赴焚修하되 須早暮勤行하고 自責懈怠하며 知衆行次에 不得雜亂하며 讚唄祝願하되 須誦文觀義언정 不得但隋音聲하며 不得韻曲不調하며 瞻敬尊顔하되 不得攀緣異境이어다.
(해설)
[赴焚修]호되 (부분수)
예불을 할 때에 이렇게 이해를 하십시오. 글 그대로 새기면 분수에 분수, 향불을 피우고 수도하는 것을 분수라고 하는데 그게 우리말로 하면 예불 드린다. 법당에 올라가서 예불드릴 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須早暮勤行]하야 (순조모근행)
조는 조과 그럽니다. 아침 예불을 조과 그러는데 ‘아침조’字지요. 우리 일과 하는 과(課). 그렇게 써서 아침 예불을 早課. 저녁예불을 暮課 그럽니다. 아침 저녁 예불에 참석을 안하면 안된다. 거기도 역시 ‘須’자가 나오죠. 반드시 아침 저녁으로 勸行입니다.
근행.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그게 아니란 말씀이죠. 송나라 때 불안청원선사라고 하는 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이 10가지 우리가 꼭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을 시로 지어 놓고 그것을 실천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불을 하는 내용입니다.
禮佛(예불)은 爲除憍慢垢 (위제교만구) 하니 부처님께 예를 드린다고 하는 것을 교만의 때를 없애기 위해서 예불을 한다. 나중에 치문경훈에 보면 나오는데 좋은 말씀이니까.
제가 한번 써드리겠습니다. 禮佛 부처님께 예경을 하는 것, 爲除憍慢垢라. 아침 저녁으로 예불한다든지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은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번뇌의 하나인 교만의 때를 ‘除’字. 없애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말이죠 세탁을 안하고 옷을 오래 입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세탁하기 힘들어 집니다. 또 집안 청소를 매일하지 않고 얼만큼 있다가해봐요 깨끗하게 하려면 힘이 들듯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도 어제 아만 말씀할 때도 제가 아만이라고 하는게 번뇌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절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하는 번뇌를 항복받기 위해서, 교만이라고 하는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절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부지런히 자기 일생 동안에 빠짐없이 해야지 하고 싶으면 가지고 하는체, 하기 싫으면 말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거기에 대한 말씀이 많지만은 이쯤해 두고요. 그 다음에
[自責懈怠]하며 (자책해태)
스스로 게으름을, ‘게으를해’ ‘게으를태’ 이것도 역시 번뇌의 하나 입니다. 해태, 번뇌의 하나라요, 게으른 것도 병이란 말씀이죠.
부처님 말씀가운데 “부지런한 것은 삶의 길이요 게으른 것은 죽음의 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게으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해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 죽음의 길로 가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랍니까 여러분, 게을러서 죽음의 길로 가겠어요?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스스로 게으름을 꾸짖으며,
[知衆行次]하야 (지중행차)
다른 책에는 ‘지중 행차에’ 그랬는데 그렇게 하면 안돼요.
저 앞에 나오는 언담차에 하는 ‘차’ 하고 이게 다릅니다. 언담차 할 때는 때라고 했죠. 그래서 ‘적’이라 갈 적에 올 적에 하는 적으로 해석을 했었는데 여기서는 순서를 말합니다.
衆은 대중. 여러 사람 중승을 말하고, 行은 움직이는 것 차는 순서 여러스님네가 움직이는 순서 지금 예불할 때니까, 다른 사람은 절하는데 자기는 일어나 봐요.안되잖아요
자 다른 사람이 합장하는데 자기는 또 가만히 서 있다든지 그러면 안되잖아요. 들쑥날쑥이니까 (그래서) 지금 이게 예불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법당에 가서 예경드릴 때 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대중이 움직이는 순서, 次는 순서로 봐야 됩니다. 순서를 잘 알아서
[不得雜亂]하며 (부득잡란)
잡란하지 말며, 여기의 잡란은 어지럽게 순서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처럼 다른 사람이 절할 때면 나도 절을 같이 해야지 다른 사람이 반 배를 하는데 자기는 큰절을 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합장하는데 자기는 합장을 안하고 앉는다든지 해 가지고는 모양새가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잡란은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 雜자는 ‘섞일 잡’字가 아니고 ‘어지러울 잡’字다. 잡란하지 말며
[讚唄祝願]호대 (찬패축원)
찬패는 범패라는 말하고 같읍니다. 찬은 찬탄한다. 행자님들이 아시는가 모르겠는데 서가모니불 정근하고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고 난 뒤에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하잖아요. 이것이 경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죠.
