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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문화유산해설사과정
2009년 7월 11일 방이동고분군·석촌동고분군 답사 보고서
보고자 : 서자영
30번 버스를 타고 ‘백제 고분’역에 내렸다. 작은 횡단보도 하나 건너 담쟁이덩굴로 쌓인 높은 담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방이동 고분군 입구에 다다랐다. 시작 시간인 9시를 조금 남겨 놓고 먼저 오신 선생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머지 분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 강사님은 정선영 선생님. 오늘 답사는 조금 여유 있어 그랬던 듯, 다들 오시길 기다렸다가 10분 정도 늦게 시작되었다.
시기상 석촌동 고분군이 앞서 그곳을 먼저 보는 것이 좋겠지만 방이동 고분군에서 석촌동 고분군으로는 30번 버스를 타면 되지만 반대로 석촌동에서 방이동으로는 버스 편이 마땅치 않아 답사 순서를 방이동 먼저 잡았다고 하였다. 걷기에는 더운 날씨라 우리 수강생들을 배려한 마음이셨던 것이다. 그래도 예보에 의하면 장마 전선이 잠깐 멈춰 어제 오늘만 반짝 맑은 날씨라 하니 행운이 따르는 듯 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 일대에서 발견된 유적·유물 등으로 보아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삼국·고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공동묘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는 선사시대의 집자리로 보이는 아궁이와 돌화살촉, 돌칼, 백제시대의 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한다. 이것은 선사시대로부터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문화의 전승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라 한다<안내판에서>.
서북쪽 언덕 경사면에 4기(제 1,2,3,6호분), 동남쪽 낮은 경사면에 4기(제 7,8,9,10호분)가 위치한다.
봉분의 형태는 모두 원형이고 내부 구조는 굴식 돌방(횡혈식 석실)과 만구덩식 돌덧널(반지하식 석곽)의
두 형식을 보인다.
방이동 고분군의 고분 8기 중에 먼저 서북쪽 언덕 경사면에 있는 제 1호분을 둘러보았다. 이 고분은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산사태가 일어나 장독대 뒤 언덕으로 올라간 농가 주민이 석실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니 이미 도굴된 상태였고 이를 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하여 알려졌다 한다.
제1호분은 구릉의 경사진 부분을 파고 돌로 방을 만든 뒤 입구에 널길을 설치한 굴식돌방무덤이다. 내부는 4벽 모두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아 폭을 좁힌 다음 큰 돌 하나를 올려 천장으로 만든 아치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벽면은 깬 돌과 돌 사이를 진흙으로 메우고 겉면에도 얇게 진흙을 발랐으며 벽화는 없다. 바닥에는 작은 냇돌을 깔았다. 이 작은 규모와 세련되지 않은, 깬돌을 쌓아 만든 둥근 천장의 굴식 돌방무덤(궁륭상 횡혈식석실분)이 공주 송산리 1호분~5호분을 거쳐 6호분과 무령왕릉의 굴식 벽돌무덤(횡혈식의 전축분)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한성 백제시대의 초기 무덤 양식인 돌무지무덤에서 웅진, 사비시대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해가는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고분인 것이다.
제2호분과 제3호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분이나 고분의 보수 정비 작업 중 분구 경상부에 노출된 천장부의 뚜껑돌에 의하여 제1호분과 동일한 구조 형식의 석실분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제6호분은 1976년에 발굴 조사되었는데 중간 벽 북쪽 끝 부분에 영공(靈孔: 부부 합장묘에서 부부의 혼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묘실 사이에 뚫어놓은 구멍)이 뚫려 있어 합장묘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유물이 발굴되어 6호분은 신라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을 답사 후 조사하다가 알게 되었다. 새삼 유물을 대할 때 ‘확정’에 신중해야 함을 느낀다.
제1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봉토분의 모습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아 동남쪽 나머지 7, 8, 9, 10호분을 바라보며 산책하듯 걸어 내려왔다. 관심과 안목 있는 관람자에게는 한성 백제기에서 웅진기로 넘어가는 고분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겠지만 이곳에 와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오는 방문자에게는 실망스러운 곳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석촌동 고분군으로는 이곳에 올 때 내가 타고 와 내렸던 곳에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30번 버스를 타고, 몇 분은 자가용으로 몇 분은 도보로 이동했다. 우리가 제일 나중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석촌동 고분군 아래로 지하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1980년대 초 백제고분로를 신설하면서 석촌동 고분의 가운데를 지나는 노선을 계획해 공사를 하면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지가 파괴되는 지경에 처했을 때 이형구 교수가 석촌동 고분군 보호운동을 4년간 전개했다고 한다. 결국 차도는 고분군의 아래로 변경하게 되었고 그 덕에 지금의 백제고분공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 정문에 들어서면 백제의 옛무덤들이 빙 두른 돌담 안으로 한 눈에 들어온다. 왕릉이나 일반 관리, 서민의 묘로 쓰였던 돌무지무덤, 널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섞여 있었다. 아래 석촌동 고분군 배치도에는 7기의 무덤이 표시되어 있지만 내원외방형 적석총 앞쪽으로 또 하나의 토광묘가 있다.
태왕릉 복원 상상도
돌무지무덤 2,3,4호는 층단을 차츰 좁혀가며 쌓아올린 모양으로 남한에서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기원전 전후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고구려양식의 무덤이며 이 무덤의 주인이 고구려계임을 뜻한다. 3호분은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하단 한 변이 60m인 태왕릉, 한 변 30m에 7단인 장군총과 비교해 3호분은 하단 50m에 높이는 3단으로 되어있다. 고구려 고분 형식을 계승한 초기 백제 적석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하단의 넓이로 보아 3단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정선영 선생님의 말씀에 한성 백제기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던 근초고왕의 고분이라는 추정에 힘이 실린다. 4호분은 기존의 흙무덤을 깎아내고 그 주변에 석축을 쌓음으로써 흙무덤이 돌무지무덤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된다. 겉모습은 하나의 커다란 흙무덤으로 보이나 무덤의 주인이 여럿인 5호분(즙석 봉토분)도 볼 수 있다. 큰 무덤 사이에 외톨이처럼 끼어있는 널무덤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평범한 인물의 것임을 짐작케 한다.
내원외방형 돌무덤은 특히 훼손 정도가 심해 바닥돌만 남아 있어 안타까웠다. 석촌동은 예전에 돌마리 또는 돌마을이라고 불릴 만큼 돌이 흔해서 마을 사람들이 고분의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기도 했다. 이곳 석촌동 고분군의 낮은 돌담에도 돌무지무덤에서 나온 돌이 들어가 있다 한다. 우여곡절 많았던 우리 역사를 뒤로 하고 고분 분투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는 동안 돌아보지 않아 되돌릴 수 없는 파괴 및 유실이 이루어진 것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보면 석촌동, 방이동 고분은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보나 왕릉이었을 텐데 그 웅장함과 경건함을 느끼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현실이 애석하다.
석촌동 고분 답사를 끝내고 다 같이 근처 칼국수집에서 점심 식사후 일부 수강생분들은 온 김에 들러보신다며 ‘삼전도비’를 보러 가셨다. 나는 다음을 기약했다.
첫댓글 덕분에 다시 한 번 복습하네요. 열성에 감동입니다.^^
내용을 정리하고 풀어 이야기하듯이 써주셨네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정갈한 음식을 먹고난 후의 포만감..든든함!! 감사합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좋은 복습이 되었습니다. 감사*^^*
많이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이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정말 이 글을 읽으니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요. 항상 열공 하시니 참 부럽습니다.
모든 재주 중에서 성실함이 으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