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성(賜姓)과 관향(貫鄕)
우리 鄭氏는
西紀 32년(儒理王 9 壬辰)봄에 鄭氏로 하사(下賜 : 나라에서 내린것)받았으니
시조(始祖) 낙랑후(樂浪侯)의 玄孫 휘동충(諱東沖)(新羅使臣으로 동옥저(東沃沮)와의
수호조약체결주역(修好條約締結主役))의 年代이다.
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고 가계(家系)의 그 자체(自體)를 本位로 한 칭호(稱號)로서
동양윤리(東洋倫理)의 근원(根源)이니 신라(新羅)에는 王孫의 후예(後裔)인
박석금(朴昔金)의 三姓과 육촌장(六村長) 後裔인 李ㆍ崔ㆍ鄭ㆍ孫ㆍ裵ㆍ薛의 六姓이
처음으로 발원(發源)하였다.
姓氏의 유래(由來)를 살펴볼 때 姓은
천강성(天降姓)과
사성(賜姓)
토성(土姓)
속성(屬姓)
입성(入姓) 等으로 區分할 수 있으며
우리의 姓은 始祖의 세덕(世德)에 따른 賜姓으로서 의의(意義)가 깊은 것이다.
姓에 따른 관향(貫鄕)(本貫 또는 本이라고도 함)은 그 시초(始初)를 말한 것으로
누구나 삶의 故鄕인 세거지(世居地)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온 것이 통례(通例)이다.
姓氏만으로는 혈족(血族)을 區分하기가 어려움으로 貫鄕이 필요한 것이며
우리 鄭氏는 始祖의 종사(宗嗣)의 긍지(矜持)를 지녀왔으며
화산(花山)과 자산진지촌(?山珍支村)이 발상지(發祥地)이므로
貫鄕을 경주(慶州)라 하였고
始祖 지백호공(智伯虎公) 後裔로서 本貫을 달리한
영일(迎日)
동래(東萊)
온양(溫陽)
초계(草溪)
함평(咸平)
하동(河東)
나주(羅州)
봉화(奉化)
진주(晋州)
진양(晋陽)等 무려 120餘貫이고
但 서산(瑞山) 랑야(琅?)는 始祖를 달리하고 있다.
◈ 정씨(鄭氏)의 연원(淵源)
시조(始祖)의 조기(肇基)
始祖 낙랑후(樂浪侯) 지백호공(智伯虎公)은
紀元前 117年(한무제원수(漢武帝元狩) 6年甲子) 경주(慶州)의 화산(花山)에 강임(降臨)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육부지조개종천이강(六部之祖皆從天而降))하여
부족국가(部族國家)이더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진한국(辰韓國) 사려동남(斯?東南)의
자산진지촌장(?山珍支村長)(慶州市 一部와 慶州郡 外東邑과 舊內東面一帶)이 되었다.
公은 五村長과 더불어 六村을 분거(分據)하여 다스리며 부족(部族)의 연맹(聯盟)을 이룩하여 왔고
西紀前 69年(한선제지절원년임자(漢宣帝地節元年壬子))三月一日 에 五村長과 함께 알천(閼川)에서
會議를 하던 가운데 양산록(楊山麓)의 나정(蘿井)옆 임간(林間)에 서기(瑞氣)가 광천(光天)하고
백마(白馬)가 궤시(?嘶)하는 모습을 망견(望見)한 六村長은 그곳에 가서 보니 白馬는 불현(不見)하고
자란(紫卵)(검붉은 알)속에서 한 동자(童子 )를 얻었다.
六村長은 의논(議論)끝에 그 동자(童子)를 고허촌장(古墟村長)으로 하여금 거두어 기르게 하였든바
영특(英特)함과 재성(才性)이 비범(非凡)하였고 13年뒤에는 국량(局量)이 관홍(寬弘)할뿐 아니라
그 出生이 신기(神奇)하므로 紀元前 57年 한선제오봉원년갑자(漢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에
그를 王으로 추대(推戴)하였으나 그가 곧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이며 거서간(居西于)이라 하고
國號를 서나벌(徐羅伐)이라 하였다.
六村長은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모든 국가정책(國家政策)을 의결(議決)하였으니
이를 화백회의(和白會議)라 하였고 이 연맹(聯盟)의 호양지의(互讓至義)는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가 되어 왕도(王道)를 토착(土着)시켰다.
그後 西紀 32年(儒理王 9年 壬辰)봄에 자산진지촌(?山珍支村)을 本 彼部(六村을 六部로 昇格)로
개칭(改稱)하고 公을 낙랑후(樂浪侯)로 책봉(策封)하였으며(樂浪은 곧 朝鮮의 本地니
지금의 關西地方으로 東史와 신라왕세계보(新羅王世系譜)에 記錄됨)姓을 鄭氏로 하사(下賜)하였으니
公의 玄孫 동충(東沖)의 年代이며 그뒤 나라와 운명(運命)을 같이 하였다.
