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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月刊文學 2014.3월호 발표]
번개탄
안 휘
“아니, 뭐라고? 그 친구가 왜?”
전화를 받던 아버지의 표정이 아연 굳어진다. 무슨 전화인데 저러실까? 나는 과자진열대 앞에서 일손을 멈추고 아버지를 뜨악하니 바라보았다. 심각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석처럼 굳어있다.
“그래, 알았어. 내 곧바로 서울역으로 갈게. 한 시간 뒤쯤에 거기에서 보자고.”
휴대폰을 끄면서 아버지는 긴 한숨까지 내쉬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어디에서 온 전화예요?”
“합정동이야.”
합정동에 사는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기동창 덕원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온 모양이다.
“안 좋은 일이세요? 무슨 전화를 받으셨기에……?”
“글쎄,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대전 동현이가 죽었다는구나.”
동현아저씨라면 아버지의 또 다른 동기동창 막역지우다. 아버지는 몇 안 되는 학교 동기들과 이따금씩 만나고 그리워하는 일을 낙으로 삼고 사는 분이다. 세 분은 최소한 일 년에 두세 번씩은 만나 서로 자기가 형이라고 우기며 티격태격 정을 나누는 죽마고우들이기도 하다.
“왜요? 편찮으시다는 소식 없었잖아요?”
몸피가 완강한 편인 동현아저씨는 칼칼한 성격이 슬쩍 엿보이는 그런 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늘 다정다감했다.
“그렇지, 나보다도 더 건강한 친군데 어쩌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갑작스레 죽는 일이 여전히 많은 세상에서, 들려오는 비보의 사유들로 따지면 교통사고만큼 잦은 횡액은 없지 싶어서 물었다.
“아니다. 집에서 자다가 그렇게 됐다는구나. 자세한 내막은 가서 들어봐야 알 것 같다. 그나마나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네.”
육십 대 중반에 머물고 있는 어른들이라 아버지의 말처럼 아직은 건강하게 살아있을 나이가 맞다. 언젠가 친구 분들끼리 집에서 함께 어울릴 때 보니까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주름이 성성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가득 담고 우스갯소리를 섞어 하하 껄껄거리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악동들이었다.
계산대 책상 앞에 잠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깊은 한숨을 한 번 더 쉬고 난 아버지는 힘없는 몸짓으로 가게 뒤쪽으로 난 여닫이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진열대로 돌아서서 과자봉지들이 빼곡한 상자를 뜯었다.
*
금요일 하오의 산동네 골목은 한적하다.
아버지가 누이와 나를 기르고 가르친 소득의 원천이 됐던 이 골목가게를 영 접지 못하는 것은 단지 돈벌이 때문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안다. 아버지는 이 가게를 오년 전 간경화로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영혼이 남아있는 성스러운 장소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가게 접는 일을 마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내다버리는 것만큼이나 끔찍스럽게 여긴다. 언젠가 친정에 온 누이가 이제 그만 가게 문을 닫자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단박에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이거마저 없으면 내가 무슨 재미로 사냐?
동네 입구에 이미 체인점 형태의 편의점이 두 개나 들어서 있다. 두어 정거장 나가면 대형마켓도 영업 중이다. 날로 떨어지는 매출로만 따져도 진작 문을 닫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가게에 손을 대는 일에 도통 엄두가 나지 않는 모습이다.
하긴 한 자리에서 무려 삽 십여 년을 생필품, 반찬거리를 팔며 살아왔으니 아버지의 미련이 무리는 아니다. 얼마 남아있지는 않지만, 아직은 단골들이 드문드문 찾아와 아버지와 말동무도 하고 추억도 함께 나누곤 한다. 우연히 지나치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들른 묵은 손님이라도 있었던 날이면 아버지는 홍조 띤 얼굴로 신이 나서 말한다. 아 글쎄, 코를 찔찔 흘리던 꼬마 녀석이 헌헌장부 청년이 되어서 나타났더구나.