[석가보살이 불사여래를 만나 가지고 너무 환희심이나서 기쁜 마음이 넘쳐 가지고 일주일 동안, 인도에서 수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발을 학처럼 한발을 듭니다.
하나를 들고 외발로 서가지고 밤낮으로 일주일을 합장하고 오로지 부처님 얼굴만 쳐다보고 그것을 시로 읊은 것이다. 찬불송이죠. 그것을 찬패라고 해요. 석가보살이 그렇게 해 가지고 9겁이라고 하는 많은 시간을 뛰어 넘어서 미륵보살보다 앞서서 성불하게 되었다]
경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에 부처될 분은 앞으로 56억 7천만년 후에, 그게 어딘지 모릅니다. 지금 어느 신흥 종교에서는 석가모니 불교는 이미 없어졌고 지금부터는 미륵불교가 나온다고 해 가지고 거기다가 무슨 뭘 써주고 돈을 받고 해 가지고 상당히 발전하는 신흥종교가 있는데요.
제가 그 내용을 잘 압니다만은 차마 제 입으로 거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미륵보살이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먼저 출가를 하고 발심을 했다고 그럽니다. 석가보살이 용맹스럽게 부처님을 찬양하면서 일주일 동안 외발로 서가지고 잠을 안자고 부처님을 찬양할려고 해봐요. 얼마나 그게 힘들겠냐 말입니다. 그래서 9겁이라고 하는 오랜 시간을 껑충 뛰어서 먼저 성불을 하셨다.
그래 우리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나서 그 게송을 읊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 나오는 찬패입니다. 그것을 또 다른 말씀으로는 범성이라고 그러죠. 범성 또 범패 하기도 하고 그걸 또 달리는 ‘어산’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요즈음 하는 축원은 “앙고 시방세 제망중중 云云---”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고요 부처님 당시에는 어떻게 했는가 하면 제자들이 반드시 일정기간에는 부처님을 찾아 뵙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거 정례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너무 떨어져 살면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소지가 있으니까 그렇게 부처님한테 찾아 갑니다.
가서 지금 오른 어깨를 드러내며 부처님께 절을 하고, 그 다음에 오른 쪽으로 세 바퀴 돌고 합장을 하고 한곁에 서 있으면 부처님 말씀이 “먼길 오느라고 고생은 안했느냐” 첫째 그걸 묻습니다.둘째 걸식 생활을 하니까 “걸식하는데 괴롭지 않았느냐?” 곧 배는 곯지 않았느냐 그 말씀이죠 “걸식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느냐? 그 다음에 건강은 어떻겠느냐? 그 세가지를 묻습니다.
그것이 축원입니다.그리고 신도들한테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공양을 받지요 공양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당신 집안의 하는 사업이 잘되고 두번째는 모두 건강하고 가정이 화합하시오” 그 세가지를 말씀을 합니다.
그것을 축원이라 그래요, 안부를 묻는다든지 자기 가정이 이렇게 이렇게(되도록 내가)기원을 한다. 그것을 축원이라 했는데 요즈음에는 뭐 신도들이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마음 먹은 대로 잘되오.
그걸 이제 축원이라 그러죠 그러니까 찬패는 법당에서 의식을 할 때에 그 의식에 맞는소리 그래서 스님네는 스님네 음성이 따로 있단 말씀이죠. 그런데 사회 사람들이 노래 부르듯이 그렇게 해 가지고는 안 맞거든 찬패라 하는게 부처님께 찬양하는 것, 그 다음에 축원은 신도들을 위한다든지 자기를 위해서 바람 같은 것을 축원이라 그럽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네께 지성귀의 하옵나니--’ 하는 그것도 설봉의존 스님의 제자인 이산교연 스님이 지은 발원문인데 그런 것도 축원에 속합니다. 자 그런걸 할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須誦文觀義]언정 (수송문관의)
그것도 조건부사가 붙었죠.
