield)’ 엠블럼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엠블럼은 근래에 커스텀 바버를 지향한 크로스본 모델에 채용되기도 했다.



▲2008년 등장한 FLSTSB 크로스본, 커스텀 바버 스타일을 지향한 모델이다.
할리데이비슨의 성공은 레이스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나, 실제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시장에서 특화된 레이스 이외에 많은 활용도를 갖고 있었다.
가족 단위의 여행자들, 우편 배달부를 위한 모터사이클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쟁 모델에 비해 뛰어난 성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할리데이비슨은 당시 미국 시장에서 먼저 모터사이클을 생산하기 시작한 ‘인디언(Indian)’과 ‘토르(Thor)’ 등의 미국산 브랜드와 엑셀시어(Excelsior)와 같은 영국산 모터사이클과 경쟁했다.


▲1916년에는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는 모터사이클 매거진 ‘The Enthusiast(광신자,열혈팬)’을 창간했다.

호황과 불황을 관통한 너클헤드
여기에 할리데이비슨은 군용 모터사이클을 납품하면서 더욱 더 성장한다.
1917년부터 시작된 군납 모터사이클을 계기로 입지가 더욱 공고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할리데이비슨은 세계1차대전에 모터사이클을 납품했다. 사진은 참전 이전에 테스트를 받는 모습이다.

1914년에 시작된 세계1차대전에서 미국이 얻은 이익은 상당했다.
여기에 1917년부터 미국 또한 참전하게 되면서 군납 모터사이클의 수요는 더욱 더 커져 1918년에는 할리데이비슨이 생산한 모터사이클의 거의 절반이 군납으로 팔렸다.



▲1917년 처음 소개된 스포츠 모델. 이후, 1923년까지 생산됐다. 수평대향 2기통 엔진으로 앞뒤로 뻗은 실린더가 인상적이다.

할리데이비슨은 창업 17년만인 1920년, 세계 최대의 모터사이클 메이커로 성장했다.
할리데이비슨은 당시 67개국에 걸쳐 총, 2,000여개의 딜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배기량을 확대한 V트윈 엔진을 얹은 모델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그 입지를 공고히 하는 한편 레이스에서도 여전히 활약했다.



▲1920년, 할리데이비슨은 배기량 999cc 엔진으로 레이스에서 활약했다. 사진은 당시 팀의 마스코트였던 돼지를 안고 있는 사진이다.
이 돼지는 훗날 H.O.G.(할리데이비슨 오너스 그룹)의 마스코트가 된다.


하지만 세계1차대전으로 얻은 급격한 성장은 미국에 대공황이란 시련을 안겼다.
하물며 미국 내 모터사이클 시장에도 그 영향을 끼쳤다.
1931년에는 미국 내 거의 모든 모터사이클 메이커가 사라졌다.
할리데이비슨과 인디언 모터사이클을 제외하곤 말이다.



▲1929년 D형 모델에 장착되었던 배기량 737cc의 엔진, 실린더 헤드의 모양에서 플랫헤드란 이름이 붙었다.

이후 1972년까지 사용되면서 엔진의 내구성을 입증했다.
할리데이비슨은 1936년 오버헤드밸브를 채택한 EL 모델을 발표한다.
이 EL 모델은 출시와 동시에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실린더 헤드의 모습이 마치 주먹을 꽉 쥔 것 같다고 해 ‘너클 헤드’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바로 이 너클헤드는 할리데이비슨에게 엔진의 형상이 모터사이클 전체 스타일링에 큰 부분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1936년 발표된 EL 모델, 너클헤드 엔진으로 최초엔 배기량 999cc로 등장, 이후 사이드 밸브 방식으로 바뀐 1,310cc 엔진을 장착하게 된다.


▲WL모델은 999cc(61큐빅인치) 배기량으로 최고시속 219km를 달성했다.

EL 모델은 현대적인 크루저 모터사이클의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낙하하는 물방울 모양의 연료 탱크는 물론, 말편자 모양의 오일 탱크, 오일순환 시스템, 4단 변속 기어, 연료 탱크에 위치한 계기반, 프레임의 라인과 각도, 연료 탱크에 장식된 로고, 스프링거 서스펜션 등은 EL 이전의 모터사이클과 이후를 구분 지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시장에서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할리데이비슨은 EL 모델의 생산 첫 해인 1936년 연간 생산량을 1,526대로 책정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하지만 역사는 할리데이비슨과 EL 모델의 편이었다.



▲너클헤드의 인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사진은 2007년 데이토나 바이크 위크에서 래디컬 커스텀 클래스에서 우승한 모터사이클로 1941년 너클헤드를 기본으로 제작됐다.