전자제품 회사 영업사원으로 있던 내가 지난해에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들어앉았을 때, 벌레 씹은 표정을 짓던 누이와는 달리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래라. 젊은 날 조금 늦는 것은 괜찮다. 살다보면 너희들 나이의 몇 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좀 늦더라도 하고 싶은 일, 더 좋은 길을 찾아 시작하는 게 중요하지……. 돌아보니 아버지는 나의 선택을 막아선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세상 누구하고도 언쟁을 벌이거나 쉽게 대립하지 않는 성품이다. 항상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양보하는 편이다.
그러나 내 추억 속의 아버지는 결코 연약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 가족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키워내는 일 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를 품고 살아온 분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묵묵한 모습으로 소처럼 일만 하며 살았다. 누이와 내가 속상할 일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모진 지청구를 듣는 경우에도 끝내 참섭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가 슬며시 기분을 풀어주는 인자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 기둥이나 대들보 꼭 그 모습의 가장이었다.
미닫이 유리문 바깥 저 만큼에 색 바랜 노란 경승용차 한 대가 멈춘다. 습관적으로 누가 내리나 하고 바라보았다. 시동을 끈 차에서는 곧바로 사람이 내리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골목길에는 예전에 비해 통행차량이 많이 늘었다. 스피커를 단 장사꾼 차량들까지 하루에도 수십 대 씩 드나들며 방송을 해댄다. 대개의 경우 구멍가게에는 없는 생선이나 수입과일, 농산물 등이라 신경 쓸 일이 있지는 않다. 요즘은 전자제품을 수거한다고 방송하는 차량들이 주기적으로 지나가며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불러주는 똑같은 방송을 하는 게 좀 달라진 풍경이다.
아까부터 멈춰 서있던 낡은 승용차 문이 열리고, 키가 자그마한 여자가 내린다.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걸친 그녀는 차문을 닫은 뒤 우리 가게를 흘끔거리면서 주저주저하는 모습으로 골목을 서성거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초조해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뭔가를 하려고 하다가 망설이는 몸짓 같기도 했다. 삼십대 중반을 넘기지는 않은 듯 보이는 여자는 얼굴이 작았다. 그녀가 다시 우리 가게를 한 차례 흘끔 쳐다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의 주저주저하는 몸짓으로 뭔가를 고민하다가 다시 승용차 문을 열고 운전석 안으로 들어갔다. 시동이 곧 걸리지는 않았다.
저만치 보이는 놀이방 옆 연립주택 대문이 열리고, 하얀 벙어리장갑이 달린 빨간 털모자를 쓴 조그만 몸집의 아이 하나가 팔랑팔랑 달려온다. 세령이라던가…그런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앙증맞은 걸음걸이로 가게 앞으로 뛰어와서는 출입문을 곧바로 열지 않고 익숙한 몸짓으로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닫이문을 살며시 열자, 아이는 뒤로 두어 걸음 주춤주춤 물러나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더러 얼굴을 마주쳤는데도 내가 말을 걸지 않은 탓인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가야, 안녕? 뭐 줄까?”
대여섯 살은 된 것 같은데, 정확치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외양만 보고 나이를 가늠하는 게 참 쉽지 않은 세상이 됐다. 대개 조숙하고, 옷들을 워낙 잘 차려입으니 짐작이 쉽지 않다. 아이는 동그란 눈을 치뜨고 나를 쳐다보며 기다란 속눈썹을 달싹거렸다.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할아버지 안 계세요?”
귀엽고 또박한 음성이었다. 나는 얼굴에 웃음기를 담으며 말했다.
“응. 할아버지 어디 좀 가셨다. 할아버지 보러 왔니?”
아이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내가 더 활짝 웃어보였는데도 아이의 경계심은 줄어들지 않은 표정이었다.
“심부름 왔니?”