西紀 503年(智證王 4년 癸未)10月에 군신(群臣)의 주청(奏請)으로 國號를 新羅로 개칭(改稱)하였음은 新은 덕업(德業)이 일신(日新)하고 羅는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갖고 있으며 西紀 516年(法興王 3年 丙申)에 公은 문화(文和)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그後에 감문왕(甘文王)(西紀 656년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3年)으로 추봉(追封)되었다.
公은 한나라의 歷史를 창조(創造)한 원훈(元勳)으로 그 위대(偉大)한 공덕(功德)과 넓은 금도(襟度)와
겸손(謙遜)은 新羅의 국풍(國風)으로 이어 주었고 이 창업(創業)과 조기(肇基)는 후계세대(後繼世代)에
빛나는 긍지(矜持)를 갖게 하였다.
참고로 六村長의 諡號(시호) 및 추봉왕(追封王)을 다음과 같이 게재(揭載)한다.
順 位
순위 |
六 村 名
육 촌 명 |
村 長 諱
촌 장 휘 |
字
자 |
降臨地
강림지 |
六部改稱
육부개칭 |
諡 號
시 호 |
追封王號
추봉왕호 |
賜 姓
사 성 |
一 |
閼川楊山村
알천양산촌 |
謁 平
알 평 |
天 瑞
천 서 |
瓢 巖
표 암 |
及 梁 部
급 양 부 |
忠 憲 公
충 헌 공 |
恩 烈 王
은 렬 왕 |
李 氏
이 씨 |
二 |
突山古墟村
돌산고허촌 |
蘇伐都利
소벌도리 |
當 雲
당 운 |
兄 山
형 산 |
少 梁 部
소 량 부 |
忠 宣 公
충 선 공 |
文 烈 王
문 렬 왕 |
崔 氏
최 씨 |
三 |
?山珍支村
자산진지촌 |
智 伯 虎
지 백 호 |
仁 世
인 세 |
花 山
화 산 |
本 彼 部
본 피 부 |
文 和 公
문 화 공 |
甘 文 王
감 문 왕 |
鄭 氏
정 씨 |
四 |
茂山大樹林
무산대수촌 |
俱 禮 馬
구 례 마 |
景 雲
경 운 |
伊 山
이 산 |
漸 梁 部
점 량 부 |
忠 烈 王
충 렬 왕 |
文 義 王
문 의 왕 |
孫 氏
손 씨 |
五 |
錦山加利村
금산가리촌 |
祗 ?
지 타 |
葺 文
즙 문 |
明 活 山
명 활 산 |
漢 ? 部
한 저 부 |
文 讓 公
문 양 공 |
壯 烈 王
장 렬 왕 |
裵 氏
배 씨 |
六 |
明活山高耶村
명활산고야촌 |
虎 珍
호 진 |
白 揚
백 양 |
金 剛 山
금 강 산 |
習 比 部
습 비 부 |
武 信 公
무 신 공 |
壯 武 王
장 무 왕 |
薛 氏
설 씨 |
◈ 본적지(本籍地:本貫)의 연혁(沿革)
동래(東萊)는 옛날의 장산국(?山國)인데, 신라(新羅)가 정복(征服)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改稱)하였다.
고려조(高麗朝) 현종(顯宗) 때 울주(蔚州)에 소속(所屬)시켰으며, 조선조(朝鮮朝) 태조(太祖)때에는
진(鎭)을 설치(設置)하였고, 병마사(兵馬使)로 판현사(判顯事)를 겸(兼)하게 하였다.
세종(世宗) 때에는 절제사(節制使)로 바꾸었으며, 명종(明宗)때에는 현령(縣令)을 폐지(廢止)하고
부사(府使)를 두었다.
1914년 동래군(東萊郡)이 되었고, 1942년 동래군(東萊郡)의 주읍(主邑)인 동래읍(東萊邑) 및
남면(南面), 사하면(沙下面)과 북면(北面)의 장전리(長箭里)?반곡리(盤谷里)의 2리(二里)가
부산(釜山)에 편입(編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主要) 성씨(姓氏)는 정(鄭)?김(金)?판(判)?송(宋)?정(丁)?조씨(曺氏)등이다
◈ 동래정씨(東萊鄭氏) 파명록(派名錄)
교서랑공(校書郞公) 보파(輔派) :
전서공(典書公) ==규파(規派)?
설학재공(雪壑齋公) ==구파(矩派)?
문경공(文景公) ==흠지파(欽之派)?
참의공(參議公) ==절파(節派)?
평리공(評理公) ==리파(釐派)?
참판공(?判公) ==개보파(介保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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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사공(詹事公) 필파(弼派) :
호군공(護軍公) ==회종파(會宗派)?//윤창파(允昌派)?