전쟁, 그리고 생존자
1941년에 발발한 세계2차대전은 전 세계적으로는 끔찍한 일이었으나, 멀리 떨어진 미국에게는 또 한 번의 경제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것은 할리데이비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에 참가한 할리데이비슨의 WLA 모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90,000 여대 이상이 투입되었다. WLA는 전선에서 활약하기 위해 프론트 서스펜션에 연결된 주머니에 톰슨 경기관총을 수납할 수 있었다.


▲WLA는 737cc(45큐빅인치) 엔진을 얹고, 손으로 변속하는 3단 기어를 탑재했다.

할리데이비슨은 전쟁 중 모터사이클 생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 육군과 해군으로부터 ‘E’ 어워드를 받기도 했다.
또한, 캐나다 군을 위한 WLC를 비롯, 샤프트 드라이브 방식의 XA와 같은 군용 모터사이클을 제조했다.


▲1942년 총 1,011대만이 생산되었던 XA 모델, 사막에서의 사용을 위해 제작된 모델로 수평대향 2기통 엔진을 얹고, 샤프트 드라이브 방식을 사용했다.

세계2차대전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자사의 엔진이 아닌 로택스 제 350cc 엔진과 500cc 엔진을 얹은 MT-350, MT-500과 같은 오프로드 타입의 군용 모터사이클을 제작하기도 했다.


▲MT-350은 영국의 암스트롱 사가 처음으로 제작했고, 이후에 할리데이비슨이 인수해 직접 생산했다.

세계2차대전이 끝난 1948년은 너클헤드 엔진을 대체할 ‘팬헤드’가 처음으로 공개된 해이기도 하다.
배기량 1,212cc(74큐빅인치)의 팬헤드 엔진을 장착하고 첫 선을 보인 FL 모델은 프론트 타이어와 리어 타이어의 사이즈가 동일했다.
FL 모델은 스프링거 타입의 프론트 서스펜션을 장착했지만, 여전히 리어 서스펜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FL 모델의 프레임의 형상은 이후, 소프테일 시리즈의 프레임으로 재탄생했다.


▲팬헤드 엔진, 팬헤드는 크롬 도금된 로커 커버의 모습이 케익을 굽는 팬과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다.


▲할리데이비슨은 1948년, 저배기량 모터사이클의 생산에도 참여한다.
S 모델이라 불리는 이 모터사이클은 다양한 버전으로 1966년까지 생산됐다.

1950년대로 들어서 미국 시장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배기량임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스포츠성을 갖춘 영국산 모터사이클이 들이닥쳤다.
이에 할리데이비슨은 엔진과 변속 기어를 일체화 한 K 모델을 내놓았다.

 

▲1952년 등장한 K모델은 이후, 스포스터로 진화한다.

할리데이비슨의 창립 50주년을 맞은 1953년, 할리데이비슨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 할 만 한 위치에 올라섰다.
하지만, 세계2차대전 이후 미국의 상황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할리데이비슨과 함께 미국산 모터사이클을 대표하는 회사였던 인디언이 도산하면서 이후 46년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내 유일한 모터사이클 제조사였다.

 

▲창업 50주년을 기념하는 50주년 기념 엠블럼

여전히 미국 내의 레이스에서 할리데이비슨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영국산을 비롯한 해외 모터사이클 메이커의 도전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결국 할리데이비슨은 좀더 본격적인 스포츠 모터사이클에 대한 개발에 착수했고, 1957년 첫 번째 스포스터 시리즈가 시장에 선 보인다.

 

▲스포스터는 배기량 901cc(55큐빅인치)의 엔진을 얹고 시장에 등장했다. 또 다른 할리데이비슨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1957년 XL 스포스터에 장착된 아이언헤드 엔진, 이 엔진은 이후 셔블헤드 엔진의 개발의 토대가 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할리데이비슨은 대배기량 모터사이클에 집중된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유럽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스쿠터에 주목했다.
할리데이비슨의 이름을 걸고 등장한 유일무이한 스쿠터 탑퍼(Topper)가 바로 그것이다.
할리데이비슨은 이태리의 모터사이클 브랜드와 합작회사를 만들며, 2스트로크 모터사이클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성과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런 결과는 미국 시장을 노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큰 기회로 작용할 수 있었다.
세계2차대전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일본이 반대로 미국 시장에서 할리데이비슨을 꺾고자 칼을 갈았다.


▲할리데이비슨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생산한 스쿠터 탑퍼(Topper)


기사 제공 : 바이커즈랩(http://www.biker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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