하긴 이 가게 안채에 살고 있긴 해도 아버지처럼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온 형편이 아닌 만큼, 낯설기로야 처음 본 사람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아이는 끝내 몸을 홱 돌려 제 집이 있는 놀이방 옆 연립주택 쪽으로 콩닥콩닥 뛰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출입문을 열고 서서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모자에 매달린 하얀색 니트 장갑이 나풀나풀 아이의 뒤를 좇으며 춤을 췄다. 해거름 골목의 적막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
노란색 승용차에 타고 있던 여자가 가게로 들어선 것은 저녁 일곱 시를 넘기고 나서 내가 막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늦더라도 오늘 밤 안으로 대전에서 올라오겠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직후이기도 했다. 건성으로 사귄 구색친구도 아니고, 그리도 서로 마음 맞아하던 벗의 부음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왜 출상까지 보지 않고 올라오시려는 것일까. 혹여 집에 왔다가 다시 내려가실 요량이신 걸까,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그 즈음에 여자는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와 가게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여자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작은 키에 어울리도록 동그랗고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굽 높은 빨간색 구두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번뇌가 깃든 흐린 그늘 한 자락을 단박에 읽어냈다. 잠시 기억의 갈피를 뒤졌지만, 일치되는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서 오세요. 뭐가 필요하십니까?”
가능한 친절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곧바로 뭔가를 말하려다가 꿀꺽 삼키고는 잠시 주춤거렸다. 나는 기다렸다. 이윽고 여자는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미안하지만, 소주 한 잔 먹고 갈 수 있을까요?”
왜 그랬을까?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진담으로 들려오지 않았다. 막연하나마 그녀가 이 골목가게를 찾아들어온 일이 고작 소주 때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그녀가 내뱉은 단어를 자꾸만 뭉개고 있었다.
가게 안 한쪽 귀퉁이에 세 사람 정도가 겨우 앉을 정도의 옹색한 테이블과 동그란 플라스틱 간이의자들이 있긴 했다. 아버지가 라면을 끓여서 끼니를 때우거나 낯익은 동네 어른들과 어쩌다가 한 번씩 스낵 안주에 소주 몇 잔씩을 나누기도 하는 곳이었다.
“안주가 부실할 텐데요.”
내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녀가 소주를 눈으로 찾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과자 매대 뒤쪽에서 소주 한 병을 집어다가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가 라면 매대 근처에서 땅콩이 함께 들어있는 오징어채 안주봉지를 뜯어왔다. 종이컵 하나를 챙겨서 테이블 위에 놓고는 계산대 쪽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로 엉거주춤 서서 우선 오징어채 안주봉지를 먼저 뜯어놓고 간이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소주 병마개를 돌려서 연 다음 술을 종이컵에다가 가득 따라서는 단숨에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다 마셨다. 땅콩 하나를 집어먹는가 싶더니 또 한 잔을 가득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두 잔을 다 마신 그녀가 푸 하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뜻밖으로 터프한 여자의 행동에 내가 좀 의아해졌고,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저 여자는 누구인가. 나는 딴 일을 하는 척하며 그녀를 경계했다. 어쨌든 작은 골목가게에 들어와 좀도둑질이나 할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먹을 것을 훔쳐가지고 달아나다 들킨 아주머니에게 그날 매상을 모두 들려서 보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그 아주머니가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과일상자를 들고 다시 찾아왔을 때 우리 가족은 비로소 지난 일을 알게 됐다.
“저기요!”
여자가 나를 불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기울였다. 알코올 기운이 퍼진 그녀의 얼굴에 붉은 빛이 살짝 비쳤다.
“뭐 필요하신가요?”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그러고 보니,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이 그 새 비어져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빈속이실 텐데…….”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어보였다. 예쁜 웃음이었다.
“아, 예. 까딱없어요. 이래 뵈도 제 주량이 좀 셉니다. 빈속이라도 서너 병은 거뜬해요.”
소주 한 병을 테이블로 가져다주었다. 여자가 부탁조로 말을 이었다.
“저어기요. 제가 오늘밤 먼 여행을 떠날 거거든요. 미안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제 술친구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좀 아래이실 것 같은데…….”
“예?”
