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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 휴식과 준비
학급 학생들과 매주 일요일 해돋이 산책을 한다고 약속했다. 몇 명 나오겠다고 했는데, 예정한 시각 이후로 5분 기다린 뒤 동네 수영산 산책을 시작했다. 작년 학생 4명과 올해 맞은 황지희, 성우경, 허준민, 최동일, 송승우 학생과 아버님 2분이 함께 했다. 아침에 맞이하는 산은 어느 때보다 좋다. 일단 사람이 적어서 좋고, 새벽의 서늘한 공기와 하늘빛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새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고, 소음이 비교적 적어서 좋다. 새벽의 기억은 엄마의 기도와 신문 배달로 인해 나에게 더욱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헤어진 뒤에도 한 바퀴 더 돌고 집으로 왔다. 배가 고프다.
해돋이 산책을 기획한 것은 우리나라 멋진 산들을 학생들과 함께 걷고 싶기 때문이다. 밑천은 체력인데, 꾸준히 매주 일요일 한 시간 걷는다면 여름 즈음부터 서울 근교의 산들을 충분히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炊事취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1박2일 캠핑이 가능하다. 설악산 수렴동 대피소를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담사에서 수렴동 대피소까지 아름다운 산길을 선물하고 싶다.
학교 교사로서 나의 정체성은 분명히 학교 제도가 규율하고 있다. 그렇기에 학교 교과과정(Curriculum)에 맞추어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제도가 주어졌다고 그대로 따른다면 개선의 여지는 줄어들 것이다. 개선을 위해서는 문제를 깨닫고 문제를 고치고자 실행해야한다.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기에 인간의 의식의 수준과 실천에 의해 제도는 얼마든지 개선 내지 퇴보될 수 있다. 제도 답습이 아닌 개선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제도와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일요일 나의 휴식은 제도 개선을 위한 재정비의 시간이다. 산행은 단순한 걷기 운동만은 아니다.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연을 가까이하면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충전하는 시간이다. 학교에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보충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학교만능주의는 학교신화일 뿐이다. 학교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보충의 기회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
학교 제도가 교사의 인식과 실천의 개선에서 나아질 수 있다면 학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밖의 利益이익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 중 하나가 교육일 것이다. 교육은 가정에서도 산에서도 직장에서도 학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물론 학교에서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큰이익인 교육을 할 수 있다면 교사는 학교 안팎을 고려하여 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면에서 학교밖에서 이루어지는 현장학습이 장려되는지도 모른다. 학교가 답답한 교사에게 학교 밖의 교육을 발견하고 학생들과 누릴 수 있다면 학교 제도를 보충할 좋은 기회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을 떠나서 우리의 자연이 주는 감동은 대단하다. 이 소중한 자연과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체력과 기본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야 더 위대한 자연인 북한산과 설악산을 가까이 하지 않겠는가? 준비도 없이 북한산을 찾았다가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에 평소 준비가 중요하다. 올해 일요일 산책을 통하여 북한산과 설악산에서 1박2일까지도 준비한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다.
올해 교과 지원이 영어와 과학으로 제한되어 내가 부족한 음악(서양음악), 미술, 실과, 체육 과목을 내가 해야한다. 하지만 서양음악과 미술의 경우 나보다 나은 학생도 많지 않은가? 연구 부서를 만들어서 학생들이 수업을 주도할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이다. 연구 부서 학생들이 교과과정을 구성하여 수업 내용을 준비하고 수업을 이끄는 것이다. 2년 전에 모든 과목을 전면적으로 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올해 몇 과목에 한정하여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모임을 구성하여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 조성을 할 계획이다. 작년 경우에 미술과 체육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해보고 학생들 모두 꽤 만족스러웠기에 올해도 학생들의 祈願기원의 힘을 믿고 교사인 나를 수업의 환경으로 자임할 계획이다. 교사가 수업의 주체가 아닌 환경으로 물러난다면 수업의 주체 그 자리에 학생들이 군림할 것이다. 수업 주체로서 학생의 힘이 커질수록 수업이 어떻게 변모할까 궁금하지 않은가?
