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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다윈
인간을 원숭이로 만들어 버린 사람.
그의 업적은 과학에만 한정된 것이아니다.
진화론 이후로 우리가 서로를,
세계를 바라보는 눈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19.당태종
제2의 중국을 만들어 놓은 사람.
이 사람때부터 중국이 한족만의 중국에서 벗어나
이민족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신했다...
그리고 결과는 시간이 흐를 수록
비대해지는 초대형 다민족 제국, 중국
18..히틀러
유럽 제국의 자폭을 유도한 사람...
17,18,19세기에 걸치면서 유럽이 가지고 있던
악과 비능률을 모조리 끌어않고 죽은,
어찌보면 희생양 같은 사람...?
17.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제2의 예수였다.
그가 남긴 경전은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던 율법이었다.
비록 지금 그의 제국은 망했지만,
여전히 그의 신도들은 세계에 다수 존재하며...
그가 철학과 역사관에 남긴 흔적은 여전히 선명하다.
15.율리우스 카이사르
서양의 뿌리는 유럽, 유럽의 뿌리는 로마,
그리고 로마를 그린 사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를 거치면서 로마는 전혀 다른,
우리가 알고 있는그 '로마'가 되었다.
14..나폴레옹
본인은 자신의 영광과 권력만 쫓았지만,
워낙 가지고 있던 에너지가 엄청난 까닭에
세계가 통째로 흔들려버렸다.
결과는 중세의 완전한 종결, 그리고 근대의 시작
13..살라딘
이슬람 세계에는 번영과 통일을,
유럽 세계에는 교황 체제의 몰락과
르네상스-종교개혁을 유발시킨 이슬람의 영웅
(후세인이 자기를 살라딘에 비교한다는
12.시황제
이 인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두려운 이웃이
되버린 중국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국에게 있어선 살아있었을땐 두려운
자였을태지만 이만큼 고마운 사람이 없었을거다.
하나라는 중화 사상, 중국 민족, 중국 제국의 시초
11.바울
맹자 없이 공자는 없었고,
플라톤 없이 소크라테스는 없었다.
예수에겐 바울이 있었다.
10.아리스토텔레스
모든 학문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아마도 이 자일 것이다.
남들은 한분야에서 이루기만 해도 역사에 영원히
9.알렉산더
서양이 동양을 만났다, 그리고 세계가 바뀌었다.
8.징기스칸
몽골제국의 창시자(재위 1206∼1227).
1204년 내외 몽골을 통일하고,
1206년부터 서하(西夏), 금(金),
만주 등을 공격하고, 1219 ~ 1223년까지
중앙아시아 평정 이후 남 러시아를
정복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분할해 중 후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고,
몽골 본토는 막내 아들에게 주기로 했다.
그러나 1225년 원정에 참전하기를 거절한
서하를 응징하기 위해 현재의 중국의 간쑤 성의
류판 산에 있다가 1227년 8월 18일
이 불세출의 대정복자는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7.콜롬버스
본인은 상상도 못했을태지만.
서양 중심의 세계관, 자본주의, 제국주의,
2번의 세계 대전, 종교 개혁, 산업 혁명,
그리고 미국까지...이 모든것의 전환점은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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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플라톤
'유일한 진리','절대적 가치'란 개념을 만들어 놓은 사람.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류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은게 플라톤...
(니체 제외.허나 아무리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4.석가모니
정치,경제,과학...허나 가장 강한 것은 종교.
우리나라 역사만 해도 실제론
단군 왕검+석가모니+공자라고 해도
3.공자
동아시아 문명권에 태어난 모든 남녀노소는
이 사람의 유령과 죽을때까지 함께 해왔다.
공자를 죽이니 마니 하는 한국이나,
유교 완 관계없다는 일본 이나,
공자를 반동이라고 욕하는 중국이나,
그리고 베트남, 몽골, 동남아시아 모두가
여전히 머리 속에, 가슴 속에 공자를 품고 산다.
2.마호메트
인류 1/3의 인생을 결정지은, 1000년간 세계를
주도한 이슬람 세계의 영원한 힘의 원천이었던 사람.
지금도 보라.
그의 이름은 여전히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구호로
수억의 사람들에게 힘을 떨치고 있다.
1.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나 있는가 ? 기독교 없는 서양은 서양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서양적 가치관에 정복당해 있는 동양도 결코 지금의 동양이 아니었을 것이다. 33세에 죽은 목수의 삶이 전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와 그림들
▲ 수확.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점치는 풍경.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임. 점보는 풍경을 그린 것 같은데 복장이
한국인의 복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음.
▲ 제물포 풍경과 양반.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로 제물포항과 양반의 모습을 그렸음.
▲ 서울풍경과 조선군.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국의 모습이 서양인에 의해 처음 그려진 시기는 19세기 초이다. 1826년 2척의 영국 함대가 백령도 등 서해안 탐사 중에 조선인들과 수차례의 접촉 기회를 가졌으며,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해안 지역을 방문했다. 당시 이들의 체험담은 1817년 알세스트호의 군의인 맥레오드와 1818년 라이라호의 함장 바질 홀에 의해 각각 항해기로 출간되었다 이 그림은 바질 홀 함장의 항해기에 게재된 그림으로 이때 홀은 그가 스케치해 온 조선의 풍물을 보여 주었더니 |
▲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관리들의 큰 모자와 담뱃대, 그리고 일산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소청도 주민들을 그린 것이다. 뾰족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조선인들 그리고 어촌의 초가 등이 특징있게 부각되어 있다. |
▲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가 촬영한 배재학당 교사의 모습.
▲ 엿장수 소년들.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외국에서 발행된 엽서로 추산이라는 곳의 거리 풍경임.
추산이 어디인지...
조선시대에는 딸을 낳으면 크게 환영받지 못한데 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시골보다는 서울에서 더 많이 보이는 여인들의 외출할 때 모습은 더욱 이색적이다. |
1093년 영국에서 발행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사진. 구들장(온돌)을 놓는 모습이다.
2층으로 된 서민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동양에서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 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한국의 집은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지면 위에 그냥 짓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바닥을 덥히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진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르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 1904) 한국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그런데 온돌방은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이가 커서 불이라도 많이 땐 날이면 문이나 창문만 열어 놓지 않으면 오랫동안 보온이 되어 방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1.8미터 가량되는 조그마한 것이다. |
▲ 궁궐 수비대.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있는 사진으로 '궁궐 수비대'란 제목이 붙어있다.
▲ 고종황제.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
있는 고종 황제의 사진.
▲ 궁궐에서 일하는 여인.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린 그림으로 제목은 'Woman employed in the palace'.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결혼한 여인', '겨울 모자를 쓴 여인', '궁중용 모자', '옛 군인 모자(설명이 잘못된 듯)'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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