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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말‘·‘벌말‘·‘밤나뭇골‘ 등의토박이 땅이름들은 대개 한자로 적어서 ‘신촌(신촌)‘·‘평촌(평촌)‘·‘율곡(율곡)‘ 등으로 변질되거나 우리 입에서 멀어져 갔다.
옛날에는 우리말을 표기할 때 말뜻만을 나타낼 경우는 한자로 의역하면 되었지만 말소리를 나타내는 경우는 이 이두문자로 그 소리를 표기했다. 이것은 한자에 대한 이해가 어렵고 한문장(한문장)의추상성과 거기 담긴 중국의 사상체계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당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문만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가서 자연히 향찰식 이두식 문장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중국과 우리 나라는 언어 구조가 다른 데서 중국어 표기에 알맞은 한자를 우리 국어 표기에 사용하려고 한 그 차용(차용 : 음차, 훈차)이란 퍽 불합리하였으니 한자를 우리말의 순서로 맞추어 표기하던 서기식(서기식) 표기, 한자의 소리[음]나 뜻[훈]을 차용하여 우리의 말 순서대로 표기하던 향찰식이나 이두식 표기가 객관적인 보편 타당성을 띠지 못했다.
단편적인 사람이름·땅이름·관직이름 등의 고유어 표현마저도 두 나라의 음운체계 음절구조를 파악해서 혹은 소리로 혹은 뜻으로 혹은 약음(약음)·약훈(약훈) 등 심지어는 어떤 암시적 표기까지도 들어 있었던 것이니 이러한 고충은 제대로 중국류의 한문자화로 해결해 갔던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의 옛 땅이름이 우리말의 소리와 뜻에 따라 그대로 이두문자로 표기되어 전해왔으나 나중에 한자지명으로 바뀌게 되어 우리말 소리와는 다른 한자 소리의 땅이름이 되어버린 경우가 있다.
흔히 순 우리말 땅이름이 한자로 옮겨지면 그 소리나 뜻이 이상하고 어감도 엉뚱스럽게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경남 울산시 두서면 전읍리(전읍리)는 순수 우리말인 ‘돈 마을‘ 또는 ‘돈말‘ 로 쓰이다가 이두문자로 ‘회은촌(회은촌)‘ 으로 표기했다.
곧 ‘회은촌‘ 의 ‘회(회)‘ 는 ‘돌다‘ 라는 뜻말의 줄기, ‘돌‘ 에 ‘鱁‘ 이 탈락한 ‘도‘ 의 소리이며, ‘은(은)‘ 은 ‘은‘ 또는 ‘遁‘으로 읽는 ‘遁‘소리이고 ‘촌(촌)‘ 은 ‘마을‘ 이라는 뜻으로 읽은 ‘말‘ 이란 소리다. 따라서 이두문자로 표기한 ‘회은촌(회은촌)‘ 은 ‘돈말‘ 이라는 우리말 소리를 그대로 표기한 땅이름이다.
신라 때 이곳에 돈을 만드는 주전소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한 지명이라고도 풀이하고 있으나 ‘돌다[회]‘ 의 매김꼴은 ‘돌‘ 은 이지만 ‘鱁‘이 탈락하여 ‘돈[회]‘ 이 된 것인데, 한자로 ‘돈‘ 을 화폐인 ‘전(전)‘ 자를 취해 전읍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두표기도 조선조에 들어서는 글자로서는 이두에서 한자로 옮겨졌고 소리로서는 우리 말소리가 생소한 한자소리로 바뀌어 뜻만 같고 소리는 다른 땅이름이 되고 말았다.
대체로 땅이름의 한자 표기는 그 뜻만 옮겨지고 말소리는 우리말 소리가 아닌 생소한 한자소리였기 때문에 일반대중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문자의 생활화에 따라 점차로 구전되어 오던 우리말의 땅이름은 사라지고 한자말 한자어의 땅이름이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땅이름의 대부분은 이와 같은 변천과정을 거친 한자 지명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제22대 지증왕(500∼513) 때까지는 임금을 왕(왕)이라 하지 않고, 거서간(거서간)·차차웅(차차웅)·이사금(이사금)·마립간(마립간) 등 옹근 우리말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거서간은 산라초의 왕호(왕호)로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 불렀다. 이것은 고대의 진한(진한)말로 임금 또는 귀인(귀인)을 뜻하였으며, 제사(제사)를 맡은 웃어른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이사금은 신라 초기 박(박)·석(석)·김(김)이 왕통을 이음에는 연장자로서 한 까닭에 왕을 이사금이라 하였다.
