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3. 12. 7.~8.(목,금) - 음력(10. 25.~26.), 일출 07:29~일몰 17:22
●산행지: 봉대지맥 1구간 졸업
●산행코스: 수반마을회관-지맥분기점-평산삼거리-현경삼거리-목동육교-송정삼거리-용정교차로-봉대산(83.8m)-작은봉대산(62.2m)-검무산(104.3m)-53.6m봉-마산육교/신기마을-홀통교차로-43.1m봉-물암마을-수암교차로-이성산(123.6m)-동산(64.2m)-외분마을-외등이발관-응양마을-봉대산(179.1m)-202.2m봉-광산2호저수지-56.8m봉-감나무재/발산1리-천장삼거리/해제남초등교-천장교차로-71.5m봉-천마산(83m)-독산(56m)-참새골/고래캠핑장-신촌마을-대월산(106.9m)-신월마을-78.5m봉-연육교-한봉산(123.8m)-원자동마을회관-신안수정교회-61.6m봉-자동4리정류장-68.4m봉-북신안농협장례식장-37.8m봉-적거마을-109.1m봉-지도배수지-용교마을/지도교회-100.5m봉-산불감시초소-꽃봉산(155.4m)-129.1m봉-171.2m봉-바람풍재-큰산갈림-큰산(160.3m)-진재-깃대봉(180.5m)-삼암봉(197.8m)-101.8m봉-53.5m봉-점암선착장
●먹거리: 생수500cc, 햄버거, 찹쌀빵, 콜라, 단백질바2, 사탕5
●준비물: 고아텍스, 바람막이, 상의, 모자, 장갑, 스틱, 헤드랜턴, 충전지2, 충전짹, 목폴라, 휴지, 물티슈, 안대, 귀마개, 양말, 띠지10
●거리: 약 63.5Km
●소요시간: 18.41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용산-목포무궁화26,000, 늦은 저녁7,900, 모텔35,000, 목포-무안버스3,200, 아침8,200, 무안-수반택시9,160, 편의점8,200, 오븐마루2차16,000, 전원장40,000, 해제아침10,000, 해제-참새골택시10,920, 편의점5,600, 점암-터미널택시12,080, 지도-광주직행버스12,000, 뒤풀이식사19,800, 광주-동서울고속버스22,500
●날씨: 4~18
●산행경과:
* 12. 7.(목) 43.1km
- 07:25 : 봉대지맥 분기점 출발
- 07:43 : 무안광주고속도로 굴다리
- 08:20 : 현경면사무소
- 08:35 : 목동육교
- 08:50 : 송정교차로
- 09:15 : 용정교차로
- 09:28 : 봉대산(83.8m)/ 옹산봉수대
- 09:49 : 작은봉대산
- 10:17 : 검무산(104.3m)
- 10:54 : 마산육교
- 11:04 : 큰재
- 11:11 : 53.6m봉
- 11:33 : 홀통교차로
- 11:55 : 43.1m봉
- 12:08 : 유월리 물암마을
- 12:17 : 수암교차로
- 12:25~13:07: 이성산들날머리
- 12:46 : 이성산(123.6m)
- 13:38 : 동산(64.2m)
- 13:51 : 805번지방도/ 해제성당 안내표지판
- 14:21 : 외동이발관/ 외동슈퍼
- 14:57 : 봉대산(197.1m)/ 해제후산
- 15:37 : 805번지방도/ 현해로
- 15:58 : 56.8m봉
- 16:05 : 솔개재
- 16:13 : 광산리 발산마을(광산1리)
- 16:47 : 천장삼거리/ 해제남초등학교
- 17:14 : 71.5m봉
- 17:29 : 천마산(83m)
- 17:44 : 독산(56m)
- 17:50 : 고래캠핑장
* 12. 8.(금) 20.4km
- 07:35 : 고래캠핑장
- 08:10 : 대월산(106.9m)
- 08:49 : 78.5m봉
- 09:25~09:39 : 연육교
- 10:03 : 한봉산(123.8m)
- 10:30 : 61.6m봉
- 11:09 : 68.4m봉
- 11:26 : 광정리 적거마을
- 12:13 : 109.1m봉
- 12:28 : 805번지방도/ 지도교회
- 12:46 : 100.5m봉
- 13:16 : 꽃봉산(155.4m)
- 13:34 : 129.1m봉
- 14:03 : 바람풍재
- 14:07~14:17 : 큰산갈림길
- 14:12 : 큰산
- 14:23 : 진재
- 14:39 : 깃대봉(180.5m)
- 14:57 : 삼암봉(197.8m)
- 15:21 : 101.8m봉
- 15:50 : 53.5m봉
- 16:00 : 점암선착장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봉대지맥(峰台枝脈)이란
영산기맥 감방산(坎方山, 258.9봉) 남쪽 3.9Km 지점인 무안읍 매곡리 수반마을 서쪽언덕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현경면과 해제면을 지나며 봉대산(83.8m봉), 검무산(104.3m, 0.3Km), 이성산(124m봉, 0.7Km), 동산(64m봉), 봉대산(197m봉), 천마산(83m봉), 독산(56m봉), 대월산(106.9m봉)을 일구고 신안군 지도앞에서 끝나는 36.3Km되는 산줄기인데 섬이었던 지도가 지금은 연육교와 방조제와 갯벌로 육지와 연결이 됐고 실질적으로 연육교와 지맥의 끝에 있는 제방사이는 담수호가 돼 있어 지도의 점암선착장까지 16Km를 연장하여 지맥의 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산줄기의 주변에는 함평만과 황해가 있다.
♤ 봉대지맥 개념도
♡ 봉대지맥을 지나는 동네
* 무안군(務安郡)
무안군은 전남 서부 무안반도에 있는 군이자 전남 도청 소재지이다. 인구는 9만여 명으로 전남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군이다. 서쪽은 신안군, 남서쪽에는 목포시, 북쪽은 함평군, 동쪽으로 영산강을 건너 영암군, 나주시와 접한다. 군 남부 삼향읍 남악신도시에 전남도청이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남악신도시를 사실상 목포시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특산품은 낙지와 양파, 백련차가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지역,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이었다가 신라 경덕왕이 무안군으로 개칭하였다. 944년(고려 혜종 1) 물량군(勿良郡)으로 고치고, 991년(성종 10) 다시 무안으로 고쳐 나주에 소속시켰다. 그 후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고, 1391년(공양왕 3)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 현감(縣監)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는 나주부의 군이 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전라도에 예속되었고 1987년 무안부로 승격시켰다. 1914년 목포부(木浦府)를 독립시키고, 나머지 지방은 무안군이 되었다. 1968년 12월 16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서부는 신안군으로, 육지부는 무안읍·일로읍 및 삼향(三鄕)·몽탄(夢灘)·청계(淸溪)·현경(玄慶)·망운(望雲)·해제(海際)면 등 2읍 6개면이 무안군을 구성하였으나 1983년 전국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운남출장소가 운남면이 되었다. 2005년 전라남도청이 무안군으로 이전, 전라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2011년 삼향면이 삼향읍으로 승격하여, 현재 3읍 6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무안(務安)은 톱니바퀴 같은 리아스식 해안 길이가 220km나 되며 세발낙지와 양파가 특히나 유명한 곳이다. 무안의 지형은 좌우로 약간 퉁퉁한 직사각형으로 가운데에 '작지만 튼 산' 승달산(333m)이 땅과 바다와 강을 품고 있다. 어미 개가 구물구물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다. 호남정맥의 한 지맥이 비옥한 나주평야를 지나 전라남도의 서남단에 무안반도(務安半島)를 형성하였고, 다시 여기서 갈라져나간 해제반도(海際半島)와 망운반도(望雲半島)가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220.3㎞에 달한다. 육지나 도서를 막론하고 높이 400m 이상의 산지는 없으며, 승달산(僧達山, 318m)·국사봉(國師峰, 283m)·감방산(坎方山, 258m) 등의 산과 낮은 구릉 및 평지로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몽탄천(蒙灘川)·남창천(南倉川)·제왕천이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하천이 15개 정도 있으나 특별히 발달한 하천은 없고 영산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해안은 침강해안으로 굴곡이 심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큰데다 바다가 멀리까지 얕기 때문에 항만의 발달에 불리하다. 연안에 2개의 유인도와 25개의 무인도가 있다.
* 신안군(新安郡)
전남 남서부에 위치한 서해안상 다도해로 이루어진 군으로 서해안 다도해 섬 대부분이 신안군에 포함되는데, 완전히 섬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쪽은 바다 건너 무안군과 목포시, 서쪽은 황해, 남쪽은 다도해, 북쪽은 영광군의 낙월군도(落月群島)와 접하고 있다. 유인도 72개, 무인도 932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각 섬들에는 높은 산은 적지만 구릉성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다. 해역은 대륙붕 지대이고 수심은 15m 안팎으로 얕아서 갯벌을 간척한 평지가 많다. 큰 섬으로는 안좌도(安佐島)·압해도(押海島)·도초도(都草島)·임자도(荏子島)·암태도(巖泰島)·증도(曾島)·장산도(長山島)·하의도(荷衣島)·대흑산도(大黑山島) 등이 있다. 동쪽으로는 무안군 해제면과 인접하고 서북쪽은 모두 서해바다와 직할 섬지역과 인접한 편인데 지도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섬 지역이다. 지도읍 또한 연륙교 건설 및 간척으로 완전 육지화 되기는 하였지만 원래는 섬이다. 증도와 압해도 두 섬에 연륙교가 생겨서 육로로도 갈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원래 마한의 신미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 연맹체인 침미다례의 영역이었다. 침미다례는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상당히 세력이 있었으나 백제에게 정복당한 뒤 아차산현(阿次山縣)이 설치된다. 백제 멸망 후 남북국시대엔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정책으로 개칭되면서 압해군(壓海郡)으로 바뀌었다. 이후 지금까지 '압'의 한자만 바뀌고 압해도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압해도가 중심지였고, 압해군을 중심으로 안파현(安波縣, 장산면), 갈도현(碣島縣, 영광군 군남면), 염해현(鹽海縣, 영광군 백수읍)을 소속 영현으로 거느렸다. 즉 신라 때는 섬 바깥 육지 일부까지 거느리는 상당히 큰 행정구역이었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위협이 심해지고 수많은 섬까지 행정관리하기가 힘들어지자 시행한 공도(空島) 정책으로 인해, 원래 주민들은 육지로 옮겨 섬을 일부러 텅 비우고 남은 섬은 전라도 지역의 여러 군현들이 나눠 관할했다. 그 중 대부분이 나주목 소속이었다. 조선 후기엔 도서 지역답게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기도 했다. 참고로 전라도 서부에서는 말 그대로 월경지 잔치를 볼 수가 있는데, 망운반도가 무안이 아닌 영광과 함평 땅이었다. 해제반도도 함평 땅이었지만 월경지는 아니다. 게다가 목포진 근처에는 무안에 둘러싸인 나주목 월경지가 또 있고, 영암과 해남 쪽에는 진도군 월경지까지 보인다. 또한 해남반도 동부, 소안군도나 청산도, 추자도 등등은 영암군 월경지였다. 그리고 법성포는 영광이 아닌 어딘가의 월경지로 되어 있으며, 이때문에 홍농은 영광군의 다른 지역과 이어지지 않게 됐다. 더 위로 올라가면, 고군산군도도 어딘가의 월경지다. 이렇게 일부러 월경지까지 만들어가며 가까운 무안현이 아닌 큰 고을들이 나눠 관할한 것은 각각의 고을들에서 각종 물자를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월경지를 두었던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이들 섬들을 하나로 묶어 지도군이라는 독립된 군을 설치한 것이 신안군의 본격적인 기원이다. 참고로 이때는 저멀리 고군산군도까지 전부 지도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서 무안군이 지도군을 흡수하여 무안군의 일부였는데, 1969년에 도서 지역들을 다시 신안군으로 분리시켜 현재에 이른다(지도군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군청 소재지는 목포시에 있다가 2011년 압해도로 이전하였다. 압해도의 중심지는 섬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군청은 남동쪽에 치우쳐 있다. 압해대교 입구가 근처에 있어 타지에서의 접근성은 나쁘지 않은데, 정작 원래 압해도의 중심지와 신안의 주요 여객항으로 군내 교통의 요지인 송공항에서 떨어져 있어 정작 군민들이 군청을 이용하기에는 불편하다. 압해도 내에서는 농어촌버스를 이용한다고 해도, 아직 송공항행 여객선이 없는 군내 대다수의 섬들은 교통이 불편하다. 1969년 무안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무안이라는 뜻에서 신안(新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안군은 현재 2읍 12면 체제로 이뤄져 있는데, 이 중 먼바다에 뚝 떨어져있는 흑산면을 제외한 모든 읍면에 육상 교통을 들여놓으려는 개발정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압해읍, 지도읍, 증도면, 자은면, 암태면, 팔금면, 안좌면, 임자면은 육지와 육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신안군 공통의 특산품으로 천일염이 유명하며, 국내에서도 소금 중에서 최고급으로 친다. 주로 염전이 많이 있어서 천일염 및 토판염 등 소금 생산이 활발하다. 소금이 광물에서 식품으로 지정 되면서 가격도 2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겨울에 나는 시금치도 유명하다. 섬에서 키웠다 하여 섬초라고도 하는데, 당도가 높고 부드러워 인기가 좋다. 특산품이기 때문에 가격도 물론 비싸다. 그외 특산물로는 마늘, 새우젓, 함초, 김, 낙지, 감태, 병어 등이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세부 구간거리
분기점-4.4km-현경면사무소-5.8km-봉대산-2.7km-검무산-4.4km-홀통교차로-2.9km-물암마을회관-2.1km-이성산갈림길-1.7km-동산-4.8km-봉대산-5.1km-감나무재-3.3km-천마산-2.8km-대월산-1.8km-연육교-3.6km-68.4m봉-1.4km-적거마을회관-2.4km-100.5m봉-1.1km-꽃봉산-2.8km-진재-1.7km-삼암봉-3.1km-점암선착장
* 구간거리
접속 : 무안 수반마을 ~ 지맥분기점 0.2km
- 지맥분기점 ~ 감나무재 34.7km
-. 지맥분기점 ~ 77번도로 22.7km
-. 77번도로 ~ 연육교 19.8km
- 감나무재 ~ 점암선착장 25.9km
