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에서 퍼 온 글
1797년(정조21) 8월 16일 조선의 제 22대 왕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기 위하여 수원으로 향하던 도중, 하룻밤을 안산(安山) 행궁에 머문다. 그 다음날 정조는 어가를 출발시키기에 앞서 안산에 위치하고 있는 효종(孝宗)대왕의 장인, 신풍부원군 장유(新豊府院君 張維)의 묘소에 치제하도록 명령하면서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린다. “우리나라에 본디 현명한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많으나, 문장과 공업의 성대함으로는 신풍부원군 만한 이가 없다. 숭릉(崇陵, 현종 顯宗) 어필(御筆) 신도비(神道碑)의 성대한 유적을 추모하니 배나 슬픈 생각이 든다. 고 부원군 장유와 (그 부인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의 아들 고 판서 장선징(張善 )에게도 똑같이 제사지내도록 하라”하였다. 이때에 치제한 제문은 정조가 친히 지은 것으로 대왕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그대로 옮겨 본다.
“조정에 있어서는 명신이고 나라에 있어서는 으뜸가는 국구였으니 그 공로는 마원과 등애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와 구양수를 앞질렀네 아름다운 영가부부인을 배필로 맞아 복을 돈독히 하여 성후를 낳았으니 공의 집이 더불어 영화로우매 성자신손이 줄곧 이어졌도다 복된 터전에 공경을 다하는 정성으로 깊고 넓은 관아에 밤 늦도록 앉아 있으니 엄숙하던 공의 모습을 접한 듯하여 짐의 생각이 유유하다 재상의 반열에 올랐던 아들과 한 몸이 되어 아름다움을 함께하네
정조는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학문이 뛰어났던 군왕의 한 분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스스로 만조백관의 군주이자 스승(君師)임을 자처하였을 만큼 문(文)·사(史)·철(哲)은 물론이거니와 시문서화에 두루 재능을 갖추었으며 한 시대를 통찰하는 직관력과 예리한 관찰력을 지녔었다. 또한 정조는 높은 자존의식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 지라도 그 공업(功業)을 쉽게 인정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도 그에게 인정받은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런 정조로 하여금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가며 친히 치제문을 짓게 한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중의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이다. 장유(張維, 1587∼1638)는 인조대(仁祖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지국(持國)이며 호는 계곡(谿谷)이다. 형조판서를 역임한 운익(雲翼, 1561-1637)의 아들이자 병자호란 때 강화성의 남문에서 순절한 충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사위이기도 하다. 장유는 이미 10세에 경서를 다 외우고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또 조선 예학의 태두인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도 배웠다. 사계 선생이 일찌기 어린 장유를 보고 말하기를 “총명한데다가 학문에 힘을 쓰고 견해가 남달리 뛰어나니 앞날을 측량할 수 없겠다” 하고는 인하여 어린 장유에게 큰 기대를 걸고 열심히 학문을 권면하기도 하였다. 초시(初試)에 장원하고 약관 20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9년(광해군1)에 문과 급제한 뒤 관직에 진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와 주서(注書)를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염증을 느끼다가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때 홀어머니를 모시고 안산(安山)의 시골집에 물러나 경전(經典) 공부에 몰두하면서 한때 은둔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23년에 그가 가담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새로운 왕이 등극하자 사관(史官)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대사간을 거쳐 대제학을 두 번 지낸 다음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재직시에는 스스로 상소하여 겸직하고 있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우빈객(右賓客)을 체직(遞職)하기를 빌었는데, 이는 처부(妻父)인 김상용(金尙容)이 좌빈객(左賓客)이 되었고, 처숙부(妻叔父)인 김상헌(金尙憲)이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어 한 집안의 3인이 같은 관청의 직임에 함께 선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이후 관직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사위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위에 등극하자 국구가 되어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장유는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신이 되었을 때도 권세를 누리지 않고 매우 청렴하게 생활하여 당시의 문헌 기록에 전하기를 “유독 장유 한사람은 깨끗이 지내기를 마치 버림받아 외로이 살 때와 같이 하면서, 한 번도 훈권(勳券)을 어루만지면서 밭 한 때기 종 한 명도 챙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그의 엄정한 태도에 감복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당시 녹을 받아야 하는 여러 훈신(勳臣)들이 대관의 논의를 무시하고 모두 과도하게 품록을 받았는데, 신풍군 장유만은 받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의 장인인 국구가 되었을 때도 그는 청렴결백하게 생활하여 그 집안의 쓸쓸함이 마치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고 한다. 