읽기와 의미에 대하여 이론이 많아 연장자의 의미, 사왕(사왕), 계군(계군)의 뜻, 임금[구주]의 뜻을 갖는 어원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다. 차차웅은 신라 남해왕의 칭호이다. 무당을 뜻하는 말로 제정일치시대의 원시사회적 수장호(수장호)의 특색을 나타낸다.
마립간은 화백과 같은 부족회의에 있어서 신분에 따라 서 있는 사람의 자리가 말뚝표로 정하여져서 왕은 그 주석(주석)에 있었으므로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어떤 학자는 신라 고대 남자 집회소 혹은 부족회의 등의 간(간)이라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말의 머리라는 말과 연관시켜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의 대전(대전)은 본래 한밭이고, 이리(이리)는 솜리(속리)이며, 청주의 학평리(학평리)는 두룸벌, 백송리(백송리)는 잣골이었다. 그래서 행정지명으로는 앞것을 쓰고 있으나 현재도 그 주민들은 토박이 이름대로 부르기도 한다.
더구나 그 때는 우리의 고유문자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다가 당(당)으로부터 한문자(한문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삼국통일 후 신문왕(신문왕) 5년 (685)에 9주(주) 5소경(소경)을 설치하였다. 옛 고구려 땅에는 한산주(한산주 : 한주), 수약주(수약주 : ), 하서주(하서주 :)의 3개주를, 옛 신라와 가양의 땅에 사벌주(사벌주 : ), 삽량주(삽량주 : 양주), 청주(청주 : )의 3개주를, 그리고 옛 백제의 땅에는 웅천주(웅천주 : 웅주), 완산주(완산주 : 전주), 무진주(무진주 : 무주)의 3개 주를 두어 통치하였다.
그 가운데 한산주(경덕왕 때 한주로 개칭)는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 대부분 지역과 강원도일부, 충북의 일부 그리고심지어는 극히 협소한 지역이지만 평남과 충남의 일부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관내에는 1소경 1중원경(중원경)으로 현 충주(충주)와 28군 49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9주 아래에 설치한 군(군)과 현(현)은 경덕왕(경덕왕) 16년(757)에 일대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전국은 모두 117군과 293현으로 나누어졌다. 그밖에 양주(양주)에 김해경(김해경), 한주(한주)에 중원경(중원경), 삭주(삭주)에 북원경(북원경), 웅주(웅주)에 서원경(서원경), 전주(전주)에 남원경(남원경)의 5소경을 두었다. 드디어 제35대 경덕왕 16년에 임금은 결단을 내렸다.
그때까지는 주로 구전(구전)하는 고유 행정구역의 땅이름을 모두 한자식으로 통일 표기했다. 옛 고구려·백제의 영토까지 온나라에 걸친 대대적인 작업이었다. 군·현의 명칭은 물론이고, 3자 이상 토박이말 땅이름까지 모두 2자를 원칙으로 하는 한자식 땅이름으로 고쳐 지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때는 중앙집권체제 강화의 필요에서 각기 상이하였던 삼국의 땅이름을 일률적인 형식으로 통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땅이름의 통일이 지방행정의 정책수행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지위를 점하게 되는 계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문화사적 측면에서 보면, 유입된 한문화를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문화적 성장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름·벼슬이름까지 그렇게 하자니 억지와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
우리 토박이말을 한자로 표기하자니 그 작업이 매우 어려워서 어떤 것은 음으로, 어떤 이름은 훈(훈)으로 적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 행정구역 이름을 모조리 한자로 통일하였으니, 그 시행이 1,200년도 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원시 우랄알타이어로 ‘시·촌·읍‘ 즉, 성(성)·촌락·주택집단의 뜻을 가진 동일 접미어들이다. ‘굴(굴), 골(촌), 골(골)‘ 등도 ‘홀(홀)‘ 과 동일 유형의 접미어이다.
신라 경덕왕은 고구려의 땅이름에서 많이 보이는 ‘홀(홀)‘과 백제 ‘홀(홀)·굴(굴)‘을 동비홀(동비홀)→개성(개성), 매홀(매홀)→수성(수성)·수원(수원), 술이홀(술이홀)→봉성(봉성), 달홀(달홀)→고성(고성), 보굴(보굴)→보성(보성), 나혜홀(나혜홀)→백성(백성)·안성(안성)등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제2음절 이하에서는 ‘성(성)‘ 으로 바꾸었다.