어쩌면 그녀는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며 공짜로 술을 마시는 집시 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그녀가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술 하실 줄 아시면 몇 잔 나누면서 제 하소연 좀 들어주시면 더 좋고요. 한 병까지는 괜찮은데, 두 병째부터는 혼자 마시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에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양의 뜻을 밝히려고 하자 그녀가 오른손을 내저어 내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바바리코트 왼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빨간색 손지갑을 꺼내더니 재빨리 오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취한 모습은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저 도둑년 아니고요, 이상한 여자도 아니에요. 혼자 먼 길을 가려니 좀 외로울 뿐이랍니다. 나중에 계산하고 남으면 제가 다시 올 때까지 키핑 해두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배시시 웃었다. 주름이 약간 드러나 보이긴 했어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나는 돈을 받아서 계산대 서랍에 넣고, 종이컵을 들고 테이블로 갔다.
“고마워요, 사장님. 사장님은 참 푸근해 보이는 청년이시네요. 좋은 분이란 걸 첫눈에 알았어요.”
내가 맞은 편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자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잔과 내 잔에 소주를 반쯤 씩 따랐다. 그런 다음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가 엉거주춤 잔을 내미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말했다.
“술이란 게 참 신기하죠? 불과 이십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게 될 줄 누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렇죠?”
그녀가 내뱉은 ‘우리’라는 낱말이 흔쾌하지는 않았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술이 낯선 사람과 이내 한 편이 되게 하는 야릇한 마력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술잔에 입을 대고 기울였다. 소주가 달았다. 그러고 보니 술을 마신 일이 꽤 여러 날 된 것 같았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단조로운 일상이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학원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이따금씩 몇몇이 어울리곤 하는데, 이런저런 푸념을 나누며 몇 잔 마시고 집에 돌아온 날은 긴장을 풀고 잠을 푹 잘 수 있어서 좋다.
“실례지만, 댁이 이 근처세요?”
종이컵을 내려놓고 내가 궁금했던 것을 먼저 물었다. 여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저기 언덕 위에 있는 교회 옆에 살아요.”
두 블록 쯤 위 언덕 꼭대기에 큰 교회가 하나 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달동네 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주택가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큰 교회다. 나는 교회가 번창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와 사람들의 정서에 대해서 폭넓은 이해심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예 그러시군요. 오래 되셨나요?”
“아뇨. 이제 두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어요.”
“아, 그래서 좀 낯설게 느껴지시는군요.”
여자가 병을 기울여 내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자기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마셨다. 내가 병을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웠다. 한동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어디, 여행을 떠나신다고요?”
내 질문에 그녀가 빙긋이 웃으면서 뜸을 들였다.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산다는 건 느닷없는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그렇죠. 그런 말씀이셨군요.”
내가 표정을 늦추며 술잔을 기울여 소주를 홀짝거렸다.
“상투적인 수사는 아닙니다. 사실 이제 곧 긴 여행을 떠나려고 결심하고 있긴 해요.”
“어디를 얼마나 오래 다녀오실 계획이시기에?”
여자는 또다시 뜸을 들였다. 종이컵에 담긴 술을 두어 번 홀짝거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제 경험으로는 짜 맞춘 듯 준비하여 시작한 여행은 재미가 없더라고요. 거의 그랬어요. 느닷없고, 무계획하고, 때로는 무모한 여행이 훨씬 더 즐겁고 기억에도 남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에게서 문득 범상치 않은 사연이 느껴졌다. 뭔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겠구나, 그런 느낌이 났다. 마음먹고 질문을 던졌다.
“생각나서 그냥 말해보는 건데요. 크게 실패하신 경험이 있으시군요.”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동그랗고 큰 눈을 깜빡거렸다. 긴 속눈썹이 까딱까딱 자주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표정에 다시 겸연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크게 성공한 적이 있다고 말해도 되겠네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 참 잔인한 말이에요.”
“무슨 일을 하셨던가요?”
여자가 내 얼굴을 짯짯이 훑었다. 흔들리는 눈길이었다. 소주를 한 모금 더 홀짝거린 그녀가 말했다.
“의류사업 아세요?”
“옷장수 말씀이신가요?”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죠. 그걸로 크게 성공했었지요. 한때 동대문에서 날렸으니까요.”
“무너지셨군요.”
“욕심이 화근이었지요. 로또복권 당첨된 사람들 중 대다수가 망했다는 이야기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 즈음에서 여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잔이 빈 것을 확인한 내가 소주병을 기울여 채워주었다.
