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참 오랜만에 정구성 시인의 동시를 읽었다. 그는 워낙 과작인데다 좀처럼 작품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꾸준히 작품을 써 왔다는 것은 이 동시집이 증명을 해 주고 있다. 등단 10년이 지나서야 첫 동시집을 내는 것도, 어쩌면 그의 문학 의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그는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꼼꼼히 생각하다 오히려 놓쳐서는 안될 것을 놓쳐 버리는 그런 치밀함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치밀함이 동시에서는 장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번 첫 동시집에는 모두 예순 두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재의 다양성은 보이지 않지만 한 소재를 시로 승화시키는 장치는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일상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자칫하면 일상의 패턴을 그대로 나열하기가 쉬운데, 그는 그 일상의 이야기에 상징성을 부여해서 시적 감성과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의 제목을 보면 표제와 같은 서술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나타낸 것이 많았다. 몇 개의 제목을 보면 금방 짐작이 간다. <병 속에 시간을 담을 수 있다면>, <아빠의 서성이던 발자국 옆에 내 발자국도 함께 있어요>, <아빠 호주머니에 거울을 넣어 드리자>, <선생님의 꿈은 코딱지 만하대요> 등이다. 이러한 제목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진다면 이 동시집 읽기가 한결 재미있으리라 본다.
아빠의 존재
이 동시집에는 아빠와 관련된 동시가 무려 15 편이나 실려 있다. 전체 작품 수에 비하면 4분의 1이나 되는 셈이다. 그만큼 아버지의 존재를 일깨워 주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아버지란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존재다. 인류학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미성년자인 아이들한테는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이다. 특히 그가 바라보는 아버지의 존재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참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힘든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위안을 주고 있다. 특히 그는 어른으로서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로 돌아가서 동심의 프리즘으로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다.
작은 병 속에/시간을 담을 수만 있다면//예쁜 병 속에/한 시간만 담아서/아빠 가방 속에/살며시 넣어드리고 싶다//아무리 바쁘신 아빠도/그걸 꺼내보시면/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으시겠지?//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그런 시간 만들어/아빠 가방 속에/몰래 넣어 드리고 싶다.
<병 속에 시간을 담을 수 있다면> 전문
현대 사회의 아버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매우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얼마나 측은해 보였으면 한 시간이라도 여유를 주고 싶어했을까? 여기서 화자는 어린아이이다. 어린이로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진지하다. 그만큼 이 동시는 진실성이 담겨 있는 셈이다. 아빠 가방 속에 몰래 넣어드리고 싶을 만큼 아버지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던 것이다.
'아이에게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커다란 빚이 있습니다. 아빠가 내게 주시는 사랑이 나에게는 가장 큰 빚입니다. 그 빚은 도무지 갚을 수가 없습니다. 갚으려고 해도 빚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어떻게 갚아야 되나? 하고 생각하다가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아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위의 글은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을 그가 직접 밝힌 것이다. 시간을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병 속에 담아서 몰래 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다. 이 시는 오늘날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시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어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이 밖에도 <아빠의 자리>, <아빠와 빨간 장미>, <아빠의 가을 숙제>, <아빠 호주머니에 거울을 넣어드리자> 등이 아버지의 존재와 위치를 일깨워주고 있다.
상상력과 상징성
시의 상상력은 시적 감성과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하는 필요한 장치이다.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은 시는 무미건조하고 시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설명적이거나 사실을 나열하게 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구성의 동시는 모두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있어서 시의 맛이 난다. 어떤 사물의 모습이나 인지 상태를 그대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물의 이미지도 상상력을 동원해서 평범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나는 우주 속에 있습니다/우주 여행을 하고 있지요//
별들이 손짓을 해도/달빛이 간질여도/나는 관심 없어요/멍하니 있는 수학 시간처럼/우주 여행 중에는/아무 생각 않기로 했어요/무중력 상태의 우주처 럼/무중력 상태의 내가 되고 싶어요, 가끔은//
잠못 이루는 밤/눈을 감으면/나는 우주 속에 떠 있습니다/아니/내 마음속에 우주가 있습니다.
<우주 여행> 전문
어린이들은 상상의 세계를 좋아한다. 때에 따라서는 환상의 세계도 현실의 세계처럼 인정하고,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여긴다. 로켓트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면서 갖은 생각을 해보는 것도 어린이들의 속성이다. 이 시에서는 그냥 우주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겪어보지 못한 일까지 직접 체험해 보는 상상을 하게 된다. 결국 화자가 우주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화자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이는 상징성까지 보여주는 셈이다.