백제의 ‘부리(부리)‘는 소부리(소부리)→부여(부여)·사비(사비), 파부리(파부리)→부리(부리)·복성(복성), 반나부리(반나부리)→반남(반남:부리의 생략), 모량부리(모량부리)→고창(고창), 고량부리(고량부리)→청무(청무)·청량(청량) 등으로 바꾸었고, 신라의 ‘불(화)‘ 은 모화(모화, )→임관(임관), 골화(골화)→임천(임천), 비화(비화)→안강(안강), 노사화(노사화)→자인(자인), 굴아화(굴아화)→울주(울주)·울산(울산), 갑화량곡(갑화량곡)→기장(기장), 달구화(달구화, 달불)→대구(대구), 아화옥(아화옥)→비옥(비옥), 추화(추화)→밀성(밀성)·밀양(밀양), 거지화(거지화)→헌양(), 우화(우화·우불)→우풍(), 칠파화()→진보(), 비자화()→창녕(), 추량화()→현풍() 등과 같이 변경하였다. 골[]은 고구려 땅이름 ‘홀()‘ 이 발달한 것이며, ‘올/울‘[예: 가재울 ]은 신라의 땅이름 ‘블[]‘ 과 백제의 땅이름 ‘부리()‘ 가 발달한 것이다. 또 우리말 ‘실‘ 계 땅이름(예: 논실)은 행정지명이 되면서 한자로 ‘곡()‘ 으로 옮겼다.
큰말→대촌(), 윗말→(), 대섬→죽도(), 물미→수산(), 갯말→와촌(), 새터→신대리(), 솔치모랭이→송우(), 양달말→양지촌(), 노루메기→장항(), 절골→사곡동(), 가래울→추동(), 밤밭→율전(), 된골(곧은골)→직동(), 벌말→평촌() 따위와 같다. 소리를 옮긴 예로는 방죽[], 서낭당[], 퉁소[]배미, 장포[]우물들은 한자말의 소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래 그 한자의 소리를 잃어버리고 토박이 말처럼 된 것이다. 이러한 말을 귀화어라고 한다. 경·부·목과 주요 군·현에는 중앙에서 감무관을 파견하여 그 고을과 여타의 속군·속현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는 전국 각처에 산재하는 호족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을 통하여 민중을 지배하였다. 그 거주지에 주·부·군·현과 그밖에 향()·소()·부곡() 등도 동시에 거기 상응하는 지위와 격식을 주었으니, 주·군·현의 칭호는 동시에 호족 세력의 대소·강약과 주민 신분의 고하에 따라 결정하였다.
즉 이러한 등차는 국가의 군사상·행정상 중요성이나 왕실의 연고(), 호족의 세력 관계 등에 연유하였지만, 고려 시대에는 근본적으로 호구의 다소, 토지의 광협에 따름으로써 이를 합리화하려고 노력한 듯하다. 고을 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 중국식으로 개칭한 후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여러 주·부·군·현의 이름을 개정하였다.
이어 성종 11년(992)에는 다시 주·부·군·현과 관()·역·강·포()의 이름까지 개정하였다. 같은 14년에 설치한 관내도(:경기도·황해도 일대)·중원도()·하남도()·강남도()·해양도()·영남도()·영동도()·산남도()·삭방도()·패서도()의 10도()는 당()의 도()이름과 마찬가지로 산천 경계를 따라서 명칭을 정한 것이다.
성종 10년 지방의 특성을 나타내는 별호()를 제정했는데, 고려사회의 본관이나 성씨·봉작명()의 운영에 기본원리가 되었다. 한편, 오아족의 안태지(), 왕후나 외척의 고향, 왕사()·국사()등의 출신지, 지방민의 국가와 왕에 대한 공죄(), 그리고 효도나 부모 살해 등의 요인들로 인하여 고을의 승격, 강등이나 행정구역의 설치, 폐합을 자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군·현 이름에 ‘주()‘자를 붙인 곳은 대개 큰 고을이어야 하는데, 부·군은 고사하고 중소 현에까지 ‘주‘자를 붙인 명칭이 많다. 같은 ‘주‘자를 쓰는 고을에도 목()이나 부()뿐만 아니라 지사부()·속군·속현 등이 허다하였다. 고려 제8대 현종9년(1018) 또 이러한 대략 완비된 5도 양계제()는 우리 나라 지방 행정구역 변천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전국을 경기와 5도() 및 동계·북계의 양계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개경(:개성)·서경(:평양)·동경(:경주)·남경(:양주, 지금 서울) 등 4경()과 안남(:전주)·안서(:해주)·안북(:안주)·안동 등 4도호부 그리고 광주·충주·정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등 8목()을 두었다. 지방제도 개편 때, 전국을 경·부·목·주·진·현 등으로 구획하여 외관()을 두고, 나머지 군·현과 향·소·부곡 등을 지방관이 있는 주현()에 분속하여 관내()로 삼았다.