“부도가 났나요?”
“많이 터졌지요. 아직 다 못 갚았고요, 아마 평생이 걸려도 다 갚지는 못할 거예요.”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자는 시선을 멀거니 허공에 둔 채로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그런 표정에서 맨 밑바닥까지 다다른 어떤 체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실례지만, 가족이 없으신가요?”
여자는 내 질문에 다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잠시 후 흐려졌던 눈빛을 되돌렸다.
“결혼은 안 했어도 남자는 있었죠. 그런데 그 자식 내가 실패해 빈털터리가 되자 잽싸게 다른 년한테로 달아나버리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여자가 갑자기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는 조용히 내 잔을 비웠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네요.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죠? 그리고 당신하고 마주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바탕 까르륵대고 웃었다. 그녀가 큰 소리로 발음한 ‘당신’이라는 단어가 살짝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싫지는 않았다. 또 다시, 여자가 예뻐 보였다.
“술이 떨어졌네요? 한 병 더 주세요.”
그녀의 발음 사이에 처음으로 알코올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빨리 움직이지 않자, 여자는 매대 쪽으로 가서 양손에 소주 두 병을 들고 왔다.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술이 달았다.
*
이봐! 왜 이번 달 실적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못하겠거든 그만두라고! ……. 영업담당 상무의 살찬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잠이 깼다. 또 꿈이로구나. 전자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한 삼년 그 끝에 남은 것이라곤 이 지독한 가위눌림밖에 없다. 선뜩한 바람이 목깃을 파고들었다. 취기가 눈시울을 물어뜯고 있었다. 속도 메슥거렸다. 그래, 가게에 낯선 여자가 찾아와 함께 소주를 흠뻑 마셨지. 기억회로에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이 헝클어져 곧바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바둑시합을 끝낸 기사들이 복기를 하듯 기억 부스러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줄을 세웠다. 여자와 나는 꽤 많은 술을 더 마셨다. 자신의 말처럼 그녀는 굉장히 술이 셌다. 여자가 거푸 들고 온 몇 병의 소주를 두 봉지의 스낵안주와 함께 다 비웠을 무렵에 나는 술판을 접었다. 여자는 한 잔 더 먹자고 청했으나 나는 야멸치게 뿌리치고 그녀를 가게 밖으로 내보냈다.
아니다. 내가 여자에게 절대로 차를 운전해서는 안 된다며 따라 나갔던 게 맞다. 주차돼있는 그녀의 승용차를 지나 교회 쪽으로 올라가는 길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던 게 분명하다. 그녀가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언덕배기를 올라가는 뒷모습을 한참 더 바라본 기억도 난다.
아니다. 그것만도 아니다. 여자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10억 원대의 부채규모도 말한 것 같다. 현재로서는 무슨 짓을 해도 갚을 길이 없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비친 것도 같다. 그 대목에서 내가 참 답답해했던 장면도 돌이켜진다. 그나마나 이건 대체 무슨 일인가. 아버지가 가게를 내게 맡기는 일이 흔하지도 않지만, 가게 안에서 누군가와 술을 마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 밤 여자와 단 둘이서 마주앉아 술을 마신 일은 아무래도 불가사의하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랬구나, 하고 기억 더듬기를 마치려고 하는데 또 다른 기억 하나가 뒤늦게 뇌리에 떠올랐다. 가게 문을 닫고 일곱 개나 되는 소주병과 테이블 주변에 흩어진 스낵부스러기들을 대충 치웠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와 쓰러져 잠이 들락 말락 할 무렵이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함께 술을 마셨던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그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저어기 젊은 사장님! 여기에 번개탄 있지요? 집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꺼졌네요.”
변두리 산동네인 이곳에는 아직 연탄을 쓰는 집들이 적지 않다. 갑작스레 번개탄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골목가게에는 꼭 구비해놓아야 하는 물품이기도 하다.
“몇 개나 드릴까요?”
“한 꾸러미에 몇 개 묶여있나요?”
“열 개씩이요.”