0306 임원선거와 지식협동수업
교사로서 경력을 쌓으면서 학생들과의 생활에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서로의 기호가 달라질 때 “세대차”라는 장벽을 맞닥들인다. 함께 나눌 얘기와 활동이 줄어든다면 서로에 대한 장벽만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학부모들도 젊은 선생님을 선호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심리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마흔 즈음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타개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세대차를 극복하는 나의 방법은 그냥 세대차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굳이 학생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즉 교사는 물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학생들간의 활동을 활성화시켜서 그들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학급에서 학생자치활동을 활성화시켜야하고 그 중심에 학급임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학급 담임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회사의 CEO처럼 실질적인 이익이 될 수 있는 행사를 치를 수 있어야 학생들간의 활동을 충분히 성취할 수 있다. 학생들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도록 담임교사는 살짝 비켜서면서 지원하는 것이다. 학급임원들이 함께 학급회의를 이끌어갈 안건을 준비하고, 학급회의의 결정 사항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하기에 학급임원들에게 별도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담임교사가 치밀하게 준비하여 마치 학급임원들이 준비하여 성취하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다면 담임교사가 최고의 환경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면 학급임원의 권한과 책임감을 적절히 경험할 수 있기에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처음엔 지원하지 않다가 나의 설명에 현혹되어서인지 김나연(백)님이 지원을 하여 여자 5명과 남자 4명이 학급임원 선거를 치렀다. 학생들이 얼마나 긴장했을까? 나는 아무일 아닌 듯이 떨어진 학생들에게 다음 2학기를 기약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학급임원 선출을 싱겁게 마쳤다.
드디어 처음으로 국어교과서를 소재로 지식협동수업을 가졌다. 4명 한모둠이 되어 국어굑과서 한 단원 내용 중에서 분량을 정하여 그 분량 안에서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충분히 얘기하면서 자신과 다른 학생간의 생각의 차이와 수준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성공적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끝날 시간을 앞에 두고 모둠별로 활동 내용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기로 했다. 시간 부족으로 두 모둠 밖에 발표하지 못했지만, 첫 시간 치고는 즐겁게 한 듯싶다. 학생들은 처음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그저 교과서 문제를 풀고 있기도 했지만, 내가 쓰지 말고 친구들에게 발표하고 서로의 생각을 물어보라고 하니까 그제야 눈치채고 쓰기를 멈추고 친구의 의견을 귀담아 듣는다. 더군다나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까 안심하고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비로소 말하기를 하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정답 쓰기가 일이었는데, 정답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강조하니까 자기 생각과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로소 주체로서 세상을 대면하는 것이다. 이전에 그저 교과서 내용을 베끼면서 정답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받아적는 것과는 거꾸로다. 지식협동수업이 노리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업의 주체를 분명히 확인하는 시간이기에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결코 낭비가 아닌 것이다.
발표는 모둠활동의 과정과 성과를 담는 것이기에 별도의 준비가 필요하다. 활동을 마친 조가 나오면 5분 뒤에 발표를 전체에 공지한다. 5분 동안 발표 리허설을 할 수 있다. 그동안의 모둠활동을 정리하면서 과정의 특이점과 성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의문 사항이 있으면 즉각 질문을 받아들여 질의응답과 토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뭔가 확실한 학습목표를 생각하고 있다면 지식협동수업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실상 확실한 학습목표 자체가 허깨비인 것이다. 어찌 학습목표가 확실할 수 있단 말인가? 교육의 과정에서 모호한 단계를 지나야만 과정의 모호성을 체험할 수 있기에 모호성을 두려워하여 학습목표로 구체화하고자 하면 안된다. 모호성은 모호성으로 내버려둘 수 있이어야만 더 수준 높은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짧은 지식으로 裁斷재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육의 과학화 운동이 대표적인 교육을 황폐화시킨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짧은 지식으로 광활하고 심원한 교육의 세계를 상처낸 경우라고 봐야 한다. 지식협동수업은 교육의 모호성을 존중하면서 나선형으로 점점 깊어간다. 이제 시작했으니 미약함 가운데 점점 더 크게 자라날 것이다.
