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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터넷로고스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David
1. 日本의 연중행사
일본의 행사는 대개 한국이나 중국에서 왔는데, 그 가운데 몇 개는 이미 없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아직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를 한다.
【설날】1월 1일은, 새해의 첫날로서 설날 혹은 원단이라고 하여,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다. 더구나 1일·2일·3일을 특히 「산가니치」라고 하여,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일을 쉬고 신년의 출발을 축하한다. 이 기간은 도시에 일하러 나가 있던 젊은이들도 고향으로 돌아가 신년을 축하하고, 산가니치의 아침은 가족들이 모여, 도소술을 마시고, 떡국을 먹는 습관이 있다.
옛날에는 각자의 집 문에 인줄을 치고, 소나무 장식을 설치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로 만든 카도마츠를 장식한다. 소나무 장식 기간을 마츠노우치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카도마츠를 세우는 집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하츠모우데】설날 아침에, 새해에 1년 동안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고, 유명한 신사와 사원에 참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하츠모우데를 하기 위하여, 전날 밤부터 집을 출발해서, 1월 1일 0시를 기해서 참배하는 사람들로 신사나 사원은 붐비고 아름다운 나들이 옷 차림의 여성도 섞여서, 정말로 설날다운 광경이다. 전차나 버스도 철야 운행하여 서비스할 정도이다.
최근의 하츠모우데는 종교적인 동기에서라기보다도, 가족이나 친구들이 서로 만나, 피크닉을 가는 감각에 가깝다. 신사나 사원은 1일에서 3일까지 종일,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츠봉】입춘 전날을 말하며, 해에 따라 날짜는 다르지만, 대개 2월 3일 전후이다. 세츠봉날 밤에는 각 가정에서 「귀신은 밖으로, 복은 안으로」라고 외치는 소리와, 집 안팎으로 콩을 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행사는 계절이 바뀔 즈음 「귀신(사악한 것이나 불행)은 집 밖으로 나가고, 복(행운이나 행복)은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다. 콩을 뿌린 다음, 남은 콩을 가족 전원이, 각기 자신의 나이만큼 먹기도 한다.
【히나마츠리】히나마츠리는 3월 3일에 행해지는 여자 아이의 명절로 「복숭아 명절」이라고 한다. 여자 아이의 장래의 행복을 기원하는 축제이다.
【단오절】단오절은 남자 아이의 축일이다. 남자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축제이다. 남자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갑옷에 투구를 쓴 5월 인형을 장식하고, 집 밖에 잉어 모양을 걸어 세우고, 창포나 찰떡으로 그 아이의 입신출세를 기원한다.
【칠석】7월 7일밤, 은하수를 끼고 빛나는 두 개의 별, 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한 번 이 날에 만난다고 하는 중국에서 전해온 전설을 기초로, 일본에서는 탄자쿠에 원하는 것을 써서 오리가미나 색종이 등과 함께 대나무 가지에 장식해서 붙이는 풍습이 남아 있다.
【오봉】불교의 전설에 의하면, 석가의 제자 한 사람이 죽은 어머니가 지옥에 떨어져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구하기 위해, 공양을 한 것에서 유래한다. 8월 13일부터 15일 사이에, 각 가정에서는 불단에 재물을 바치고 조상의 영을 위로한다.
오봉 날 밤에는 각지에서, 근처 사람들이 모여, 피리나 북에 맞추어 윤무를 즐기고, 폭죽도 쏘아 올려, 여름의 풍물시를 펼친다. 이 기간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일제히 고향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도시는 교통 체증도 없고 평온을 되찾는다.
【시치고상】시치고상은 달력 나이로 3세와 5세의 남자 아이, 3세와 7세의 여자 아이에게 나들이 옷을 입혀서 신사에 참배하는 축하일로, 11월 15일에 행해진다. 에도시대의 무가사회의 관습이 일반화된 것으로, 당시 무가의 자녀는 3세에 남녀 모두 처음으로 머리를 늘어뜨리는 「카미오케의 의식」을 행하고, 그 후 남아는 5세가 되면 처음으로 하카마를 입는 「하카마의 의식」여아는 7세가 되면 처음으로 히모(띠)를 풀로 정식으로 오비(띠)를 하는 「띠풀기 의식」을 행하였다.
