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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이야기 -축逐, 바둑 이야기 -후절수後切手, 바소라 삼국지, 베팅 두더지, 부부 대국夫婦對局
묘수
이제민
바둑판 전체에
숨어있는 묘수
하수의 눈에는
잘 띄지 않아요.
보물을 찾듯
세밀히 관찰해도
급소는 엉뚱한 곳에
있을 때가 많아요.
아무리 큰 대마도
묘수 한방에 휘청거리고
사활은 나만의
희열을 가져다주지요.
접바둑은
언제나 하수만
당하고 말아요.
미생 1
이제민
누구나
처음엔 미생未生이다.
완생完生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살아가는 삶
되돌아가려고 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운명의 시간
사석死石을 버려둔 채
밤하늘 별을 보며
삶의 희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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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한국문학세상』 2015년 겨울·봄호 (통줜 제27호)
미생 2
이제민
처음엔
누구나 미생未生이다.
완생完生을 위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며 살아가는 삶
뒤돌아보려고 해도
뒤돌아볼 수 없는
시간의 운명
공배空排를 남겨둔 채
별빛 하늘을 보며
삶의 고뇌를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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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한국문학세상』 2015년 겨울·봄호 (통권 제27호)
미생未生의 길
이제민
처음부터
완생完生이 어디 있으랴
삶이란 텃밭에 씨앗 뿌려
물 주고 거름 주어
길러야 하는 연약한 존재
목적지를 향해
물 흐르듯 수순을 밟지만
거미줄처럼 얽힌 길
동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미생의 길인 것을.
바둑 배지를 달며
이제민
태극문양에
흑백黑白 조화調和롭다.
만물은
음陰과 양陽이 공존하고
흑돌은 음이요,
백돌은 양을 상징한다.
우주의 심오한 법칙을
바둑을 두며 심취하고
배지를 달며
바둑인으로 자긍심을 갖는다.
바둑 예찬
이제민
반상 위의 361로의 길
흑백을 교대로
인생을 만끽하는 바둑
귀에서 정석 진행이 되어
변으로 진출하고
그 안에는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수많은 선택의 길.
우주가 좋아 힘자랑
내 집을 굳건히 지키며
밑으로 지하철 구축하고
귀, 변, 중앙이
조화를 이룰 때
바둑의 묘미가 더해 가며
회돌이, 패싸움, 환격
더없는 묘수에
피로를 떨쳐버리네.
바둑 한 수에
오늘도 수담에 빠진
나의 바둑 인생.
바둑 친구
이제민
너 한 수, 나 한 수
우리는 바둑 친구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서로 집을 짓는다.
흰 돌, 검은 돌
서로 부딪치며
격렬하게 싸우다가도
금세 친해지는 너와 나
말이 없다가도
간혹 '아아' 탄식의 소리가 나고
또는 '허허' 웃는 소리가 나는
우리는 다정한 친구.
바둑 친구 · 2
이제민
너랑
나랑
반상盤上에 마주앉는다.
흑이랑
백이랑
병정놀이한다.
마주앉아
병정놀이하다가
우리는 친구가 된다.
반상에서 친구가 된다.
적이 되었다가
아군이 되기도 한 병정들
그 틈에서 싸우다가도 친해지는
우리는 바둑 친구.
바둑과 시
이제민
한 판의 바둑을 두고자
구상을 하듯
한 편의 시를 쓰고자
많은 생각을 하고
싸움을 해야 할지 안 할지
조절해야 하는 바둑
시도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 써야 하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
기풍棋風을 느낄 수 있는 바둑
시에도 혼자만의 시어詩語가 있어
읽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주네.
흐름이 있어
복기할 수 있듯
시에도 리듬이 있어
외우기 쉽고
조용한 곳이
대국 장소로 좋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
차 한 잔 곁들여 쓰는 시
그래서 낮보단 밤이
더욱 좋네.
바둑교실 가는 길
이제민
학교 수업, 학원 공부
무거운 가방에
축 늘어진 어깨
힘겹게 걷는 아이들
바둑교실 가는 길은
가방, 공부 부담 없어
발걸음도 사뿐사뿐.
하얀 돌 까만 돌
서로 어울리며 동행하듯
발걸음도 가볍게
친구와 발맞추며
나란히 나란히.
바둑돌
이제민
바둑돌 하나는 외로워요.
아군을 기다리며
홀로 갇혀
기다림에 지치고 마는
가엾은 눈동자예요.
바둑돌 두 개는 튼튼해요.
