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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Review (2008. 2월)
이 순 구
아주 오래전부터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사물들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변화한다. 600년 '시간의 누적'된 건물이 몇 시간 만에 "홀라당" 타버렸다. 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형성해 놓은 긴 시간을 또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축약시켜 숯 덩어리로 만들었다. 어디 몇 백 년뿐이랴. 몇 천 년의 시간도 순식간에 함축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건은 사물들의 변화에서 받는 인간의 시간적인 인식을 개인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유난히 문화라는 말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 요즈음 한국사회는 모든 영역에 문화라는 단어를 붙인다. 먹고 마시고 놀게 하는 것이 주로 "문화"라는 명칭을 부여 받는다. 얼마 전 "근자에 한국사회에는 진정한 문화가 없다"고 개탄하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말은 그 세대의 기준점에 의한 늙으신네의 괜한 걱정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공감이 간다. 방송매체의 일률적인 맛 자랑 멋 자랑이나, 화려해졌을 뿐 오락프로그램의 한계성도 여전하다. 문화는 무엇인가.
문화(culture)는 라틴어 cultura로 경작ㆍ육성의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안다. 동물의 행동은 유전과 본능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인간은 유전과 본능뿐만 아니라 경험과 모방 그리고 언어를 통하여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사고ㆍ감정ㆍ행동을 학습하고 획득한 것을 같은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전달한다. 이와 같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학습ㆍ전달되는 통합성을 가진 총체를 문화라 할 수 있다.
사전적인 의미나 사회적인 뜻은 여러 설명이 있으나 그중 한 현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화는 '文글월 문, 化될 화'이다. 文은 문자ㆍ글이란 뜻이지만 좀 더 생각하면 문자는 "무늬"를 지칭하기도 한다. 글자는 상형문자처럼 형상에서 기본된 것이나 지사(指事)나 회의(會意)문자 일지라도 결국 평면에 그어 표현하는 "무늬"인 것이다. 이러한 무늬가 되는(化)것, 변화하는 것도 문화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해석이다. 주로 그림에 관한 문화는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때 흥미로운 지점이 많이 발견된다. 그림은 시대와 개인의 사고의 전환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도 이러한 문화의 한 패러다임을 만들며 그 촉수를 진화의 시간에 두는 것이다.
1. 다원화 속의 한국문양
시대의 흐름에 의해 어느덧 서양구조의 사고체계와 생활양식이 이미 서양의 그것을 따르고 행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일본에 의한 서구 문물 유입은 한국에서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아쉬움과 오해의 소지를 싸안고 출발했다. 따라서 정확한 서양구조에 대한 이해의 욕구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타인에 의한 미묘하게 잘못된 습관이 젖어버리는 것과 같이한다. 특히 그림의 경우 더욱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아직도 일부 저변에서는 그 미망에 벗어나질 못한다. 거기에 현대사회의 "다변화와 문화 혼성시대"에 의해 그 미망은 미묘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현재사회의 만연된 풍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가 아무리 요동을 친다 해도 미망은 미망이고, 진지함과 절실함은 아직도 그 중심에 있는듯하다. 이지점에서 세대 간에 작품 만들기의 특성을 살펴보면 '절실한 세대'와 '문화적 혼성기의 세대'가 어느 의미인지 구분될 것이다.
최태신교수의 전시회(2008.2.21-27 갤러리 이안)는 온통 한국의 전통적인 문양들로 가득하다. 고궁이나 사찰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는 단청문양들의 <음양陰陽>시리즈는 2000년대에 들어 지속해온 작품들이다. 단청은 오방색과 만다라에 의한 음양의 조화로움이 가장 잘 도식화된 '무늬'이다. 자연물에서 결정된 조화로움을 인간의 시각적 집약에 의한 기호적인 결집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우리의 조상은 이를 반복에 의해 이상세계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화려하면서 단아한 무늬를 창작한 것이다. 거기에 작가는 명과 암을 조화시켜 또 다른 평면의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응집력을 가진 평면을 창작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많은 길들을 쫒아온 결과라 생각된다.