【오마츠리(축제)】1년내내, 전국 어딘가에서 축제가 행해지고 있을 정도로 일본인은 축제를 좋아하는데, 특히 봄은 풍작을 기원하고, 가을은 수확을 즐거워하는 등, 농업국이었던 옛날의 잔재가 마츠리로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시대와 함께 마츠리의 전후 사정이 변해서 지금은 마츠리에 참가하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일종의 레크레이션으로서 취급하고 있고, 관광화되고 있다. 마츠리에서는 신체를 안치한 가마를 많은 사람들이 메고 발을 맞추어 걷고, 흔들면서 위세를 더한다.
바야흐로 도시에서도, 동단위로 가마를 메고, 발을 맞추어 걷는 등, 축제가 되면 은일본이 축제로 들뜬다.
【단풍놀이】봄에는 하나미와 같이, 벚꽃이 필 때, 떠들썩한 잔치로서 자연에 친해진다고 한다면, 가을에는 단풍놀이와 같이 나무들이 단풍이 들 때, 그 색채의 변화를 조용히 즐기는 것이라고 하면 되겠다. 일본인들은 한편으로는 일벌이라고 야유받을 정도로 열심히 근로에 전념하는 반면, 생활속에 자연을 잘 융화시켜 즐기는 여유도 갖고 있다.
【섣달그믐】12월 31일의 별칭인데, 일년의 마지막 날로서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제까지 1년간의 대차 관계는 이날에 청산하는 습관이 있고, 특히 상인들에게 있어서는 해를 넘길 수 있을지 어떨지는 분명히 이 날의 수금 여하에 달려 있다. 또 1년의 최대 이벤트인 설날을 맞을 준비를 하는 최종일에 해당되므로 여러 가지로 바쁘다. 집의 대청소를 끝내고, 설날의 장식물인 시메나와나 소나무 장식을 하며, 집에 따라서는 카도마츠도 세운다.
섣달그믐날 밤은 심야까지 깨어있어, 가까운 사원에서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무사히 1년을 보낸 것을 가족전원이 서로 기뻐하고, 송구영신의 메밀국수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끝나면 가까운 신사나 사원에 첫 참배를 하는 사람도 있다.
2. 日本의 性씨
지금부터 100년 이상이나 전의 오래된 문서를 보면, 농민이나 장사꾼의 이름에는 성씨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에도시대(1603∼1867)의 인별장(지금의 호적부와 같은 것. 그 마을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던 가가 쓰여져 있다.) 등을 보면, 성씨와 이름이 양쪽 다 쓰여져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베」라든가 「한스케」 등이라고 이름만 쓰여져 있다.
에도시대 말까지, 정식적으로 성씨를 붙일 수 있었던 사람은, 무사나 혹은 특별히 허락된 사람들(예를 들면, 대상인이나 마을의 유력자 등)뿐이었다.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묘지타이토를 허락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매우 명예롭게 생각했다. 이것은 이 시대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사는 특별히 훌륭하다. 농민이나 상인이 그 무사와 같이 성을 붙이는 것은 무례하다."
사·농·공·상이라고 하는 신분상의 규칙은 이러한 작은 것에까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농민이나 상공인 사이에서도, 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오키」라고 하는 성씨를 가진 대지주의 소작인에 「타로사쿠」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사람은 정식적인 성은 없었지만, 사람들로부터는 「아오키노타로사쿠」등으로 불려졌다. 또, 큰 다리가 있는 마을에 살고 있던 「고해에」라고 하는 사람은 「오오하시노고헤에」라고 붙여진 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국민은 누구라도 성을 붙여도 좋다」라고 결정된 것은 1870년(메이지 3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앞장서서 성을 붙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거듭해서 「국민은 모두 성을 붙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는 명령을 1875년(메이지 8년)에 내렸다.
사람들은 어떤 성을 붙이면 좋을 지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아오키노타로사쿠」라든가 「오오하시노고헤에」등으로 불려졌던 사람이, 그대로 「아오키타로사쿠」라든가「오오하시노고헤에」 등으로 붙여졌던 일도 있었다. 또, 스스로 성을 붙일 수 없는 사람은, 마을 사무소의 관리 등에게 적당한 성을 선택해 받았던 일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입 앞에 소나무가 있기 때문에 「마츠시다」라고 붙이기도 하고, 산의 입구에 있기 ?문에 「야무기츠」라고 붙이기도 하고, 옛날의 유명한 무사의 이름을 따서 사카이·혼다·우에스기 등으로 했다.