0307 助長조장과 謙遜겸손
어제 학급임원을 뽑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모둠별 협동교육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명명한 지식협동수업은 여전히 생동하며 변화한다. 오늘은 수학 1단원 약수와 배수를 시작했다. 아마도 이 단원을 배운 뒤의 최종적인 평가는 약수와 배수에 관하여 아는 바를 기록하는 것이다. 이 기록 속에 학생 자신의 생각과 질문이 담겨 있다면 꽤나 의미있게 공부한 것이고, 뭘 써야할지 모르겠다면 아무 생각없이 문제풀이에만 몰두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저 문제풀이의 기능에만 매달렸으니 기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수학에 관한 무슨 흥미와 재미, 보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내재적 가치를 끊임없이 상실해가면서 진도와 문제풀이와 성적만을 추구하면서 자기 소외마저 드리우게 된다. 사춘기의 반항이 이로 인해 증폭하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수학 첫 시간에 학생들이 이미 다 배웠다고 자랑하고, 재미없다는 둥, 자신은 중2 수학과정을 한다고 자랑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도를 나간다면 무슨 소용있겠는가? 타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助長조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孟子맹자>에 나오는 故事고사가 지금도 적절하게 먹힌다는 것이 경이롭다. 방향을 모른채 열심히 노력한 댓가가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어른들이라도 알아야하는데, 자식과 학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을 기성세대가 앞장서고 있기에 助長조장 故事고사는 이땅의 학생들에게 우둔함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을 채찍질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어른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미래세대의 밑둥을 자르고 있기에 우리나라의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고 볼 수 있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교사는 희망을 학생들과 지금 여기서 펼쳐내야만 한다. 분명히 침몰하는 상황이지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혜를 요청한다. 지혜 중에서도 교육이 아마도 가장 우선일 것이다. 助長이 아니라 교육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약수와 배수는 이와 관련한 특수한 수학 현상을 한자어로 드러낸 말이다. 이면의 수학 현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약수와 배수로 드러내었기에 용어에 대해 좀 더 깊이 질문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즉 수학의 용어와 용어로 대표되는 현상 전체를 관련짓는 지식을 구성해야 한다. 문제풀이는 지식이 아닌 정보로 파편화시킬 수 있기에 적어도 수업에서는 止揚지양해야 할 것이다. 문제풀이는 시험에 있어서 지엽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뿐, 그 자체를 지식 구성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정보와 지식의 차이를 모르고 교과와 수업과 평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경우 너무나 정보 검색 수준의 시험에 매몰되어 수업과 교과의 성격마저 파편화되는 셈이다. 너무나 치명적인 수렁에 빠진 상황이다. 가장 큰 피해자인 학생들의 수학적 사고는 문제풀이 상황에서 고갈될 뿐이다. 그러니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어찌 우물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가?
수업에서 정보와 지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학생의 생각을 자극해야 할 것이다. 등에 역할을 맡은 소크라테스처럼 학생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귀찮게 하여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도록 기회를 가져야 한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역시 발표와 토론, 작문이다. 생각도 생각에만 머물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심화되기 어렵다. 드러날수록 더 깊이 갈무리할 수 있다. 말로 글로 표현될수록 자기 수정과 개선의 기회는 넓어지고 깊어진다. 교사의 하화는 결국 학생들을 얼마나 올바른 방향으로 상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열정과 시간이다. 교사의 하화를 향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들의 상구는 그만큼 수월할 수 있다. 수월하다고 해서 쉬운게 아니라 보다 확실해진다는 뜻이다. 보편적인 연대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스승다운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사에게 필요한 지혜는 바로 교육이다. 교육을 품고 내일을 꿈꾼다. 잠을 푹 자야만 교육을 잘할 수 있다.
