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쿄 가이엔
고쿄 외원(皇居外苑, こうきょがいえん)은
고쿄(皇居: 황거)에 인접해 있는 환경성 관할의 국민공원이다.
고쿄 외원은 엄밀히 말하자면, 기타노마루 공원과 고쿄마에 광장의 고쿄 외원,
그리고, 고쿄를 두르는 해자가 있는 구역까지를 가리키지만,
통상 고쿄 외원이라 말하면, 고쿄마에 광장을 중심으로 한 구역을 가리킨다.
넓은 광장 외에도 사쿠라다 문, 니주 다리가 있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건물들을 볼수 있다.
황거(皇居)
일왕과 그 일가가 거주하는 조용한 왕궁, 일본다운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곳으로
일본의 천황과 그 일가가 살고 있는 궁이다.
황거皇居는 일본 천황의 평소 주거지로서
현재는 천황 주거인 고쇼[御所], 교지[御璽]나 정무의 장소인 궁전, 궁내청 청사 등이 있다.
1888년에 원래 목조로 건축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파괴된 후, 1968년에 재건되었다.
지금은 왕이 사는 황거지만 이전에는 에도 막부의 쇼군이 살았던 에도 성[江戸城]이다.
명치明治 원년元年 1868년 10월 황거가 되었고, 그 다음 해 1869년 3월 명치천황明治天皇은
1,000년 넘게 살았던 교토[京都]에서 에도 성으로 옮겨온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
니주바시의 니는 2(二), 바시는 다리(교)를 뜻한다. 즉 이중다리라는 뜻이다.
원래는 이 다리가 2단 구조로 되어있었기에 니주바시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 돌다리를 안경 모양의 다리라 하여 '메가네바시'라고도 하는데,
메가네는 안경이라는 일본어로 안경 모양을 하고 있어 이름 지어진 곳이다.
일본 건축양식은 아니고 일본 개화 이후 시작된 양식(洋式) 문화중 하나이다.
(다른 곳에도 안경모양의 다리에는 같은 이름을 붙인다.)
일왕의 집의 굳게 닫혀진 정문.
황거(皇居)는 천황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
이곳은 1년에 두 번 신년과 천황의 생일 밖에 개방하지 않는데,
그때는 도쿄의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서 천황을 보려고 몰리기도 한다.
현재 천황은
정치에 직접 상관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나
아직도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어 지는 곳이다.
황거를 일본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도 그런 연유인 것이다.
황거는 일본의 역사를 지배했던 옛 천황의 존엄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일본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참관을 원할 경우, 예약은 희망일 4일 전에 완료되어야 하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참관 허가서가 배부된다.
(인터넷 예약 : http://sankan.kunaicho.go.jp/)
현재 일본의 국왕은 1989년에 즉위한 아키히토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나 우리를 못살게 굴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 지주 히로히토라고 한다.
고쿄를 두르는 해자, 아름답다기 보다 삼엄하다고 할까!
원래는 황실 정원으로 있는 곳을 전후, 내각회의에서
국민공원으로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49년 개원됐다.
고쿄마에 광장의 넓은 대지에 잔디와 곰솔나무가 심어져 있고,
거대한 분수를 가진 와다쿠라 분수공원등 도심에서 없어서는 안될 편안한 휴식공간이다.
일반인에게는 황거정원의 일부인 히가시교엔(東御苑)과 고쿄마에 광장 (고쿄마에히로東御苑前廣場),
그리고 니주바시(二重橋) 등의 외곽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고쿄마에 광장은 고쿄 외원의 대표적인 광장이다.
매우 넓은 광장으로 도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다.
자갈 부분과 잔디 그리고, 곰솔이 심어진 광장은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가꾸었다.
바로 앞에는 분수공원 등이 잘 가꾸어져 있고 빌딩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주변의 마루노우치와 히비야의 빌딩숲을 조망할 수 있다.
광장의 사이에는 우치보리 대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와다쿠라 분수공원은
와다쿠라 지구에 있는 분수공원이다.
아키히토 천황의 결혼을 기념하여 1961년 개원했다.
그 후, 현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해 정비되어 1995년 현재의 모습으로 띄게 되었다.
높이 8.5m까지 분출하는 대분수와 그 주위를 받쳐주는 소분수는 예술적이다.
밤에는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여름의 더위를 피해 오는 사람들이 많다.
도쿄를 대표하는 구스노키 마사시게 동상은
벳시도잔에서 구리를 채굴한지 200년을 기념하여 스미토모에서 제작해 궁내청에 헌납했다.