또, 물고기나 야채의 이름만을 많이 붙인 마을도 있었다. 무사의 성씨에는, 지명에서 딴 것을 비롯하여, 절의 이름이나 직업이나, 식물의 이름 등에서 딴 것이 많다고 말해진다.
현재 일본인의 성은 컴퓨터를 통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성은 101, 733종이 이쏘, 이름은 150, 930종류가 있다. 또, 제일 많은 성씨는 「사토」이고 2위가 「스즈키」, 3위가 「타카하시」로 되어있다. 나자의 이름으로 가장 많은 것은 「히로시」, 2위가 「토시오」, 3위가 「요시오」의 한자에 의해 쓰는 방식은 387종이 있다고 한다. 여자의 이름으로서는 1위는 「요시코」, 2위는 「케이코」, 3위는 「카즈코」라고 하는 것이다.
성씨의 지역적인 분포를 보면, 「사토」는 토호쿠·홋카이도·칸토에 많고 「스즈키」는 칸토에 많다고 한다. 또, 「타카하시」는 동일본에서 츄코쿠·시코쿠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3. 日本의 國民性
일본인의 국민성의 특징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 가운데, 공통성이 있는 것을 몇 개 언급해 보자.
일본인이 몇 사람 모이면, 예를 들어 연령이라든가, 사회적 지위 등 어떤 기준에 의해 서로서열이 의식되고, 그것에 의해 생동양식도 영향을 받는다. 또 일본어는 경어가 매우 발달해 있지만, 이것은 일본인이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것에 의한 것이다.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입장과 동떨어진 행동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까 혹은 타인으로부터 어떻게 생각될까 등에 관해서 마음을 쓰고, 그것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일이 많다.
서양인은 자신의 의사나 의견을 직접 상대에게 부딪쳐 강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데 비해, 일본인은 상대의 기분이나 입장을 살피고, 그것도 고려해서 발언하거나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상대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행동을 기대한다. 더구나 일본인은, 승낙과 거절을 확실히 표명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들은 일본인이 단일 동질민족이고, 마찰을 피하려는 전통에서 오고 있다. 이것은 또 타인에 대한 야마에에도 연결된다.
일본인은,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존중한다. 건축이나 정원의 양식에서도, 일본에서는 자연을 그대로 살려 소재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관해서 미국 여류 사회학자, 프로렌스크라크혼은 「미국인이나 러시아인은 자연은 인간에 의해 정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멕시코의 농민은 인간은 자연에 굴복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비해, 일본인은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논술하고 있다.
4. 日本의 영화
일본영화는 1920년대 중반에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예술성을 찾기 시작한 이래, 1960년대 중반에 사양길로 접어들기까지 예술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였고 매우 융성하였다.
작픔을 보면 1926년의 衣笠貞之助 감독의 「미친여름」가 예술적으로 상당히 높은 경지로 끌어 올렸지만, 국제적으로 일본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 것은 1951년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쿠로자와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부터이다. 쿠로자와의 그랑프리 수상은, 1947년 수영으로 세계 기록을 수립한 古橋廣之進1949년 물리학자 유가와히테키가 노벨상 수상과 함께, 대전후 자신을 잃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밝은 희망을 안겨 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쿠로자와의 영화가, 남성적인 강인함, 늠름함, 훌륭함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었다면, 남자다운 남자를 전혀 그리지 않았던 대조적인 감독으로 미조구치겐지가 있다. 미조구치는 의지할 곳 없는 잘생긴 청년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여자가 그 남자를 극복해서 굳세게 살아가는 모습과, 장남 상속자인 형을 위해 형제자매가, 희생하게 되는 옛날 일본의 가족제도를 비판적으로 그렸다.
그는 195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사이카쿠이치다이온다」를 출품, 감독상을 수상했다. 다음 해 53년에는 「우게츠모노가타리」로 54년에는 「산쇼다유」로 계속해서 은상을 수상, 3년 연속 수상으로 일약 세계 무대에 뛰어 올랐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이후의 프랑스 영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 두사람과는 전혀 달리 일본의 소시민의 세계를 완벽하고 세련된 양식으로 그린 사람이 小津安二郞이다. 小津는 일본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 특히,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딸의 애정을 테마로 그렸다. 小津특유의 아름다운 구도의 영화를 「만추」, 「가을다운 날」 「東京物語」(토쿄모노가타리) 「꽁치의 맛」 등에서 볼 수 있다. 小津安二郞는 국제적인 상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영화인으로서 최초로 일본 예술원상을 수상하고,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가 죽은 후 , 1970년대에 미국에서 小津의 작품이 하나의 붐이 되어, 많은 작품이 상연되었다.