0308 학교 밖 수업의 소재
교육청 공문 중에는 더러 학생들에게 큰 이익이 될만한 내용이 있다. 그들도 나랏돈으로 좋은 일을 만들어내고 있기에 정보를 취득하는 자가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나 역시 학급 담임으로서 학생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좋은 행사에 참여하고자 한다. 마침 생존수영과 다이빙“교육”과 관련하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행사를 추진하는 것이 있어서 반 학생들에게 의향을 물었는데, 학생들 중의 일부가 싫다는 의사표현을 했다. 이럴 때 행사 추진을 포기해선 안되고 사정을 들어보고 이해를 구하고 설득을 해야 한다.
우선 여학생 중에서 생리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었다. 남학생 중에서는 깊은 물에 빠졌을 때 공포감을 가진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수영장에 얕은 곳이 있고, 몸이 좋지 않아 쉴 수 있다고 이해를 구하니 모두 안심한다. 결국 별도의 시간을 들여 이해를 구하니 모두 참여하겠다고 했다. 교육은 이보다 훨씬 섬세한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의 유대감에서 다른 어떠한 활동보다 가깝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학생들 대부분이 원하더라도 단 한명의 학생이 반대하면 학교에서 한발자국 나갈 수가 없다. 학교라는 제도는 그만큼 마음껏 누리기에는 제약조건이 많다. 그래서 제도를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개선할 수 있어야만 제도의 악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자면 교육청이라는 조직보다는 학교 자체의 자율성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교육청 공문을 뒤지는 까닭은 현재의 학교 제도 아래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이익은 나는 물론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모두 포함한다.
학교가 정말 가르쳐야할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각계각층의 발언이 모두 다를 것이다.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기 입장을 낼 것이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는 정치적인 권력에 의해 각계각층의 이익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좀 더 높은 정치적 지위에 오르기 위해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학교의 지배적인 교과는 매우 정치적인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국영수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에 대한 강조와 집중은 너무나 지나치다. 오로지 대학 진학을 위해서 다른 과목에 대한 관심을 줄여가며 시험 점수 올리기에만 급급하기에 브레이크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들 과목 역시 너무나 많은 관심으로 인해 시험을 위한 교과로 전락하여 학생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국영수 교사들은 이를 누릴 뿐이다. 교과 이기주의로 인해 조금도 교과시수나 시험 점수의 배점이 낮춰지지 않고 있다. 수학과 별로 관련없는 대학 전공인데도 엄청난 시간을 수학 점수 올리기에 급급하는 것은 보통 낭비가 아니다. 한 생명을 망칠 수 있기에 국영수에 대한 강조는 마땅히 철폐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수영은 목숨과 직결되어 너무나 중요한데도 학교에서 손을 놓고 있다가 세월호 참사를 겪고 나서야 초등학교 3학년에 강제적으로 수영“교육”이 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너무 멀다. 마땅히 국영수 시간을 줄여서라도 수영 수업을 늘여야 한다. 내 관심이기에 학생들을 설득하여 우리반이라도 수영 수업을 더 갖고자 신청하는 것이다. 좋다고 하면서도 현실을 들어가며 어쩔 수 없다는 자세는 결국 제도의 관성에 굴복하는 것밖에는 안된다. 무엇이 변하겠는가? 결국 함께 침몰하면서 침몰이 아니길 기원하는 꼴이다. 우물안 개구리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우물안 개구리는 대롱같은 하늘이라도 바라보지만, 학교에서는 학생 자신의 인격적 지식과 유리된 정보를 외우기에만 급급하다. 아무리 이해를 들먹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암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과에 풀 빠져들 수 있겠는가? 오로지 대학에 진학하면 교과의 내재적 가치를 상실한 채 쭉정이만 남은채로 외재적 가치에만 휩쓸리게 된다. 결국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어 그동안 그토록 저주했던 제도 속에 매몰되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하여 미래 세대에게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제도를 개선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서는 미래 세대에 이익을 전할 수 없다. 학교 안이 답답하여 더욱 밖에 나가고자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0313 주말 효도 과제와 건강, 修身수신 문제
월요일 아침, 학급 분위기가 주말과 연속인지 남학생들 게임 얘기가 요란하다. 하지만 어쩌랴! 그들의 문화로 깊숙이 자리했기에 강제로 입을 닫게 할 수는 없고 아침 자습으로 화제를 돌린다. 조용히 독서하기. 이런 면에서 제도와 관습으로 지속되는 활동도 긴요하다.