1904년 동상이 완성되었다. .
황궁에 간 날은 우연히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바로 눈 앞에서 건너 갈 수가 없었는데, 결국 지하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야 했다.
지상과 같이 지하도 똑 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날씨가 쌀쌀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지하로 다니기 때문에 지상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투척 김지섭 의사
‘동지 여러분 앞. 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 제(弟)는 288시간만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말 지저(地底)의 생활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 비애, 적막, 번민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이 사람의 흉중으로 총집되어 경도광랑(驚濤狂浪)의 소리만 들릴 적에 할 일없이 어서 나와 어복(魚腹)으로 들어가라고 유인하고 최촉하는 공포를 주던 것이 마치 왕생(往生)의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은 1924년 1월 5일 도쿄 소재 일왕(日王)의 궁성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투척,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친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일본에 도착한 후 상하이(上海)의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부분이다. 무려 12일간을 석탄 운반 화물선의 창고에 몸을 숨긴채 일본에 도착한 김의사는 당시의 고통스런 상황을 마치 죽었다 살아 나온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김 의사는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20대 청년시절 한때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귀향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아 국권회복의길을 강구하였다. 이후 김 의사는 만주·연해주·상하이 등을 다니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1922년 4월에는 고려공산당에, 그 해 여름에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이중교 의거’에 앞서 김 의사는 1923년 3월 같은 단원인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과 함께 국내에 있는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기로 하고 대량의 폭탄을 중국으로부터 국내로 반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동지로 위장침투한 경기도 경찰부 소속 조선인 경찰 황옥(黃鈺)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김 의사는 다행히 사전에 피하였으나 김시현·유석현 등은 일경(日警)에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그 해 12월 김 의사는 거사 자금을 마련키 위해 조선인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에게 5만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백은 요구를 들어줄 듯하다가 결국에는 배신, 동지 윤병구(尹炳球)만 체포되고 말았다. 백방으로 거사자금 마련을 하던 중 1924년 초, 도쿄에서 일본 총리를 비롯하여 조선총독 등이 대거참석하는 ‘제국의회(帝國議會)’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김 의사는 일제 침략주의자들을 처단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 동지 최윤동(崔允東)에게서 입수한 폭탄 3개와 여비 100원을 준비하여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도쿄로 향했다. 당시 김 의사는 일본인 소유 석탄운반선 천성산환(天城山丸)의 창고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이 과정에는 일본인 공산주의자 히데시마 히데지(秀島廣次)와 선원 고바야시 간이치(小林幹一)·구로시마 리게이(黑島里經)의 도움이 있었다.
1923년 12월 31일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에 도착하여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彦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여관에 투숙한 김 의사는 여기서 3일을 보낸후 모포·외투·시계 등을 전당포에 맡겨 여비를 마련한 다음 도쿄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제국의회가 휴회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 의사는 거사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日王)의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
1월 5일 도쿄에 도착한 김 의사는 우선 궁성의 규모·구조를 사전답사한 후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오후 7시경 일본인 관광객과 뒤섞여 이중교 앞으로 접근하자 감시 경찰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더 이상 궁성 쪽으로 접근하지 말 것을 종용하자 김 의사는 일경을 향해 폭탄 한 발을 던지고 재빨리 이중교를 건너 궁성 정문쪽으로 향하였다. 이에 궁성 보초병 2명이 달려들며 김 의사에게 총을 겨누자 김 의사는 나머지 폭탄 2발을 일경들이 달려드는 궁성쪽을 향해 연속적으로 던졌다. 그러나 김 의사가 던진 폭탄 3발은 모두가 불발이었다. 김 의사가 타고온 배는 습기가 많은 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 폭탄의 화약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
김 의사의 의거로 일본전역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자신들이 ‘신(神)’으로 받드는 일왕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무차관의 견책에 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궁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 파면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히비야(日比谷) 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김 의사는 1924년 9월 9일 열린 공판에서 직업을 묻는 판사에게 “조선 독립당원과 혁명사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또 10월 11일 공판에서는 장문의 ‘진술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박한 다음 “이번에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도취된 왜국(倭國)관민을 각성시키고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밝혔다. 재판정에서 김 의사는 자신에게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줄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제는 무기징역을 언도하였다. 1927년 20년으로 감형된 김 의사는 옥중에서도 의거 당시의 의기를 굽히지 않았으나, 고문 후유증이 악화돼 이듬해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 때 김 의사의 나이는 44세였다. [출처] [펌]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투척 김지섭 의사|작성자 미래내꺼