5. 일본의 꽃꽂이와 다도
【꽃꽂이】꽃꽂이의 역사는 이미 15세기경, 일본의 가옥에 토코노마라는 독특한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토코노마에 서화를 걸고 꽃꽂이를 장식해서 감상하는 것이 마음의 평온의 장이었다.
16세기경부터 다도가 번성하게 되자, 종래에 토코노마에 세우는 꽃으로서 장식하던 것에서 차석에 꽃꽂이로 장식하는 것으로 변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꽃꽂이에 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생명이 없는 철편·석고·유리 등을 소재로 해서, 그것에 생명감을 주고, 생명력이 있는 모양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전위적인 꽃꽂이가 생겨났다.
꽃꽂이의 기초기술로서는, 소재를 화기에 정착시키는 방법, 여분의 가지와 잎을 가르는 방법, 소재를 구부리는 법, 비뚤어진 것을 바로하는 법 등의 기법이 있다. 일찍이 일본에서는, 결혼전의 기호로서 여성이 꽃꽂이를 배우는 것이 일반적으로 행해져 왔지만, 오늘날에는 그것보다도 실내 장식의 하나로서, 또 생활을 즐기는 취미로서, 가볍게 생활속에 침투하고 있다.
【다도】일본인이 차를 사랑하게 된 것은, 9세기경 한국으로부터 전해지고 부터이다. 이윽고 주인이 손님을 불러, 차를 통해 대화하고, 마음을 교류시키는 다도로 발전해 왔다. 16세기 후반이 되어, 센노리큐라고 하는 사람이 다도를 완성시키고, 그 유과가 몇 개로 나누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도의 예법은 그 때문에 만들어진 감상가치가 있는 독특한 찻잔에, 향기짙은 차를 끓여 손님에게 권하는 방법이나, 손님이 이것을 삼가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서 이루어진다. 다도의 예법에서는 무사의 예법이나 노의 영향을 볼 수 있고, 이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예의작법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모양보다도 마음을 존중하고, 자기자신의 정성을 다해 손님 접대하는 것이 다도의 마음이라고 말하여진다.
6. 일본의 전통 연극
일본의 연극에는 긴 역사가 있지만, 전통적인 연극으로서, 14세기부터의 「노」, 17세기부터 「분라쿠」,, 「카부키」가 알려져 있다.
【노】지금부터 1000년 정도전, 한반도에서 아시아 대륙의 음악이 전해졌다. 그것을 「산가쿠」라고 한다. 이것이 「사루가쿠」가 되고, 이것과 「덴가쿠」에서 「노」가 생겼다. 일본 최고의 연극인 「노」는 무로마치시대에 칸아미·제아미부자에 의해 대성한 전통 예능이고, 특히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이것을 좋아해, 스스로 연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카부키」나 「분라쿠」가 서민들의 연극인 것에 대해, 「노」는 무사 계급의 것이었다. 에도시대에도 「노」는 다이묘들의 보호를 받아, 무사의 식락으로서 번성했다. 그 때문에, 메이지가 되어 무가사회가 폐지되자 「노」노 쇠퇴하는 운명을 감수하게 되었다. 관계자의 노력으로 뭔가 생명을 보존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고, 최근에는 고전 예능의 재발견의 기운도 있어, 젊은 사람들 사이에 애호자가 늘고 있다.
【분라쿠】카부키와 같이 근세 연극을 대표하는 분라쿠는 분라쿠좌에서 발상한 꼭두각시인형 연극의 명칭이고, 달리 인형 죠루리라고도 불려진다.
분라쿠의 기원은 무로마치시대에서도 에도시대로 이어지면서 게이항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완성되었다. 타유우·샤미센연주자가 기다유 죠루리를 연주하는데 맞추어 인형을 조정한다. 더구나 하나의 인형을 세사람이서 조정한다. 인형은 목·어깨·몸체·손으로 되어있고, 발은 원칙적으로 남자밖에 없다.
