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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시차가 7시간이나 되니 집에 전화하기가 쉽지 않다. 잠자기전 12시에 전화를 하면 우리나라는 아침 7시가 되니 말이다. 우리나라 저녁시간에는 한창 버스 안에 있거나 한창 문화재 등을 답사 중이어서 전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호텔로 가면 콜렉트콜로 전화를 사용하기가 쉽지만 말이다. 집에 전화를 하지 못해서 답답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에 가이드의 설명에 벌써 가슴이 미슥하고 아프다. 나치의 완벽한 준비에 의해 저질러진 살인공장, 아우슈비츠!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무료입장이었다.
독일은 2차대전에서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뜻에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많은 노력과 재원을 보탰다고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이 잔인하고 무지하고 비인권적이고 비인간적인 일이 이 세상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한다는 점에서 무료로 많은 관광객들이 보고 가서 널리 알려야한다는 취지에서 무료입장이란다. 동병상련을 겪은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편이고 일본인들은 거의 오지 않는 편이란다. 가이드는 또 한가지 더 부탁을 했다. 너무나 잔인한 모습과 이해되지 않는 살인에 대해서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보라고 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념관을 나와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민망하다고 했다.
또한 가이드는 이슬라엘인들은 단체로 자기나라의 국기를 들고 많이 오는데 총살의 벽앞에서, 또한 여러 유품들이 전시돼 있는 제1수용소를 둘러보면서 손을 불끈 쥐며 눈이 충혈되는 모습을 여러 번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나치가 유대인에게 행한 그 잔혹한 일들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재현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나치와 같은 인종주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백인외국인한테는 한없이 친절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유색인종들에게는 차갑도록 무시하고 관심을 갖지 않는 태도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인종주의가 아니겠는가하고 반문했다. 유럽인들이 보는 한국인은 별로 탐탁지 않은 아시아인에 불과하며, 특히 아시아에서 사스가 한창 유행일 때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우리 가이드가 지나갈 때면 사스병균이 지나가는 듯이 행동했다고 했다. 그 당시 자신은 걸어 다니는 사스균이었다고 술회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피부색이 검은 인종에게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는 과연 어떠한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우슈비츠의 원래 목적은 유태인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었다고 했다. 폴란드인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당초에는 폴란드인 학살 장소로 이용할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치는 전 유럽인들, 특히 유럽각국에서 각각의 국적을 얻은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들을 이곳에 보내오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구 유고슬라비아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독일인도 있었다. 수용소가 개방될 때까지 정치범도 계속해서 이곳에 보내졌다고 했다.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제1수용소)과 브졔진카(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의 수용소는 현재까지 특별히 보존되어 관람이 가능하다.
<철조망만 남아있는 수용소입구와 들꽃들만 무심하게 피어있는 브졔진카>
전쟁이후 그대로 보존되어온 오시비엥침의 ‘죽음의 블록’과 제1화장터,브졔진카의 4개의 화장터/가스실터, 총살의 벽, 수감자 수송을 위한 철도,수감동,감시탑,고압전류가 통했던 철조망, 정문 등은 잔혹했던 나치 범죄의 증거가 되고 있다.
제1수용소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정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라는 글이 쓰여 있다. ’노동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말이란다. 즉 일하면 자유로와진다는 말인데 이문을 통해서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 나간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만 했고, 수감자들이 강제노동에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SS대원이 몇 천 명이나 되는 수감자들의 행진을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취사장 옆의 조그만 광장에서 수용소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고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인과 기타 유럽인들을 가두기 위해 나치가 만든 최대의 수용소였다.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감금, 굶주림, 중노동, 의학실험, 사형집행 등의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수용소는 1942년부터 유럽 최대의 유태인 학살지가 되었다. 죽음을 선고받은 유태인들의 대부분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서, 명부에 등록되지도 않고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정확한 희생자의 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독일 제3제국은 여러 가지 종교․정치사상을 가진 사람들, 전쟁포로와 일반시민, 강제 퇴거당한 마을․도시의 주민, 우연히 체포된 현행범, 그리고 인종말살이 계획되었던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보내 가두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처형을 위해 끌려온 유태인의 대부분은 동유럽으로 이주한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와 헝가리의 유태인들은 나치에게 속아서 존재하지도 않는 농장, 토지, 상점 등을 구입했고, 자신의 재산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왔다.