“그냥 한 꾸러미 다 주세요.”
나는 열십자 형태로 끈에 묶여있는 번개탄 한 꾸러미를 검은 색 비닐봉지에 담아서 내주었다. 여자가 생긋 웃으며 비닐봉지를 받아들고는 가게를 나갔다. 염려했던 것보다 걸음걸이가 멀쩡했다. 나는 가게 문을 닫고 방으로 곧장 들어와 잠에 골아 떨어졌던 것 같다. 그게 다였다. 그래, 그랬다.
아버지가 밤중에 온다고 했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자리에 계속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방문을 살짝 열고 건너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안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거실 벽시계의 시침분침이 1자로 곧게 서서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 들어오셨을까. 안방으로 건너가볼까 하다가 좀 더 자기로 하고 문을 닫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함께 술을 마신 여자의 이름을 몰랐다. 나도 여자도 서로 이름을 묻지 않았다.
*
“얘야, 어서 일어나 밥 먹어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눈시울에 달라붙은 피곤이 좀처럼 달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 근육에 힘을 주어 샛눈을 떴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사발시계는 여덟시를 기웃대는 중이었다. 자리에서 몸을 부스스 일으키는데, 핑하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취기와 졸음이 끈질기게 온몸을 휘돌았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거실 식탁에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내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밥공기에 밥을 퍼 담아 식탁에 내려놓았다. 밥공기 위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웬 일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냐? 친구라도 왔다 간 게냐?”
아마도 가게 매대 뒤 음료수박스 옆에 널브러진 술병들을 보았을 것이다.
“아뇨. 갑자기 누가 와서……그럴 일이 좀 생겼어요.”
나는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어서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가며 메슥거림의 돌기들을 휩쓸었다.
아버지가 끓여내는 된장찌개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나는 아버지의 된장찌개를 먹을 때마다 결혼에 대한 강박관념을 슬며시 느낀다. 언젠가 식탁에 마주 앉은 누이가 나에게 빨리 자리를 잡아 장가를 들어야 아버지가 직접 밥을 짓는 수고를 덜 것이라며 넌지시 압력을 넣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밥이 모래알 같았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희미한 구역질은 뜨끈한 된장찌개를 몇 술 더 뜨고 났을 때에야 가라앉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피곤 때문만도 아닌 수상한 그늘이 보였다.
“언제 돌아오셨어요?”
“두시 반쯤인가에 왔다. 심야버스가 있더라.”
“그런데, 왜 출상도 안 보시고 일찍 올라오셨대요?”
아버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젓가락질을 잠시 멈추는 것 같기도 했다. 표정에 뭔가 말하기 힘들어하는 기미가 설핏 보였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버지는 조금 더 주저했다. 그러다가 결국 시선을 밥그릇 위에 둔 채로 말문을 열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동현이 그 친구 너무 불쌍하게 갔더라.”
“왜요? 교통사고는 아니라면서요.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나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조용히 물었다.
“가스중독으로 죽었어.”
“가스중독이요?”
“그래. 방문 닫아걸고 번개탄을 피웠다더라.”
충격이었다.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한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니었다. 매사 조심스러운 아버지와는 다르게 호방한 웃음 속에 시원시원한 성격을 드러내는 어른이었는데…….
“자살하셨단 말씀이세요?”
아버지가 대답대신 고개를 두 차례 끄덕거렸다.
“아니, 왜요? 왜 그러셨대요?”
아버지는 말없이 밥을 한 숟갈 더 떠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는 여전히 숟가락을 든 채로 뜨악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딸하고 심하게 다투고 난 뒤 홧김에 그랬다는구나.”
동현아저씨는 오래 전 이혼하고 하나 뿐인 딸과 함께 살다가 몇 해 전 시집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가구매장을 운영하면서 그런대로 쪼들리지는 않고 살아온 분이라고 들었다.
“따님하고는 무슨 일로 다투셨대요?”