우린 짝이 되어
위로하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버리기도 아깝지 않아요.
바둑돌 세 개는 불안해요.
빈삼각 우형이 나와
회돌이를 당할 수 있어
상대에게 노림수를 당해요.
바둑돌 여러 개는 무거워요.
한두 개처럼 가볍게 보지 못해
대마가 되어
버리지도 못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 말아요.
서로 어울림 속에
외로움
불안함
무거움
모두 다 힘들지만
좋은 행마로
튼튼함 속에 두 눈을 틔우고
보금자리를 만들어요.
바둑을 두며
이제민
우주에 점 하나
낮과 밤 순환하듯
반상의 흑과 백 서로 교차한다.
살며 사랑하며
떠도는 인생
바둑판에 옹기종기 모였다.
흐르는 물
생명이 숨 쉬듯
둥근 바둑돌 반상 위에 유영한다.
우주의 섭리
바둑판에 동행하는 인생.
바둑 이야기 -따먹기
이제민
먹기 먹기 따먹기
재미있는 따먹기
단수 단수 연단수 치며
촉촉수로 잡고
먹여치기 이용해
환격으로 잡고
도망가는 말
그물 쳐놓고 몰면
한 점 한 점이
두 점 세 점 뭉쳐
소마 대마 왕대마 되네.
먹기 먹기 따먹기
기분 좋은 따먹기
잡은 돌 들어내며
환한 웃음 짓고
따르르 따르르
뚜껑에 돌 담는 소리
경쾌한 소리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기분 좋은 건
대마 빵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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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한국문학세상』2008년 겨울호
바둑 이야기 -선의 노래
이제민
1선은 죽음선 나가면 나갈수록 죽고요.
비마飛馬끝내기* 살금살금 상대 진영 짓밟고
위험할 땐 서로 손잡고 연결하고요.
2선은 패망선 기면 길수록 망하고요.
한 칸 끝내기 야금야금 상대 진영 교란하고
불안할 땐 얼른 가볍게 살아 놓아요.
3선은 실리선 늘면 늘수록 안정하고요.
중심을 잡아 살랑살랑 포근함을 갖고
수비할 땐 좋은 행마로 살아 놓아요.
4선은 세력선 두면 둘수록 커지고요.
우주로 나가 팔랑팔랑 희망을 품고
공격할 땐 크게 중앙에서 모자씌워요.
오선지에 그린 악보처럼 높고 낮은 선
서로 사이좋다가 싸우기도 하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있는
포근하고 희망의 노래
*비마(飛馬)끝내기 : 비마달리기. 끝내기 수법의 하나.
2선에서 눈목자가 되는 1선에 달려가 끝내기하는 수법.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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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한국문학세상』 2009년 여름호 (통권 제12호)
바둑 이야기 -승부수勝負手
이제민
인생에서 3번의 기회가 오듯
바둑에서도 3번의 기회가 온다.
계가로 지나
불계로 지나
지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을
패착이 되더라도
꼼수처럼 보이더라도
불리함을 극복하는
역전의 용사
빈틈을 노리는 비범함
불리할 때
허점을 보일 때
비수匕首를 꽂는 자만이 진정한 승부사이다.
바둑 이야기 -축逐*
이제민
갑자기 추격하는 당신
도망가려고 온 힘을 다하지만
계속 마술에 걸린다.
추격자를 따돌리려고 발버둥치지만
한 발짝도 여유가 없는 것을
사전공작도 펼쳤지만
살짝 비켜 가는 축머리
일단 잠시 숨 고르고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법을 쓰는 수밖에.
*축(逐) : 돌을 잡는 수법의 하나.
상대의 돌을 계속 단수가 되도록 몰아가는 방법으로 돌을 잡는다.
한자로는 관습적으로 ‘逐’을 사용해 왔다.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
**성동격서(聲東擊西) : 공격법의 하나. 공격하고자 하는
돌의 반대편에서 공작하여 그 결과로 얻은 세력 등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주된 목표를 공격하는 방법.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
바둑 이야기 -후절수後切手*
이제민
잡고 나서 잡히고 되잡는
신기한 후절수
1, 2선에 바보사궁四宮, 번개사궁
우형愚形으로 만들어
상대에게 잡혀주고 끊어서 되잡는 고급 기술
사활 문제로 많이 풀었는데
실전에는 잘 나오지 않아
죽었다고 포기하고 만다.
죽은 것처럼 보였던 돌이
후절수로 살았을 땐 탄성이 절로 나고
환격 촉촉수보다 재미있고 신기한 후절수.
