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화원 유적지 순례
「 백제의 숨결을 느끼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의성문화원 박태주 원장을 비롯한 회원 170여 명은 「백제의 숨결을 느끼다 」고도古都 공주 천년고찰 마곡사, 국립공주박물관, 공산성을 탐방하였다. |
○ 춘마곡春麻谷의 마곡사
충남 공주시 사곡면 태화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3년(643)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중건한 사찰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선정 산사山寺 7곳 중 한 곳으로 충남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마곡사 터는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중 한 곳으로 기근이나 병란의 염려가 없는 길지로 이름이 났으며, 조선 전기 세조가 마곡사에 들렀을 때“ 내 비록 한 나라의 왕이지만, 만세불망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이 절은 봄의 경관이 특히 아름다워‘춘마곡 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했다. 계절의 아름다움이 봄에는 마곡사요, 가을에는 갑사라는 얘기다. 그만큼 마곡사의 봄 풍경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으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즉 법계法界에 들어가게 되며해탈을 하겠다’라는 원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두 번째 문인 천왕문은 박공지붕 집인 데 비하여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 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영산전靈山殿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으로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 각순대사覺淳大師가 1651년 절집을 다시 일으키면서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해탈문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世祖가 쓴 것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보러 마곡사를 찾았다가 결국 만나지 못하자, 영산전 현판과 자신이 타고 온 가마를 남겼다고 전한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사르며 울부짖던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 회유하고자 했던 세조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마곡사 제일의 건물이며 아름답게 잘 지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51년 각순대사와 공주목사가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보물 제801호로 지정되어 있고, 처음에는 대장전으로 지었다는 기록이「중수기」에 있으며,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오언절구가 보인다.
옛 부처 나기 전 古佛未生前 고불미생전
의젓한 하나의 동그라미 하나 凝然一相圓 응연일상원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으니 釋迦猶未會 석가유미회
가섭이 어찌 전하리 迦葉豈能傳 가섭기능전
본래 검지도 희도 않으니 本來非皁白 본래비조백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다 無短亦無長 무단역무장
보물 제802호인 대광보전大光寶殿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1788년에 중창되었으며,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이 건물의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도록 특이하게 봉안되어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 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준다고 한다.
대광보전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1788년 조성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 사천왕으로 구성되어 있고, 비로자나 부처님 뒷벽에는 18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보는 사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음보살님으로 이름나 있다.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는데,그 옆으로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와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잘 자라고 있었다.
백범 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한, 백범 선생이 마곡사에 은신하던 때에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답설야踏雪野접하고, 중요한 결단의 순간마다 시구절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고 전한다.
○ 백제의 숨결을 느끼는 국립공주박물관
백제의 비상을 꿈꾸었던 웅진(공주)에 자리한 국립공주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웅진 백제 문화를 중심으로 충남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전시하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였다.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로는 1971년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과 대전․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8점, 보물 4점을 포함하여 약 30,000여 점의 문화재를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다.
1층의 웅진백제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1971년 송산리 고분군(현재의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배수로 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부흥시킨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주는 지석을 비롯하여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 백제인의 내세관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받침 있는 은잔 등을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무령왕릉의 내부 바닥과 똑같은 크기의 진열장을 설치하고 널길과 널방에 놓였던 진묘수와 제사용 그릇, 왕과 왕비 목관 등을 원상태로 배치하여 마치 관람객이 무령왕릉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하였다.
2층의 충남의 역사문화실은 구석기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충남의 선사, 고대와 중․근세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인데, 충남지역의 선사문화는 금강 유역에 있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고, 고대문화는 기존 문화에 새로 유입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마한 속의 백제는 점차 주변 세력을 통합하여 고대국가 백제로 성장했으며, 신라에 통합된 이후에는 웅천주라는 지방 행정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중․근세 시기에는 도道를 기반으로 한 지역문화가 발달했는데, 충남의 문화는 관촉사 미륵불과 같은 대형 석불石佛과 계룡산 철화 분청사기, 조선 시대 예학의 표준인 호서예학 등의 뛰어난 지역문화를 형성하였다.
