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도로에서 "쇼를 하라!" 라는 문구를 달고 다니는 버스를 종종 보는 수가 있다. 처음에 그 글귀를 발견하였을 때 조금 놀랐다. 획기적인 단어를 광고로 사용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그 광고를 방영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가 있는데 발상이 기발하고 독특하여 시선을 강하게 끌어 당겼다.
우리사회에서 '쇼'가 어떤 의미였는가? 쇼는 약간 경망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유교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 민족에게 쇼란 뭔가 가벼운 것 또는 우스운 것 것으로 간주돼 왔었다. 점잖고 품위 있는 사람보다는 좀 촐랑거리는 사람이 쇼라는 단어에 더 어울릴 것 은 문화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쇼를 하라” 란 단어는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점잖거나 정연한 질서 위주의 사회가 계속 될 수 없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기도 한다. 고지식하고 성실한, 또는 순차적인 질서의식을 가진 사회에 돌을 던져 일파만파로 동심원을 만들어 내고 그 동그라미로 인해 구성의 중심이 타인이 아닌 바로 자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구심력이란 무엇일까. 권력을 향한 야심일수도 있고 명예를 위한 마음 향함일수도 있다.
역사를 이끌어온 선조들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쇼맨십을 읽을 수가 있는데 그 쇼맨십은 그의 인생을 더 풍부하게 하기도 하고 낭만을 더해 주기도 하지만 간혹은 일종의 변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변혁은 더러는 지탄받아야할 오류를 낳기도 하였다. 가까운 우리 역사에서도 질서나 고지식한 의식 속에 갇혀있던 사람들보다는 쇼맨십이 뛰어난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다 갔음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더욱이 21세기는 세계가 지구촌화 되면서 급변하고 있다. 인종이나 문화가 뒤섞이고 전통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이런 다양성의 시대에 변혁은 불가분한 것 같다. 변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살아남느냐 아니면 먹히느냐가 정해지는 것이다. 사회에는 늘 변혁이 있었다. 그리고 중심이 있었다. 그 변혁과 중심에서 누가 더 유연하느냐 또는 누가 더 창의력과 행동력이 있느냐에 따라서 주인이 되고 구속자가 되어 왔던 것이다.
거리를 흐르고 있는 “ 쇼를 하라” 의 문구는 이제 이 시대가 눈에 보이는 물질의 경쟁시대를 넘어서 의식과 아이디어의 경쟁시대에 들어섰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다. 질서의 무너짐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한 적응! 이런 중요한 사회적 현상을 단지 몇 마디로 광고가 가능할 정도로 이제 사회는 변화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 무한 경쟁의 전방에 서야 할지 모른다.
지구상에 이제 더 이상 미지의 땅이 존재하지 않듯이 고정된 관념도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 고정관념이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대에 필요 없는 것으로 매도당하는 이유는 그 관념으로는 이제 더 이상 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대응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빌 게이츠가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질서에 전전 긍긍 했다면 컴퓨터가 이토록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미국이 경제적 대국이 되는 데에 일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수빈이나 측천무후가 사회 질서나 순리에 순응하기만 했다면 그 존재를 역사에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한 이유는 그들이 닫혀 진 사고 속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반드시 바람직한 인간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이 갖고 있던 질서에 대한 의식이나 기발한 행위가 인간성의 다양성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욱이 변혁의 시대이고 모든 관념과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이다. 언제 어느 때 무엇이 부각될지 모르는 시대이기에 우리는 생각의 영역에서 거리낌 없는 자유로움을 가져야 한다. “쇼를 하라”는 문구를 읽고 있으면 현 시대상황이 압축되어 표현돼 있다는 것을 느낀다.
쇼를 하라! 삶 자체가 사실은 쇼이다. 우리가 정해진 길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사실 삶에 무슨 그리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일탈이나 변혁 그리고 끊임없는 “쇼”를 하면서 삶을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야 진정한 삶을 산다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거기다 변화무쌍한 도전 정신이 있다면 그 정신은 예측불허의 삶을 잉태하고 그 속에서 21세기의 특징인 예상 밖의 새로운 길이 제시되는 것이다.
역사를 둘러보면 우리의 삶이란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60년, 70년이 길고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지만 지나고 보면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고 수많은 현자들이 외쳐왔다. 그들은 우리의 일생이 긴 역사 속에서 짧은 한 토막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 이 시대도 한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이 시대의 의식이 어디로 흐르는 지를 다소나마 알았다면 여기에 어떻게 맞추어 나갈 것인지도 다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른 방법으로 삶을 살아보라. 즉 춤을 추어 보라! 쇼를 하듯이 춤을 추어보라! 춤이나 쇼나 같은 맥락이다. 현대의 “쇼” 의식이 우리 피부에 와 닿거든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춤을 추라. 아니면 캘리포니아 바닷가에서 파도와 바람 속에서 춤을 배운 이사도라 던컨처럼 춤을 추라. 아니면 자유를 위하여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홍신자 처럼 춤을 추라. 춤은 자유를 의미한다. 춤은 영혼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늘 의식이 깨어 있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넓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춤을 추다보면 우리가 쇼를 해야 하는 이유도 더욱 선명히 알 수가 있으리라. 조르바가 삶의 기쁨에 넘쳐서 몇 시간이고 홀로 춤을 추듯이, 이사도라가 자연의 사랑과 위대함에서 자유로움을 발견하였듯이, 또는 홍신자가 자유를 위하여 힘겨운 구도의 길을 떠났듯이, 쇼를 하고 그 쇼 속에서 삶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새로운 기쁨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21세기를 제대로 살아 갈 수가 있으리라. 이 세기가 끊임없는 생존경쟁과 신자본주의의 압박을 받고 있어도 그 속에서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다면, 우리는 21세기에 이끌려 가는 사람이 아니라 21세기를 이끄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인생을 쇼를 하듯이 적극적이고 동적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나는 늘 아이들에게 시킨답니다, 쇼를 하라, 아니 친구 후배들에게도 그러지요 쇼를 하라 그래야 먹혀들고 좀 관심을 주는 사회가 아닙니까 고지식하게 자신만 옳다고 아집 부리는 시대는 이미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쇼를 하란 말을 잘합니다,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의 쇼는 필요합니다. 소후님 글참좋으네요
첫댓글 바빠서 읽지 못하고 나가지만 왜 안오셨어요, 아우님, 내가 소후님 글 좋아하는 것 알지요, 동인지 접수 좀 해주세요, 이제 말일까지 입니다, 이따가 읽어 볼께요 ^^
열린 사고 방식을 가졌고 또래 보다는 앞서간다고 자부하지만 나이라는 한계는 쇼를 하기에는 불가능하네요, 너무도 빨리 변하고 진보하는 세대에 이제는 안간힘 접고 자식들에게 쇼하는 영역을 넘겨주었어요, 오랫만
나는 늘 아이들에게 시킨답니다, 쇼를 하라, 아니 친구 후배들에게도 그러지요 쇼를 하라 그래야 먹혀들고 좀 관심을 주는 사회가 아닙니까 고지식하게 자신만 옳다고 아집 부리는 시대는 이미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쇼를 하란 말을 잘합니다,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의 쇼는 필요합니다. 소후님 글참좋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