1m에서 1.5m의 크기이고, 무거운 것은 10㎏이나 된다. 분라쿠는 현재 중요 무형 문화재가 되어 인간 국보(문화재)로 몇 사람이 지정되어 있다.
【카부키】일본의 대표적인 서민연극이다. 1603년, 이즈모타이샤의 무녀였던 오쿠니라고 하는 여성이 쿄토에 나와 종교적인 염불춤을 사람들에게 보여,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그러나, 풍속을 흐트린다는 이유로 금지처분을 받고, 이윽고 남성만으로 연기하는 카부키로 변해간다.
오늘날의 카부키가 여자역도 여자모양을 한 남성으로 연기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카부키의 무대장치에는 화도나 회전무대 등 독특한 것이 있다. 화도는 무대를 향해 관객석을 가로질러 설치된 통로이다. 이것은 배우가 등장 퇴장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배우와 관객과의 교류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연극으로서의 성격을 말하면, 카부키는 음악극이고 무용극이다.
그 많은 작품이 샤미센 등에 의한 일본 고유음악을 반주로 하고, 대사에도 동작에도 독특한 음악적 리듬감이 요구된다. 그리고 생략·과장·형식화된 움직임이 하나로 창출되어, 근대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연극과는 크게 다르다. 카부키의 주제로는 옛날 귀족이나 무사의 세계를 그린 것과, 서민 생활을 그린 것 두 종류가 있다.
7. 일본에 온 한국 문화
일본의 각지에는 한반도에는 없는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3국의 이름을 사용한 고려신사·백제신사·신라신사 등이 많이 있다. 그것이 어떤 곳에서는 고마신사로 되고, 백제왕신사로 되고, 또 신라는 시라키, 시라기신사, 시라히게신사, 시라야마신사 등으로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일본 각지의 신사·신궁에 모셔져 있는 신들은 거의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없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신라 신사만 하더라도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의 신라신사, 기후현 타지미시의 신라신사, 효고현 히메지시의 신라신사, 아오모리현 하치노해시의 신라신사, 호쿠이현 이마조쵸의 신라신사, 미야기현 시바타군의 신라신사, 시가현 오오츠시의 신라신사, 카가와현 제츠우지시의 신라신사, 시마네현 오오다시의 한신신라신사 등의 9개가 있지만, 오오다시의 경우는 일부러 「한신」으로까지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시가현의 요고호반에 있던 신라신사나, 시즈오카현 카케가와시의 카라코에 있던 신라신사처럼, 최근에서야 다른 신사와 합사되어 폐지된 것을 더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지금은 사이타마현 이루마군 히다카마치로 되어 있는 구고려군 고려촌은 「속일본기」716년의 「스루가·카이·사가미·카즈사·시모우사·히타치·시모츠케 7국의 고려인 1799명이 무사시국으로 옮겨와 처음으로 고려군을 두었다.」라고 하는 기사가 아직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려 약광왕과 사루타히코를 제신으로 하는 고려신사가 있고, 궁사인 고려가는 지금 제59대째가 된다.
카나가와현, 오이소마치코마에 있는 고려산 남면 산기슭에 고래신사가 있다. 이 신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려사는 미나모토노요리토모가 막부를 카마쿠라에 열자 사가미의 대사로서 사람들로부터 존중받게 되고,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열게 되자, 그 경내는 영역으로서 정중히 보호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이 되자, 건물은 파괴되고 역사를 자랑하던 고려신사도 폐사되고 단지 신사만이 1895년(메이지 3년)에 고래신사로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토야마현 토나미시의 남방, 이나미마치타카세에 타카세신사와 타카세유적이 있다. 이 타카세신사도 원래는 고려신사이고, 그 고려가 전하여 「타카세」로 된 것임에 틀림없다. 또, 타카세유적은 1971년 발굴 조사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한국식 토기라고 하는 스에키와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쿄토시의 야사카신사와 법관사를 중심으로한 동쪽의 고려씨족에 대해서, 서쪽은 신라의 도래인인 하타씨족이 개척한 땅이다. 특히, 광륙사는 하타씨족의 우지테라였으므로, 여기에 일본 국보 제1호로 되어 있는 유명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나라의 동대사는 원래 금종사라고 해서, 신라에서 온 도래승인 신죠가 화엄경을 강연하였던 절이다. 지금 볼 수 있는 동대사는 752년 4월 9일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16.21m, 얼굴길이 4.8m라고 한다. 이것은 또 세계최대의 불상이다.