-. 연육교 ~ 100.5m봉 8.3km
-. 100.5m봉 ~ 점암선착장 8.5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수반마을 회관: 수도
- 현경면사무소: 식당, 슈퍼, 하나로마트
- 수암교차로: 나그네민박/ 식당 061)454-5552
- 외동슈퍼: 010-9947-1007
- 천장삼거리: 삼오가든
- 대월산 신촌(24번국도): 식당, 편의점
- 신안수정교회: 수도
- 지도교회 : 수도
- 점암항/ 선착장: 화장실, 횟집/ 버스매표소, 대합실, 슈퍼, 민박
- 무안 해제면 택시: 010-3644-6338, 061)452-7111
- 신안 지도읍 택시: 061)275-1000, 3355, 4747
- 무안 해제면 전원모텔: 061)453-1060
- 대송한방건강랜드: 무안터미널 ~ 목포중앙병원정류장 600번 좌석버스, 1번 노선버스, 요금1,500원
* 서울에서 봉대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용산역 ~ 무안역(무궁화): 07:33, 16:54, 4.51h, 24,900원, 목포역 5.29h, 26,000원
- 목포터미널 ~ 무안터미널: 06:20, 06:25~18:20, 0.37h, 3,200원, 해재여객터미널 1.20h, 6,900원
- 광주유스퀘어 ~ 무안터미널: 06:45, 07:25~, 1.24h, 6,000원
- 용산역 ~ 목포역ktx: 05:07, 05:47, 06:28~, 2.34h, 44,900원~52,800원
- 센트럴시티터미널 ~ 무안터미널: 07:30, 07:55, 14:55, 16, 17, 3.40h, 33,500원~43,600원
- 무안터미널 ~ 매곡리: 210번 버스, 1.1km, 15분
- 무안터미널 ~ 수반마을: 택시 1만원 이내
* 점암선착장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점암선착장 버스매표소 ~ 지도터미널: 택시 1만원
- 지도터미널 ~ 해제터미널 ~ 망운터미널 ~ 무안터미널 ~ 무안역
- 무안역 ~ 서울역(무궁화): 07:34, 16:34, 5h, 24,900원
- 무안터미널 ~ 센트럴시티: 09:25, 10:20, 11:15, 15:15, 16:20, 3.40h, 33,500~43,600원
- 무안터미널 ~ 목포터미널: 08:15, 18:50, 20:55, 0.40h, 200번 좌석버스 배차간격 15분
- 지도터미널 ~ 해제터미널 ~ 망운터미널 ~ 무안터미널 ~ 함평터미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동서울: 12:40, 13:20, 14, 14:50, 17, 19:10, 19:50, 21:20, 3.30h, 22,500~33,3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센트럴: 19:45, 20, 20:10, 20:20, 21, 21:15, 22:30, 23:20, 24, 3.20h, 30,800~48,000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나라에 변란이 있을 시 봉화를 피워올려 위급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있는 산을 봉대산 혹은 봉화산이라 불렀기에 봉대지맥은 일견 봉화지맥이나 봉수지맥과 동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문으로는 봉수지맥(鳳首枝脈), 봉화지맥(鳳華枝脈), 봉대지맥(峰臺枝脈)이다. 봉대지맥 만큼은 봉대산(烽臺山)에서 유래했기에 봉대지맥(烽臺枝脈)이 맞는거 같은데 그것이 아니다. 서해안 바닷가를 이어주는 통신망으로 여수 백야산 봉수와 고흥 천등산 봉수와 연결되어 목멱산(남산)으로 가는 이충무공의 승전보가 가장 많이 오간 5거봉수이다. 77번국도는 이 5거봉수를 따른다고 볼 수도 있겠다. 지맥 투어를 하며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밟아보는데 섬들의 왕국 신안군을 가보지 않는다면 양쪽 모두에게 서운할 일이다. 봉대지맥이 그 서운함을 이어주는데 급기야 지도에서 임자도로 24번국도가 연장되었으니 덩달아 지맥도 임자 만나는 것은 아닌지ㅋ 강산나루, 하면나루가 연결하던 해제반도와 지도 사이의 뱃길은 해협이라 부르기엔 미안하지만 영광군으로 조운선이 드나든 수로였으리니 이름이 있을법 한데 쉽게 답을 구하지 못하던 차에 후삼국시대 역사를 기술한 『삼국사기』와 『고려사(高麗史)』에서 답을 구했다. 909년 견훤이 후백제의 국서를 휴대한 사신단을 오월(吳越)에 파견하였는데 임수리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궁예정권의 왕건이 나포한 것이다. 지금은 갯벌로 연결된지라 제방을 쌓아 간척으로 농토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봉대지맥이 신안군까지 들어섰으니 신안군으로서는 신 산경표에 거듭 감사할 일이다. 하나 더 의구심이 드는건 밤톨만한 옹성봉수에도 이충무공의 스토리가 있는데 주먹만한 봉대산성이 묵혀있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니 역사자료도 기대가 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무안군 무안읍(務安邑)
군의 북부에 위치한 읍으로 본래 무안군 외읍면(外邑面)으로 1910년 지방관제 개편 때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어 성내·성동 등 7개 리로 개편되었다. 1917년 면성면(綿城面)으로 개칭되었다가 1957년에 무안면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몽탄면 성암리를 편입했으며, 1979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현경면 평룡리와 청계면 사마리 일부를 편입하였다. 읍의 동남부는 높이 200m 내외의 산지이며, 북서부에는 야산과 평야가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양파·마늘 등이다. 특히, 양파의 특산지로 그 재배량이 연 2만 톤을 상회하고 있으며, 고절리에는 돼지·비육우·한우를 기업적으로 사육하는 축산이 있고, 배합사료를 생산하는 사료공장이 있다. 또한, 성남리에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자기공장이 있다. 도로는 읍의 북동쪽에서 남서방향으로 광주∼목포를 잇는 도로가 나 있다. 따라서 무안군의 교통의 요지이다. 문화유적은 교촌리의 무안향교·유산정, 고절리의 병산사·면루성, 성남리의 공수산성, 성동리의 정득수가옥, 매곡리의 박봉기가옥·영화정·죽헌정 등이 있으며, 이 밖에 성동리에 약사사석불·이인사지당간지주·대우사 석불 등이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로 용월리의 백로·왜가리 서식지가 분포해 있다. 성내(城內)·성동(城東)·용월(龍月)·성남(城南)·교촌(校村)·고절(高節)·매곡(玟谷)·성암(星巖)·평룡(平龍)·신학(新鶴) 등 10개 리가 있다.
수반마을 회관에서 분기점까지 마을길을 걸어가는데 15분 소요됩니다.
♤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수반(水盤) 마을, 양림(楊林) 마을
무안읍 매곡3리 수반마을의 대표성씨는 務安朴씨이다. 지명유래는 마을 신촌서쪽에 있고 감방산을 중심으로 옥녀봉과 임자봉이 소반을 받은 형국이라 하여 「盤谷」으로 부르다가 후에 「水盤」으로 개칭한다. 마을형성은 고절리 무안박씨 박익경의 증손이 을사사화 이후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며 현재 그가 시와 글을 읊조리며 문인제자들과 강학했다는 죽헌정이 남아있다. 무안읍 매곡4리 양림마을의 대표성씨도 務安朴씨이다. 지명유래는 마을이 형성되던 시기에 감방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옥녀봉과 임자봉이 소반을 받은 형국이라 하여 「盤谷」이라 불렀으나 후에 매곡리로 개칭되면서 「楊林」으로 부른다. 마을형성은 이웃한 수반마을의 무안박씨 박활의 아들 박경보가 결혼하여 이 마을에 분가해 살면서 마을의 터전이 닦아졌다 한다. 현재 무안박씨의 거의 완전한 동성마을이다.
봉대지맥의 산패는 부뜰이, 천왕봉운영자님께서 수고해 주셨네요.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 봉대지맥분기점/ 읍면계(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 현경면 평산리)
영산기맥 봉대지맥 분기점에 있는 수반마을은 무안읍 매곡리이고 평림마을은 현경면 평산리이다. 영산기맥은 면계인 두 마을의 경계를 따라 남하하고 봉대지맥은 읍면 경계에서 평산리로 들어서며 서쪽으로 출발을 한다. 물탱크가 있는 삼거리에서 처음부터 임도를 따라 걷는다.
♤ 무안군 현경면(玄慶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본래 무안군 다경면(多慶面)이었는데 1910년 지방관제 개편시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화면(玄化面) 평룡·양학·학동·모촌 등 19개 리와 망운면 일부를 병합해 현화와 다경의 이름를 따서 현경면이라 하고 다시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면 전체가 높이 50m 이하의 야산이나 평지로 되어 있어서 농업에 적합하다. 동서로 함평만과 서해에 접하고 있어 연안양식 어업의 적지를 이루고,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다. 부속된 무인도로 죽도(竹島)·대도(大島)·소도(小島)·어은도(漁隱島)·은벌도(銀伐島)·고도(孤島)·주당도(籌堂島) 등이 있다. 쌀·보리·유채·고구마·양파 등을 주로 생산하며, 특히 고구마와 유채의 생산량이 많다. 양학리에서는 축산업으로 젖소와 돼지를 많이 사육한다. 수산업으로는 연안 해역에서 굴·고막·바지락·김 등이 생산되며, 낙지가 많이 잡힌다. 특히, 굴과 낙지는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하여 이 지방의 특산물로 유명하다. 지하자원으로 양질의 고령토가 채광된다. 외반리를 중심으로 운남면 연리와 해제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서부를 지나고 있으며, 평산리에서 함평·무안 등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동부를 각각 통과하고 있어서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평산리에 평산사가 있으며, 가입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300년의 팽나무가 있다. 그 둘레가 4m, 높이가 20m나 되는 이 나무에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낸다. 외반(外盤)·양학(養鶴)·동산(東山)·평산(平山)·수양(垂楊)·용정(龍井)·오류(五柳)·현화(玄化)·해운(海運)·송정(松亭)·마산(馬山)·가입(加入) 등 12개 리가 있다.
고속도로 터널을 지나기 전이 평산마을, 지난 후가 원평산마을입니다. 둘다 감방산 그늘에 있습니다.
♤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平山里) 평림마을
감방산을 주산으로 하고, 대부분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 마을, 마을에 높은 산이 없고 평평한 들판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평산이라 불려지는 마을이다. 무안군의 양파, 마늘, 콩, 쌀, 고추, 고구마 등 작물을 재배하고, 평산사 열녀비 등 역사자원이 풍부하다. 평산 마을은 현경 면소재지에서 돗재를 넘어 함평으로 가는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 지역명은 현경면 평산1리 원평산 마을이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에 높은 산이 없고 평평한 들판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평산이라 했다는 설과, 또 하나는 현재의 무안 박씨, 영성 정씨가 들어오기 전에 평산 선씨가 살았다 해서 평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 마을에서 유독 인물이 많이 배출된 이유는 풍수상의 학 형국이기도 하지만 무안의 주산이라 일컫는 감방산의 맥이 이 마을에 닿고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물길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기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주민들은 마을 뒤에 있는 8바위의 영험스러움이 마을에 미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예로부터 마을에 놓여있는 큰 바위는 그냥 바위로 보지 앟고 큰 산으로 보았다.해서 8개의 큰 산이 마을을 받치고 있어 큰 인물이 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평산사는 민재 박임상의 유언으로 후손들이 1946년에 세운 사당이다. 민재 선생은 면암 최익현과 송사 기우만에게 사사하여 학문의 대도를 깨우친 분이다. 민재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도도했던지 당대의 석학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직접 '민재'라는 아호를, 송사 기우만 선생이 '민재기(아호의 내용을 기록한글)를 지어주었다. 또한 나라에서 벼슬을 내리고 중용하려 했으나 관리들의 혼탁함을 보고 나아가지 않고 마음의 계산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민재 선생은 평소에 스승을 위한 사당을 세우기를 소원했으나 일본 관현의 감시가 심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언으로 사당 건립의 뜻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이곳에는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 민재 박임상 세분을 배향하고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평산사는 무안 박씨와 영성정씨 두 가문이 힘을 합하여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1888년에 지은 서당이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 마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기둥과 지붕을 개축한 것이다. 88세대 225명이 살고 있다.
♤ 무안광주고속도로 굴다리
굴다리를 통과한 직후 30.1m봉은 눈으로 오르는 봉우리이다. 도로가 봉대지맥의 마루금으로 양편으로 황토밭이 펼쳐진다.
♤ 참사랑요양원표지판/ 60번 지방도(국가지원지방도 제60호선)/ 삼리경계면(현경면 평산리, 양학리 → 동산리)
참사랑요양원 표지판에서 우틀하여 지방도를 따른다. 국도 및 다른 지방도와 중복된 구간은 제외하고,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무안읍 구간(공항로), 담양군 고서면 일부 구간(창평현로), 곡성군 삼기면-곡성읍 구간(곡성로), 의령군 부림면 우회도로(부림로), 창원시 북면-대산면 구간(낙동로), 양산시(공단로~동서로)-기장군(정관로~해맞이로(종점)) 구간은 왕복 4차로 이상이다. 다만, 2021년 현재까지 미완성 구간이 많으므로 일주를 하거나 해당 지방도를 따라 시내버스 여행을 하기에는 좀 부적절하다.
