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死]의 선택이 두려움을 이기는 지혜라니!
주혜(主惠) 김정숙 / 수필가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그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생존의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어쩌면 우리는 엄마 뱃속의 태아 때부터 이미 그 두려움을 경험하며 태어났는지 모른다. 살고 싶은 본능, 바로 그것이 생존의 본능이다. 사람들은 안전하게 살고, 후회를 덜 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이나 결과의 파장이 클수록, 선택에 대한 두려움의 무게도 커지게 마련이다. 혹여 어떤 선택들은 간단하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기준의 어떠한 선택’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삶의 과정을 반추해 보았다. 삶의 선택에서 ‘어떤 기준의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내 선택의 첫 번째 기준은, 그 선택이 현재의 나에게 ‘가장 최선의 옳은 선택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고, 두 번째는,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후회를 않거나 후회를 덜 할 만한 선택인지를 숙고해 보며, 세 번째는,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과연 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최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입장이라면, 차라리 ‘죽음[死]’을 선택할 정도 비장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최악의 선택이 아닌 최선의 선택이 되는 결과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초등시절에, 나는 옆집 동년배 또래 여아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그 아이는 몇몇 친구들까지도 자기 부하처럼 군림하면서 나를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 여자아이의 부모님이 방송국에 근무하는 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들 못 입고 못 먹고 사는 전형적인 깡촌 시골뜨기였다. 그러했기에 그 아이는 맛있는 과자들을 미끼로 주변 아이들을 유혹하며 자기 부하로 이용해 먹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공부를 곧잘 했기 때문에 바로 옆집 사는 그 아이에게 미움을 당한 것이다. 그 아이에게 온갖 설움을 받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야 비로소 그 아이에게 맞설 용기가 생겼다. 그냥 그대로는 도저히 못살 것 같아서 ‘죽음’을 각오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어느 날 그 아이의 잘못된 횡포와 압력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나에게 죽음을 각오한 결기(?)같은 것을 느꼈던지 많이 당황하였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다행히 훌륭한 선생님, 좋은 친구들을 만나 무난하게 보냈다. 그런데, 대학교를 입학하니까 군 제대를 한 복학생이 자신의 많은 나이와 연배를 내세워 공개적으로 과 전체 학생들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수업시간에 자신의 발표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도 하지 말라며 우리들을 윽박질렀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이 발표할 때에는 자신의 발표가 완벽한 듯이 치장하며 교수님 앞에서 잘난 체를 했다. 그때도 나는 무슨 배짱이었던지 그가 했던 압력을 마음속으로부터 강하게 거부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일부러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했다. 결국 그는 몹시 당황해하며 내 질문에 대한 어떤 답변도 제대로 내놓지를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비교적 좋은 직장에 입사했기에, 직장에서는 그렇게 심한 압력행사는 없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한두 명 정도는 있는 것 같았다. 모 팀장은 내가 술을 안 마신다는 이유로 나를 공격했고, 그것을 자기와 뜻이 안 맞았던, 더 높은 상사를 공격하는데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는 회식자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 술은 내가 따르는 술이지만, 내 술이 아니라 더 윗분이신 실장님이 따라주는 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술을 안 마시면 내 말을 거역한 게 아니라 실장님의 말을 무시한 겁니다. 그러니 마셔요. 안 마시면 내 술잔을 거부한 게 아니라, 실장님 술잔을 거절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하니 올해 당신의 근평은 아마 바닥일 거요. > 라고 말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내가 술을 안 마시게 된 이유는 기독교인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남편과 결혼할 때 하나님과 남편 앞에서 서로 술을 안 마시기로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이다를 달라고 종종 말했는데도, 그때 그 팀장은 교묘히 나를 괴롭혔다. 남편과 내가 술을 아예 안 마시게 된 이유는 남편의 결단 때문이었다. 남편의 친가 쪽의 친척들은 전통주를 생산하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 술로 인해 그동안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그러했기에 술로 인한 집안의 오래된 저주(?)같은 것을 끊겠다고 남편이 하나님 앞에서 금주를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뜻에 따라, 나도 동참하고자 우리는 결혼 전에 그 서약을 서로에게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유들로 인해 사이다를 달라 했지만 팀장은 무조건식으로 나에게 술 마실 것을 강요했다.
선택에 따른 결과가 몹시 두려웠지만, 결국 나는 차라리 ‘죽음[死]’을 선택할 정도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마치 소설 <상도>에서 주인공 임상옥이 ‘죽을 사(死)’를 선택하듯 나도 그렇게 결단했다. < 죄송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남편에게 한 약속이니까 지켜야 하고, 또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저의 근평 점수가 바닥이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 라고 대답했다. 팀장은 그 순간 매우 불쾌해 했지만 나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또한 그런 비상식적인 협박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또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깰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순간 내가 했던 그러한 선택들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려웠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선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해 공적상을 받았다. 즉, 실장님은 내가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와는 상관없이, 그 동안의 나의 공적을 인정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이 났어도 내게 맡겨진 일들을 끝까지 성의 있게 완수하는 것을 보시더니 그 팀장도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나에게 많이 배웠다면서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존경한다고까지 말했다.
또 어떤 때에는 연말 송년회식에서 모 수석이 <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다 다루는 방법이 있지 > 라고 혼잣말처럼 하면서 이상한 행동을 팀원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갑자기 큰 냉면그릇의 절반이 다 차도록 콜라, 사이다, 맥주, 소주를 섞어 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팀원 모두에게 올해의 송년 멘트와 내년을 위한 각오를 다지면서 이 냉면 그릇에 담긴 각종 술을 개인들이 각자 다 원샷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팀원들을 돌아가면서 호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4번째로 지명당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나를 골탕 먹이고자, 나를 노리고 그 모든 사전 행동을 진행한 것이었다. 즉, ‘네가 술을 안 먹나 보자. 내가 오늘은 결단코 너에게 술을 먹이고 말겠다!’라는 심사였던 것이었다. 역시 난감했지만, 나는 그때도 차라리 ‘죽음[死]’를 선택할 정도 비장한 각오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상사께서 주신 술이고, 내년의 다짐을 발표하는 자리이니만큼 안 받을 수는 없는 술 같아서, 진심의 마음을 담아 ‘마음’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 라고 말하며 나는 내년의 다짐을 말씀드렸다. 그런 후, 나는 얇은 패딩조끼를 입고 있었던 내 가슴팍에 그 술을 부어 버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약 10초 정도 침묵이 흘렀다. 나를 괴롭히려던 모 수석은 온갖 짜증을 다 내면서 < 그냥 다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 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그 당시 실장님은 자신들의 잘못된 관행과 나의 결단성 있는 행동에 많이 놀랐는지 오히려 반성하는 눈치였다. 실장님은 남아 있는 회는 다 먹고 가자고 다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회식 후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실장님은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시면서 < 잘 들어가세요. > 라고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이기기는 힘들다. 그러나 작은 두려움도 조금씩 극복해나가다 보면 큰 두려움도 차츰 이겨나갈 수 있는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것은, 후에 내가 정말 후회를 덜 할 옳은 행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몰랐던 나의 용기가 어디선가 용솟음치게 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감히 나는 독자들께 역설하고 싶다. 많이 두렵다면, 차라리 회피하지 말고 정면돌파(正面突破)의 길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결국 자신을 지키는 보루라 믿기 때문이다.
첫댓글 용기와 강단이 대단하십니다. 세상은 작가님 같은 분께서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