“돈 문제였다는구나. 사위의 사업자금을 대달라는 요구를 거듭 들어주지 않자 딸이 아주 모진 소리를 한 모양이야.”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모진 말을 했다는 딸의 언행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해버린 동현아저씨의 선택도 도통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부친의 비극적 선택에 충격을 받은 딸마저 쓰러진 상태에서 집안 친척들이 부고도 없이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있기에 그냥 올라왔다고 말했다. 아마도 아비를 그렇게 죽게 만든 친구의 딸을 보기도 싫고,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린 벗이 밉기도 해서 그랬을 것이다.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
사라진 여자를 찾은 것은 J병원 응급실이었다. 가벼운 화상에다가 약간의 호흡장애 때문에 일단 응급실에 입원시켰지만, 예후도 심각하지 않아 곧 퇴원 조치할 것이라는 간호사의 설명을 먼저 들었다.
여자는 처음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을 모르니 응급실을 그냥 뒤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한 귀퉁이 병상에 지친 듯 누워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 했다. 인기척에 눈을 뜬 그녀가 한동안 나를 짯짯이 살피더니 뒤늦게 알아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 역시 내 이름을 모를 것이므로, 호칭도 없는 사이에 서로 할 말을 바로 찾기란 쉽지 않았다. 병상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에서 짙은 번개탄 연기 냄새가 풍겨와 후각을 자극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식은땀이 났다.
거북한 속을 달래가며 아침밥을 먹고 난 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던 나는 불쑥 떠오른 생각 때문에 잡고 있던 비누를 놓쳤다. 번개탄? 그래, 그거였어. 여자가 뒤늦게 찾아와 번개탄을 가져갔지. 딸과 다투고 난 뒤 홧김에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렸다는 동현아저씨와, 간밤 함께 술을 마시고 갔다가 뒤늦게 다시 찾아와 번개탄 꾸러미를 들고 간 여자의 얼굴이 자꾸만 오버랩 됐다. …제가 오늘밤 먼 여행을 떠날 거거든요. ……여자가 했던 말도 잇따라 떠올랐다.
승용차가 있었지. 그 기억을 되살려내자 나는 재빨리 가게 앞문 쪽으로 달려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골목길에 주차돼 있어야 할 노란색 경차는 보이지 않았다. 번개탄을 들고 나가면서 결국 만취상태인 여자가 몰고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휴대폰으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 술에 잔뜩 취한 삼십대 중반쯤의 여자가 번개탄을 사들고 승용차를 몰고 사라졌다는 이야기 끝에, 그녀가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까지 덧붙여 늘어놓았다. 전화를 받은 콜센터 요원이 내게 누구냐고 물어서 ‘보호자’라고 대답해줬다. 보호자라면서 이름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되묻던 끝에, 요원은 일단 전화를 끊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오만가지 상상이 뇌리 속을 휘돌았다. 다 부서진 경차 안에 피투성이가 된 바바리코트 차림의 예쁜 인형 하나가 굴러다니는 망상도 떠올랐다. 가스에 질식사한 여자의 푸르딩딩 납덩이같은 얼굴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환상도 보였다.
5분쯤 지났을까, 112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의 승용차에 번개탄을 피웠던 어떤 여자가 J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내용이었다. 죽었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른다며 직접 확인해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한달음에 병원으로 왔던 것이다.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울기 시작했다. 긴 속눈썹 사이로 슴벅슴벅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여자는 화려한 레이스가 곁들여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바르르 진동이 전해져 왔다. 지난 밤 절박한 이야기를 들은 나로서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무작정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편안하게 누워 있으세요. 다 잘될 거예요.”
근거가 있는 위로도 아니고 명쾌한 확신도 아니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자는 한참동안 더 울었다. 살펴보니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윽고 평온을 찾은 여자가 병상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흐리멍덩한 정신도 가눌 겸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미닫이 유리문 앞쪽에서 기지개를 켜며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서너 발짝 떨어진 쓰레기통 옆에 서서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는 경찰관 두 명의 대화가 들려왔다. 서류 파일을 들고 있는 키가 큰 경찰관이 말했다.
“노란색 똥차에서 번개탄 피운 저 여자 말이에요. 크게 상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병원에서 나가면 뭐합니까? 큰 돈 물어줘야 하게 생겼는데.”