♤ 조암동표석/ 무안농협조합/ 삼리경계면(현경면 평산리, 동산리 → 외반리)
조암동(鳥巖洞) 표석이 있는 곳에서 지맥의 왼쪽이 동산리에서 외반리로 바뀌며 현경면 소재지인 외반리와 평산리의 경계를 따른다.
♤ 무안군 현경면 외반리(外盤里)
외반리는 현경면 소재지로 24번, 77번국도와 815번 지방도가 마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현경면의 공공시설물과 상가 등이 밀집되어 있어 현경면의 중심 생활권이 되는 곳이다. 외반, 화촌, 조암, 내반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래 목포부 망운면의 지역으로써 반룡동의 바깥쪽이 되므로 바끝 반룡 또는 외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반리와 다경면의 신흥리 고실리 조암동 기동 화촌을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외반리의 지세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반용(盤龍)이란 한자도 용이 서려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민들은 지세로 보면 용이 머리를 들고 망운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으로 승천을 향한 용틀임의 자세라는 것이다. 특히 구름을 뚫고 비상하는 국제 비행장이 망운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주민들의 믿음은 현실로 이뤄지고 있다.
현경면 소재지를 통과하면서 식당과 편의점 슈퍼를 지납니다. 봉수지맥은 중간 보급에 문제가 없다는 말이네요.
♤ 현경교차로/ 평산삼거리/ 현해로
현경교차로에서 현해로를 따르다 현경면사무소 직전 외반리로 들어서서 현경삼거리를 지나 계속 현해로를 따라 망운면 해동마을로 간다. 현해로는 전남 무안군 현경면 현경교차로에서 무안군 해제면 천마교차로를 잇는 도로이다. 상습 교통체증을 유발해 일명 ‘복장 터지는 도로’로 불리는 국도 77호선 현경-해제 일부 구간이 4차로로 확장될 전망이다.
봉대지맥은 상당부분을 국도 24호선/77호선, 채소(배추, 양배추, 양파, 대파, 마늘)밭과 함께하는데 하나 더 추가하자면 동네마다 서있는 세장산비입니다. 사후의 세계가 더 넓은듯 마을 표석보다 세장산비가 큽니다.
♤ 국도 제24호선(國道第二十四號線)
국도 제24호선은 전남 신안군 임자면 임자교차로에서 울산광역시 남구 무거동 삼호교남 교차로를 잇는 대한민국 일반 국도이다. 담양군에서 거창군까지의 구간은 광주대구고속도로와 평행하게 달리며, 밀양시에서 울산광역시 사이에는 국도 최장터널인 가지산터널이 있다.
여수지맥에서 일면식이 있는 국도 제77호선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네요.
♤ 국도 제77호선(부산-파주선)
국도 제77호선은 부산광역시 중구 옛시청 교차로에서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자유 나들목까지를 연결하는대한민국 일반 국도이다. 한반도의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L"자형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국도이고, 미개통 구간이 많이 있다. 본래는 부산-인천선이라고 하여 인천광역시 동구까지였으나, 2008년 말에 자유로가 이 도로에 포함(국도 제77호선으로 승격)되면서 대한민국의 극북과 극서, 극남을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종점에서는 국도 제1호선과 연결 된다.
♤ 서당골식당/ 면계/ 삼리경계면(망운면 목동리, 현경면 외반리 → 송정리)
현경면 외반리를 지나온 지맥은 서당골식당 주차장에서 망운면 목동리와 만나 해동마을까지 경계를 따른다.
♤ 무안군 망운면(望雲面)
군의 서부 중앙에 위치한 면으로 본래 영광군에 속해 오다가 조선 인조 때 감목관(監牧官) 설치로 목장면(牧場面)이 되었다. 1910년 지방관제 개편 때 목포부에 편입되면서 망운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면서 현화면(玄化面)의 도천·대박산·학례 등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71년 운남출장소(雲南出場所)가 설치되었고 1983년 운남출장소가 운남면으로 승격되면서 분리·독립되었다. 무안반도에서 서남방향으로 돌출한 망운반도의 중앙부에 해당되며 동서 양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지세는 면 전체가 기복이 심하지 않은 낮은 구릉과 평지로 되어 있으며, 토양은 사질로 토심이 두껍고, 전 지역에 지하수가 흘러 곳곳에 관정이 뚫려 있다. 해안에는 넓은 갯벌이 있으며, 간척지가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양파 등이다. 특히, 이곳의 황토밭에서 산출되는 고구마는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그 맛이 밤과 같아서 ‘밤고구마’로 이름이 나 있다. 과수로는 포도 및 감이 있는데 피서리의 톱머리에서 나는 단감은 감미율이 높고 한 개의 무게가 300g 이상이 되어 이 지방 특산물로 손꼽힌다. 연안 해역에서는 굴·고막 등의 패류양식이 이루어지며, 맛이 좋은 세발낙지가 많이 잡힌다. 운남면 연리에서 현경면 외반리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나고 있다. 곰리 앞 모래밭에는 캐나다가 원산지라고 하는 선인장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피서리의 톱머리에는 해수욕장이 있다. 목동(牧東)·목서(牧西)·피서(皮西)·송현(松峴)·탄도(炭島) 등 5개 리가 있다.
♤ 무안군 망운면 목동리(牧東里) 해동마을
망운면 목동리는 목동, 목남, 주교, 압창, 해동 등 다섯개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시대 군마를 방목하기 위해 설치된 망운목장을 관리하는 목관의 동편에 위치한다 하여 목동(牧東)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조 때 병사용이나 관청용으로 말을 길렀던 국영 목장은 전국에 21개소로 그 중 무안 망운목장을 포함한 5개 목장이 전남에 집중해 있다. 해동은 목동5리에 속하는 마을로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면 방향으로 1km쯤 가다가 고가도로 밑에서 왼쪽으로 꺽어들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은 밤까시(栗村 또는 栗洞) 또는 빵까시라 하였다. 마을 지형이 밤톨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얼마 전까지 군데군데 밤송이를 뜻하는 흙무더기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 목동육교/ 면계/ 망운면 목동리 → 현경면 송정리
목동육교를 통과하고 해동마을에서 송정리로 들어서서 송정마을 송정교차로를 지난다. 지맥은 구24번 도로인 현해로를 따르고 24번/77번 신도로가 목동IC에서 교차하여 오른쪽으로 흐른다.
♤ 서해랑길
서해랑길은 전남 해남 땅끝탑에서 인천 강화를 연결하는 109개 코스, 1,800km의 걷기여행길로, 서쪽(西)의 바다(파도)와 함께(랑) 걷는 길을 의미하며 서해랑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드넓은 갯벌과 황홀한 일몰, 종교와 문물교류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장어집을 지나며 아주머니에게 오른쪽은 함평만인데 왼쪽 바다는 이름이 있냐고 여쭸더니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우리는 앞바다 뒷바다 그러요.ㅋ~ 저는 직진하니 둘다 옆바다입니다만 오른쪽은 함평만, 왼쪽은 목포 바다 탄도만입니다.^^
♤ 송정교차로/ 대박분맥분기점
대박분맥은 24번/77번 신국도에서 출발해 24번 구도로에서 좌회전 송정교차로를 지나 (주)팔팔을 지나면 바로 봉대지맥/대박분맥 분기능선이다. 운남면사무소를 통과하고 대박산(87.5m)을 지나 도원마을 방조제까지의 도상거리 약 16.6km 산줄기를 말한다.
♤ 대상농산, 대상정미소/ 리계(현경면 송정리 → 용정리)
대상정미소 표석을 지나는 지점으로 현경면 송정리에서 용정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좌우로 바다가 멀지 않다.
♤ 봉오재/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龍井里) 봉오재마을
현경면 용정리와 해제면 오류리로 이어지는 긴 재가 있는데 원래는 저승재라 불렀으나 이제는 봉오재라 부른다. 이곳은 산림이 깊고 인가가 없어 사람들이 함부로 다니기를 꺼려하였다 한다. 또한 봉대산은 조선시대 옹산봉수로 알려진 관방 유적이 있다.
♤ 용정교차로
봉대지맥 분기점으로부터 도로를 따라 약 9.5km를 걸어 여기부터 비로소 산길로 접어든다. 밭을 지나 봉대산을 향해 오른다.
봉대지맥의 봉대는 봉수대의 준말이고 봉대산은 봉화산의 다른 이름임을 알고 갑니다. 봉대산에서 신우대 숲길로 내려서서는 안됩니다. 지맥은 능선을 따라 옆으로 이동하여 김해김씨 묘지로 이어지고 묘지길을 따라 내려섭니다. 시그널을 잠시 놓쳤습니다.
♤ 봉대산(烽台山, 83.8m)/ 옹산봉수대(甕山烽燧臺)/ 팔각정자
이곳 봉대산은 전남 무안군의 서쪽 해제반도 현경면 용정리에 위치한 산으로 조선 시대에 '옹산'으로도 불렀으며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봉대산 옹산봉수는 조선시대 때 서남부 지역에서 왜적의 침입이 있거나 변란이 일어났을 경우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불을 피워 한양에 알리는 통신망으로서 이 지역 봉화의 경로는 조선 초기인 1438년(세종20) 경에 개설되어 삼향 왕산에서 남쪽의 무안현 고검산 봉수(무안군 청계면 강정리 도대봉)를 걸쳐 전달한 내용을 서쪽의 함평현 해제 봉수(무안군 해제면 신정리 봉대산)에 전달하는 연락체계로 1894년(고종31)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 되었다. 옹산봉수는 간봉(間烽)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가장 많은 승전보를 임금에게 알린 봉수로 알려져 있고 이곳 현경면과 이웃한 해제면은 함평현에 속해 있다가 1896년에 무안현으로 편입된 관계로 아직껏 주변 바다가 함평만으로 남아있다. 옹산 봉수의 크기는 해제 봉수와 함께 임치진에 속한 봉수로 별장 8명 봉수군 75명이 배치되어 활동했다. 옹산봉수는 1976년 전경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관계로 유구(遺構)와 제단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2001년 공공근로사업으로 정비하였는데 화덕지나 연대 그리고 방화벽이나 막사 터의 흔적은 이미 사라지고 복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지도서』에 감악산에서 뻗어 나오고 함평현 관아에서 서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옹산(瓮山) 봉수는 관아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해제후산의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남쪽으로 무안현 고림산 봉수로 신호를 보낸다고 기록하였다. 『대동여지도』에 함평 감악산에서 해제로 이어지는 산줄기에서 벗어나 옹산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봉수대터가 있다. 무안군 봉오제 망루는 충무공 이순신께서 올라 임란의 방비책을 강구했던 성 무안 봉대산성이다. 나주에서 고막원을 거쳐 무안에 도착하여 세번째 날에 옛지명 동산원 현지명인 봉오재에서 말을 먹이고 임치진에 이르러 밤을 맞이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현재 동산원의 흔적은 당시 함평현의 관할지 옹산 봉수지라 부르는 봉오재가 있어 짐작이 간다. 해제의 임치진성, 성내에 남아 있는 몇 기의 비석만이 첨사가 근무하던 성이라 말하고 있다. 이 충무공께서 정유재란을 한해 앞두고 임치첨사 홍견과 더불어 지형을 살피며 방비책을 세웠던 곳이다.
♤ 작은봉대산(62.2m)/ 리계(현경면 용정리 → 오류리)
봉대산에서 24/77번국도로 내려서서 맞은편 주유소옆 밭으로 들어선다. 작은봉대산에서 하산길에 탄도만이 바라다 보이고 잠깐이지만 묘지를 만나기까지 덤불숲이다.
♤ 어은동고개/ 무안군 현경면 오류리(五柳里)
어은동은 오류2리에 속하는 마을로 곡지동에서 이주하여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숲속에 은거하고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고하여 어은동(漁隱洞)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명의 한자를 보고 그에 맞게 풀이한 것일 뿐, 漁隱이란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사용하는 호(號)로서 속세를 벗어나 세상 번뇌를 씻고 맑고 한가로움을 탐하며(淸閑), 풍류와 흥을 낚는 의미로써 많이 쓰여지는 관념어이다.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으며 여생을 한가로이 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어은동 마을에 있는 어은동고개를 지난다.
봉대지맥에서 삼각점을 처음 만나는데, 1:5만지도 도엽명에 쓰인 와도는 오후에 가야할 천마산 아래 해제면 창매리 중매산 아래 바닷가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검무산에서 와도가 보이는군요. 검무산의 가치가 레벨업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검무산(劍舞山, 104.3m)/ 2등삼각점(와도 25/ 1999 복구)
검무산은 지맥에서 왼쪽으로 약 200m 벗어나 있어 다녀와야 한다. 정상에는 정교하게 쌓은 돌탑 두기와 운동시설이 있다. 조망도 썩 좋은 편으로 영산기맥의 흐름이 제대로 관전된다. 현경면 오류리 어은동(漁隱洞) 마을 뒤에 검무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지류에 뒷산이라 부르는 동산이 있고 앞에는 작은봉대산이라 부르는 앞산이 있다. 검무산의 제일 높은 곳은 무제봉이라 하며 그곳에서 재를 지내기도 하는데 아이를 못 낳는 집에서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원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주민들이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검무산은 예로부터 이 산의 기운을 받은 곳에서는 장군이 날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자세히 보면 장군이 칼을 들고 웃는 형국이라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산의 지형이 거미가 집을 지을 때, 가운데에 거미가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하여 거무산(거미산)이라고 했다 한다. 이 거무산이 한자어 표기에 의해 검무산으로 바뀌어 졌다는 것이다.
봉대지맥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왔다리갔다리 앞바다와 뒷바다를 오갑니다.^^
♤ 마산육교/ 리계(현경면 오류리 → 마산리)
오류동마을회관을 지나고 마산육교로 진행한다. 육교 아래로 24/77번 국도가 지나간다. 마산육교를 지나 신기마을버스정류장에서 마산리로 들어선다.