속현에는 원칙적으로 외관을 파견하지 않았고 주현에 파견한 지방관의 통제를 받았다. 향교()는 대개 속현에는 두지 않았으나 특수한 곳에는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 주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속현에는 조세()·공물()의 수납·조조()·진제(:구제)등을 목적으로 각종 창고를 두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지리지』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새 땅이름을 많이 수록하였다.
무릇 주와 부·군과 현의 사이에는 각각 등급이 있는데,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래도 본떠서 지관()의 행정관이 있는 자리에도 주()자를 붙여 부르는데, 이런 보기로는 인주()니 괴주()니 하는 따위가 바로 이것이고, 현감()으로서 주()자를 붙여 부르는 고을은 과주()와 금주()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뒤섞여 부르기 때문에 그 고을의 등급을 알 수가 없어서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많아 지관()이나 감무관()으로 행정관리가 된 고을은 그 주()자를 모두 ∼‘산()‘자나 ∼‘천()‘ 등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자료들에는 우리말 땅이름을 거의 한자로 표기하여, 할미산을 노고산(), 모래내를 사천(), 애오개를 아현(), 삼개를 마포() 식으로 적어놓았다. 고려 시대에는 중앙행정 감독의 편의상 전국을 5도()·양계()로 하고, 조선 시대에 8도제를 실시하였다.
이때 도의 명칭은 도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부()·주()의 이름을 따서 정하고, 그 고을의 격( )을 승강할 때는 도의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군()·현() 이름의 변화는 초기 군현의 정비, 병합과 혁파()·신설·승격과 강등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중국처럼 산천·지세 등 자연 경계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주()이름 위주의 도이름을 사용했으므로 해당 주·부에서 반역자나 강상죄인()등이 나면 등급을 격하하고 도()이름도 바꾸었다.
그 가장 심한 예가 조선 시대 초기의 함경도와 후기의 충청도의 경우였다. 도이름의 변천을 보면 이러하다.
즉 충청도의 경우, 충주를 현을 강등하면 공청도로 하고, 청주를 강등하면 공흥도, 공주를 강등하면 또 고쳐서 홍청도로 한 것과 같다. 도 이름을 바꾸므로 갈래가 많아 인식되지 않으니 차라리 천고()에 변함이 없는 산천의 이름을 따서 도이름을 고정하는 것이 옳으리라고 제안하였다.
태종 3년(1403) 11월 사간원()의 진언()에 따라, 같은 13년(1413) 10월 도이름 개편과 동시에 읍호도 개칭하였다. 즉 종2품 부윤()의 임지()인 부()와 정3품 임지인 목() 이외의 고을에는 ‘주()‘자 사용을 금지하여 도호부 이하 군현은 모두 산()·천()의 두 글자로 대체했다(대도호부에도 州자 사용을 금함). 전국 ‘천()‘자 36개소, ‘산()‘자 23개소 등 59개 군·현명을 대대적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자 대신에 평()·원()·성()·양()…으로 개칭한 사례도 있었다.
수주()→부평(), 수주()→수원(), 구주()→구성(), 양주()→양양() 등이 곧 그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군현제를 개편하였다. 고려왕조도 그 본질은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였지만 신라시대부터의 토호적 향리() 세력이 강하여 그들은 주·부·군·현에 계층적으로 편입하고 주·부와 일부 군·현에 파견관을 두어 이들을 감독하게 한 데에 불과하다.
외관을 파견하지 못한 이른바 속군·속현은 주된 부·군·현의 감독하에 토호적 향리들을 다스린 것이 상례였다. 그 결과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은 토호들의 세력판도에 의하여 크거나 작아졌고, 대체로 너무 세분되고 고르지 못하여 견아상() 또는 월경처()도 많았다.