반드시 송문관의 입니다. 글을 읽고 거기에 따른 의미를 관찰을 해야된다. 의미를 알고 해야되지, 말만, 음성만 해서는 안된다, 송문관의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 하나하나를 보면서 그 의미를 알아야지 ‘관의’의관은 ‘관삼륜청정’의 관하고 같은 의미로 보면 됩니다. 앞에 관삼륜청정이 나왔지요. 여기 지금 ‘관의’의 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의를 자세히 살펴서 알아야 된다. 말만 해 가지고는 안된단 말이죠.
[不得但隨音聲]하며 (부득단수의성)
다만 음성만 따르지 말고 소리만 질러서는 안된단 말이래요. 소리만 내가지고는 안된다. 그 의미를 알아야된다.
[不得韻曲不調]하며 (부득운곡부조)
곡조가 틀리게 하지말고, 높이할 때는 높게하고 낮게할 때는 낮게 해야지 다른 사람이 높게하는데 자기는 낮게하고 그러면 불협 화음이 되니까 안된단 말씀이죠. 그러니까 음성을 맞추라 이겁니다.
음성을. 韻曲은 곡조인데 음성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음성을 맞추라. ... 다른 사람은 ‘시방’하는데 나는 ‘삼세’한다든지 그래가지고는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음성을 맞추어야 하고 운곡이 고르지않게 하지 말며, 곧 음성을 맞추라, 곡조가 맞도록 해라.
[瞻敬尊顔]하사와 (첨경존안)
여기의 존안은 聖顔, 다른 표현으로 하면 성안 성인성자 聖, 얼굴안자 顔
곧 부처님이나 보살상을 말합니다. 또 한가지 탱화 있죠, 부처님의 등상불이나 탱화, 그것을 말합니다. 聖顔이라 하는데 성은 부처님을 가리키죠. 또 보살 얼굴도 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瞻敬(첨경)이니까 부처님 얼굴만 주시하고, 그것은 아주 거기에는 공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 顔을 우러러 공경해서. 첨은 우러러 본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첨앙이라고 그러죠. 우러를 仰자. 경은 尊敬입니다. 恭敬(공경). 부처님 얼굴이나 탱화 거기에만 눈을 집중하고 또 공경스러운 자세로 임해야 된다.
[不得攀緣異境]이어다 (부득반연이경)
옆으로 이것 저것 살펴서는 안되는 것이다.
攀緣(반연)은 살펴본다는 얘기입니다. 본래 반연이란 것이 다른데 끌린다는 말인데, 다른 곳에 끌린다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이것 저것 곁눈질을 해서 부처님 얼굴만 보지 않고, 한 군데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마음이 흐트러져, 마음이 흐트러지니까 이것도 쳐다보고 저것도 쳐다보고, 이렇게 산만하게 예경을 해서는안되는것이다.
다른 경계, 그 異境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법당에 들어가면 중앙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죠. 이 통도사만은 뒤에 보궁이, 사리가 계시기 때문에 불상을 안 모셨는데, 이것은 특수한 경우고요. 대부분 불상이 모셔져있는데 그 불상만 주의해야지 딴데 가 가지고 이걸 본다든지, 자기 도반을 본다든지 뒤에 무슨 다른 물건을 본다든지 하는 것을 ‘異境’이라 그랬는데, ‘異’자는 다른 異자도 되지만 ‘많을 多(다)자’의 의미도 됩니다. 많을 多자. 그러면 곧 이것 저것을 반연, 이것 저것에 끌리면 안된다, 이것저것을 봐서도 안된다. 그런 해석이 가능하죠. 그것이 이제 예할 때의 자세입니다.
<讚唄祝願에서부터 ‘韻曲不調까지는> 의식을 할 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을 말씀하셨고. 예경드리니까. 지금 법당에 가서 예배할 때니까, 부처님만 주시하고 그것도 공경스러운 자세, 자기 몸과 입과 생각을 가다듬어서 해야되지 흐트러진 자세에서 함부로 예배드리면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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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
네~~감사합니다 공부 잘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