♤ 무안군 현경면 마산리(馬山里) 신기마을
신기(新基)는 마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처음 들어온 사람이 새롭게 터를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산리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해제 쪽으로 9km 떨어진 현경-해제간 일반국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바다 앞에 있으며 들이 넓게 펼쳐진 농촌지역으로, 마을형국이 동으로 초장(草場), 서로 방마형(芳馬形)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마산과 신기 두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말을 길렀다는 병마골과 초장골이 있으며 대대로 문맥(文脈)이 끊이질 않고 이어져 온 지역이다.
♤ 53.6m봉/ 4등삼각점(와도 452/ 1985 재설)
신기마을을 지나 임도를 따르고 임도삼거리가 큰재이다. 큰재에서 좌틀하여 올라선 53.6m봉은 무시무시한 가시나무가 곡장으로 둘러쳐진 어느 집안의 묘지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벗어나 있다. 삼각점봉 뒤쪽에 판윤경은김해김공 합장묘가 보여 다녀오는데 부인은 남편의 관직에 따라 숙부인이다. 경은(耕隱)은 어은동(漁隱洞)마을과 연관이 있는 호처럼 보인다.
♤ 마산리/ 원마산/ 배나무재
마산마을을 지나 24번국도에서 마산마을 표석을 만나고, 그 앞에 있는 원마산버스정류장에서 24번국도를 따르는 경우가 많지만 원 지맥은 도로를 건너 반대편 신정교회로 진행한다. 지형도상 배나무재이다.
♤ 홀통교차로/ 마산활어집앞
24/77번 도로를 따라 20분 이상 걷는다. 좌우로 바람에 바다 냄새가 넘나드는 곳이다.
♤ 낙지길
낙지길은 무안군 해제면 생태갯벌센터에서 물암마을을 거쳐 홀통해변으로 이어지는 7.1km 구간의 해안길이다. 동북쪽으로는 함해만의 갯벌습지보호지역과 마을을 연결하고, 남서쪽으로는 탄도만의 섬과 바다를 이어준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무안의 갯벌, 황토, 생태 그리고 사람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다. 물암마을에서 도로를 건너면 물바위가 있는 해변이 나타난다. 생태갯벌센터 앞이 넓은 갯벌인 데 비해 물바위 해안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물바위해변의 명물은 물바위다. 물바위는 ‘물에 잠긴 바위’라는 뜻이다. 물바위에서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홀통해변으로 이어진다. 홀통은 유리병의 목처럼 생긴 지형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유진농산/ 리계(현경면 마산리 → 가입리)
아젤리아커피점을 조금 지나 유진농산 앞에서 왼쪽 바다로 코딱지 만한 무인도인 은복도(銀伏島)를 바라보면서 가입리로 들어선다.
♤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加入里)/ 더드리
가입리는 현경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해제면 유월리와 경계에 있으며 서로는 탄도만 동으로는 함해만을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20세기 들어서야 목포부 다경면의 지역으로 가입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가입과 너물 두 마을이 있다. 가입이라는 지명은 더드리에서 비롯된다. 이 지역은 현경면에서 현경로를 따라 봉오재를 지나 해제면과 경계 지점 직전에 오른쪽으로 꺽어들면 만날 수 있다. 지명의 유래는 조금 더 들어가면 마을을 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더드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지금의 가입리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더드리라는 예전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43.1m봉을 접수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었습니다.^^
♤ 43.1m봉
가입리 마을 표지석을 지나 올라서는 나즈막한 야산이다. 가입리 버스정류소에서 우틀하여 가입리 마을로 들어서다 왼쪽에 보이는 우성산업 뒤쪽으로 등산로가 있다. 맥길은 묘지로 내려서서 밭을 지나 무안에덴교회로 나간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43.1m봉을 생략하고 물암마을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다.
2,300명의 조선군이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친 한강변 행주대첩의 원동력이 망암 화차에 있었군요. 도로를 따라야지 묘소를 바라볼 수 있는가 봅니다.
♤ 망암(望菴) 변이중(邉以中) 선생 묘소
가압리 43.1m봉 아래 커다란 묘지가 망암 변이중선생 묘소이다. 임진왜란 승리의 숨은 공신인 망암 변이중 선생(1546~1611)은 장성읍 장안리에서 출생 하셨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23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사헌부 감찰 공조좌랑 성균관 전적 황해도 도사 등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1952년 10월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소모사가 되어 군량미와 의병을 모집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선생은 일찍이 왜적의 조총에 맞서 싸울수 있는 신무기가 화차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발명한 화차 300량을 제작, 이 가운데 40량을 바닷길을 이용해 행주산성에 있는 권율장군에게 보냈다. 망암 선생은 함안군수를 끝으로 벼슬을 지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하곡 정운용 추담 김우급 등과 교유하여 장성향헌 20조를 만들어 백성의 교화에 앞장섰다. 변이중(邊以中)의 묘(墓)가 그가 출생하고 성장하면서 학문을 연마했고 별세한 장성에 있지 않고 고향에서 50km나 떨어진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가 전라도 소모어사를 하면서 봐뒀던 명당이라는데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었다고 한다. 1546년 장성에서 태어나 66세(1611년)에 여생을 마친 망암 선생은 장성에 안장됐다가 몇 해 후 아들에 의해 화해롱주(花蟹弄珠: 게가 구슬을 희롱하는 명당)로 알려진 이곳에 안장되었다 한다.
물암마을 표석을 지나며 해제면으로 들어섭니다. 정확하게는 수암정 추어탕집을 지나면서 해제면입니다.
♤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유월3리)/ 육각정자/ 면계/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회관 주차장 옆으로 벽면에 밀창문이 설치된 육각정자가 있다. 물암은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방향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유월3리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당당구지와 한뿌리(一根)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24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현경과 해제면의 경계 지점에 있다. 또한 지리적으로 자라목 지형으로 동서로 바다가 접해있어 육지면이 가장 좁은 지역이다.
♤ 무안군 해제면(海際面)
본래 무안군 지역으로 군의 서부에 위치하며 사면이 바다로 되어 있으므로 해제면이라 하였는데 1910년 지방관제 개편 때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진하산면(珍下山面)의 일부를 병합해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신정리 봉대산(烽臺山, 197.1m)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이 100m 내외의 산지와 구릉 및 저지로 되어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안선의 길이가 75㎞에 달하며, 해안에는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며, 특용작물로는 잎담배·참깨·양파·마늘 등이 생산된다. 해안에 접한 지역에서는 김·조개·낙지·숭어 등이 많이 나며, 수산물의 어획 및 채취로 인해 가계소득이 높은 편이다. 특히, 이 고장에서 잡히는 세발낙지는 그 맛이 좋아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다. 북쪽에 있는 도리포(道里浦)는 숭어·돔 등의 어종이 풍부한 자연낚시터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안읍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양월리에서 해제반도 중앙을 지나고 있어서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신정리 옛 읍 입구 봉대산에 봉수대와 석성 흔적, 그리고 도굴된 것으로 보이는 옹관묘와 그 파편이 산재해 있으며, 송석리에는 선돌이 있다. 광산리에서는 신석기시대 유물로 보이는 돌도끼가 발견되었다. 임수리에 임치진성, 광산리에 미륵당, 산길리에 원갑사가 있다. 이 밖에 덕산리에 분매사(盆梅祠), 대사리에 학산사(鶴山祠), 양매리에 모충사(慕忠祠) 등이 있다. 면의 서쪽 약 5㎞ 지점에는 100m의 성책과 5기의 전라우도수군첨절제사 공적비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은 옛날 함평현에 속하는 임치진(臨淄鎭)이다. 신라 때는 임해현(臨海縣), 고려 때는 임치현(臨淄縣)이라 하여 서남해지역의 해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봉대산에는 봉수대터와 반달형 석성 흔적이 남아 있다. 신정(新井)·덕산(德山)·대사(大士)·유월(柳月)·용학(龍鶴)·송석(松石)·만풍(萬豐)·양매(兩梅)·학송(鶴松)·양월(洋月)·산길(山吉)·임수(臨水)·석룡(石龍)·광산(廣山)·창매(蒼梅)·천장(泉壯)·양간(兩干) 등 17개 리가 있다.
칠산대교 도리포로 가는 길에 무안황토갯벌랜드라고 써진 큰 건물이 보이는데 찜질방일까요?
♤ 수암교차로/ 나그네식당
정면 오른쪽으로 이성산이 바라다 보인다. 수암교차로는 임자도로 향하는 24번국도와 칠산대교로 향하는 77번국도가 분기되는 지점이다. 수암교차로 송마로 아래 위치한 나그네 식당은 인근 무안 황토갯벌랜드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2020년 8월 18일 오픈했다. 식당 벽면에 나그네 민막 연락처가 있다. 식당 앞에 있는 카라반(나그네 민박)에서 하루 자는데 5만원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
개눈엔 똥만 보인다고 오류 마을회관 지나 이성산 오가는 지점에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예사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안에 들어가 간단하게 햄버거로 식사를 하는데 안온하더군요.
♤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오류마을
오류마을에서 이성산을 다녀오는데 왕복 1.7km이다. 이성산을 다녀오기 위해 도리포마을쪽으로 진행한다.
황금박쥐 금굴은 찾질 못했다는 후길 보았고,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를 표지판 방향으로 들어가 찾아보았으나 광산김씨, 인동장씨 묘지만 있고 약수터는 찾질 못했습니다.
♤ 122.0m봉/ 4등삼각점(와도 444/ 1985 복구)
오류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양회임도를 따라 30여m 가면 느티나무가 보이며 왼쪽에 이정표가 나오고 이성산 오르는 넓은 길이 이어진다. 10여 분 오르면 묘지 위에 4등삼각점 와도 444가 있는 122.0m봉이다. 맨발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이성산에서 바라보는 함평만 건너는 대부분이 무화과로 유명한 손불면의 앞바다네요. 영산기맥 군유산(君遊山, 406m)/ 삼면봉(영광군 군남면, 함평군 신광면 → 손불면)에서 아리하게 칠산대교를 바라보던 기억을 후기를 찾아보며 소환해봅니다.
♤ 이성산(泥城山, 123.6m) 왕복
삼각점봉에서 2분 여 더 가면 이성산 정상인데, 해제면에서 봉대산 다음으로 두번째로 높은 산이다. 편백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고 긴 의자 하나에 풀만 무성하다. 전망은 좋은 편이다. 도리포 방향으로 함평만 건너편은 주포한옥으로 유명한 돌머리 해수욕장이다. 이 산에는 일제시대에 금광이 개설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금을 채취했다. 니성산에는 약수터가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약수터 위에 절터가 있어 약수터의 물을 떠다가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고 하나 사찰이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성산에서 발길을 되돌린다.
♤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松石里) 도리포마을
송석리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7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함해만을 사이에 두고 함평군 손불면과 마주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인접해 있어서 해태와 어패류 등의 수산물이 많아 가계소득이 높다. 본래 해제면 지역인데 1914년 송계동 삼봉리 입석리 도리를 병합하여 송계와 입석의 이름을 따 송석리라 하였다. 도리포와 닥섬이 있다. 영광군과 함평군을 경계로 하는 칠산 바다와 인접되어 있는 도리포(道理浦)는 일출과 일몰을 같은 장소에서 즐길 수 있어 매년 1월 1일에는 해맞이 행사가 개최되기도 한다. 입석은 송석2리에 속하는 마을로 세개의 선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호랑이의 피해를 막기위해 돌을 세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호랑이의 피해가 잦았다. 그러던 어느 해 한 스님이 마을을 지나가다 마을을 둘러보고 방책을 알려주었다. 마을 어디를 파면 돌이 세개 나올텐데 그 돌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옷을 힙히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이 마을은 니성산의 줄기인 천마산을 주봉으로 하고 있으며 함해만이 보인다. 지형이 천마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어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외얏골, 핑경, 꽃방울, 잿등, 방장골, 안장바위, 왕겨산 등이 그것이다. 송계마을은 예전부터 해제면에 전해져 오는 8개의 명당 중 하나인 천마시풍(天馬嘶風)의 혈처가 있다는 마을로 길지로 여겨지고 있다.
주유소 건물 뒤편에 수도가 있어 물을 받아갑니다.
♤ 77번국도/ SK동부셀프주유소/ 리계(해제면 유월리 → 용학리)
지맥은 77번국도에서 용학리와 경계를 만나고 용학장로교회에서 FND본사로 가며 용학리로 들어선다.
♤ 무안군 해제면 용학리(龍鶴里) 장성마을
용학리는 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해제면소재지부터 현경면 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룡동, 도성동, 장성동, 이방리, 학천동을 합하였으며 기룡과 학천의 이름을 따서 용학리라 부르게 되었다. 들이 넓으며 마을 앞으로 강이 흘러 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자연마을로는 도성, 장성, 이방, 기룡 마을 등이 있다. 용학2리 장성(長城) 마을은 마을 앞의 언덕이 성처럼 쌓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옛 조상들이 마을에 입향 하였을 때 두 장승(남자, 여자)을 세웠다 하여 장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리방(梨芳)은 마을 뒷산에 배나무가 있었는데, 그 배나무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좋아 배꽃 리(梨)자와 꽃다울 방(芳)자를 따서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 동산(東山, 64.2m)/ 리계(해제면 용학리 → 양매리)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고 숙인(淑人) 나주정씨 묘가 있다. 동산에서 곧바로 우틀로 떨어지면 다시 도로구간이 이어진다. 해제면소재지 양간리에서 동쪽에 위치하여 동산이라 불린듯 하다.