주말 과제로 “효도”를 떠올렸는데, 학생들이 다양하게 주말 효도를 발표한다. 선민이는 부모님 모두 몸살이라 넷째 세 살 동생을 돌보아주고,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 발을 씻겨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얘들이 냄새 때문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에 이번 주 과제로 부모님 洗足세족하고 인증샷 보내는 것으로 삼았다. 부모님과 유대할 수 있다면 과제로도 유용하다 싶다. 학생들 이야기 속에서 과제를 이끌어내는 나의 안목에도 칭찬하고 싶다. 모든 문제와 해결의 방법이 우리 속에 내재한다. 문제는 그것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은 내 속의 거울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반성적 사고야말로 내 속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쉼이 필요하다. 경주마처럼 달리다가는 지칠 수밖에 없고 결국 自繩自縛자승자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근데 승리가 눈썹 옆 반창고를 붙이고 있어서 물어보았더니 주말에 친구집에서 놀다가 찢어져 응급실에 다녀왔다고 한다. 효도와 관련하여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효경>과 <논어>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자식이 건강한 것만으로도 부모는 한 시름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근데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기에 몸을 마음대로 다룬다. 건강의 정도는 아프지 않는 수준에서 개선한다면 끝이 없을 정도로 광막한 과제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修身수신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修身을 통해 효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孝야말로 동아시아의 가장 큰 규범이자 우주의 원리였던 것이다. 태권도를 소재로 사범님께서 전해주시고자 했던 것도 가정에 충실하라는 孝가 아니었다 생각한다. 너무 추상적인 담론으로 빠졌지만, 효도는 가정을 벗어나기 힘든 사회 구조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주제인 듯 싶다. 주말 과제치고는 너무 수준 높다. 계속 自畵自讚자화자찬이다.
현준이가 국어 수업 중에 속이 거북하다기에 얼른 가서 토하라고 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또 거부반응을 보이길래, 토하는 것과 똥싸는 것의 유사성을 거론했다. 비슷하지 않는가? 몸의 독성을 제거하는 가장 빠른 길이 토하는 것이기에 언제든 즉각적으로 활용할 것을 부탁했다. 아니 생활의 지혜라고 일렀다. 하지만 초등학생들은 똥과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게 거부감을 가진다. 하지만 어쩌랴? 학생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가 들고, 나이가 들면서 몸에 관해 철이 들기에 내 말을 시간이 지나면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긴요할 때 적절하게 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고 교사 경험이 쌓일수록 적절성 여부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공자의 인생 경로에서 마지막에 이른 從心所慾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가 전혀 도달 불가능한 경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수신의 바탕 위에서 경험과 반성적 사고가 깊이 배어들어간다면 원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런 경지에 다가가고자 건강 관리를 잘해야하고 휴식을 잘 취해야 할 것이다.
작년 동학년 선생님께서 아프셔서 담당한 1학년 반에 강사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학기 초에 담임의 부재는 1학년에게 난감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나의 몸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내 몸의 주체를 나라고만 확정지을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속한 사회와 조직의 부속품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몸의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修身의 정도에 따라 나라는 이기적 자아로부터 확대되어 사회와 조직으로 동심원으로 퍼져 나간다. 나와 타인의 동심원이 서로 만날 때, 그만큼 주체는 확장될 것이다. 효도와 건강과 修身과의 관련이 좀 어정쩡하지만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연구 과제를 발견한 셈이다. 현준이는 좀 토하고 들어온 후로는 쌩쌩하다. 역시 吐토가 효과가 있다.