강제로 체포당해 끌려온 사람들은 밀폐된 화물열차에 움직일 틈도 없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밀어 넣어진 채, 식료품도 없이 7-10일간의 긴 여행 끝에 오시비엥침에 도착하면, SS장교와 SS의사가 노동이 가능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수요소로 보내고,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가스실로 보내졌는데,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의 증언에 따르면 운송되어온 사람의 70-80%가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헝가리에서 온 유태인들을 학살 할 당시에 SS대원이 촬영한 약200매의 사진 중에서, 수십 장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전시되어있다.
전시실에 있는 아우슈비츠 ‘죽음의 공장’의 약도에는 빨간색으로 집단학살장이 표시되어 있는데, 총살의 벽, 가스실, 화장터,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태우던 장소 등이 바로 그것이다.
<총살의 벽과 시체를 화장한 기계>
제2화장터 가스실의 모형을 보면, 지하탈의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샤워를 한다는 SS대원의 말에 속아서 계단을 내려가 옷을 벗고, 샤워실로 보이는 방까지 걸어가면, 천장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기가 달려있다. 210㎡(약63.6평)의 지하실에 약 2,000명이 들어가면, 문을 닫고, SS위생병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지하실로 사이클론 B가스를 투입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15-20분 사이에 질식사하였다. 그 후에 금이빨을 뽑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반지와 목걸이를 빼낸 사체는 1층에 있는 화장터로, 혹은 시체가 너무 많을 때에는 밖으로 운반해 쌓아 놓았다고 한다.
<살인에 쓰인 사이클론 B가스통> < 주소가 적힌 가방들>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철저하게 분별되어 SS나 국방군, 일반시민이 이용하기 위해 창고에서 독일 본국으로 운반되었다. 물론 독살된 사람들의 물건은 수용소의 SS대원들이 이용하기도 하였다.
수감자들로부터 빼앗은 물건들을 실은 열차가 잇달아 본국으로 향해갔지만, 수용소의 창고에는 언제나 미처 분별작업을 하지 못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소련군이 오시비엥침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창고에서 가치 있는 물건들을 본국으로 운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개방되기 전날,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SS는 창고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35간의 창고블록 중에서 6간만이 남아서, 그 안에 있던 몇 만 켤레의 신발과, 브러시, 의복, 안경, 소유자의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있는 트렁크, 식기, 신체장애자의 의수족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전시되어 있는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 우윳병 등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사형집행과 가스실에 버금가는 효과적인 수감자 처형방법은 노동이었는데, 수감자들은 여러 가지 분야에 혹사당했다. 초창기에는 수용소 증축작업이 고작이었는데, 차츰 그들의 노동력은 독일 제3제국의 산업에 이용당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휴식도 없이 항상 뛰면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너무 빠른 작업속도와 음식부족, 그리고 혹심한 고문 등으로 인해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다. 노동반이 수용소에 돌아올 때, 손수레에는 수감자들의 시체가 쌓여있었고, 그 중에는 삽으로 구타당한 부상자도 섞여 있었다.
수감자들의 하루 식사량은 1,300~1,700칼로리를 넘지 못했다. 아침식사로 ‘커피라 불린 액체’500cc와 점심식사로는 거의 물뿐인 썩은 야채로 만든 수프 1리터밖에는 먹지 못했다. 저녁식사는 300~350g의 검은 빵과 소시지 20g이나 30g의 마가린 혹은 치즈, 그리고 채소음료가 전부였다. 중노동과 배고픔에 의해 수감자들은 완전히 쇠약해져서 결국에는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현재 우리들은 수용소에서 매일 일어났던 비참한 장면들을 상상하기란 어렵지만, 수감자들 중에 있었던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림들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씩 느낄 수가 있다. 그 작품들은 그들이 남긴 증언이 되어 수용소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른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SS는 수감자들을 범죄적인 의학실험에 사용하였는데, 슬라브 민족을 생물학적으로 전멸시킬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남녀 단종 실험(성기절단 실험)을 자행하였으며, 유전학과 인류학 연구라 하여 쌍둥이와 신체장애자를 이용해 잔인한 실험을 자행하였다. 이밖에도 수감자의 피부에 유해물질을 바르기도 하고, 피부이식을 하거나, 동상실험, 새로운 의약품 투여실험 등 여러 가지 위험한 실험이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어, 실험 중에 사망한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갖가지 장애에 시달렸다.
지하에 있는 감방에는 죄인, 수감자를 도왔던 수용소 부근의 일반시민, 탈주하다가 체포된 수감자, 탈주자를 도운 죄로 아사를 선고받은 탈주자의 동료, 수용소의 규칙을 위반했다고 SS에 의해 간주된 수감자 등이 수감되었다. 현재 3종류의 감방을 볼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은 심문 당하던 죄수들이 감금당했던 감방이다.