지맥은 해제성당 삼거리 직전 전주최씨세장산비에서 우틀합니다. 여기에서 해제 시내로 들어가 밥을 먹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도로를 왕복하는 시간까지 1시간은 소비되겠어요.
♤ 805번지방도로/ 현해로/ 해제성당
805번 지방도로로 내려서 해제성당 이정표 삼거리에서 원맥길은 오른쪽으로 신정리 응양마을 표석을 지나 봉대산으로 향하고, 왼쪽으로는 해제면 방향이다. 도로를 따라 소망교회와 양매2리 외분마을을 지나면 이후로도 농로길과 밭을 지난다.
♤ 무안군 해제면 양간리(兩干里)/ 양수머리
해제면은 예전의 큰 고을 터였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이 고을 터가 어떤 배경과 역사를 지녔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기록상으로는 해제면 일대에 백제시대 때 이미 도제현(道際縣)이 설치되어 있었다. 백제시대부터 현이 설치될 정도로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성이 인정되었던 해제가 사료나 유물의 부족으로 그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봉대산에서 백제시대 이전의 성터로 추정되는 성벽이 발견되었고 봉대산 주변 밭에서 수습되는 백제-통일신라시대 때의 많은 토기편들은 오래된 이 고을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양간리는 해제면소재지로 현경면에서 신안군 지도를 향하는 24번국도가 지난다. 양간이란 지명은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 다리를 중심으로 동쪽은 개니(가양이란 마을이 이름에서 변화, 개웅의 끝이라는 개미의 뜻임) 서쪽은 고읍내라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시 마을 중심인 현재 동아약국 앞에 나무다리가 있어 양간이라 하였다. 주민들은 다리독으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다리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포구였다. 양간의 한자는 兩間, 兩干, 또는 兩澗 등으로 표기되나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 유래지나 다른 자료에는 兩干으로 표기하고 있다. 兩干으로 쓴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치진이 있는 해제의 지리적인 특성으로 군사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兩間으로 쓴 이유는 개니와 고읍내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兩澗은 봉대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개니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진다는 의미에서 쓰여진 한자이다. 예전에는 개니 고랑에서 양간다리를 거쳐 성포 앞까지 사금채취가 붐을 이룬 적이 있었다.
슈퍼에서 간단한 음료수와 막걸리, 캔맥 등을 구할 수 있는데 시골이라 뜨네기 상대라선지 단가가 세네요.
♤ 외동이발관/ 외둥슈퍼/ 805번도로/ 삼리경계면(해제면 덕산리, 양매리 → 신정리)
지맥은 양매리 외분마을과 매곡마을 옆을 지나 덕산리와 경계를 만나고 함평만이 내려다 보이는 파평윤씨 묘지에서 좌틀하여 외동이발관으로 향한다.
♤ 무안군 해제면 신정리(新井里) 응양마을
신정리는 해제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대산을 주산으로 응양, 신흥, 고읍, 신간(양간3), 양학(양간4) 등 다섯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신흥과 정동의 이름 첫자를 따 신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신정1리 응양마을은 정촌마을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해제면 소재지에서 대사리 쪽으로 2km 쯤에서 왼쪽으로 꺽어들면 나온다. 남양홍씨 자작일촌으로 마을 뒤 장수샘 주변으로 동백군락지가 있다. 마을의 형국을 보면 봉대산 기슭에 주산인 산짓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좌청룡우백호의 형세를 갖추고 있다. 특히 마을 뒷산인 산짓등이 매 형세를 갖추고 있어 마을 앞에 있는 촌중산(村中山)은 매의 먹이인 꿩 형국으로 매가 먹이를 앞에 두고 있는 지세다. 이와같이 마을 지형이 매와 꿩의 형상이라 응양(鷹揚)이라 했다고 한다. 신흥마을은 입향조인 나씨 다음에 들어온 밀양 박씨가 새로이 조성한 마을이라 하여 새로울 신(新) 자에 일어날 흥(興)자를 써서 신흥(新興)이라 불렀다. 고읍마을은 임진왜란 무렵 해제면의 도읍터라 하여, 옛 고(古)자와 고을 읍(邑)자를 붙여 마을 이름을 고읍(古邑)이라 하였다.
주차자장에서 무슨 사연인지 간단한 제례상에 고사를 지내는 분을 만나 요굴트와 귤을 얻어 먹습니다. 봉대정에 올라 조망을 만끽하는데 아차차~ 백학산과 눈맞춤을 안했군요.
♤ 봉대산(烽台山, 197.1m)/ 해제후산(海際後山)/ 봉대정(奉台亭)/ 삼각점( / )/ 삼리봉(해제면 신정리, 덕산리 → 학송리)
봉대지맥의 주봉이자 해제면의 진산으로 해제면 중앙에 위치하여 쌍봉을 이루고 있다. 무안군의 서쪽 해제반도 해제면 석룡리 ·학송리 · 신정리 등에 걸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해제후산으로도 불렸다. 정상에는 조선시대부터 봉화대가 있기 때문에 봉대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정상의 봉우리는 2개인데 큰봉대, 작은봉대라고 부른다. 주변 일대에는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산성이 남아 있다. 『여지도서』에 "해제후산(海際後山)은 옹산에서 뻗어 나온다. 함평현에서 서쪽 70리에 있다. 해제후산 봉수는 관아의 서쪽 68리에 있다. 북쪽으로 영광현 차음산(次音山)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동쪽으로 옹산(瓮山) 봉수로 신호를 보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 이치진 북쪽의 해제봉수가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함평현 남쪽에 있는 감악산에서 해제반도를 따라 이어지는 산줄기가 해제 고현(古縣) 북쪽 해제 봉수에 이르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무안읍지』의 봉수에 관한 내용 중에서 "슬산(瑟山)이 지금의 해제 봉대산이니, 남쪽으로 함평 옹산에서 북쪽 영광 차음산으로 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봉대산이 슬산이란 이름으로도 불렸음을 짐작케 한다. 봉대산에는 해송이 무성하여 인근 주민들의 등산코스로 많이 이용되며, 큰 봉대 밑 옹달샘은 약수로 유명하다. 이 약수를 마시면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해오며 여름철이면 많은 아낙네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또한 봉대산 봉우리에는 오랜 유서를 간직한 봉수터가 있으며, 봉대산 큰 봉대밑 무제봉에도 명당자리가 있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큰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봉대산은 해발 200여m의 봉우리라 산이라 말하기에는 그리 높지 않지만 그래도 근방에선 가장 높기에 서해의 많은 섬을 한눈에 내려다 보고 일출과 일몰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명산으로 유명하다. 예부터 봉대산은 군사적 요충지로 정상에 올라가면 봉대산성이 있는데 성벽과 봉화터를 볼 수 있다. 봉대정(奉台亭) 귀퉁이에 삼각점이 있는데 땅속에 묻혀 글자는 식별이 되지 않는다. 영광군 백수읍을 잇는 칠산대교와 대단위 풍력발전단지도 보인다.
♤ 무안 봉대산성(烽臺山城, 202.2m)/ 삼각점( / )/ 산불감시카메라/ 삼리봉(해제면 신정리, 학송리 → 광산리)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봉대지맥의 최고봉이다. 직진으로 등로가 좋지만 맥길은 봉대산성을 찍고 뒤로 백해서 가야한다. 무안군 해제면 고읍리 서쪽에 위치한 작은봉대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지난 2005년 숲 가꾸기 사업을 하던 중 우연히 성벽이 발견됐는데, 방어시설인 치성도 같이 발견되었다. 천2백 년 만에 세상 밖에 드러난 봉대산성이다. 돌로 쌓은 성벽은 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반도를 이룬 해제면 중앙부의 가장 높은 산에 자리 잡고 있어 신안·무안·함평·영광군 등 서남해안의 바닷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서해와 남해 사이의 신안, 무안, 함평, 영광군 등을 지키기 위해 지었다.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 무렵에 도제현을 다스리기 위한 중심성곽(치소)으로 처음 쌓았으며, 통일신라시대에도 고을 이름을 해제현으로 바꾸어 고려시대까지 사용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약 430m, 너비 5m, 면적은 약 6,587㎡이다. 부속시설물로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성문과 성벽의 일부를 네모꼴, 또는 둥근 모양으로 튀어나오도록 쌓아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앞과 양쪽의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인 치 2개 등의 유구와 기와류, 토기류, 철기류 등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봉대산성은 통일신라시대 석축 산성 가운데 석재의 가공에서부터 성벽의 축조까지 최고의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다. 성돌을 받치는 구실을 하는 지대석을 지면 위에 놓고, 규격화한 성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쌓는 형식은 통일신라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그만큼 성벽의 구조와 안정성 면에서 뛰어난 산성으로 평가된다.
♤ 백학산(白鶴山, 126.3m)
무안군 해제면 대사리에 있는 백학산은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려 말 고씨(高氏)의 속성(俗姓)을 가진 명승이 이 산에 들어와 절을 세우고 수도를 하였다. 어느 해 가뭄으로 온 동리가 아사지경이 되었을 때 한 노인의 간청에 따라 불공을 드려 비를 오게 했으나, 다음 세상에 중들이 수난을 당할 것을 예견하고 상좌들을 피신시킨 뒤 자신은 백학이 되어 구름을 타고 날아갔다는, 긴 가뭄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학이 되는 저주를 감수하고 비를 내려 백성을 구한 고승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진정한 구원자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고승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동네 뒷산인 동백산을 백학산이라 불렀다.
♤ 세민길/ 리계(해제면 신정리 → 광산리)
광산2호저수지를 지나 땅골마을로 내려서서 805번지방도/ 봉대로를 가로질러 세민길을 따르다 용덕사가 내려다보이는 삼거리에 닿기 직전 양쪽에 너댓기의 묘지군이 있는 곳을 지나며 해제면 광산리로 들어서면 곧바로 용덕사를 지난다. 용덕사 규모가 꽤 커보인다.
♤ 56.8m봉
김해김씨세장비와 용덕사를 지나 오른 잡목봉 봉우리이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이곳에서 오른쪽(서쪽)으로 가까운 해안가가 임치진성이 있는 임수리 임치마을입니다. 지도로 넘어가 100.5m봉에서 꽃봉산으로 진행하며 백학산과 임수리 임치마을 그리고 강산을 자세히 바라볼 기회가 있습니다.
♤ 임치진성(臨淄鎭城)/ 염해현(鹽海縣)
임치진이란 오늘날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임치마을에 있었던 진영으로 전라우도의 도만호진(都萬戶鎭)으로 목포진·다경포진·법성포진·검모포진·군산포만호진을 관할하는 주진이었으며, 군선도 중선 8척에 별선이 12척, 군사도 1,055명이 배치되었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임치는 치 형국으로 물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고, 중국 산동반도의 고을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임수1리에 속하는 마을로 임치와 동령재로 이루어졌으며 임치 마을 앞의 서해바다는 중국을 향한 무역항로일 뿐 아니라 조세운반의 해양 길목에 해당되어 고대로부터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임치라는 지명이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고록지현(일명 개요현)을 통일신라가 염해현(鹽海縣)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에서 이를 임치현(臨淄縣)으로 개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관계로 한 때는 8만호를 거느렸던 수군 진영이 있었고 지도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육지이기도 하다. 임치진성은 해안가에 있는 산성이다. 임치포구는 전라우도수군이 머물면서 전남의 서남해역을 방어했던 진지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두 번이나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난중일기』에 병신년(1596년) 9월 8일 임치진성에 들러 첨사인 홍견(洪堅)에게 방비책을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성벽의 일부가 남았으나 농가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밭을 확장하기 위해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궁예는 909년 태조(왕건)에게 명하여 정주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군사 2천5백을 거느리고 진도군과 고이도(皐夷島)를 점령하였다. 당시 왕건이 지휘하는 태봉 수군은 염해현(영광 해제면 임수리)에 머물렀다가 견훤이 오월국으로 파견하는 선박을 노획하였다.
솔개재 정상에 있는 통사랑 묘지에 글자가 없는 도근점 삼각점이 있네요.
♤ 솔갯재/ 비석거리/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廣山里) 발산마을
솔개재를 넘어 내려서면 감나무재이다. 솔개재를 넘어 도로에 닿고 이후 천장교를 지나 천마산에 오르기까지 도로를 따라 약3.2km 진행한다. 마을 북쪽 언덕을 비석거리라 한다. 영광군수 이현익 휼민선정비(1865년)가 세워져 있다. 영광에서 지도군(지금의 신안군 지도읍)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길을 지나가야 한다. 솔갯재의 비석거리를 넘어 독새청이라는 곳에 주막이 있었다. 오랫동안 대로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이 이뤄질 당시에는 서당골, 비석거리 등으로 부르다가 마을이 스님이 들고 다니던 바리때 모양으로 생겨,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 즉 바랑의 원말 발낭(鉢囊)에서 발(鉢)이라는 이름이 왔다. 뒷산의 산을 합해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마을 앞 절은 건너편 강산(糠山)에 있는 원갑사(圓甲寺)를 말한다. 통일신라의 의상이 창건했다. 본래 강산사였으나 훗날 당산사로, 다시 원갑사로 바꾸었다. 사찰에 빈대가 너무 끓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하나, 진위는 확실치 않다. 삼갑사(영암 도갑사, 영광 불갑사, 무안 원갑사)중 하나라는 점에서 의미를 두기도 한다.