0314 體德知체덕지의 새로운 해석
우리의 언어담론은 전통에 기대고 있다. 우리의 전통은 과거 한자문명과의 연속이 아니라 단절에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대대수의 한자어는 전통과의 연속에 있지 않고 서양어의 번역어인 일본이 만든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담론은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지배적인 담론이었던 한자와 한문보다는 서양 언어담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體德知체덕지의 담론도 한자로 적혀 있다고 해서 전통과 관련있을 것이라고 짐작해서는 안된다. 족보를 더듬자면 유럽의 경험론을 본격적으로 태동시킨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로부터 체덕지의 교육론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담론에 있기에 유럽과 미국의 학교에서 체육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전통은 우리의 경우 박약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에 무과보다 문과가 중시되었고, 문과에 있어서 체육과 관련된 공부는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의 전통은 崇文主義숭문주의가 강렬하다.
이러한 숭문주의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로 볼 수 있다. 일본의 尙武主義상무주의 문화가 우리와 비교되면서 일본의 운동과 무술이 대거 흡수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충격과 영향은 우리의 崇文主義숭문주의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비만과 체력 부실로 큰 문제를 치르고 있다. 시대적인 정황을 볼 때 체덕지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학교 교사로서 체육을 학생들에게 등한히 한다면 그 업보가 일제강점기의 재현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학생들에게 체육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몸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뜻이 강직하고 지혜롭더라도 몸이 버티지 못하면 결국 실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기 초에 반 학생들에게 운동의 기회를 최대한 넓히고자 체육 시간을 확보한다. 그리고 아침 자습을 이용하여 학급의 문화로 운동을 자극하는 것이다. 나 또한 함께 몸을 움직이니 참여하는 학생과 함께 큰 이익을 누린다. 일단 화요일과 목요일에 한하여 아침 자습으로 체육관에서 체력 단련을 제안하고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오늘은 드디어 나의 주도 아래 체력단련을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그냥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놀라고 방임했지만, 체력단련이 방임으로는 어림도 없기에 내가 주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상황이 너무나 처참하다. 좀 뛰고는 주저앉아 버린다. 비록 20분간이지만 하고 있으면 숨이 목까지 올라오고 땀이 줄줄 흐른다. 비로소 한계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이겨내야만 한다. 여기서도 물론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라는 교육의 원리가 내재한다.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어디 그렇겠는가? 선생님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을 1년간 지속했을 때 나타나는 변화와 이익은 모든 불만을 상쇄시키고도 능가할 것이다. 긴 시간의 지속의 힘을 믿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은 절대 단 시간에 완성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닌 것이다.
현재로서는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매일 등교할 때 운동장 뛰기를 제안했다. 학생들 모두 수긍하고 따른다. 띠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은 결국 실천의 문제다. 師弟同行사제동행이라는 미덕은 교사에게 스승으로서 率先垂範솔선수범을 먼저 요청한다. 그만큼 언어와 지식보다 몸의 실천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스승은 말을 많이 해서는 안된다. 교사가 말이 많을수록 학생은 교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을 움직이고 감동으로 이끄는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이다. 말이 실천에 앞서지 않고 실천에 뒤따라 올 때, 비로소 말의 힘은 실천과 더불어 커지는 것이다. 거꾸로 될 때 말은 하찮은 쓰레기만도 못하여 師弟사제 사이를 떨어지게 한다. 공자의 말을 교육적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리라! 子貢問君子。子曰:「先行! 其言而後從之。」 자공이 스승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먼저 실천하라! 말은 실천 이후에 따르면 좋으리라.” 체덕지의 體체를 좁게는 체육을 거론할 수 있지만 넓게는 실천적인 과업으로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든 간에 德덕과 知지는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교사의 중요한 일은 실제 일을 도모하고 일을 통해 학생들과 구체적인 이익을 이끌어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못한다면 교사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