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영태는 1927년 전남 함평군 함평읍 진양리에서 아버지 김수현과 어머니 임순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6・25전쟁 중에는 종군화가로 활동하였고 1949년, 조선대 부속중학교를 시작으로 이후 1968년 광주공고에서 교직을 물러나 평생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또한 1967년엔 광주일요화가회를 창립하여 초대부터 제10대 회장 겸 지도교수를 맡아 일을 해왔다.
작품전은 1972년 광주에서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100여회의 국내외 초대전을 가졌다. 또한 100여회의 외국 스케치 여행을 다녔는데,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지냈다.
김영태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각광을 받는 작가이다. 일본의 모 제과업계의 재벌이 작가를 초청하여 초대전을 갖는 등 출품작의 120%를 소진시키기도 하였다. 외국에서는 그림 한 점 팔지 못하면서 국내에서 사인과 낙관으로 호황을 누리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작가들에게 일본 및 유럽에서 호평받고 있는 그의 예는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학시절 지도교수였던 김보현 선생에게 유화를 배운 그는 초기에는 사실주의 화풍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상파의 대가인 오지호에게 사사한 후 인상파 화풍으로 변화를 가진다. 그 때 그는 자연을 통해 작가의 개성과 시각, 이미지와 영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조형적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풍에서 예술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화의 모든 양식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상파 예술이다. 오늘의 회화를 이끌고 있는 종합예술은 인상파 계열의 회화이며, 지금이야말로 세계는 인상파 화풍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는 이 주장은 그가 신념처럼 여기던 조형사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의 생각에 좀더 여유가 있다. 즉 “창작행위로 이루어지는 예술양식을 굳이 어떤 이즘이나 화풍이라고 하는 카테고리에 넣어 꿰어 맞추는 것이 바람직 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자연주의, 신구상주의, 또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새로운 화풍 등 얼마든지 이름을 붙일 수 있고, 굳이 용어상의 문제가 형식에 얽매이는 것 같아 창작 본래의 의미가 희석되는 느낌을 갖게 한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는 예술이나 인생이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어떤 경계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그는 노년에 들어 원숙의 경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때 묻지 않고 연륜이 더해질수록 젊어지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진실에 접근하려고 하는 작업태도와 예술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주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미학적인 조형사상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며, 그 공간 속에 얼마만큼 작가가 염원하는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작가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이며, 그는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소재에서 절대해방을 주창하고 있다. 이른바 사진처럼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재현일 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정된 캔버스에서 화면을 생략하고 소재를 단순화 시켜 캔버스를 절제시켜 미를 창출하는 것이 그의 화면구성이며 예술성을 발현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또한 김영태는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표출해내는 최대의 강점이 색채미학이라고 주장한다. 색채의 뉘앙스나 조화, 배색과 대비 등이 색채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색채를 통하여 비춰지는 그의 작품세계에서 물상의 현장개념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 옛날 유럽의 인상파에서는 주로 팔레트 색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김영태는 철저하게 팔레트에서 쓰고자 하는 색을 섞어 사용하다보니 색깔이 부드럽고 화면이 간결해 보인다. 유럽의 인상파가 주로 사물의 표면에 칠해진 빛을 포착하고 그 빛의 움직임을 그리는데 열중한 반면 김영태는 색채를 통해 사물의 진실을 발견해내는데 관심이 있다. 그것은 사물의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김영태는 항구건 산이건 도시건 간에 형태를 그려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모티브의 형태를 명확하게, 또는 사실적으로 그려낼 경우 오히려 선명한 사물에 의해 감동이 줄어든다. 사물이 스스로를 모두 설명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사실적인 형태를 강조할 때는 사물이 간직하고 있는 내면의 진실보다는 외형의 느낌만 전달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형태보다는 그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그리기 위해서는 사물의 형태를 왜곡한 모습인 부정형하게 그려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그림은 형태보다는 색채에 의해 그 느낌이 결정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영태는 산과 강 그리고 바다와 마을이나 도시를 즐겨 그리지만 그러나 그것은 느낌과 정신을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모티프에 불과하다. 그것들로 인해 그림그리기 위한 동기유발이 될지언정 사실 그것들이 갖는 의미는 크지 않다. 즉 김영태는 무엇을 그렸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그가 어떤 느낌과 정신을 그렸는가가 더 중요하다 가령 바다위에 내리쬐는 햇빛으로 인해 바다가 주는 어떤 영감, 산에 드리워진 그늘이나 햇빛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깊고 오묘한 느낌 등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의 두터운 벽을 깨고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회화의 세계인 것이다.
그는 바다와 산 그리고 마을을 즐겨 그린다. 이것은 초기에서부터 지금껏 수십 년 동안 그려온 그림의 소재들이다. 이것들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자연이라는 것이다. 불면하지 않는 자연에의 정신을 끊임없이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건 산이건 간에 그 곁엔 언제나 마을이나 도시가 있다. 즉 자연 곁에 인간이 놓여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태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바다와 산, 나무, 도시 건물이 하나가 되어 마치 정물처럼 어우러져 있다.