그러자 키가 작고 통통한 경찰관이 맞받았다.
“그러게 말이야. 본인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왜 그 고급 외제승용차 옆에서 불을 피워가지고 그 사태가 벌어진 거야?”
“아직 신문을 안 해봐서 모르지만, 무슨 원한관계가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 차에다가 직접 불을 지른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죽으려고 붙인 번개탄 불에 자기 차뿐만 아니라 남의 외제차까지 전소된 거잖아? 오죽 살기 어려웠으면 자살하려고 했을까. 그런데 죽지도 못하고 오히려 거금을 물어주게 생겼으니 억세게 재수 없는 노릇 아닌가? 여기서 살아나간다 한들 무슨 희망이 있을까보냐고. 내 경험으로 볼 때 저런 사람은 틀림없이 어떻게든 또다시 자살하려고 들 텐데, 갑갑하구먼.”
그렇다면, 저 여자가 차 안에서 번개탄에 불을 붙였다가 자기 차뿐이 아니라 곁에 있던 고급차량까지 모두 태워버렸다는 이야기 아닌가. 우연히 엿듣게 된 그들의 대화를 통해 사태의 전말을 조금 더 알게 된 나는 가슴이 쿵덕쿵덕 뛰는 통에 정신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지난 밤 소주병을 마주하고 들은 이야기로는 의류사업을 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갚아야 할 빚이 어마어마하다 하지 않았던가.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 경찰관들은 응급실 앞에 좀 더 그러고 있을 낌새였다.
나는 조용히, 그러나 재빠르게 응급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 뒤편으로 난 본관 복도 쪽 통로를 살폈다. 그리고 그 통로 가운데로 연결된 병원현관 정문을 확인하고, 정문 저 만큼에 손님을 기다리고 서 있는 택시들도 보아뒀다.
여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물을 흘린 끝이어서인지 약간 부어있는 눈두덩이 촉촉해보였다. 자그마한 얼굴은 여전히 예뻐 보였다.
“저기요. 지금 일어나실 수 있지요? 걷는데도 문제가 없으시지요?”
내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를 그녀의 귓바퀴에 쏟아 넣었다. 여자가 눈을 떴다.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당신, 여기 이렇게 있으면 정말 끝이에요. 조용히 일어나서 나를 따라오세요.”
여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열었다가 깜박깜박 했다.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대 밑에 놓여있던 빨간색 구두를 찾아들고 발에다 끼웠다. 병상 머리맡에 놓인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는 버려야 할 것이다. 여자는 내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겠다는 표정이면서도 마지못해 따라주고 있는 눈치였다.
신발을 신기고 막 병상을 벗어나려는데, 링거 병을 들고 지나가던 간호사 한 사람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그런데 어디 가세요?”
여자를 부축한 모습으로 내가 얼른 대답했다.
“아, 예. 화장실이 급하다 하네요.”
의아한 낯빛으로 훑어보던 간호사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다.
병원 본관 복도를 다 지나 현관문이 있는 공간에 이르러서야 여자는 내게 물어왔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나는 부축했던 팔을 약간 늦춰주며 말했다.
“아무 말 말고 나와 함께 저기 파란색 택시를 탑시다. 지금은 무조건 내 말 들으셔야 합니다.”
여자가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려 내 말을 들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다시 몸을 의탁해오는 여자의 무게가 느껴졌다. 병원현관 앞에 우뚝 서 있는 제복차림의 덩치 큰 경비원이 흘깃 쳐다보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나가는 우리 두 사람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택시 뒷좌석 안쪽에 여자를 밀어 넣다시피 태우고, 잇따라 옆자리에 내 엉덩이를 붙여 넣었다. 택시기사가 걸걸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어디로 가지? 나는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일단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혹시 어디, 아무도 못 찾는 무인도 같은 곳 아는데 없으세요, 기사님?”
막 병원 주차장 출구 쪽으로 달려가던 차를 멈춰 세운 택시기사가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검은 구레나룻 위로 짙은 색안경을 걸친 투박한 얼굴 하나가 허공에 갸우뚱 떠올랐다.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