지하 감방에서는 ‘지하실 청소’라고 불리던 죄수선별이 정기적으로 실시되어서, 선별된 죄수들은 징벌반에 보내졌거나 총살당했다. 18호실은 아사를 선고받은 죄수가 감금되었던 감방의 하나인데,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죽은 폴란드인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도 1941년 이곳에 가두어졌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책이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데 누군가가 나의 봉사와 희생을 간구하면서 보내었나보다. 이 잡지에서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님의 글을 대충 지나가며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도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인제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어두운 20호실 감방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죄수들을 가두어 질식사시킨 일도 있었다. 21호의 벽에서는 죄수들이 남긴 벽화와 낙서들을 볼 수 있고, 22호실에는 90×90cm의 빛도 안 들어오는 좁은 공간에 4명을 한꺼번에 밀어 넣어 세워놓는 벌을 주었다.
수감자들은 생명의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SS에 대항해 저항운동을 시도하였다. 수용소 부근에 살고 있는 폴란드인과 은밀히 연락해서 수용소 안으로 식료품과 의약품을 밀반입하기도 하였다.
SS범죄의 자료가 밖으로 새나가기도 하였고, 수감자와 SS대원의 명단이 밀반출되기도 하였다. 그 자료들이 나치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암호편지가, 특별히 만들어진 용기에 넣어져 보내진 적도 있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반 나치 연대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예술 창작활동과 종교 활동도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 제2수용소
제1수용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브졔진카’라는 마을에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브졔진카의 독일식 명칭)가 설립되었다. 이 수용소의 면적은 약 175ha(약 53만평)로 300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들 중 지금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45동의 벽돌건물과 22동의 목조건물 뿐이다. 타버리거나 파손된 건물들에는 벽돌로 된 굴뚝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는데 그 수는 수용소가 얼마나 큰 규모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SS중앙 위병소의 탑에서는 이 최대의 학살수용소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탑의 바로 앞쪽에는 죄수들을 운반했던 철로가 있고, 벽돌건물들은 철로의 왼쪽에 있다. 축축한 습지 위에 기초도 없이 지어진 이 건물들은 대부분 바닥도 없고, 많은 지면이 진흙으로 되어있다. 이 벽돌건물에는 여성 수감자들이 수용되었었는데, 3층침대의 썩은 짚단 위에서 비참한 밤을 보냈고, 침대 한 층을 8명씩 사용했다.
나치는 대부분의 학살 장비를 이곳에 설치했는데, 4동의 화장터와 가스실로 개조된 농가들, 시체를 태우기 위한 야외소각장이 바로 그것이다.
철도가 끝나는 지점에는 후퇴하는 SS대원들이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폭파한 2동의 화장터/가스실이 무너진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죽음을 예고 당한 사람들이 옷을 벗었던 지하 탈의실과 가스실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일행이 제 2수용소를 눈으로 보기 위해 갔을 때는 이스라엘에서 온 두 여학생이 나치시절 특별하차장으로 쓰였던 철로 가에 책상을 놓고 앉아서 나치 정권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불러도 불러도 끝이 없는 이름들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야외에 앉아서 불러대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희생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부르너성과 브르너의 가로등-리본모양이 인상적이다>
점심식사후 체코 부르너에 도착했다. 그랜드호텔부르너에 짐을 풀고 여유있게 저녁식사를 했다. 해가 있고 밝은 대낮에 호텔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유로움이 너무 좋았다. 시간이 많으니까 원하는 사람은 식사 후 산책하기로 했다. 7시10분에 프론트에서 만나 가기로 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다 나왔다. 각자 함께 또 따로 흩어져서 뭉쳐서 교회나 성을 산책했다. 예정에도 없는 도미니크 성당과 피터 성당, 부르너성 주위 산책을 잘 했다.
많이 걸었던지 발바닥에 물집이 조그마한 게 생겼다. 터뜨리고 싶은데 따가울까봐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여행경험이 많은 문샘한테 말했더니 여행 다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바늘과 실을 갖고 다니며 혹시 물집이 생길 때는 실을 바늘에 꿰어 물집을 한번 깁고는 실을 남겨놓고 실을 자른다고 했다. 그래야 물집의 물이 빠지며 물집이 아프지 않고 아문다고 했다. 옆에 있던 손샘이 실과 바늘을 내주었다. 차안에서 바로 물집을 바늘로 한방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