♤ 감나무재/ 4등삼각점(와도 446/ 2010 재설)/ 리계(해제면 광산리 - 천장리)
신등마을 표석과 원갑사 입구 표지판이 있는 감나무재에 닿는다. 발산마을 버스정류장 왼쪽으로 소공원 간이화장실 옆에 16.1m봉 4등삼각점이 있고 도로 오른쪽 지맥 마루금에는 기상레이더 연구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잠시 도로파와 맥길파로 나뉜다. 충남 천안 살던 밀양 박씨가 잦은 흉년으로 살기 어려워지자 1680년쯤에 좋은 곳을 찾아 내려오다가 발산마을에 이르렀다. 앞에는 바다가 인접해 있고 지세가 좋아 500년 이상을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해 정착하게 되었다. 발산마을 미륵은 원갑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이 참조되었는지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미륵(彌勒)은 도솔천이라는 곳에서 살며 56억 7천만 년 후에 메시아로 출현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래불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해있는 불교사상이자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발산마을 입구에 서 있는 당산나무는 주엽나무다. 간척 전에는 본래 당산나무 앞까지 바다였으므로 이곳이 일종의 포구이자 배머리였다. 해제면 산길리 원갑사 뒤편의 산이 강산(糠山, 129.6m)인데, 지도 내양마을과 해제 강산마을을 오가는 나루터를 '강산나루'라 불렀다.
♤ 해제 남부교회/ 삼리봉(해제면 천장리, 광산리 → 산길리)
현해로 보천길을 따라 걷다가 해제남부교회 푯말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광산리에서 산길리로 바뀐다.
♤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山吉里) 신등마을
신등마을은 용골, 등길골, 감나무골, 신등으로 이뤄졌다. 단치산을 주산으로 하고 와필(臥筆)의 안산을 마주하고 있다. 입향조 강위석의 아버지 강흘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순, 순창, 남원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김천일 장군과 함께 진주성싸움에서 참가하여 남강에서 순절한 의로운 선비이다. 구등은 신길2리에 속한 마을로 원래는 구등길(舊登吉) 써야한다. 왜냐하면 구등 하면 의미가 없지만 구등길로 쓰면 지명이 갖는 본래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삼거리와 본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천등산을 주산으로 하고 문필봉과 잿등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는 와우형의 지형이다. 이 마을은 만민교회 이재록목사가 태어난 곳이다.
♤ 천장삼거리/ 해제남초등학교/ 해제면 천장리(泉壯里) 돌기마을회관
계속 도로를 따르다가 마루금 위에 앉아 있는 해제남초등학교 앞 천장삼거리에서 천장리로 들어선다. 남초등학교 안에 11.2m봉 삼각점이 있다. 천장리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다. 리의 서쪽으로 금산간척지가 있으며 24번국도가 지나간다. 1914년 보천과 장동의 이름을 따서 천장리라 하였다. 장동, 돌기, 보천, 백동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장동마을에 기계유씨 진산단을 포함하여 재각인 황관재 그리고 효자각, 열부각 등 각종 비가 있으며 보천동에는 공덕비등 3개의 비가 있다. 백동마을에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145명의 영혼을 모신 위령탑이 있다. 돌기마을 회관을 지나 왼쪽으로 지맥 마루금은 기계유씨 세장산이다. 천장교 아래로는 24번국도가 지난다. 본격적인 산행은 천장교를 지나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면서 시작한다.
♤ 71.5m봉/ kt무선중계기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묘지길로 장동마을 뒤편 고갯길로 내려서서 천마산으로 오르며 창매리와 만난다. 내려서자마자 금성나공 묘지를 지나는데 잔디가 아닌 콘크리트로 바닥을 발라 놓았다.
동밖에 대장님이 멀리 나주에서 천마산까지 마중을 나와주셨습니다.^^
♤ 천마산(天馬山, 83.0m)/ 팔각정 쉼터/ 리계(해제면 천장리 - 창매리)
산벚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져 있고 천마산 앞에 암봉이 있으나 조망은 나오지 않는다. 주민들이 자주 찾는지 팔각정자도 있고 정비가 되어 있다. 원 맥길은 정자를 지나지 않고 그 전에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蒼梅里) 장동마을
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 간척지를 지나 6km 지점에 위치한 창매리는 해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창매리는 천장리, 양월리와 함께 조선시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으면서 진하산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창산은 철마산이 주산이며 매당은 매령산, 매안은 중매산이 주산이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진하산면에 속했던 신월, 명암, 산촌, 창마, 매당, 장동 등의 6개 마을이 해제면으로 바뀌고 이곳 창마리와 매당리를 합하여 창매리라 하여 현재는 창산, 매당, 매안 등 세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 졌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창마라 했으나 언제 현재의 창산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은 창산, 진등, 참샛골 장두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철마산을 주산으로 하고 우측에 독산과 응봉산(매봉산) 좌측에 도문산 그리고 마을 앞 건너에 중매산이 자리하고 있다. 철마산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독산은 산 위에 커다란 독(바위)이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와도(蛙島)/ 머우섬
봉대지맥에 사용되는 삼각점에 쓰인 1:5만지도의 도엽명은 와도와 임자 두개이다. 와도는 법성(북), 나주(동), 목포(남), 임자(서)의 가운데이고, 임자는 안마(북), 와도(동), 지은(남), 부남(서)의 가운데이다. 창매리 매안마을 앞에 머우섬이라 부르는 와도가 있다. 개구리 섬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앞에서 바다를 따라 쭉 뻗어있는 지형이 이 개구리를 잡으려는 뱀과 같다 하여 배암 혓바닥이라는 지명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동백나무가 무성하여 주민들의 자랑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섬이 되었다. 원래 이 섬은 마을 공동 소유였는데 주민들의 관리 소홀로 언제부터인지 유현상 신인자씨부부의 개인 소유로 변했다. 머우섬 주변에 정챙이 개가 있다.
♤ 독산(禿山, 56.0m)
산에 커다란 독(바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되돌아 왼쪽으로 내려선다.
오늘은 고래캠핑장에서 마치고 동밖에대장님 픽업으로 해제 금잔디식당으로 나와 해제에 사시며 지맥을 뛰고 계시는 봉대산님에게 융숭한 저녁을 대접받았습니다.
♤ 참새골마을/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蒼梅里) 참새골마을
독산에서 참새골마을로 내려서서 새로 생긴 고래캠핑장을 지나 마을길로 나가 24번 국도로 진입한다. 해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 간척지를 지나 6km 지점에 위치한 창매리는 해제면의 가장 남쪽이다.
♤ 32m봉/ 민삼각점
고래캠핑장을 지나 왼쪽 임도를 따르다 능선으로 오른 나즈막한 야산으로 정상 묘지 옆에 도근점이 있다. 맥은 왼쪽으로 넘어가나 오른쪽으로 참새골길을 계속 따라 삼거리로 돌아서 도로를 타는 경우도 있다.
♤ 황금박쥐(붉은박쥐)
창매리 남단에 위치한 봉대산 자락인 수포마을 뒷산은 폐광된 10여개의 금광이 있는데 이 중 석포대굴에서 다수의 황금박쥐가 발견됐다. 창매1리 창산마을 폐금광에서도 황금박쥐(일명 붉은 박쥐)가 서식한다. 황금박쥐는 천연기념물 452호로 지정된 세계적 희귀종으로 우리나라에 500여 개체가 서식하는데 해당 동굴엔 최대 167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된바 있다. 황금박쥐는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나 대나무밭에 1~10개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겨울에는 습도가 높고 따뜻한 동굴에서 1개체씩 따로 떨어져 동굴에서 동면한다. 그리고 암컷과 수컷의 비율이 1대 80으로 극히 불균형 상태인데다 환경오염과 난개발에 따른 생태계 파괴 등으로 개체수가 줄어 멸종위기에 처한 세계적인 희귀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연기념물 452호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1급인 황금박쥐는 주로 동아시아 지역에 분포하는 애기박쥐과 종의 포유류로 학명은 붉은박쥐(Myotis formosus chofukusei)이다. 무광택의 오렌지색을 띠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함평과 신안 등에서 발견됐으며, 최근에는 충북과 강원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 24번도로/ 창매1리버스정류장/ 황토골민물장어/ 리계(해제면 창매리 → 양월리)
고래캠핑장에서 내려가 24번국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양월리로 들어선다. 길건너 코너에 17m 수준점이 있다.
♤ 무안군 해제면 양월리(洋月里) 신월마을
양월리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인군 지도읍 자동리와 서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경면에서 해제면 소재지를 거치지 않고 지도로 가는 새로운 외곽도로인 24번국도가 마을 사이로 지나고 있다. 또한 마을 바로 옆에는 신안군 지도읍과 연결하는 연륙교가 있다. 뻘이 좋아 감태와 낙지 숭어 등 수산물이 유명했으나 연륙이 되면서 옛 명성은 사라지고 추억만 남아있다. 이곳은 대월산을 중심으로 명양, 신월, 신촌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 졌다. 잔등 너머에 있는 신촌은 양월2리인 신월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신촌의 풍수적 지형이 오리 형국이라 부란(鳧卵)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6.25전까지만 해도 점등이라 부르는 사기점과 옹기점이 있었던 곳이다. 무안군 자료에 따르면 해제와 지도 사이 해협을 명양(鳴洋) 또는 울두라 했는데 양월리에 명양마을과 울뚜골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양월리포구로 불리웠고 간척되기 전까지 목포에서 지도, 임자도로 오는 객선이 들렀다.
삼각점을 찍고, 와도를 찾아보는데 집중하느라 준희선생님 산패를 깜박했네요. 대월산을 내려서며 길을 놓치면 가시잡목 속으로 들어가 개고생입니다. 능선을 고수하고 어플을 들여다보며 진행해야 합니다.
♤ 대월산(大月山, 106.9m)/ 4등삼각점(와도 450/ 1985 복구)
24번국도를 따라 대월산으로 향한다. 도로가에 편의점과 식당이 있다. 대월산은 신촌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왼쪽 숲으로 올라붙어 15분 가량 등산로가 아닌 잡목숲을 헤쳐야 한다. 정상은 넓은 헬기장으로 운동시설과 함께 쉼터가 자리한다. 대월산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천장리와 창매리의 모습이 달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금광개발을 하기도 하였다. 와도도 찾아볼 수 있다. 바다 건너가 무안국제공항이고 팔랑개비는 운남면이다. 그 뒤로 영산기맥이 흐른다. 급우틀로 휘어져 잡목을 뚫고 내려선다.
♤ 78.5m봉
대월산에서 24번국도로 내려서면 신월마을 표석뒤로 통합기준점이 있다. 마루금은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올라야 하지만 길이 없어 보인다. 150여m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가서 묘지길 가는 수레길을 따라 78.5m봉으로 올라서면 편하다. 정상 통신탑에서 우틀하여 78.5m봉에 오르고 다시 좌틀하여 내려선다. 어느 정도 진행하면 마지막 내려서는 길이 절개지급으로 어렵다. 앞쪽이 절벽이라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왼쪽으로 가야할지? 왼쪽으로 돌아서 도로쪽으로 내린다. 게다가 넝쿨지대라 위험하기도 하고 고약한 구간이다.
연육교를 건너는데 약15분 걸리고 여기부터 지도 구간 점암선착장까지는 약16.3km입니다. 곧 무너져 내릴듯 좁은 통로에 간간이 아카시아 나무가 막고 있어 쉽지많은 않네요. 오래 전엔 버스도 다녔다던데 지금은 둑이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 연육교/ 연육제방/ 군계/ 무안군 해제면 양월리 -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육지(무안군 해제면)와 섬(신안군 지도읍)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는 연육제방을 지난다. 처음에는 비교적 널찍한데, 중간쯤부터는 여기저기 무너지고 폭이 좁아져 보행 자체가 쉽지 않다. 왼쪽으로 24번국도가 방조제로 연결이 되어 있으나 그 남북쪽이 모두 바닷물인 줄 알지만 남쪽은 바닷물이지만 북쪽은 민물이라고 한다. 그 북쪽 일대는 1975년 지도(신안군) 연륙사업의 결과로 광활한 면적의 육지가 논으로 탈바꿈 했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의 양옆에 물막이 제방을 쌓고 국도 24호선과 지방도 805호선을 냈다. 더불어 주변 갯벌을 매립함으로써 6개의 제방과 다리로 연결되었고 2천37㏊(지도읍 820㏊, 해제면 1천217㏊)의 농경지가 만들어졌다. 예전 바다의 수로에 대한 이름이나 별칭은 표기되지 않은듯 하나 지도읍 내양리 외양마을에 강산나루, 지도읍 자동리에서 하면나루로 해제면을 오갔다.
한봉산 직전 묘지가 모여 있는 곳 바로 아래에 큰 건물이 들어서는지 포클레인이 올라와 바위를 부수고 터를 닦는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 한봉산(翰鳳山, 123.8m)
직진하여 마을길로 오른다. 마지막 민가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붙으면 묘지가 나오고 최근 개설한 임도를 만난다. 족적없는 잡목과 가시덤불 지대가 기다리고 정상엔 준희선생님 산패와 반바지님 코팅산패가 있다. 속성으로 봉수지맥을 끝내는 경우 원자동마을회관 뒤로 한봉산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기도 한다. 한봉산 이름과 관련하여 전하는 바는 없으나 봉(鳳)의 날개(翰)란 뜻이고 지도의 중심이 아닌 외곽에 위치한다. 중심에 있는 봉과 관련한 산은 통상 봉수산(鳳首山)으로 부른다. 자동리 인근에 봉황산(鳳凰山, 164m)이 있다.