옥외전시장은 본관 앞쪽에 자리하고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많은 석조유물石造遺物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공주시 반죽동에서 출토되어 보물로 지정된 석조石槽 2기를 비롯하여, 공주, 홍성 등에서 출토된 석조여래입상과 석탑 등을 전시하고 있다.
○ 백제 고도古都의 역사적 상징성인 공산성
공주 여행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공주 도심 속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성곽인데, 문주왕 원년 (475)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후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4년간 웅진시대의 중심이었다.
공산성 내에는 당시 왕이 머물던 왕궁지를 비롯해 성벽, 연못, 나무창고, 저장구덩이 등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적 제12호로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 백제(475~538)를 지켜낸 왕성이다.
공산성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신라에 병합되고,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까지 줄곧 읍치(현청이 있는 곳)가 되었다. 초기 웅진성은 토성이었으나, 이후 통일신라 시대 석성으로 조성하고, 군사 방어시설이 된 현재의 석성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공산성은 본래 백제 시대 이름은 웅진성, 고려 시대에는 공주 산성 또는 공산성, ‘이괄의 난’으로 조선 중기의 인조 임금이 잠시 몽진한 후에는‘쌍수 산성’으로 불렀다.
북으로 금북정맥, 금강, 동남쪽 멀리 계룡산이 있다. 원거리 외적의 방어에 적합한 천연 요새이다. 동․서에는 다른 산성에서 보기 드문 보조 산성이 있다. 형태는 동서 약 800m 남북 약 400m 규모 장방형이다. 성곽 둘레는 현재 2천 660m이고 보조 산성을 제외하면 내성만 2천400m가량이다. 이전 백제의 초기 토성은 735m, 신라 시대의 석성은 1천 925m이었다.
공산성은 본래 남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 공북루拱北樓만 있었다. 터만 있던 동문 영동루迎東樓와 서문 금서루錦西樓는 1993년 복원하였고, 성곽은 비밀 출입구 암문暗門, 치성雉城, 고대高臺, 장대將臺, 수구문水口門 등을 갖추고 있다. 발굴 결과, 백제의 연화문 기와․토기와 고려․조선 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오랜 시간만큼 공산성은 뼈아픈 역사도 품고 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사비로 쳐들어오자, 그해 7월 13일(음력) 의자왕은 한밤중 공산성(당시 백제 웅진성)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7월 18일 의자왕은 성주이자 대장군 예식이 이끄는 말에 올라 태자와 함께 결국 항복하였다.
신라 헌덕왕 14년(822) 3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신라의 왕이 되지 못하자, 그 원한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웅진성에서 10여 일간 항전하다 자결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인조 2년(1624)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함경 병마절도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 제瑅를 왕으로 추대한 후 범궐할 지경에 이르자, 인조 임금은 황급히 공산성으로 파천한 이후 현 쌍수정 터의 언덕에 매일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진압 소식을 애타게 기다린 애환이 서려 있다. 충청감사를 지낸 옥오재 송상기 선생의 공산성시 한 수를 소개하면서 탐방기를 맺는다.
공산성에서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젊어서 아버지를 감영에서 뵈었고 少日春營覲 소일춘영근
중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돌아왔지 中年錦節歸 중년금절귀
얼마나 많은 세월 흘렀는가 流光幾回換 유광기회환
세상일 온통 변했구나 人事已全非 인사이전비
역로에는 시든 잡초만 남았고 驛路空衰草 역로공쇠초
산성에는 지는 햇살만 비춘다 山城但夕暉 산성단석휘
흰 구름은 머문 자리 없으니 白雲無處所 자운무처소
동쪽 하늘 바라보며 눈물만 흘린다 東望淚沾衣 동망루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