이로 보면 그의 청렴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장유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과 더불어 조선중기 한문학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당시에 공사간의 모든 문서를 도맡아 지었다. 일찌기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은 말하기를 “그의 문장과 절행(節行)이야말로 유림 가운데 으뜸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은 “장유의 문장과 재학(才學)은 당대의 제일”이라 하였고 이정구(李廷龜)는 왕에게 아뢰는 상소에서 “장유의 문장은 조리가 있고 빠짐이 없는데 사명(詞命)에 더욱 능합니다. 장유와 같은 자는 과연 쉽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판중추부사 尹昉(尹昉, 1563∼1640)은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는데 편법을 쓰지 않고 원리 원칙대로 행동했으며 나라에 충성하려는 일념만 지니고 있는데 다 고사(古事)를 익힌 힘이 있어 문학적 재질이 이 세상에서 그 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라고 칭찬을 하였고 대학자인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는 “대개 듣건대 사람들과 어울려 험담하기를 싫어하는 데다가 문재(文才)도 현재 으뜸이다”라고 하는 등 당대의 일류 명사들이 그의 문장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장유의 문장관은 그가 남긴 저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대략 살펴볼 수가 있다. “문장이 아름답게도 나쁘게도 되는 것은 제대로 정해진 소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장이 정미하고 변화가 많으므로 반드시 능한 다음이라야 알게 되는데,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도 않고서 능히 그 묘함을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까닭에 그런 묘리를 모르는 자에게 있어서는 돌을 옥이라 하고 아담한 것을 속되다 하여도 분별할 수 없지마는, 아는 자가 본다면 마치 저울로 달아서 가볍고 무거운 것을 맞게 하고 자(尺)로 재어서 길고 짧은 것을 헤아리는 것과 같아서 비록 속이고자 하여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여 문장에 능숙해지기 위해서는 피나는 수련을 거쳐야 하며 이름난 옛 문장을 그냥 답습만 하지 말고 자신의 뜻에 맞는 글을 지으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일찌기 양명학(陽明學)을 접하여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여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라고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尤庵 宋時烈(尤庵 宋時烈, 1607∼1689)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 만한 이가 없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병자호란때의 주화론(主和論)을 설파하던 최명길과 장유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내왔는데 이름이 친구이지 사실은 형제나 다름이 없는 사이였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1581∼1660)과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도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동명 정두경(東溟 鄭斗卿, 1597∼1673)은 어릴 적부터 장유를 종유(從遊)하였던 인물이다. 장유의 저술로는 『계곡만필(谿谷漫筆)』이 전하며 1655년(효종6)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장유의 묘소는 시흥시 조남동 응달말의 뒤편으로 뻗어 내린 수암봉(395m)의 낮으막한 줄기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동자석(童子石), 문인석(文人石)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으나 귀면(鬼面)이 새겨진 고석(鼓石)과 향로석(香爐石)은 근래에 분실되어 새로 추설(追設)하였으며 최근에 봉분 주위로 호석(護石)까지 설치하여 원형이 많이 변형된 상태이다. 문인석(높이 190m), 동자석(높이 117m), 망주석(높이 180m)의 문양이 화려하고 조형 감각이 뛰어나 당대의 기준작으로 삼을 만 하다. 또한 봉분 앞에는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의 묘표(총높이 203cm)가 건립되어 있다. 화강암의 방부에는 복련(覆蓮)과 당초문(唐草紋), 연주(連珠)를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백대리석의 비신(높이 150m)을 세워 놓았다. 비신의 전면대자는 ‘靖 社功臣議政府右議政新豊府院君 贈諡文忠張公之墓 永嘉府夫人金氏 左’라고 써 놓았는데 유려(流麗)한 촉체(蜀體, 조선화된 송설체)풍의 해서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문에 의하면 현종(顯宗)의 어필인 것으로 되어있으나 묘표에는 어필이라는 刻字가 보이지 않는다. 뒷면에 새겨진 묘표음기는 ‘男 弘文館副校理 善 ’(1614∼1678)이 읍혈근식(泣血謹識)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좌명(金佐明, 1616∼1671)이 근서(謹書)하였다. 마모가 심하지만 판독은 가능한 상태이고 비신의 우측에 각자(刻字)된 건립 연대는 ‘崇禎紀元戊辰後37年甲辰(1664, 현종5)9月 日立’이다.