♤ 신안군 지도읍(智島邑)
지도(智島)라는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나주목 유천조이다. 섬의 지형이 지(智)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지도라 부르게 되었다. 무안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신안군 지도읍은 유인도 5개 무인도 41개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읍은 백제시대에 고록지현, 통일신라시대에 염해현, 고려시대에는 임치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광군과 나주목에 속하였다가 숙종 8년(1682년)에 지도진이 설치되었으며, 1869년 군청이 들어서면서 한때 번창했던 지도군은 현재의 신안군 각 도서는 물론 영광의 안마도 전북의 위도 목포의 율도 영암의 나불도까지 관할했다. 고종 32년(1895년)에는 지도진이 폐지되면서 지도군이 되었다. 1914년 한일 합방으로 지도군이 폐지되고 지도면이 되면서 무안군에 예속되기까지 17년 동안 군세를 떨쳤는데 1969년에는 현재의 신안군으로 되었으며, 1980년 12월 1일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지도(智島)는 목포에서 36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지도중심으로 꽃봉산(155.4m) 큰산(160.3m) 깃대봉(180.5m) 삼암봉(三岩峰, 197.8m) 등 150m~200m 전후한 나지막한 높이의 산으로 지도읍에서부터 능선이 시작되어 북서방향으로 점암선착장까지 이어진다. 신안군 지도는 병어와 민어로 유명한 고장이다. 해마다 6월에는 병어축제, 8월에는 민어축제가 열린다. 병어와 민어는 지도와 임자도, 낙월도 인근 모래지층 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1974년 무안군과 지도읍을 연결하는 연륙교가 놓이면서 육지화되었다. 지도는 예부터 군사적으로 주요한 요충지였다.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과 중국을 오가는 중요한 항로였고, 임진왜란 때는 해로를 따라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뱃길이었다. 그런 탓에 지도에는 일찍부터 수군진이 있어 1682년(숙종 8)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었다. 당시 지도군의 관아가 있던 언덕에는 현재 지도읍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自東里) 자동마을
원자동마을회관을 지나고 자동마을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면 61.6m봉 아래 신안수정교회가 보인다. 만두 두개를 넘으면 또 24번국도와 만난다. 입향조인 전주 이씨 이철의 호가 자신당이여서 자신당골이라 부르다가 일제 때 동쪽에 마을이 위치한다 하여 자동마을로 개칭하였다. 신안수정교회로 들어서서 왼쪽편으로 민가 뒤쪽으로 올라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진 61.6m봉을 직진으로 넘어선다.
♤ 68.4m봉/ 4등삼각점(임자 428/ 1999 복구)/ 리계(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 광정리)
임도와 만두를 오르내리는 구간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68.4m봉을 백동리 마을(자서4리 자동마을) 도로로 진행하여 팬션 뒤쪽으로 오른다. 68.4m봉은 가선대부 등 김해김씨 문중 묘가 있다. 계속 직진하면 알바, 우틀하여 길이 없는 곳으로 띠지를 보며 내려서면 밭이 나온다.
24번국도변에 적거마을 표석이 서 있고 마을은 약1km 들어가야 나옵니다.
♤ 신안군 지도읍 광정리(廣井里) 적거마을
24번국도를 건너고 광정3리 적거마을 표지석 오른쪽 도로를 따르며 왼쪽 37.8m봉과 오른쪽 만두를 다녀오기도 생략하기도 하며 그린공원을 지난다. 지도군 군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정, 월산, 장동, 적거, 용교, 백양마을을 합하여 광정리라 하고 무안군 지도면에 편입하였다. 적거(積巨)는 처음에는 마을에 황토가 많아 적거라 부르다가 일제 때에 화렴(굽는 소금)이 많이 생산된다 하여 적도로 개칭되었다.
♤ 109.1m봉
적거마을에서 오르는 109.1m봉은 여름에는 엄두가 나지않는 지독한 칡넝쿨과 가시덤풀이다. 선배님들이 뚫어 놓은 흔적을 그대로 따르는게 고생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우틀하여 잡목 비탈로 내려서며 수레길을 만난다. 철망 울타리는 지도광역배수지이고,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용교마을 805번 도로 왼쪽이 지도교회이다.
지도교회에 들어가서 점암선착장까지 마지막 남은 구간 8.8km(3.20h)에 사용할 식수 500cc를 확보해야 합니다.
♤ 805번지방도/ 지도교회/ 지도읍 광정리 용교마을
지도광역배수지에서 양회임도를 따라 내려서서 용교마을을 지나 과수원 뒤로 산으로 진입하여 잡목을 헤치며 100.5m봉에 오른다. 왼쪽으로는 지도 읍내로 나간다. 마지막 구간을 여기서 끊는다면 지도에는 모텔이 없어 해제로 나가는 버스 타기도 쉽다 하지만 남은 구간이 9km가 되지 않으니 애매하긴 하다.
산불감시초소 옆 야자매트에 퍼질러 앉아 빵과 콜라로 행동식을 합니다. 여기 내려서면 쓰러진 이정표가 있는 데구나 하면서... 그런데 이정표는 잘 세워져 있더군요. ㅎㅎ
♤ 100.5m봉/ 신안군 지도읍 광정리 - 읍내리
100.5m봉에 올라서면 이후부터 길이 좋아진다. 야쟈매트와 가로등도 설치되어 있다. 100.5m봉에서 우틀로 3분 정도 가면 비슷한 높이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좌틀로 꺾어 삼거리 안부로 내려서면 이정표가 왼쪽으로 지도초교 280m, 지나온 길은 지도읍사무소 780m, 직진길은 진재 3.4Km라 안내한다.
124.2m봉을 향하며 오른쪽으로 해제 봉대산 통신탑이 보이고 바닷가로 백학산과 임수리 임치진 그리고 강산마을까지 자세히 바라봤는데 그만... 중요한 지점인데 사진을 빠뜨렸네요.
♤ 124.2m봉
조망 맛집이다. 왼쪽으로 바라보니 오른쪽에 두류산(頭流山, 169.7m)이 보이고 봉대지맥 종착지인 점암선착장으로 임자2대교의 모습과 그 뒤로 임자도에 대둔산(319.9m)과 삼각산(213.8m), 수도산(171.7m)도 보인다.
♤ 화봉정(花峰亭, 142.7m)/ 육각정자/ 삼리봉(지도읍 광정리, 읍내리 → 감정리)
이곳은 사방으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자 포토존이다. 벤치가 있는 이곳에서 보는 남동쪽 조망이 시원하다. 북쪽으로는 영광 낙월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임자도, 남쪽으로는 사옥도와 증도를 비롯한 암태도·자은도까지 크고 작은 섬들의 군무가 펼쳐진다. 빨간 아치형 다리인 증도대교도 가깝게 보인다.
♤ 꽃봉산(155.4m)/ 4등삼각점(임자 426/ 1999 복구)/ 무인산불감시탑
화봉정에서 약160m 진행하면 꽃봉산이다. 꽃봉산은 예쁜 이름과 달리 특별한 조망은 없고 무인 산불감시탑과 삼각점만 있는 평범한 봉우리이다. 내려서며 생태이동통로를 만난다.
감정리에는 금출동마을이 그리고 봉리에는 황금동마을이 있군요.^^
♤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甘井里)
1896년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지도군 군내면 지역으로 감정, 조비, 용산, 백련동, 금출, 점암, 고사 등 7개 마을을 합하여 감정리라 하고 무안군 지도면에 편입하였다. 대부분 평지이고 고사도와 윤낭기, 돈도리, 장고섬 등의 섬들이 속해 있다. 처음에는 덕기동(德基洞)이라 부르다가 국지관이 이곳에 들러 우물물을 먹어 본 후 물맛이 달다하여 달 감(甘)자와 우물 정(井)자를 넣어 감정리라 하라하여 감정리로 개칭되었다.
♤ 감정(甘井)고개
감정리 감정골로 내려가는 이정표를 지나면서부터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선답자 산행후기에서 공사중인 사진도 보였는데 동물이동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정상은 배낭 놓고 잠시 옆으로 다녀와야 합니다.
♤ 129.1m봉
안부에서 나무 계단길로 10여 분 올라서서 좌틀로 내려선다.
♤ 147.9m봉/ 삼리봉(지도읍 감정리, 광정리 → 봉리)
129m봉에서 10분 정도 가면 커다란 분지형태에서 감정리, 봉리, 광정리가 만나는 봉우리인 ‘3개리 분기점’ 이정표를 만난다. 삼리봉이라선지 장의자 세개가 놓여져 있다. 바람풍재로 내려선다.
♤ 신안군 지도읍 봉리(鳳里) 황금마을
봉리는 지도읍에 관할로 대부분 평지이고 참도와 정도 등이 속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대실, 불취, 서당골, 원동, 월락동, 신기촌 등이 있다. 마을 뒷산이 봉의 형국이라 봉동(鳳洞)이라 하였으며 뒷산에 금출이 있다 하여 금출동이라고 불렀다. 봉리의 뒷산은 봉대지맥의 마루금을 말한다. 금출동의 또다른 이름이 '쇠낭구지' 였다. 즉 쇠가 나왔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런데 마을 이름은 황금마을이다. 봉황의 마을이자 황금의 마을이다.
♤ 171.2m봉
로프가 매어져 있는 암릉으로 오르면 정상부는 칡넝쿨이 우거진 펑퍼짐한 넓은 공터로 지도읍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좌틀하여 바람풍재로 내려선다.
♤ 바람풍재(105m)
지도읍등산로 안내도가 있는 바람풍재를 지나고 2분여 오르면 진재로 내려서기 전 135m 정도의 큰산 갈림봉이다.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이정표가 없기도 하지만 큰산 정상의 조망이 그다지 빼어난 것도 아니어서 굳이 들를 필요는 없다지만 그래도 오른쪽으로 큰산에 다녀온다.
♤ 큰산(160.3m)
마루금에서 250m 벗어나 있어 다녀와야 한다. 길도 없는 능선을 헤치고 150m 정도 가다보면 큰산 정상부 왼쪽으로 전망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 보는 조망이 좋다. 오른편으로 지도읍 봉리의 봉동마을과 봉동저수지, 그 뒤로는 큰포작도와 어의도가 보인다. 큰산 정상에는 잡목이 가득하여 조망이 별로이며 시그널만 몇개 부착되어 있다. 큰산갈림길까지 되돌아 나가 깃대봉으로 향한다.
♤ 진재/ 양회임도
진재는 봉리(봉공)와 감정리(용진골)로 연결되는 삼암봉 유일의 횡단 임도다. 등산로 안내판 오른쪽으로 작은 목교를 건너 깃대봉으로 올라선다.
♤ 깃대봉(180.5m)
깃대봉 정상에는 지도읍 등산로 안내도와 다리를 쉴 수 있는 벤치 두개가 놓여 있다. 나무꼭대기에 맨발님 산패가 매어져 있다. 봉리에 있는 앙달치봉(146.2m)으로 나가는 분기점이기도 한데 다녀오려면 왕복 약1.4km, 50분이 소요된다.
♤ 삼암봉(三岩峰, 197.8m)/ 꽃봉산 삼각점(임자 / )
깃대봉에서 약20분 소요된다. 이정표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져 있다. 지도읍 주능선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바닷가에 접해 반도처럼 툭 튀어나온 봉대지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표지목 아래 바위 옆에 있는 삼각점은 땅에 묻혀있어 글자 식별은 고사하고 찾기조차 힘들다.
♤ 두류산(頭流山, 169.7m)
지도읍 감정리 백련마을 두류산 정상부에 오선생단 또는 오선비(五善碑)라고도 하는 두류단(頭流壇)이 있다. 2000년 1월 31일 신안군 향토자료 제7호로 지정된 것으로, 1720년경 주자, 정여창, 김굉필 등 세 분을 모시는 정자를 짓고 제를 모신 것이 그 기원이다. 그 후 1914년 호남지방 선비들이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 지방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 세 분을 단비로 모시면서 '3현단'이라 불렸다. 5년 후인 1919년 면암 최익현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4현단이 되었고, 1948년 중암 김평묵의 제자였던 지도 출신 나유영 선생을 단비로 모심으로써 오선생단 또는 오선비라 불리고 있다. 두류단에서 내려다보는 주변 풍광이 일품이다. 두류산의 ‘두류’는 고유어인 ‘/들/두리’ 등에서 유래하였다. 이들의 어원은 고구려 지명어 ‘達’과 관련된다. ‘두루’는 경상도 일대에서 ‘두리’라고도 한다. 두류산이란 지명은 지리산에만 쓰인 것은 아니라 전국적으로 여러 개 있다. 춘성군(春城郡) 사내면(史內面), 신안군(新安郡) 지도읍(智島邑), 문천군(文川郡) 운림면(雲林面), 길주군(吉州郡) 역사면(晹社面) 등에 있고, 두류봉(頭流峰)은 화천읍(華川邑), 순창군(淳昌郡) 인계면(仁溪面)에 있다. 해남군(海南郡)의 두륜산(頭輪山)은 이것이 변형된 이름이다. 이 모든 산들의 이름을 명명할 때 모두 백두산과 관련지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두류-’라는 이름이 갖는 보편성은 이 단어가 사람들이 자주 쓰던 일상어에서 나왔음을 시사한다. 즉 두류산의 ‘두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다고 본다.
♤ 101.8m봉
삼암봉을 지나 능선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바위 조망대가 있다. 북쪽으로 조망이 시원한데 멀리 영광 백수읍의 풍력발전단지 풍차들이 보인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산벚나무에 매어 있다.
♤ 96.7m봉
삼암봉에서 약20분 소요된다. 벤치 두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쉼터이다.
♤ 53.5m봉
봉대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수도를 걸쳐 임자도로 넘어가는 임자2대교가 보인다. 점암 1km 등산로 이정표부터는 숲을 벗어나 콘크리트포장도로를 걸을 수 있지만 끝까지 맥길을 고수한다. 오른쪽으로 바다와 어촌 풍경을 보며 10분 정도 걸으면 등산안내도가 나타나고 아스팔트포장도로를 만난다. 주의할 점은 등산안내도 표시가 점암선착장이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애매하다. 반드시 왼쪽 다리 교각이 보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 10분 정도 더 가면 점암선착장에 닿는다. '여기서부터 24번국도가 시작됩니다'는 교통표지판에서 해안소초가 있는 금출방조제로 넘어가나 도로를 따라 점암선착장으로 내려선다. 원 지맥길은 지도 민박 건물 뒤편으로 내려선다.