이와 같은 고려의 행정 구역에 대하여 조선왕조가 실시한 시책은 향리가 통치한 속군·속현·향소()·부곡() 등 각 임내(관내)의 폐지, 군현의 병합·이속()에 의한 개편, 월경처는 물론 견아상입지()를 정리하는 일 등이었다. 태조() 때부터 논의하기 시작한 이 작업은 태종() 14년(1414)에 군현을 폐지·병합하기로 결정, 그 실시를 각 도에 시달하고 세조() 때 종결을 보게 되었다.
그 병합과 이속의 예를 보면, 용구()와 처인()을 아우러 용인(), 부령()과 보안()을 합하여 부안()으로 하고, 계림(경주)의 해안()을 대구()로 이속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령에게 군사직을 겸하게 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수령간에 상하의 계통이 서게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듯 수령이 겸임하는 군사직의 상하관계는 일단 유사시에 수령간의 명령계통을 확연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폐합하는 사례가 많았으나, 대체로 3년 정도가 지나면 다시 복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신라와 고려 초에, 땅이름을 따서 임금 이름을 붙인 것과 사람 이름을 따서 땅이름을 개칭한 바 있으나 이는 드문 예이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이름이나 이름자를 따서 지은 땅이름은 적었다.
이는 고려조 이후 혐명사상()으로 인하여 이름자를 취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특히 땅이름 중 임금이름, 대신의 이름, 궁전이름 등은 피하여 개칭케 한 바도 있었다.
주현()과 속현을 병합할 때는 원칙상 주현의 이름을, 군현과 향·소·부곡을 병합할 때는 군현의 글자를 앞에 두었다. 병합할 때 조선시대 군현이름의 결정은 읍치의 소재지는 두 읍 가운데 큰 곳으로 하는 원칙이 있었다.
특이한 예로 산음()과 안음()을 산청()과 안의()로 바꾸었다. 영조 43년(1767)에 산음현에서 7세 여아가 사내아이를 낳게 되자 “안음과 산음은 경계를 삼고 있는데, 지난번에 변희량의 역모가 일어났고 이번에는 음부()가 나타났으며, 또 아미산()도 있으니 이런 까닭에 삼소()가 어우러져 이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는 군현명에서 연유한 바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하여 개칭하였다 한다. 그래서 산음()이냐 산청()이냐는 그 지도의 제작연대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조선 초기에 이르러 호구수를 기준으로 하여 군현 등급과 칭호를 정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엿보인다. 군현의 등급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건 가운데 인구수가 기본이 되는 것은 고금이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을 무시한 채 여러 가지로 불합리하게 군·현 등급의 승강을 빈번히 하였으나 조선 태종조부터는 그러한 폐단을 점차 없앴다. 그리하여 세종 때 군·현 이름을 그 지방 인구의 다과에 따라 정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특히 태종 13년(1413) 지방제도를 일대 개혁한 뒤부터 일반화한 듯하다.
‘속담에 ‘동네방네 소문났네‘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행정구역 단위인 동()과 방()의 안() 이란 뜻의 ‘동내방내()‘라는 한자말에서 나온 것이다. 갑오경장(:1894) 무렵 서울의 행정구역은 5서(:를 바꿈), 47방(), 288계(), 775동이었다.
특히 당시의 장터는 정보매체 중 가장 큰 몫을 하였다. 도로나 하천의 접합지점에다 자리잡았는데, 대개의 경우 읍내에서 이웃읍내까지의 거리가 60∼110리, 평균 약 80리 정도가 보통이었다. 예를 들어 경주()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면 울산()·언양(),·영천()은 각각 약 80리, 연일()은 60리, 흥해()·장기()는 각각 110리였다. 읍내에서 그 영역 안의 모든 중심마을은 1일 왕복권 내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보행교통에만 의존한 시대에 1일 보행의 적정량인 약 80리(32km) 안팎의 위치마다 결절 지점이 있어서 큰 마을이 생기고, 여기에 군·현의 청사를 세워 읍내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통례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높은 산이 연이은 평안·함경·강원의 3도에는 읍내 상호간에 1일 이정()을 기준할 수 없었으며, 반면 삼남() 지방에는 토호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군현 개편이 뜻대로 되지 않아 30∼40리에 읍내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주·부·군·현이 각기 읍치()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등 몇 개(주로 4면)의 방향으로 면을 나누고, 이런 면 아래에 리·동·촌 따위 등 자연부락을 붙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면·리·촌·사()·동·방() 등의 용어가 실제는 명확한 구분 없이 서로 혼용되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또 면·리제의 실시와 함께 초기의 권농관()과 이정()에는 재향품관()이나 유식자를 임명하였다.