가끔씩 그려내는 꽃과 인물도 우리가 기억하는 꽃이거나 인물이 아니라, 빛과 그늘을 가진 색채로써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물의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더 이상 꽃이거나 사람이 아니라, 색채라는 빛일 뿐이다. 그것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태는 어쩌면 설치미술, 행위예술 또는 추상미술 쪽에서 볼 때 고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구상회화를 지키며 끈질기게 천착해온 까닭은 무엇일까? “구상이나 사실주의가 고루하고 진부하다는 논리는 편견이다. 실험적 방법론을 통해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현대적 시각의 추상주의가 반드시 앞서가는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독선적 허구에 빠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표현양식의 개념 설정문제가 아니고 표현의 결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훨씬 중요하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기존질서가 새로운 미술사조에 밀려 몰락하고 새롭게 태동하는 새로운 미의식의 창조가 옛 자리를 메꾸게 된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당위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논거는 창작행위를 배제한 일반적인 논리로만 가능하다. 적어도 창작의 세계에서는 옛과 현대가 공존하는 등 상호 견제와 보완의 구실을 하면서 발전할 때 미술은 꽃 피우는 것이며, 예술이 지향하는 그 본질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 의한 전통의 현대적 방법론의 수용이나 추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비록 서구적인 매재를 사용하는 유화일지라도 한국성에 천착하는 세계의 예술양식을 모색하는 탐구정신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아무리 현대라고 할지라도 서구적인 발상이나 아류, 또는 모방으로 일관하는 것은 존립의 의미가 없으며, 이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상은 ‘지나간 것’ ‘낡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조의 미술을 아류나 모방으로 따라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서양의 미술재료인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일지라도 우리나라의 독창성을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던 서구주의가 퇴색되고 있는 시점에 그가 주장해온 한국성 미학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구상양식의 회화를 끝내 고집하면서 최후의 보루처럼 지켜온 그는 ‘숙명처럼 주어진 제한된 공간에 미의 극치를 실현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요, 구극의 목적’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처럼 구상회화에 대한 믿음 또한 깊다. 그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피카소의 게르니카, 렘브란트의 자화상, 고흐의 해바라기 등이 명화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고전이요, 구상이라고 하는 예술 양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미의 영원한 터미널은 구상회화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설치미술이나 행위예술 등은 결코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을뿐더러 예술의 영원성에 배치되는 일관성, 취약성 때문에 공존의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단순한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다.
최근 팔순을 맞아 김영태는 화집을 펴내었다. 그가 평생 해온 회화세계를 책을 통해 집약시킨 것이다. 그러나 1976년 2월 광주시 충장로 2가에 있던 화실의 화재로 인해 모든 작품과 미술서적, 화구, 재료 등 미술에 관한 일체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1976년 이전의 그림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아쉽게도 그의 초기 작품을 볼 수 없는 것이 실로 안타깝다. 그러나 그가 거둔 예술적 성과는 한국을 넘어 일본, 유럽 등지에서 평가받고 있다. 팔순이 넘어 고령에도 그가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은 야외 사생은 물론 외국 사생까지 하는 그의 부지런함에 있다.
이러한 그의 부지런함은, 즉 현장 사생하는 버릇은 어떤 특정한 모티프를 그려낼 때에도 적용된다. 가령 포구나 묘지가 있는 소나무나 숲 속,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봄 풍경이나 초여름의 신록 등, 한 자리에서 각도의 변화나 이동시점을 통하여 많은 소재를 발견하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 점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초기인상파 화가인 모네가 해질녘에 짚더미나 수련의 모습을 각도에 따라서, 빛의 양에 따라서 그려내던 것과 같다. 이러한 그림그리기는 김영태만이 가진 비방이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나의 모티프에서도 그림 한 점 그려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법성포를 찾았지만 단 한 점의 작품도 그려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을 두 점이나 그려와 사인까지 하게 됐다” “법성포가 몰라보게 변한 것도 아닌데 왜 옛날에는 그렇게도 없었던 소재가 지금은 얼마든지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옛날과는 시점,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들 생활 속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느끼는 것, 이 모두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별 맛이 없었던 것도 지금에 와서는 최상의 맛이 될 수 있고, 별다른 흥취를 느끼지 못했던 판소리가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락의 무한한 흥취로 느끼게 된 것 등이 그러하다“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법성포라는 항구 마을을 40년이나 쫓아다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그의 취향, 즉 그의 시각의 차이에서 온 결과라는 것이다.
팔순이 넘도록 그가 해온 예술은 그는 미의 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선한 것도 아름다운 것이 빠져버리면 진실도, 착함도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는 작가로서의 예술과 생애를 순결무구하고 숭고하게 살아온 우리 시대의 산 증인이요, 스승 같은 모범적인 사람이다.
강경호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
2009년 11월 10일 인쇄
2009년 11월 14일 발행
지은이 | 강 경 호
펴낸이 | 강 경 호
인쇄・기획 | 도서출판 시와사람
등 록 | 1994년 6월 10일 제 05-01-0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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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5665-262-7 03810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