예정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늦어져 16시에 점암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17시에 버스가 있다는데 택시를 불러타고 지도터미널로 나왔구요. 거기서 우연히 김전무라는 선배 산꾼을 만나 뵈었어요.
♤ 점암선착장/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甘井里)/ 사각정자/ 횟집/ 민박
점암은 마을 땅밑이 바위로 되어 있다 하여 점바위 또는 점암이라 하였다. 지도읍 점암선착장에서 출발한 배는 15분 만에 임자면 진리포구에 닿았는데 2013년에 지도읍과-수도-임자도 간에 연륙교(連島橋)로 착공된 길이 1,920m의 다리가 2020년 7월 완공되어 이제 과거에 임자도행 철부도선이 운행을 하던 선착장이 되었다. 선착장은 텅 비었다. 여객선은 커녕 자그만 고깃배 까지도 자취를 감췄고 여객선터미널도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2021년 3월 임자대교가 개통되고 두 섬을 오가던 뱃길이 끊기면서 나타난 서글픈 현실이다. 뱃길과 관련된 부대시설들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신안군이 지도읍 자동리에서 점암선착장까지 맨발로 걷는 어싱길을 조성하고 있다. 신안의 질 좋은 황토로 두껍게 쌓아 올려 걷기 좋게 흙다짐한 어싱길은 무려 14㎞에 이른다. 2023년 7월 3.4㎞를 먼저 개통하고 2026년까지 14㎞를 완료할 계획이다.
♤ 임자대교
전남 신안군 지도와 임자도를 잇는 대교로, 2013년 10월 착공, 2021년 3월 준공돼 전면 개통이 이뤄졌다. 총공사비 1720억 원이 소요된 임자대교는 연장 4.99km에 폭 11m의 2차로이다. 점암 선착장 위로는 임자대교가 지나간다. 지도(감정리)와 임자도(진리)를 잇는 4.99km짜리 연도교(連島橋)다. 정확히는 지도와 임자도 사이 ‘수도’라는 꼬맹이 섬을 잇는다(때문에 ‘임자1교’로도 불린다). 길이는 750m, 수도와 임자도는 1,135m짜리 임자2교로 연결된다. 두 다리의 길이를 합치면 1,885m, 여기에 수도를 지나는 구간과 임자대교를 연결하기 위해 확장된 도로 구간까지 합치면 4.99km가 된다. 이는 신안군의 12번째 다리로, 천사대교에 이어 두 번째 규모다. 임자대교로 이어지는 지도와 임자도는 여객선으로는 30분 이상 소요되는 거리지만, 임자대교 개통 시 차량으로는 3분이면 가능해져 농수산물 유통비 절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신안군은 대파 국내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최대 생산지로, 특히 임자대교가 연결되는 임자면은 800ha(약 240만 평) 규모를 자랑하는 주산지다. 또 임자면에는 매년 4월 개최되는 튤립 축제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백사장을 지닌 대광해수욕장(12km)이 있어 향후 관광객도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 임자도(荏子島)/ 임자면
신안군 임자면 임자군도의 본섬이다. 임자라는 명칭은 자연산 들깨가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붙었다고 한다. 신안군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광주로부터 90km, 목포로부터 66.6km, 지도(智島)점암에서는 12㎞ 지점에 있다. 고려 초부터 수군통제사가 주둔하여 진을 두고 자은도(慈恩島)까지 관할하다가 1748년(영조 24)영광군에 부속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진을 폐지하고 지도군의 신설로 지도군에 속하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지도군 폐지로 무안군에, 1969년에는 신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섬 荏子面' 표석이 반기는 임자도는 신안의 1004개의 섬 중 두 번째로 크다. 지질은 산성화산암류가 대부분이다. 최고 높이는 남쪽에 있는 대둔산(320m)이며, 북쪽에는 삼학산(165m), 동쪽에는 불갑산(224m)이 있다. 해안선은 복잡하며, 동쪽 해안선에 염전이 있다. 섬 전체가 모래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물치, 모래치 라고 부르는 물웅덩이가 많이 있다.
♤ 수도(水島)
수도는 전남 신안군 임자면 수도리의 부속 섬으로서, 해안선 길이가 8Km이고 지도읍 서쪽 7Km와 임자도 동쪽 1Km 해상에 위치한다. 물이 맑고 풍부하다 하여 수도라 불렀다고 하는 이섬은 원래는 지도군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무안군에 속하였다가 1969년 무안군에서 신안군이 분리될 때 신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최고점은 섬 중앙의 산지인 수도산(171m)이며 남쪽 해안 만입부 연안에 평지가 이루어져 취락과 농경지가 분포한다.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쌀· 보리· 고구마 등을 생산하고, 연근해에서 낙지의 어획 및 김 양식이 이루어진다. 지도읍 점암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여객선이 운행되다가 연도교로 연결이 되었다.
♤ 증도(曾島)/ 증도면
증도대교가 놓이면서 육지가 된 증도는 2007년 우리나라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증도 모실길은 5개 코스 42.7km 중 3코스(4.6km)가 가장 아름답다. 짱뚱어다리, 우전해수욕장, 천년숲길, 엘도라도리조트, 신안갯벌센터가 있다. 여의도 두배 면적으로 국내 최대의 단일염전인 태평염전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소금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소금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 에필로그
과연 완주할 수 있을지 자신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실 만추에 웅석지맥을 두번이나 시도를 했는데 몸이 안좋아 성공하지 못했거든요. 기차안에서 한기가 느껴져 온도를 올려달라 말할려다 옷을 껴입었네요. 무궁화호는 시간이 오래걸려 지루했고 목포 숙소로 정한 찜질방은 빈대로 영업을 하지 않아 터미널 근처에서 숙박했습니다.
중국과도 거리가 가깝지만 동북아 해상권력은 왜구들의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왕건의 고려군과 인연을 두고 몽고군에 대항한 삼별초, 임진왜란을 거쳐 역사는 현대사 한국전쟁 좌우익의 비극까지 해제반도를 관통해 왔습니다. 도보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야근을 조퇴하고 첫차를 타고 무안으로 가서 12시에 봉대를 출발하기에 첫날 해제면까지 가기로 하고, 도로를 걷는 구간이 많다니 시속 3km 이상으로만 간다면 계획대로 이틀에 끝낼 수 있겠더군요. 해제에서 하룻밤 숙박하고 조조에 출발하면 양이틀 간에 끝내고 상경할 수 있겠습니다. 이성산, 봉대산, 삼암봉 정도가 조망 명소가 되겠고 검무산에서 와도를 찾아볼렸는데 비가 살짝 내리네요. 짐이 가벼워 부담이 덜합니다. 고도 편차가 적어 박짐 짊어지고 걸어가기에 딱 좋은 조건인데 몸상태가 그렇질 못합니다. 강원도 산골짜기를 운행한다면 박짐이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편리를 추구하렵니다. 6일 오후에 비가 들어 목포 찜질방에서 두밤을 자고 첫날 길게, 둘쨋날 마무리를 하기로 급거 계획을 변경하니 한결 여유로워졌습니다. 해제반도와 지도 사이 간척된 해협의 이름을 알아보려던 차에 『고려사(高麗史)』와 후삼국시대를 기술한 『삼국사기』에서 해답을 구했습니다. 909년 견훤은 후백제의 국서를 휴대한 사신단을 오월국에 파견하였는데, 궁예정권의 왕건이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후백제의 사신선을 나포하여 돌아오자 궁예가 매우 기뻐하고 흐뭇하여 포상하였다. 궁예가 나주에 공을 들이면서 서남해안에 금성전투(錦城戰鬪)의 엄청난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교적 가벼운 지맥을 골라 오랜만에 출정하는데 그 동안 병원에서 치료받은 목디스크가 헛방이 되더라도 가보는 데까지 가보기로 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준희선생님께 출정보고를 올렸더니 나주 동밖에대장님을 연결해 주셔서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천마산까지 마중을 나와주시고 같이 지맥을 하고 계신 해제 지맥꾼 봉대산님이 금잔디식당에서 육사시미와 삼겹, 송어회젓갈을 대접해주셔서 그 바람에 완주를 하였습니다.^^
첫댓글 '비산비야'라고 할까요?
황토밭 무안 해제반도까지 다녀갔네요.
퐁라라님 산행기를 보며 옛날 목포에서 살 적에 차를 타고 오묘한 해안선을 따라 석양의 바닷가나 즐기러 다니던 옛 추억의 장소를 하나 하나 짚어 봤네요. 감사!
아픈 목디스크도 빨리 나아서 하고 싶은 일 거침없이 하기를 바랍니다. ^^
네 선배님!
말씀대로 봉대가 비산비야라 싱겁고 재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마음속에 담고 오래 기억에 남도록 이것저것 많이 챙겨보며 갔습니다.
앞으로 모든 지맥을 진행할 때 다 그렇게 할 요량입니다.
이 지맥을 하며 꼭 챙겨야 되는데 혹시 빼먹은 것은 없는지,,,
여러 선배님들의 후기를 통해 힌트를 얻고,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고 시사에 나온 신구 소식도 살펴봅니다.
바쁜 사람들에게 일일이 지맥을 두발로 뛰어보라고 할 수도 없으니
간접경험으로라도 풍부한 지식을 얻도록 일목요연하게 소개한다면,
지맥을 굳이 다니지 않는 사람이 보더라도 한꺼번에 그 지맥에 대해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면,
그렇게 고급진 지식은 아닐지라도 시간을 줄일 수 있겠다 싶고, 그것도 누군가의 역할이라고 보아서요. .
산경표를 따라서가 모든 산행기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신 산경표의 162지맥이 있어서 산꾼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처럼
무언가 하나라도 후대의 답사자에게 도움 되는 후기가 되어보고자 노력할려고 합니다.^^
흑사리 껄적으로 사는게 심심해서요.^^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유익한 시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퐁라라님, 칠갑산 님 등 자세한 산행기를 통해 간접경험을 하고 나면 호기심이 사라져서 별로 갈 필요성을 못 느끼겠더라구요. ㅎㅎ
몸도 불편한데 장거리, 장시간 산행에 세심한 산행기까지 올리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
자세한 후기가 산줄기종주영웅 등극을 어렵게 한다는 말씀은 인지부조화에서 오는 이율배반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갈 사람은 다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눈높이 선생님 같습니다~ ㅋㅋ
저의 후기는 출발하기 전에 이미 90% 만들어 놓고, 다녀와서 사진과 함께 10% 보완하는 식입니다.^^
현재 6~70km 지맥 30개 정도 만들어 두었고 계속 틈틈이 보완하고 있어요.
퐁라라 운영자님 오랜만에 봉대지맥 션하게 잘 하고 오셨네요.
우리가 다녀온지 아직 1년이 안되엇는데요.
그새 산패가 몇장 없어진거 같습니다.
꼭 있어야 될 검무산과 꽃봉산에 산패가 안보입니다.
앙달치봉은 다녀오시에 부담이 되셨겠군요.
선생님께서 내도 못 가본 곳이데 부뜰이가 한번 가바라 하셨거든요.
그 곳에는 신상옥님 시그널 한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봉대지맥이 멀기는 먼곳에 있나봅니다.
비용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봉대지맥 졸업 축하드림니다.
부뜰이성님!
선배님 산행기도 미리 잘 읽어보고 갔습니다.^^
검무산하고 대월산 산패는 와도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처 찾지를 못했구요.
꽃봉산 산패는 보이지 않았어요. 앙달치봉은 계속 쳐다보며 갔지만 시간상 패스했습니다.
박짐을 메고 갔더라면 일단 숙박요금 75,000원이 줄고요.
해제에서 버스를 이용했다면 택시비도 줄였을 것입니다.
첫날은 찾아간 목포 찜질방이 영업을 안해서 모텔을 이용했구요.
둘쨋날도 처음 계획으론 목포 찜질방에 나가서 자는 거였지만
찜질방이 영업을 하더라도 컨디션이 안좋아 중간에 해제에서 자야겠다고 맘이 굳어졌습니다.
지도터미널에서 점암선착장 오가는 버스편을 알아본다는게 깜빡했네요.
두분 운영자님이 자가용 두대를 이용해 차박으로 음식도 준비하며
진행하는 방식이 비용이 얼마나 절약되고 효율적인지 잘 알겠더라구요. 감사합니다.^^
그렇죠
비용은 우리하는 방식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나마나 다담주 부터는 낙동정맥에 딸린 지맥을 할려구 하는데요.
시작도 하기전에 걱정입니다.
거리도 무지하게 멀거니와 접속구간이 고약한 곳이 여러개 있네오.
그렇다고 안갈수도 없고 말이지요.
퐁라라운영자님의 봉대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이틀에 걸쳐 60km가 넘는 산길을 거침없이 질주하셨네요.
날씨도 좋아 기억남는 산줄기 여정으로 기억될 듯 싶습니다.
반갑게 마중나온 동밖에님, 봉대산님도 만나시고 터미널에서는 친숙한 산님도 만나셨네요.
멋진 한줄기 마무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흐리거나 황사가 있거나 시계가 맑지 못할 때 봉대를 진행하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구,
사정에 따라선 야간행군을 하면서 한 큐에 끝내는 경우도 있을겁니다.
짱짱하니 추운 겨울에 진행한다면 지금보다 더 또렷한 시계를 확보할 수도 있을거구요.
시계가 좋으니 바다 건너 영산기맥이 또렷하게 보이고 신안군의 섬들도 더 또렷하게 보였지 않았을까요.
저는 평균이상의 시계를 확보한것 같네요.^^
지맥에 따른 특성을 이해하고 최악의 경우를 피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산행 능력 중에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한여름에 봉대를 진행하며 도로를 걷는 불상사도 있을것 같은데,,
한여름에 한다고 해도 봉대를 진행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미 결정이 되었다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마음 속에 품고 가면 어렵지 않은 일이 되니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