8. 일본의 와카와 하이쿠
【와카】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더구나 중세·근세·현세를 불문하고 많은 가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8세기에 편찬된 「만요슈」이다. 그 중에는 장가·단가가 포함되어 있고, 오늘날 즉 그 형식이 중시되고 있는 단가는 5음·7음·5음·7음·7음처럼 31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가의 형식이 언제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고대 가요의 세계에 애용되고, 정착하였는가는, 지금까지 확실하게는 해명되고 있지 않다. 천황의 명예 의해 공적으로 편찬된 노래집을 「쵸쿠센와카슈」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안에 뽑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명예롭게 생각되었다.
특히 헤이안(지금의 토쿄)에 수도가 있던 8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황실을 중심으로 귀족 사이에서 와카가 유행되었다. 내용은 거의 봄·여름·가을·이별의 노래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우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것도 공상이나 상상의 산물로서 차츰 만족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생겨나서, 12세기에 활약한 사이요처럼, 실제로 자연속에 묻혀서 읊은 노래가 존중받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단가는 쇠퇴하지 않고, 동인지나 외보를 중심으로 해서 작품의 발표가 행해지고 있고, 손쉽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문예로서 애용되고 있다.
【하이쿠】하이쿠는, 「홋쿠」를 노래하는 형식이 독립한 것으로 「오래된 연못에(5음) 개구리 뛰어드는 (7음) 물소리(5음)」(마츠오바쇼의 구)처럼, 세계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17음으로 구성하는 단시형 문학이다.
짧은 형식만으로, 짓는 내용은 필요없는 부분이 없고, 그것만으로도 풍부한 이미지인 것 요구된다. 그 때문에, 춘하추동 어느 것이나 계절을 나타내는 용어인 「키고」를 넣어서 짓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또, 그들 「키고」를 분류 정리한 「사이지키」가 널리 이용되고 있다.
하이쿠는 당초 「하이카이」라고 불려지는 코믹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차츰 예술성을 높이기 위하여 연마되었다. 17세기에 활약한 마츠오바쇼와 그 문인들, 18세기의 요사노부손, 코바야시잇사 등은 특기할 만한 가인들이다.
특히 사이교의 발자취를 연모해 각지를 여행한 바쇼의 「오쿠노호소미치」와 많은 기행문집은, 오늘날도 자주 읽히고 있다. 현대의 하이쿠는 여러 가지 개혁운동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큰 변화는 바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현상황이다.
9. 일본의 문학
【상대문학】많은 소국가가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던 1세기경부터 794년의 헤이안교 천도까지를 상대하고 한다. 이 시기의 문학 작품은 황실이나 민간으로 전해져 온 신화·전설·설화·가요 등을 천황중심의 국가체제의 확립이나 국가위력의 과시를 위도로 하여 편찬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코지키』와 『니혼쇼키』이다.
『코지키』는 전3권으로 구성되어, 상권은 신의 계보와 신화, 중권은 진무천황에서 오진천황, 하권은 닌토쿠천황에서 스이코천황까지의 서술이다. 텐무천황의 명에 의해 히에다노아레·오노야스마로가 712년에 완성했다. 또, 720년에 토네리신노 등이 편집한 것이 『니혼쇼키』(전30권)이다.
이어서 『만요슈』 탄생했다(759년 이후), 최고의 가요집인 만요슈는 전 20권이고, 오토모노야카모치가 중심이 되어 편찬했다.
8세기 중기부터 약 150년에 걸쳐, 위는 천황에서 아래는 무명의 민중까지 장가·단가 포함해 약 4,500수가 수록되어 있다. 가인 중에는 많은 도래인이 있었고, 도래인이 만든 노래도 많이 있다. 유명한 가인, 야마노우에노오쿠라도 도래인이라고 한다.
와카는, 만요가나라고 불리는 한자로 쓰여져 있지만, 이것은 한국어를 한자로 나타낸 방법(이두)을 흉내내어 만들어졌다.
【중고문학】794년에 헤이안쿄로 수도를 옮기고부터, 1192년에 카마쿠라막부가 열리기까지의 약 400년간을 중고라고 한다.