내가 만약
초록 어린이 나라 대통령이 되면
어린이들 마음까지도
초록빛으로
곱게 곱게 물들여 줘야지.
<어린이 나라 대통령이 되면>의 마지막연
초록 어린이 나라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는 상상도 재미있지만, 그 나라 어린들 마음까지 초록빛으로 물들이겠다는 연상 작용이 시적 장치를 탄탄히 해 주고 있다. 상상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타낸다면 황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구성의 시는 상상에다 상징이라는 시적 매개체를 하나 더 얹어줌으로써 시의 때깔을 갖추게 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상상이라도 상징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공허한 세계만을 그려 놓게 된다. 이렇게 시의 상상력은 시의 내면 세계를 확장시켜 독자들의 인식을 새롭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 의식
이 시집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에 관한 시가 몇 편 실려 있다. 흔히 보아온 유적과 유물들이지만, 그는 예사로 보지 않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천 년이 넘는 긴 세월/무슨 생각/그리 깊게 잠겨 있느냐?//날아갈 듯 예쁜 네 몸매/보는 사람들마다 입 벌리고/어린 눈동자들 더 커져도/너는 도대체 말이 없구나.//신라의 하늘과 바람과 별/네 가슴엔 온통 신라뿐이고/다시 태어날 신라를 기다린다고/이제 속 시원히 얘기 좀 하렴.
<첨성대> 전문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말 한 마디 없는 첨성대를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입을 열면 신라의 흥망을 고스란히 얘기해 줄 것 같다는 상상력이 동원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시작 메모를 보면, 그의 상상력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조상들의 슬기를 찾으려면 경주를 가야 합니다.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자취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천 년이 넘은 세월 동안 아직도 그대로 서 있는 첨성대를 보면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해 보니 내가 신라 시대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첨성대가 만약 입이 있다면 할 이야기가 무척 많을 것입니다. 언젠가 첨성대의 말문이 트일 때 조용히 귀 기울여 신라의 한과 화랑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그는 첨성대를 살아있는 사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말문이 열리면 조용히 귀 기울여 신라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동시에서는 이런 상상이 어린이들의 심리 상태와 잘 맞물려서 시를 문학의 경지로 극대화시키는데 효과를 얻고 있다. 다른 작품 <천마총>과 <에밀레종>, <석굴암> 등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법을 사용하여 마치 그런 사물과 얘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어린이의 심리
그의 시는 철저하게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 이 말은 어린이의 심리를 잘 파악해서, 그가 어린이가 되어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어린이를 화자로 내세워 사물의 세계를 그려나가고 있다.
하나를 내려 주고/또 다시 빼고/그러다 가끔 길을 잃어버립니다//신호등에 정신 팔고 있다가/길을 헤매는 것처럼/그까짓 점 하나 때문에/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한참을 끙끙거리며 두리번거리다가/다음 신호 기다려/길을 건너며/살며시 점을 찍어 놓습니다.
<산수 시간> 전문
우리 선생님의 꿈은 코딱지만하대요//어릴 적 대통령이 되려다/친구들을 못 만날까 봐 그만 뒀어요//장군이 되려다가/철모가 무거울까 봐 그만뒀어요//의사가 되려다가/아이들의 연한 살에 차마 주사 바늘을 꽂을 수 없어 그만 뒀대요.
<우리 선생님의 꿈은 코딱지만하대요> 일부
위의 시 은 산수 시간에 겪은 마음의 움직임을 솔직하게 나타내었다. 즉 점 하나 찍지 않아 일어난 상황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떻게 할까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살며시 점을 찍어 놓는다는 뒷부분의 생각이 어린이의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는 어렸을 때 선생님의 꿈이 차차 바뀌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대통령도, 장군도 그리고 의사도 마다한 심리 상태가 어린이의 정서와 일치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어릴 때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아이들 곁에서 함께 손을 잡고 푸른 빛을 칠해 주겠다는 소망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역시 이 작품도 상상력을 동원해서 어린이다운 생각을 담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맺는 말
정구성의 시는 철저하게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어린이들이 시를 읽으면 바로 시 속의 화자가 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그는 사물을 사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적 장치를 탄탄히 만들어 놓고 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시가 많은 것은 그의 문학 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는 차남이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존재가 나약해져 가는 현실을 깊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단 10년이 지나서야 첫 동시집을 내었지만 이제 시적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번 동시집에서 주제를 바깥으로 드러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제 첫 동시집을 냄으로써 자기의 시 세계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