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에도 기적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셔서, 바다를 건너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2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대에 누인 채, 예수께로 날라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기운을 내라,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셨답니다. 갈릴리 호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바다라는 말과 호수라는 말은 같은 단어를 씁니다. talassa 라는 단어인데 ‘큰 물웅덩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길게 흐르는 강이 아니라, 큰물이 모여 있는 바다나 호수를 그리스인은 다 탈라싸라고 했습니다. 그 갈릴리 호수를 건너 고향지역인 가버나움으로 오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이동식 침대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려왔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분이라면 이 난치병도 고쳐주실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시는데, '병이 나았으니 일어나 걸어라' 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이런 기록에는, 병과 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병과 함께 그 병이 생긴 원인인 죄까지 용서해주셨다고 본문이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 깊은 병이 걸렸을 때, 악령이 들었다거나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도 있고요.
그런데 이 문제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예수님이 신성모독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예수님이 마태라는 세관원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9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2세기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 본문에 등장하는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의 이름이 마태복음이 되었는데 사실은 그와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마태와 그 일행들, 그러니까 세관원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셨노라고 이어지는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세리라는 말은 세관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관원은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실제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어서 착복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으시고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2~13절을 보겠습니다.
12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답니다. 이 말씀은 구약과 신약을 뚜렷하게 나누는,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와 사상은 의인을 존중하고 죄인을 경계합니다. 죄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갱생시키려는 노력은 세상의 모든 훌륭한 종교와 사상이 다 하는 것이지만, 아예 의인보다 죄인을 더 주목하는 종교와 사상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라는 예수종교의 위대한 점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사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병약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지요.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가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하는 정신과 의사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의인이라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어울리기를 꺼리는 모든 하층민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본래 이런 종교입니다. 의인들의 종교가 아니라 죄인들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모여서 여전히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여 의인으로 거듭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죄인이 교회에 가면 의인으로 거듭납니까? 제가 보기에는 의인으로 거듭나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고집스럽고 자기만 옳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신칭의’라는 교리에 따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미 의인이 된 것이라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그것이 과연 옳은 가르침인지, 정말로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인지, 냉철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금식에 대한 논쟁이 담겨있습니다. 14~15절을 보겠습니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지금은 혼인잔치 기간이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민중들이, 마치 신랑신부가 결혼을 해서 신혼기간을 즐기듯 마음껏 서로의 사랑을 나누며 즐기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고, 그때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금식을 할 거랍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6~17절을 보겠습니다.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게 찢어진다.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슬퍼하며 금식하면 칭찬을 받던 시대는 지났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 축제를 벌일 때는 축제를 벌이고 신나게 놀 줄도 알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눈물 흘릴 줄도 알아야지, 무조건 금식과 기도가 미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놀이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모두 악한 것이라면서 오직 기도와 금식에 몰두하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도 신앙도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고통 자체가 미화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는 말씀의 더욱더 중요한 의미는, 기존의 법과 관습도 시대에 맞지 않으면 개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시 시대와 맞지 않는 구약의 율법과 관습을 재해석하셨듯이, 오늘날의 시대와 맞지 않는 신약성서의 기록들도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따르는 오늘날의 진정한 제자들은 교리에 얽매인 보수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과학과 합리에 의해 성서를 재해석하는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교리에 얽매인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토록 비판하신 당시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제자들일 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즉시 나았다는 이야기와, 예수께서 죽은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눈이 먼 두 사람의 눈에 손을 대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와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적 사화에 대해서는 8장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9장의 마지막 본문에는, 예수께서 성읍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는 기록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민중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