이 시대는 공식문서에 사용된 한문에 대해 생활에 있어서의 가나문자의 발달도 있어, 와카나 모노가타리 문학이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그 선두가 된 것이, 아름다운 처녀 카구야히메를 주인공으로 한 『타케토리모노가타리』이다.
또, 왕조문학의 걸작이라고 말해지는 『겐지모노가타리』는, 일본문학의 대표작으로서도 정평이 있다. 작자는, 무라사키시키부가 거의 정설로 되어 있고, 1010년경에 성립된, 전54첩( 첩 : 종이나 김을 세는 말로 1첩은 가로 35㎝·세로25㎝의 반지 20장)이라고 하는 대장편 소설이다. 천황의 아들이면서, 어머니가 신분이 낮은 여성이었기 때문에 신적에서 내려진 히카루겐지라고 하는 귀공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정편44첩과, 그 아들 카오루노키미를 주인공으로 하는 10첩으로 된, 궁정생활을 중심으로한 여성편력의 애정물이다.
【중세문학】1192년의 카마쿠라 막부의 성립에서, 1603년의 에도막부성립까지의 약400년간을 중세라고 한다.
중세는 동란의 시대이가. 이시기에 일어난 동란과 천재지변은, 사람들에게 불안을 주고, 그 불안에서 도피하려고 해서 사람들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수필로서는, 시정의 삶에 무상을 느끼고, 산가에 은거한 카모노쵸메이의 「호죠키」(13세기)와 신관의 집에 태어나서 출가하여,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한 요시다켄코의 「츠레즈레쿠사」등이 있다.
【근세문학】1603년 토쿠가와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열고부터, 토쿠가와요시노부가 대정봉환한, 1867년까지의 약260년 간을 근세라고 한다. 이 시기의 문학은, 에도나 오사카를 중심으로 번성한 상인문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무사를 대신하여 경제의 기반에 뿌리를 두고, 주도권을 뒤고 있던 자는 상인들 쪽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분로쿠노에키(임진왜란)와 케이쵸노에키(정유재란)때, 조선에서 갖고 온 금속활자와 잡아온 인쇄공·왈자공·제지공들에 의해, 인쇄 기술이 발달했다. 또, 출판업자·직업작가가 나타나, 당연히 상인의 문학, 읽을거리가 출판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이하라사이카쿠의 「우키요조우시」,「코쇼쿠이치다이오토코」와 치카마츠몬자에몽의 극작에 의한 죠루리·카부키,마츠오바쇼의 「오쿠노호소미치」등이 있다.
【근대문학】1868년 메이지원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1세기정도를 근재라고 부른다. 근재 문학의 여명은, 1882년(메이지 15년) 의 「신체시초」이다.
산문의 세계에서도, 1887년(메이지 20)에 「우키구모」가 후타바테이시메이에 의해 쓰여졌다. 이 소설은, 그때까지의 소설과 달리, 등장인물도 평범한 시민이고, 문체도 언문일치로, 확실히 신세대를 대표하는 느낌이었다.
【나츠메소세키】(1867∼1916) 영문학자로서 교직에 있던 나츠메소세키는, 39세로 작가활동을 개시했다 .소세키의 대표작으로서「나는 고양이 이다」「도련님」「풀베게」「행인」「마음」등이 있다.
【아쿠타가와류노스케】(1892∼) 허구의 세계에서 자기표출로 산 작가로서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있지만, 그는 장편에 전혀 손을 대지않고, 시종 단편작가로 통한 이색적인 존재이다. 대표작으로 「라쇼몽」「지옥변」「코」「토시꽅」 등이 있다.
【카와바타야스나리】(1899∼1972년) 1924년 창간된 「문예시대」에 의해, 신감각과 운동을 일으킨 카와바타야스나리의 대표작 『이즈의 춤추는 소녀』『설국』 등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야스나리는 196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미시마유키오】(1925∼1970) 『가면의 고백』『사랑의 갈증』『금각사』 등으로 작가적 지위를 확립한 미시마유키오는, 이론적인 문체와 치밀한 구성을 특색으로 한 픽션의 세계를 전개했다.