시대의 맥락처럼 1977년 미술회관의 첫 개인전은 "원초행위의 첫 물음"(김복영 미술평론가)으로 대표되듯 신문 잡지 등에 긋고 지우고 칠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제시했다. 당시의 화단의 동양철학에 의한 관심이 "비우고(지우고) 채우기"(임동식 서문2008)로 제작되는데 현재에 보면 이 작품들은 전자제품의 기기판을 연상하게 한다. 기기판은 문자대신 많은 역할들의 용량을 가지고 조밀하게 제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신문이나 잡지의 내용들이 작가가 지우고 칠하여 구체적인 단어와 이미지를 없앰으로서 조밀한 기호적 평면 구조물로 읽히게 한다. 이를 "기능이 박탈된 매스ㆍ미디어의 세계"(김인환 미술평론가, 1978전일미술관 개인전)라 해석하기도 했다. 내용적 기능의 박탈이 오히려 첨단 전자부품의 구체적 형상처럼 만들어진 것은 재미있는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많은 형상들이 작가에 의해 '지워'지고 새롭게 형성된다. "이미지의 새로운 해석"(오광수 미술평론가, 1985미술회관 개인전)으로 한국에서 사용된 이미지들을 재분석하며 "다원화의 모색기"(임동식 서문2008)를 지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리기'의 상황과 타일과 같은 퍼즐화면과 더불어 창살무늬를 등장시킨다. 퍼즐화면이나 창살문양은 시각을 이중으로 교배시키는 작용을 한다. 작품의 화면에 시선이 직접 닫지 않고 정면과 이미지 사이에 공간을 형성한다. 따라서 '창 넘어', '유리를 넘어' 그 이미지의 현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임동식 선생은 "그의 문양 그림은 로코코적 화려함도 바로크적 장중 엄격함도 아닌 제3의 성격, 서양그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무심 속에서 熱반응을 보이며 다가오는 색채로 그의 심상을 반영"하며, "빠른 속도로 휘두르고 싶은 표현주의적인 욕구, 현란한 색채를 동원하여 화려한 시각을 연출하고자하는 일각의 유혹, 물감이 쌓아 중첩시키는 물성강조에서 오는 힘의 부과, 붓질의 여운 등 모든 중요한 요소를 걷어내고 참아야하는 분명한 선택"이라고 읽고 있다. 이는 우리의 선배 세대가 작업을 임하는 근원적인 태도가 현재의 젊은 작가들과 다른 점이다. 표현하고 싶은 데로 내어뱉듯 자기의 감정에 충실한,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넘칠 정도로 민감한 현세대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최태신교수의 전시회는 이 지역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퇴임하는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많은 관람객들에 의해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였다.
【그림1)】최태신,<신문77-16>혼합재료,1977(좌).<작품85-7>혼합재료1985(우)
【그림1)】최태신,<춤>유화, 1991(좌) <음양陰陽 A>유화, 2000(우)
2. 시간과 가치관의 유동
시간은 유동한다. 문화적 가치나 의의 또한 변화한다. 긴박히 돌아가는 시대를 피부에 접한 삶은 누구나 안다. 유난을 떤 2000년대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미술도 구체적인 방향을 모색한다. 작가일원에서 모색을 시작하면 그것을 수용하는 전시공간도 틀의 변모를 꾀한다. "찾아가는 미술관"이나 "대안공간" 등이 그것이다.
대안(代案)은 ‘어떤 안을 대신하는 다른 안’을 지칭한다. 곧 어떤 주체적인 것이거나, 이미 사용되어지는 그 어떤 상황 또는 사물을 다른 것으로 대신하거나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제도나 관습에 의해 이루어지고 지켜온 기존 틀에서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자하는 하나의 방법론이기도하다.
미술활동에 제도가 생겨나면서 전시 전용공간의 개념이 만들어지고 특정 공간을 할애해 전시형태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바로 제도안의 미술관과 갤러리이다. 혹은 인류학적인 주제들의 변화를 통해 만들어진 미술의 장으로 동굴, 사원이나 성당, 살롱, 미술관, 갤러리 등의 순으로 찾아볼 수도 있겠다. 대안공간은 이러한 유형의 발전과정에서 제도적인 틀의 권위성과 자본주의의 특성에 의한 자본의 영리성에서 벗어난 공간을 창출하자하는 취지의 일환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하나는 근대에 사용했던 공장이나 역사(驛舍), 학교, 창고 등의 건축물을 재 보수(remodeling) 과정에서 용도를 달리하여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바뀌는 형태도 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 어느 곳에서 주관하느냐와 운영방침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지만 큰 의미에서는 용도의 대안을 찾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대안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장소성의 대안보다는 미술제도와 운영해나가는 방법에 따라 대안의 영역은 매우 커지기 때문에 제도적 운영방침이 매우 중요하다.