수찬공(修撰公) ==옹파(雍派)?
직제학공(直提學公) ==사파(賜派)?
참봉공(?奉公) ==급파(伋派)?
대호군공(大護軍公) ==인파(絪派) 등이다.
◈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와 변천(變遷)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상계(上系)가 살았던 곳은 짐작(斟酌)하기 어려우나,
"경신보(庚申譜)”에 보면 12세(十二世) 정규(鄭規)의 자손(子孫)들은
충남(忠南) 천원(天原)의 직산(稷山)과 전북(全北) 정읍(井邑)의 태인(泰仁)을 세천지(世遷地)로
지키고 있으므로, 이 무렵부터 이 지역(地域)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던 것 같다.
20세(二十世) 이후에는 천원(天原)의 목천(木川)?경북(慶北) 성주(星州)?경남(慶南) 양산(梁山)?
동래(東萊)의 기장(機張) 등지(等地)에도 일부 자손들이 터를 굳혔다고 보여진다.
12세(十二世) 정구(鄭矩)의 자손(子孫)들은
양주(楊州)?수원(水原) 등 경기지역(京畿地域)에서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그중에서 일부는 경북(慶北) 성주(星州)로 옮겨갔으며, 일부는 청도(淸道)에,
또 다른 일부는 칠곡(漆谷)의 인동(仁同)에 세거(世居)의 터를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5세(十五世) 정예운(鄭禮耘)?정형운(鄭亨耘)의 대(代)를 전후(前後)하여
대구(大邱)?경산(慶山)?함양(咸陽)의 안의(安義)?합천(陜川)의 초계(草溪)?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여주(驪州) 등지(等地)에도 자손들이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12세(十二世) 정부(鄭符)의 자손(子孫)들은,
15세(十五世) 정우(鄭?)의 대(代) 이래로 경북(慶北) 상주(尙州)?군위(軍威)?의흥(義興),
전라도(全羅道) 함평(咸平)?충남(忠南) 천원(天原)?천안(天安) 등지(等地)에 정착(定着)하였으며,
19세손(十九世孫) 정종경(鄭宗慶)?정인경(鄭麟慶)의 대(代)에 와서,
일부가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신천(信川) 등지(等地)로 옮겨가
그곳에서 세거(世居)했다고 믿어지고,
19세(十九世) 정유(鄭?)의 후계(後系)는
충북(忠北) 충주(忠州)에서 살았던 것 같다.
한편 12세(十二世) 정절(鄭節)의 자손(子孫)들은
양주(楊州)?포천(抱川) 등 경기지역(京畿地域)에서 많이 살았고,
18세(十八世) 정치소(鄭致韶)의 대(代) 이후에 일부가 경남(慶南) 양산(梁山)에 가 정착(定着)하였다.
12세(十二世) 정인보(鄭仁保)의 자손(子孫)들은,
16세(十六世) 정익(鄭益)이래로 충북(忠北) 청주(淸州)에 많이 살았고,
13세(十三)世 정개보(鄭介保)의 자손들은
16세(十六世) 정귀로(鄭龜老)의 대(代)부터 2대(二代)에 걸쳐 경주(慶州)?경산(慶山)의
하양(河陽)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10세(十世) 정승원(鄭承源)의 자손(子孫)들은
경북(慶北) 예천(醴泉)의 용궁(龍宮) 등지(等地)에 세거(世居)하다가,
16세(十六世) 정철(鄭哲)의 후계(後系)가 함남(咸南) 함흥(咸興)으로 옮겨갔고,
14세(十四世) 정사주(鄭師周)의 후계(後系)는
경북(慶北) 상주(尙州)에,
16세(十六世) 정세겸(鄭世謙) 이래(以來) 전북(全北) 임실(任實) 등지(等地)에 정착하였으며,
11세(十一世) 정인(鄭絪)의 자손(子孫)들은
전북(全北) 김제(金堤)?전주(全州) 등지(等地)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9세(九世) 정태숙(鄭泰淑)의 자손(子孫)들은,
관향(貫鄕)인 동래(東萊)?기장(機張) 등지에 세거(世居)하였다.
1930년 당시(當時) 동래정씨(東萊鄭氏)는
강원도(江原道) 이천군(伊川郡) 판교면(板橋面),
충북(忠北) 청원군(淸原郡) 남일면(南一面),
전북(全北) 김제군(金堤郡) 월촌면(月村面),
경북(慶北) 군위군(軍威郡) 효령면(孝令面),
청도군(淸道郡) 화양면(華陽面),
상주군(尙州郡) 청리면(靑里面),
예천군(醴泉郡) 풍양면(豊壤面),
경남(慶南) 산청군(山淸郡) 생초면(生草面),
거창군(居昌郡) 남상면(南上面)?남하면(南下面),
제주도(濟州道)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리(涯月里) 등지(等地)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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