10. 일본의 신화
세계가 생긴 처음, 먼저 하늘과 땅이 완성되자, 그것과 함께 일본인의 선조인,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가, 타카마노하라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 후에,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신과 여신이 태어났다.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는 이 두신을 불러, 「일본을 만들어라!」고 했다. 그래서 이자나기·이자나미 남녀 두 신은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로부터 창을 받아 창을 바다에 넣어 휘저어 그것을 끌어올리자, 그 물방울이 굳어져서 섬이 되었다. 그 곳에 내려와 기둥을 세우고, 두 신은 기둥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아, 만난 곳에서 결혼을 하여, 차례차례로 섬을 낳았다.
나라가 완성되자, 이번에는 많은 신을 낳았다. 그것과 함께 바람의 신, 바다의 신, 산의 신, 들의 신, 강의 신, 불의 신을 낳았다. 그런데, 가엾게도 이자나미는 마지막 불의 신을 낳을 때에, 몸에 화상을 입어, 그 때문에 죽었다.
이자나기는 「아, 나의 처인 신이여! 저 하나의 아이 때문에 소중한 당신을 잃는다는 것은!」라고 말하고, 여신의 시신을 히바의 산에 장사지냈다.
이자나미는 황천의 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긴 칼을 뽑아, 여신의 재앙의 근원이 된 불의 신을 베어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신을 만나고 싶어, 새까만 황천의 나라까지 갔다. 이자나기는 암흑 속에서 소리쳐 부르기를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인 여신이여, 당신과 함께 만든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다. 제발 다시한번 돌아오렴」이라고 했다.
그러자 여신은 「그렇다면, 좀 더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벌써 더러운 불로 구운 것을 먹었기 때문에, 두 번다시 그 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오셨기 때문에, 하여간 황천의 신들에게 의논해 봅시다. 하지만 그 동안에, 결코 나의 모습을 보지마세요.」라고 하고, 어전으로 들어갔다.
이자나기는 오랫동안,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나미는 언제까지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자나기는, 이제 너무 오래 기다려 견딜 수 없어서, 드디어 어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신은 벌떡 일어나「아니, 드디어 내모습을 보셨군요. 이 얼마나 증오스러운 분이야!」라고 말하고, 곧 요기들을 불러「빨리, 저 신을 잡아 오너라」라고 명령했다.
이자나기는 귀신들에게 잡히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도망쳤다. 도망쳐서, 이 세계와 황천의 나라와의 경계까지 왔다. 그곳에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자나기는 그 복숭아 열매를 따서, 귀신들을 향해서 내던졌다. 그러자, 귀신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서둘러 몸을 씻으러 휴유가의 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아마테라스오오카미와 츠키요미노미코토와 스사노오노미코토 등을 낳았다. 이자나기는 이 세신을 보고,「아마테라스오오카미는 하늘로 올라가 타카마노하라를 다스려라. 츠키요미노미코토는 밤의 나라를 다스려라. 스사노오노미코토는 바다위를 다스려라.」라고 했다.
아마테라스오오카미와 츠키요미노미코토는, 이자나기의 명령에 따라, 각각 하늘과 밤의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스사노오노미코토만은, 이자나기의 명령을 듣지 않고, 언제까지나 지나도 바다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엉엉 울었다.
이자나기는, 그것을 보고,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불러 「도대체, 너는 내가 말하는 것도 듣지 않고, 무엇을 그렇게 미친 듯이 울고만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사노오노미코토는「나는 어머니가 계신 쪽으로 가고 싶어서 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자나기는 그 말을 듣자, 매우 화가 나서「나가.」라고 했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태연히 누님인 아마테라스오오카미가 살고 있는 타카노하라에 갔다. 그곳에서 난폭한 행동을 했다. 스사노오미코토의 난폭함에 놀란 아마테라스오오카미가 아메노이와야에 숨었다. 아마테라스오오카미가 숨었기 때문에, 천하가 어둡게 되었다. 신들은 의논해서, 물건을 장식하고, 우즈메노미코토에게 반나체로 춤추게 했다. 밖의 웃음소리에 이끌려서 아마체라스오오카미가 바위문을 조금 열었기 때문에, 타지카라오노미코토가 손으로 끄집어 내어,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신들은 의논해서,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난폭한 행동을 한 벌로서, 타카마노하라로부터 쫓아냈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이즈모나라로 갔다.
이즈모나라에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로 나누어져 있는 큰 뱀이 살고, 아가시를 차례로 먹기 때문에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술을 먹여 퇴치하여 살려준 아가씨와 결혼해서, 그대로 이즈모나라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