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꿈이 뭐니 / 남정언
꿈의 반대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도 꿈을 꾼다. 현실의 꿈을 보통 희망이나 포부라 부른다. 꿈은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이라 정의한다. 가끔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했던가 하는 회상에 잠긴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담한 키에 말씨가 조용하고 성함까지 정숙하신 가정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었다. 1번부터 차례로 “네 꿈이 무엇이냐?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라고 질문하면 친구들은 제자리에서 일어나 대답을 했다.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 장관이 되고 싶다,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다,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여러 가지 거창한 대답이 들렸다. 25번인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제 꿈은 현모양처입니다.”라고 하는데 가정 선생님 표정이 갑자기 멍해지셨다.
어릴 적 내 꿈은 현모양처였다. 그 기준은 우리 어머니였다. 어머니보다 예쁘고 퓨전 요리를 잘하고 서예도 하며 바느질 솜씨까지 뛰어난 좋은 엄마, 분위기 있는 좋은 아내가 되는 게 인생 목표였다. 또 어머니보다 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정 선생님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나갔다.
“25번아, 여자는 결혼해서 어지간하면 현모양처가 다 된단다. 현모양처 말고 되고 싶은 인물은 없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소박한 내 꿈이 사정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잘하는 것이 뭐지? 국어 한문 사회 과목을 좋아했던 것만 생각하고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가며 꿈결같이 대답했다.
“그럼,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 25번아, 그 꿈을 꼭 이루어라.”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시는데 나는 진땀을 흘리며 비실비실 자리에 앉았다. 큰 문제였다. 내 꿈을 공개선언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언니와 오빠들이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해서 닥치는 대로 한국문학 전집을 끌어안았고, 세계문학 전집을 읽다가 주인공들이 얽히고설켜 공책에 주인공 이름을 적으며 읽었으며, 국어 과목만큼은 전교 최고가 되고 싶어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되고픈 마음에 국어를 좋아했지만 특별한 문학성은 보이지 않았다. 라디오에 사연을 응모하면 내 이야기가 방송되는 잔잔한 기쁨뿐이었다. 국어는 좋아하는 과목일 뿐이었고 오히려 이성적으로 성장하면서 전공으로 선택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기말시험 기간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네 꿈이 뭐냐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명확하게 대답하는 아이가 몇 명 되지 않는다. 어쩌다 목표나 희망을 정해 놓은 아이 중에는 부모님이 설정한 목표로 아이를 억누르고 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고 실토한다. 그런데도 초등학교 때부터 목표를 정해 선행학습을 해서 중고등학교에서 내신 관리로 명문대학을 가겠다는 말에 문득문득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교육으로 미래의 꿈을 멋지게 만드는 세상이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원을 순례하는 모습이 재미없어 보인다. 고교 졸업자 기준으로 대부분이 대학을 진학하는 무한경쟁에 살기 힘든 현실이다. 자녀의 꿈을 부모가 개입하는 일에 대해 누구 책임이냐고 묻기 두렵다.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가 풍족한 우리나라에서 과거와 같은 꿈을 갖기란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꿈이니까 자기만의 이상을 키우고, 꿈을 이루기 위해 끈기 있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학벌만 높게 취하기보다 학식까지 갖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특목고를 가니까 따라가고, ○○대학에 편입하니까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 있는 꿈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만 낳으면 신사임당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의 사소한 실수에 짜증을 냈고, 잘 가르쳐 보겠다며 아이를 달달 볶으며 다그치는 날이 있었으며, 내신 성적변화에 불안해 허둥댄 적도 있었다. 아들딸이 유치원에 입학할 때부터 도서관 자원봉사를 시작하면서 중 2학년까지 함께 책을 읽고, 시험 기간에 같이 문제집을 풀고 매겼다. 교육과정이 바뀌는 시점에 미리 준비한 독서지도와 대입 논술, 국어를 공부했던 길고 긴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다. 아이들과 놀기 위해 문화탐방을 다니고 체험생태까지 공부하다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국어 과목을 가르치게 된 나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아이의 습관과 행동을 간섭하며 기, 승, 전, 공부하기를 자주 재촉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기다려봐라, 화내지 마라.” 하며 부처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팔 남매 자식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매일 일찍 자라며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학교에서 뭐든지 배우고, 자기 할 일을 다하면 친구를 도와주고, 집에서 형제자매끼리 서로 돌봐줘야 한다는 말씀만 하셨다. 모진 말로 야단치는 소리를 한 적이 없는 분이 바로 어머니시다. 어머니를 따라가기는 어렵다. 어머니는 내 영원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끝까지 살아보아야 안다고 하지 않은가. 현모양처를 꿈꾸면서 꽤 현명한 아내도 아니었고 썩 좋은 엄마도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길을 걸어가는 조금 괜찮은 어른이 되기를 소망한다. 만일 다음 생에 똑같은 직업을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현모양처와 국어 선생을 다시 선택하리라.
꿈이 뭐냐는 질문에 진땀 뻘뻘 흘렸던 25번 여중생. 솔직한 내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는 제자들에게 꿈을 물어본다.
“진짜로 네 꿈은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