*후절수(後切手) : 돌 잡는 법의 하나.
특정한 수순에 의하여 돌을 죽이고 난 후에 다시 상대의 돌을 잡는 수법.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
바소라 삼국지
이제민
화려하게 펼쳐지는
바소라 삼국지
여기저기
나라를 세우는 군주들
까만 밤에 하얀 눈을 등에 지고
장수들을 하나 둘 모집해
세력을 떨쳐 그 위상이
천하에 울려 퍼진다.
흰 돌, 검은 돌에
포로를 잡아
군주 앞에 대령하는 장수
술 한잔을 꿀꺽꿀꺽 마신다.
성(城)이 아무리 높다 해도
날렵한 협사객을 동원 해
군주를 쳐서 항복을 받아
영토를 확장시킨다.
언제나 흥미 만끽한
바소라 삼국지
바둑동의 초보자이지만
바소라만이 할 수 있는
이벤트 행사이다.
* 1997년 1월. 『하이텔 바둑동』 「바소라」 이벤트 대회
베팅 두더지
이제민
두더지야, 두더지야
베팅 두더지야.
나와라 나와라
어서어서 나와라.
어둠 속에 숨어있지 말고
베팅방으로 나와
환한 빛을 보아라.
대국이 끝나면
머뭇거리지 말고
얼른 나와
우리를 기쁘게 하라.
빨간 고깔모자를 쓰고
고개를 살랑살랑 거리며 나오는
앙증맞고 귀여운 네 모습을 보니
잠시 대국자를 원망했던
내가 부끄럽기도 하구나.
두더지야, 두더지야
베팅 두더지야.
돌아라 돌아라
빙글빙글 돌아라.
음악에 맞춰
어깨도 들썩이고
리듬에 맞춰
춤도 선보여라.
대국자에 비할 순 없지만
초반부터 마음 졸여가며
응원한 나를 위해
빨간 머플러가 휘날리도록
다 함께 춤을 춰봐라.
네가 어둠에서 나와
밝은 빛을 봐야
나의 베팅주머니가
타이젬 머니로 차곡차곡 쌓인다.
* 타이젬 바둑사이트에서 베팅대국이 끝나면
베팅 축하를 나타내는 승부 애니메이션
부부 대국夫婦對局
-도월화* 수필집 『여월여화如月如花』 중 「부부 대국」을 읽고 나서
이제민
실력차 많이 나는 부부 대국
흑 9점 화려하게 놓고 두었네.
만방으로 깨지니 남편이 말하기를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
두 집 내기 쉬운 네 귀를 중심으로
겨우 두세 집 짓고 나면
외곽 쌓아 숨통을 조여오는 당신
중앙은커녕 옆집 마실 갈 길도 끊어지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불계패하고 말았네.
보다 못한 남편이 말하기를
‘공격은 최상의 방어’다
공격해 보지만 워낙 강적 앞에서 맥도 못 추고
죽은 흑돌 시체가 즐비해
빚쟁이 신세가 되고 말았네.
고수하고 대국하는 게 영광으로 생각하고
양말을 빨아 대령하라는 당신
갖가지 주문을 해댄다.
주말에는 옆집 부부와
연기連琪***를 두었네.
남편끼리 실력이 비슷하고
우리 여자끼리 실력이 비슷해서
서로 어울리는 바둑
아내들이 엉망으로 만들면
남편들이 좋은 상황을 만들려고 애쓰는 모습에
참았던 웃음 폭발하고
한밤중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바둑을 두었네.
여러 가지 바둑 격언 동원한 남편의 지도
7점 두는 바둑으로 성장하였네.
내 생전 백돌을 잡는 야심은 애당초 없지만
네 귀 흑 네 점 소박하게 놓고 둘 수 있는
날이 오면 남편에게 숙성된 포도주 한 병과
예쁜 꽃 한 송이를 선물하리라.
감사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카드 한 장과 함께.
*도월화 수필가 :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졸업. 전 중등교사(사회과). 창작수필 등단(2000).
수필집 『여월여화(如月如花)』(2007, 선우미디어). 수필넷 : http://cafe.daum.net/essaya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 바둑 격언의 하나.
자신의 말이 산 다음에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 뜻이다.
약점을 살피지 않고 무모하게 상대의 돌을 공격하다가는
오히려 해를 입기 쉽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
***연기(連棋) : 2인 이상이 한 팀이 되어 한 판의 바둑을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두는 형식의 대국.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