권농관은 제언()·관개·파종 등을 관리하는 수령의 직사()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군·현 이름의 변경과 관등의 변화는 그 사유와 과정, 그 시기와 함께 전반적인 역사적 고찰을 통해 종합적인 땅이름 연구를 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구리개()란 곳을 일제가 그들의 어운()을 따서 황금정통()이라 불렀는데, 우리 정부 수립 후에는 다시 우리가 을지로()로 바꾸었다. 또 조선 시대의 한성()을 경성(), 진고개()는 본정()으로 일제가 바꾸었는데, 광복 후에 각각 서울, 충무로로 개정하였다.
1895년 일제의 조종에 의해 제정된 홍범() 14조가 선포되고 같은 해 5월 21일 칙령 제98호 ‘지방제도 개정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8도 제도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가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다. 23부는 한성부()를 비롯한 인천부(), 충주부(), 공주부(), 개성부() 등이다.
그러나 23부제는 불합리한 점이 많아 시행한 지 불과 1년 2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8월 4일 칙령 제36호인 ‘지방제도·관제·봉급·경비 개정의 건‘을 공포하여 13도제가 시행되었다. 13도제는 종래의 8도제를 바탕으로 하여 경기·강원·황해를 제외한 5도를 남북 양개 도()로 분할한 것이다. 오늘날의 지방행정구역 체계는 바로 이 13도제에서부터 그 기반이 확립되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창씨 개명에 앞서 전국적인 땅이름 변경을 실시하였다. 땅이름과 성씨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둘 이상 땅이름에서 한 자씩을 떼어 붙여 새 땅이름을 만드는 소위 합성 땅이름을 이때 무의미하게 양산하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대륙침략의 길잡이와 토지수탈 목적 아래 토지조사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지형도를 간행하였다. 이를 위해 본격적인땅이름 조사에 착수했는데 이때 약 180만 개의 땅이름이 채집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땅이름 조사는 불충분했고 더욱이 일본인들이 사용에 편리한 땅이름으로 상당히 변질된 것이 많았다. 그것은 1899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5만 분의 1 군용지형도, 1910년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지형도에 땅이름을 기재할 때 한자지명 옆에 일본 문자인 ‘가타카나()‘를 병기()했기 때문에 여기서 파생된 혼란이 심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6만 개 가량의 마을이름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우리 땅이름을 고쳐 버렸다. 그들은 우리 땅이름을 변경할 때 ‘행정구역개편‘이라는 이유를 붙였다. 행정구역이 달라졌으니, 지역 명칭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명 변경의 이유였다.
또 그들 식의 땅이름을, 또는 일본에 있는 땅이름을 우리 땅 곳곳에 붙여 나감으로써 우리 나라에 일본땅이름을 새겨 나가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음도 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에 일제는 ‘땅이름 바꾸기‘ 작업을 꾸준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땅이름은 한번 붙여지면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끈질긴 속성과 우리 민족의 비협조로 인하여 그들의 목적을 쉽게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함으로써 더 이상의 땅이름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땅이름에는 신라 이후 변화 없이 그대로 현재까지 계속되는 것이 있는 반면에 여러 번 바꾼 것도 있으며, 혹은 같은 땅이름인데 장소(위치)가 상이()한 수도 있다. 1970년대 한때 한자교육 폐지에 따라 부정확한 땅이름 발음과 오기가 많아서 땅이름의 혼용·오용 등이 많아졌다.
한편, 지도상의 땅이름과 현지에서 부르는 그것이 다르거나 차이가 있으면 군사상에도 곤란을 겪는다. 그리고 한 곳이 둘 이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복합호칭 땅이름을 지도상에서 통일표기하기 위하여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1958년 국방부 지리연구소에 중앙지명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각 도·시·군·읍·면 지명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땅이름을 조사·심의한 결과, 남한 지역만 총 12만 4,198개의 땅이름을 채택하여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현재는 1980년 측량법에 중앙지명위원회와 각급 지방에 지명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하여 중앙지명위원회의 기능은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에서, 지방지명위원회는 시·도 및 시·군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아직도 땅이름의 오기()·개작() 등 혼란이 심하므로 이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일제 시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조치가 우리 지명사()에 큰 오류를 범하면서 우리말 우리글을 되찾은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자 지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