열린미술관 <화려한 외출>전(2007.12.21-2008.2.24 중앙로 지하상가)은 대전시립미술관이 기획하고 중앙로 지하상가운영위원회의 주최로 열렸다. 미술은 과거의 여러 목적과 의도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인간중심에 있다. 미술은 작가들의 것이 아니며 대중의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자명한데 가끔 그 의지가 분명치 않다. 물론 창작자들은 자기의 인생을 걸고 혼신을 다해 정진하여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하고, 슬쩍 눈치를 보아가며 적정선의 곡예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창작은 창작이다. 혼신을 다한 작품들을 지나치기 일수 인 대중이 많은 국가는 그만큼 저하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적 노예라 하는 것은 바로 이점도 하나의 기준점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미술관을 찾을 수 없다면 할 말은 없지만 몰라서 찾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현상이다. '미술이 밥 먹여 주냐?'는 과거의 일갈은 작가에게 힘 빠지는 일이었으나, 현대에는 '미술이 밥 먹여 주는 사람도 많다'로 미술은 알게 모르게 모든 생활에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근래에 미술이 전시장을 나와 대중과 가까이 하는 곳에 찾아가서 그 장소의 특성에 부합하거나, 문제점을 인식하여 신선한 시각에 의한 새로움을 부여하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전시기획들이 전국각지에서 종종 이루어졌다. 환경미술, 공공프로젝트의 명목으로 재개발지구, 시장, 달동네 등 소위 미술문화의 소외지구를 찾아가 펼친 사업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세간의 주목을 끄는 점에서 의미는 있지만 차후 지속적인 대안방안이 없어 대부분 1회의 행사성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열린미술관>은 대전시립미술관의 꾸준한 사업의 하나로 2004년부터 다양한 장소와 참신한 전시기획이 시도되고 있다. 이번 <열린미술관>"화려한 외출 Art Street전"이 열리는 중앙로지하상가는 얼마 전 지상에 건널목이 설치됨에 따라 사람들의 통행이 줄어 도심 속 소외공간으로 형성되어가는 곳이다. 따라서 빈 점포가 늘어나 창고처럼 사용되어지는 곳이 많다. 하지만 지상에는 문화의 여건이 서서히 조성되는 지역이다. 이미 기존의 이안, 우연, 이공, 에스닷, 대전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가톨릭문화회관에 아트센터 알트가 생겼으며 얼마 후에는 (구)국립농산물관리원이 새로운 모습의 대안적인 미술관으로 거듭날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대흥동 일대는 화랑들과 전시장들, 표구점, 화구, 문구점들이 여러 곳 존재한다. 이처럼 미술문화가 모여 있는 곳은 서울 인사동을 제외하고 많지 않다. 따라서 이지역의 앞으로 문화사업계획은 자명해 보인다. 관계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실재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역의 지하상가 <열린미술관>"화려한 외출 Art Street"전에 7명의 작가(김윤경숙, 송병집, 여상희, 오윤석, 윤철희, 이갑재, 이순구)가 각자의 특성을 살려 영상과 언어, 문자, 기호, 그림 등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설치하였다. 실재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획 의도와 오가는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그 지역의 활성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화려한 시선이 부활되기를 기대하며 제작되었다. 그러나 실재적인 전시 여건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으며 시민들의 반응 또한 여러 가지였다. 열린미술관이라 함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고된 작업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체계적이고 면밀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림1)】열린미술관, 김윤경숙,<엿보기>, 비닐, 매직펜, 가변설치,2007(좌)
윤철희,<Everything is true made>,가변설치 디지털프린트, 2007(우)
【그림1)】열린미술관, 오윤석,<온실-소통하다>,가변설치,2007(좌). 여상희,<1001-홍>,가변설치,공단천>,2007(중). 이갑재,<가벼움의 시대>, 가변설치, 혼합재료,2007(우)
3.내면의 향기
그림표현은 많은 분류 중에 사회적 관점에서보다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업들이 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며 온유한 정신을 가꾸는 유형이다.
김효진 전(2008.2.21-2.17롯데화랑)은 화사한 꽃들이 만발했다. <꽃 찾으러 왔단다.>의 명제처럼 유년시절 면면히 기억되는 친숙한 꽃들을 담담한 필치로 꽃의 상징성을 생각하며 제작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기쁨, 슬픔, 만남, 헤어짐, 탄생, 소멸 등이 꽃이 가져다준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화려한 꽃들의 문양 위로 얼룩말 한 마리가 배회한다. 앞으로 많은 날들 시간을 투자하여 "꽃"의 의미를 새롭게 의미하며 각인되길 바래본다.
【그림1)】김효진,<꽃 찾으러 왔단다.>,한지에 채색,2008(좌우)
【그림1)】윤소연, <수다 중>, 유화, 2008(좌). <방>, 유화, 2007(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