장유 묘소 좌측 아래의 묘도(墓道) 주변에는 귀부개석(龜趺蓋石) 양식을 갖춘 거대한 규모의 신도비(총높이 약 488cm)가 건립되어 있다. 가로 645cm 세로 713cm의 기단(基壇)을 마련한 다음 신도비를 안치하고 귀부(龜趺, 높이 136cm, 길이440cm, 폭246cm)아래에 팔각형의 지대석(地臺石)을 갖추어 기초를 튼튼히 다져 놓았다. 귀두(龜頭)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입에는 송곳니가 드러나 있다. 귀갑(龜甲)위에는 하엽좌대(荷葉座臺)를 마련하고 비신(碑身)을 세워 놓았으며 그 위로 팔작지붕의 개석을 얹어 놓았다. 개석의 용마루에는 두 마리의 용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은 처음 확인되는 것으로 개석(蓋石) 장식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신도비문은 애석(艾石)의 비신(높이 262cm)을 다듬어 전후면(前後面)에 각자하였다. 전액을 ‘議政府右議政文忠張公神道碑銘’이라 올리고 비제(碑題)를 ‘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行奮忠贊謨立紀靖 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新豊府院君文忠谿谷張公神道碑銘幷序’라고 하여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밝히고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찬(撰)하고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 1641-1683)이 서(書)하였으며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 1633∼1687)가 전(篆)을 올렸다. 앞서 나온 정조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비문의 글씨를 숭릉(崇陵, 顯宗)의 어필(御筆)이라 하였으나 비문을 확인한 결과 심익현의 글씨임을 알 수 있었다. 청평위 심익현은 효종대왕의 부마로서 조선화된 송설체(松雪體)인 蜀體(촉체)를 매우 잘 써 글씨가 유려단아(流麗端雅)한 특징이 있었다. 비문의 말미에 기록된 입석연대는 ‘崇禎紀元戊辰後丙辰(1676, 숙종2)10月 日立’이다. 장유신도비는 규모나 양식면에서 숙종대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작품으로, 조선시대 신도비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장유 묘소의 위쪽에는 아버지인 형조판서 운익(雲翼, 1561∼1599)의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원래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에 있던 것을 1960년 도시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의 장소로 옮겨 온 것이다. 묘소는 그 와중에 실전되었다고 전한다. 신도비는(총높이 381㎝) 방부리수(方趺 首) 양식을 갖추고 있는데, 이수의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雙龍爭珠)’의 모습을, 뒷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단룡농주(單龍弄珠)’의 모습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방부(方趺)에는 복련(覆蓮)과 당초문(唐草紋)을 장식하였다. 이수와 한 몸인 艾石의 비신(높이 194㎝)의 앞뒷면에 비문을 새겼으며 상태는 완벽하다. 비문은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짓고 대사헌(大司憲) 신익상(申翼相, 1634-1697)이 서(書)하였으며 이조참판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 전(篆)을 올렸다.
장유 묘소의 동쪽 구릉에는 아들인 예조판서 선징(善 , 1614∼1678)의 묘소와 묘갈이 건립되어 있다. 의정부우참찬 朴弼周(朴弼周, 1665∼1748)가 지은 묘갈문을 성주(星州) 이한진(李漢鎭, 1732-?)이 예서(隸書)로 쓰고 전액(篆額)도 올려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의 앞뒷면에 새겨 놓았다. 조선시대에 예서로 쓰여진 비갈은 소수에 불과하여 조선시대 서예사 연구의 중요한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이외에도 손자인 천안군수(天安郡守) 선(木+宣: 1635∼1686)의 묘소와 석물이 조성되어 있다. 장유를 비롯한 그 가족의 세장 묘역은 시흥시뿐만 아니라 경기도를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현재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거론하였듯이 석물을 도난 당하고 원형이 변형되는 등의 수난을 겪고 있어 앞으로 행정당국과 후손들의 각별한 보존 대책이 요망되고 있는 실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